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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대학 가면 이혼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는 박경희 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술술 풀어놓는 이야기에 풍덩 빠져버렸습니다. 꾸준히 300배 정진을 이어오며 지회 공동정진 꼭지를 맡아 탄탄하게 운영하는 지금, 딸은 결혼하여 이쁘게 잘 산다는데, 이혼은 하셨을까요?
저는 2남 1녀의 둘째입니다. 20대에 부모가 되어 자식을 잘 키우고 싶었던 아버지는 식사 중에도 우리를 훈계했습니다. 외할머니의 재혼으로 친정이 없는 엄마는 시어머니에게 무시와 설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엄마 없는 아이들로 만들지 않고 당신 손으로 잘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시집살이를 견뎠답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욱하는 성격으로 부모님은 자주 다투었고 저는 항상 불안했습니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숨고 싶어서 ‘개미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돈을 벌어와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아이스크림을 먹던 기억, 빨간 피겨 스케이트를 재미있게 탄 기억이 선명합니다. 부모님이 삼 남매를 서울에 두고 양주에서 축산업을 하면서 청소년기에는 따로 살았습니다. 돌아보니 특별히 행복하진 않아도 부모님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잘 자랐다 싶습니다.
남편은 오빠 친구로 5학년 때 엄마가 중풍으로 쓰러져 왼쪽이 마비되고 점차 앞도 못 보면서 힘들게 컸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어린 나이에 가장이었습니다. 친정 가족 모두 결혼을 반대했지만, 인연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은 제가 쾌활해 집안 분위기를 밝게 하고, 어려운 집안 살림도 잘 꾸릴 거라고 기대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불편하고 괴로워도 물 한 잔 달라는 부탁조차 쉽게 하지 않았고, 시아버지는 제게 많이 의지했습니다. 시부모 뒷바라지에 아이들 키우느라 직장 생활은 꿈도 못 꾸고 잠깐의 외출도 항상 눈치를 보았습니다.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렸을 때 너무 힘들어 거의 탈진이었습니다. 제 나름 한다고 했지만, 퇴근한 남편은 어머니 방에 들어가 보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딸이 사춘기에 들자, 상황은 더 나빠졌습니다.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등교를 거부하는 딸을 데리고 신경정신과에 갔습니다. 의사가 제게도 약을 권했습니다. 약을 먹으면 졸려서 집안일하기가 더 어려웠습니다.
남편이 요양병원을 둘러보고 “죽어도 어머니 요양원에 못 보낸다. 아침저녁으로 봐야 하는데 어떻게 보내냐.” 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시집올 때부터 문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고 몸이 약해 저도 보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쯤 ‘당신도 살아야 하지 않겠어. 어머니 요양원에 모시자’라는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 한마디면 큰 위로가 되었을 텐데, 저는 이 집에 노예인 듯 자기 엄마만 챙기는 남편의 모습에 억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아픈 부모님 챙기느라 여유가 없지, 안 계시면 달라질 거야'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시부모님 모두 돌아가시고도 남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싸우면 불안했던 기억에 좁은 집에 살면서 싸우지도 못했습니다. 불만과 억울함을 차곡차곡 쌓으며 참고 살았습니다. '딸이 대학 가면 이혼한다'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행복해지려고 이혼한다기보다 미래가 없는 삶을 청산하고 싶었습니다.
사촌 언니가 법륜스님 유튜브를 항상 듣는다고 했습니다. 힘들고 속상할 때 도움이 된다는 말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에 참석해 행복학교1를 안내받고 관계편까지 했습니다. 불교대학은 가게 일로 엄두를 못 냈지만, 온라인으로 바뀌면서 기회가 왔습니다. 막상 하려니 컴퓨터도 어렵고 가게 문을 닫을 수 없어 망설였습니다. 어영부영하다 개강 날이 되었고 남편이 가게를 맡아주었습니다.
