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실천

통일
여기 와 고개 숙이라
제주 4.3 역사기행

삼만 명이었어요.

햇빛이 드는 회벽에 기대어 인선은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

대만에서도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는데요.

인선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침착했다.

그 숫자들을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곳들이 모두 고립된 섬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중에서

2025년 4월 12일부터 13일까지 제주지회는 실천활동으로 제주 4.3.역사기행을 진행했습니다.

그 동안 혼자 또는 친구와 함께 제주도 여행에서 4.3 관련 사적지를 찾아다닌 적이 있지만, 이번은 제주도 정토회원들과 함께 집중적으로 순례하는 특별한 기회여서 기대하는 마음으로 제주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첫째 날, 4월 12일

첫째 날 일정은 관덕정, 오라리, 4.3평화공원, 낙선동, 너븐숭이 역사관과 다랑쉬 굴입니다.

전날 저녁 제주도에 도착한 덕분에 여유 있게 제주 종합운동장 시계탑에 도착했습니다. 안내하는 회원들과 만나고 이어 제주지회 담당법사이신 법전법사님과 서울에서 오신 좋은벗들 사무국장(평화재단 역사연구개발팀장 겸임) 이승용 님이 도착했습니다.

30여 명의 제주지회 회원들이 모두 모이자 ‘정토회 제주 4.3역사기행’ 이라는 형광글자를 단 버스가 출발했습니다.

마침 전날인 4월 11일, 제주 4.3 기록물 1만 4601건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기뻐하며 첫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제주 시내 한가운데 자리 잡고있는 관덕정.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15세기 조선시대 건축물입니다. 관덕정 앞은 역사적으로 제주도민들이 모이는 광장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1947년 3.1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시위를 하였다고 합니다. 혼란 속에 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여 쓰러졌지만, 그냥 가 버린 기마병에 분노하며 군중이 시위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주민 6명이 희생된 장소라고 합니다.

또한 토벌대가 1949년 6월 제주 4.3봉기의 2대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사체를 경고용으로 걸어 둔 곳도 바로 관덕정 앞 입니다. 우리 외에도 다른 두 팀이나 관덕정에서 기행을 시작했지만, 어디에도 4.3 역사와 관련된 표지가 없어 아쉬웠습니다.

오라리 방화터

다음은 오라리 연미마을입니다. 마을회관 앞에는 비극적인 4.3 역사의 도화선이 된 오라리 방화사건을 설명하는 큰 돌이 서 있었습니다. 비극적 내용이지만, 눈으로 보며 기억을 할 수 있는 표지석을 보자 다행인 마음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

해설자 이승용 님은 1948년 4월 3일 제주도 무장대의 봉기가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귀에 쏙쏙 들어오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토벌대와 무장대의 유혈사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4월 28일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사령관 김달삼은 동족간의 끝없는 복수극을 중단하기 위한 평화협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휴전 중이던 5월 1일, 마을에서 집 10여 채가 불타는 방화 사건이 발생했고, 조사 결과 서북청년단과 대동반공단 우익청년들의 소행임이 밝혀졌습니다. 미군정은 이런 보고를 받고도 무시하고, 무장대의 소행이라며 불타는 마을 영상까지 만들게 하고 본격적인 강경 무력진압을 위해 이용했다고 합니다.

제주 4.3 평화공원으로

역사기행 중 항상 비가 왔다는 해설자 이승용 님의 말대로 제주 4.3 평화공원에 도착하자 하늘은 잿빛이 되었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기 전 바람부는 스산한 공원 한 쪽에 옹기종기 앉아 각자 준비해온 도시락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4.3 평화공원은 제주 4.3 기념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입니다.

다랑쉬굴 내부 모형을 눈여겨보라는 해설자의 안내에 따라 수 개월간 어두운 굴 속에서 살아야 했던 희생자들의 일상을 유심히 관찰했습니다. 실제의 그림자에도 못 미치는 모형이지만, 어두운 굴속에서도 삶을 이어가고자 했던 사람들의 생존 의지가 느껴졌습니다.

역사관에서 나오니 비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합니다. 평화공원을 천천히 산책할 여유는 없었지만, 새까만 비석에 둘러싸인 4.3 위령탑 앞에서 묵념을 합니다. 잔혹한 죽음의 사연이 이름 석자에 새겨진 듯, 셀 수 없이 많은 이름을 달고 있는 검은 비석들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조천읍 낙선동의 4.3성(城)

다음 기행지는 조천읍 낙선동 4.3 성담입니다. 역사 기행의 첫날은 제주 시내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돌고, 둘째 날은 서귀포에서 서쪽으로 돌면서 원을 완성하는 모양새였습니다. 효율적이고 수준 높은 프로그램 진행을 위해 해설자와 제주지회가 얼마나 고심했는지 느꼈졌습니다.

비극적인 역사를 듣고 배우며 시시각각 슬픔이 번져 다소 침울한 기분이 들 때마다 이동하는 버스에서 재치있는 사회자 멘트는 우리를 웃게 만들어주었습니다.

4.3성은 1948년 11월 토벌대에 의해 초토화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 당국의 지시로 1949년 봄부터 성담을 쌓고 집단 거주하게 된 장소인데, 낙선동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이라 합니다. 당국은 이런 성을 통해 주민들을 무장대와 분리하여 통제하고자 했습니다. 바람이 숭숭 통하는 비좁은 집에서 장정 하나없이 아녀자와 노인들이 낮에는 밭일하고 밤에는 보초를 섰다합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달팠을까,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다행이었을까?' 하는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습니다.

북촌리 너븐숭이 역사관

제주 4.3에서 한라산과 바닷가 사이에 위치한 중산간 지역 주민의 피해가 압도적으로 컸습니다. 이번에 향하는 장소는 중산간지역이 아닌 해변가에 위치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역사관입니다.

함덕 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조천읍 북촌리에 도착하자 굵은 비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습니다. 무명의 애기무덤이 여기저기 보이는 기념관 앞에서 해설을 들었습니다.

애기무덤
▲ 애기무덤

북촌리 마을은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가가 많았고, 해방공간에서도 도민들의 자치조직이 활발했던 곳입니다. 1949년 1월 17일 군인 2명이 무장대 습격으로 숨지자, 군경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촌리에서 이틀 동안 약 40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는데, 4.3 동안 단일 사건으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았다고 합니다.

비를 맞고 있는 현기영 작가의 <순이 삼촌>(1978) 문학비 앞에 서서 진실에 가까운 소설 작품을 썼다고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던 독재 시절이 과거가 아니라 까딱했으면 최근에도 재현될 뻔했던 것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위령비 앞에서 묵념을 한 후 북촌리 사건을 전시한 너븐숭이 역사관으로 들어가서 다큐 영상을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으로 힐링의 섬인 제주도와 3만여 명의 학살이 이루어진 피로 물든 제주도가 겹쳐지며 한강 작가의 작품 <작별하지 않는다> 속 제주도가 떠올랐습니다.

구좌읍 다랑쉬굴

다음 장소