아들에게 빌린 태블릿으로 수업에 참여했습니다. “아들! 내 얼굴이 없어졌어. 좀 나오게 해 줘!” 생소한 기기, 처음 들어보는 용어들, 사전 학습과 수행 과제, 봉사활동 등 넘어야 하는 고비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창피할 정도로 나누기하며 많이 울었습니다. 솔직하게 내어놓고 나면 마음이 안정되고 속이 시원했습니다. 이어서 경전대학도 다녔고, 짜증 내면서도 가게를 맡아준 남편 덕분에 결석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졸업했습니다.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전법 활동가 교육을 받고 싶었습니다. 남편에게 또 가게를 부탁해야 하고, 기간도 일 년으로 중간에 그만둘 것 같아 미리 포기했습니다. “하다가 못할 수도 있지, ‘지켜야 한다’는 업식이 너무 강하다.”라는 도반의 말에 ‘안되면 중간에 그만두지 뭐.’ 하는 마음으로 신청했습니다. 남편에게 솔직히 터놓았습니다. “당신 덕분에 불교대학, 경전대학을 개근으로 졸업할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당신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할게. 근데 솔직히 너무 하고 싶어.” 했더니 일단 신청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싶었습니다. 컴퓨터도 못하고, 소통방이 많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도 부족하고 할 것은 계속 쌓여갔지만, 제 업식을 살려 열심히 했습니다.
전법활동가 교육생이 되자 아들이 맥북을 선물했습니다. 배우기 어려워 힘들었습니다. 모둠별로 돌아가면서 하는 지회 공동정진 담당을 맡게 되었습니다. 영상 사고가 나면 몸에 있는 피가 모두 빠져나가는 듯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실수하면 자책이 심했습니다. 제 실수도 용서가 안 되고 다른 사람의 실수도 못 보아 넘겼습니다.
법사님이 100일간 300배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해보자고 한 것이 올해 8월이면 3년이 됩니다. 절 방석 솜이 꺼져 두 개를 놓고 하다 담요를 넣어 절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힘이 들어 일어날 때 비틀거렸는데 이제는 일상이 되었습니다. 하고 나면 개운합니다. 갈수록 자책과 불안함도 사라지고 대형 사고가 터져도 ‘공영방송도 아니고 이 정도면 잘 막았지.’라고 생각합니다. 봉사자에게도 “항상 대기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며 안심시킵니다. 타인을 의식하며 지나치게 스스로를 옭아매었는데 요즘은 있는 그대로의 저를 인정하니 편안합니다.
<깨달음의 장2>은 아들까지 합세해 신청했지만, 신청자가 몰려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다 코로나로 멈춰 영영 못가나 싶었는데, 전법활동가 교육생에게 잠시 문이 열렸습니다. 가게 문을 닫는다고 회사에 보고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법사님께 "일 때문에 못 갈 것 같다"라고 하니 “오늘 교통사고 나면 내일 가게 문 열 건가요?”라는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바로 신청하고 설레었습니다. 아들이 만들어 준 법복 패턴으로 직접 누비 법복을 지어 한 달 전부터 가방을 싸놓고 기다렸습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제가 엄청 뒤끝 있는 사람임을 알았습니다. 24년 전의 일을 매일 곱씹으며 인간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속 좁고 치사한 저를 보니 남편이 이해되고 그 일은 깨끗이 정리되었습니다. 지난 일을 품고 있으면 마음만 갉아먹을 뿐이었습니다.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저더러 "고집 세다" 말해도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제가 ‘옳다’ 하고 살았는데 다 옳은 게 아니었습니다.
부모님 위주로 생활하며 아이들을 키우니 남편과는 데면데면했습니다. 같이 밥을 먹어도 대화 한마디 없었습니다. 감정이 좋지 않으니, 말을 톡톡 쏘았습니다. 아들이 군대에서 제대하고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우리 집 분위기가 너무 싫다. 갈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있다.” ‘가정 분위기는 가장이 만드는데, 가장이 저러니 애들이 저러지’ 하면서 남편을 원망했습니다.
‘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겠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인정하겠습니다.’ 법사님께 받은 300배 기도문입니다. 꾸준히 하다 보니 ‘남편이 부처님입니다. 예, 하고 하겠습니다.’가 기도문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 아들에게 “엄마가 좀 달라졌니?” 물으니 “네, 달라졌어요. 그런데 아빠도 달라졌어요.”라고 합니다. 남편이 편안하고 아들이 안정된 것이 느껴집니다. 스님 법문이 맞았습니다. ‘제발 어떻게 해주세요.’ 하면서 제 목줄을 남편에게 쥐여줬는데, 이제 제 삶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뭘 요구하면 즉석에서 해줍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것이 더 많습니다.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것은 햇볕이지 바람이 아니라는 옛날 동화와 같습니다.
아이들 사춘기 때 중심 없이 자식들에게 질질 끌려갔습니다. 조금 더 일찍 정토회를 만났더라면, 아이들을 잘 키웠을 텐데 싶습니다. 속상하고 아쉽지만, 모르고 죽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미혼 시절 봄이 좋았습니다. 결혼하고도 새순 돋고 아지랑이 아른거리면 밖으로 나가고 싶었습니다. 40대 중반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4월 초, 장을 본 후 집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동행했던 아는 동생이 강변에라도 나가자고 했습니다. “안 돼, 집에 가서 밥 차려야 돼.” 저도 모르게 눈물이 펑펑 솟았습니다. 봄이 오는 것이 싫었습니다. 더 짜증 나고 우울했습니다. 친구마저 "너 또 봄이 왔구나." 그랬는데 작년부터 달랐습니다.
봄이 너무 좋고 나이 60이라 더 좋습니다. 예전에는 생일에 남편에게 뭐 사달라고 하기 싫었는데, 요즘에는 저도 모르게 농담처럼 “저거 이쁘다. 사줘.” 그러고는 스스로 깜짝 놀랍니다. ‘말랑말랑해졌구나, 달라졌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예’를 듣기 위해 머리 굴리고 입을 쉽게 열지 못했지만, 이제는 마음이 편안해져 무슨 말이든 술술 나옵니다.
가까이 사는 친정 부모님과는 대화를 자주 나눕니다. "남편이 밥 먹는 거 보면 프라이팬으로 뒤통수를 때리고 싶다. 집에 안 들어오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밥 먹는 거 보면 짠하다. 뭐든 챙겨주고 싶다.” 하니 부모님은 “너무 좋다. 네가 정말 달라졌다.”며 기적이라고 합니다.
남편이 자꾸 잊어버린다고 해서 “집하고 마누라 얼굴만 기억해.”라고 합니다. 뭔가 부족하다고 하면 “뭐가 중요해? 자기는 나만 있으면 되고 나는 자기만 있으면 되지, 뭘 더 바라.”라고 합니다. 이혼하겠다는 마음으로 악물고 살았는데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툭 나오니 신기합니다.
말썽부리던 딸도 잘 커서 결혼할 때 남편과 제게 편지를 써 청첩장을 주었습니다. '나는 엄마처럼 못할 것 같다. 포기하지 않고 잘 키워줘 고맙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딸은 시부모님께도 싹싹하게 잘하고, 재미있고 예쁘게 삽니다.
아이들은 조부모의 애정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잊지 못할 사랑과 추억을 선물해 준 시부모님께 고맙습니다. <나눔의 장3>에서 시어머니를 편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 아들은 제가 책임질게요."
미래가 보이지 않던 막막하고 힘든 생활을 잊지 못할 사랑과 추억으로 만들었습니다. 고된 삶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박경희 님처럼 매일 300배 정진하고 봉사할 수 있을까요? 묵묵히 나아가는 수행자의 본보기가 되어 고맙습니다.
글_안화순 희망리포터(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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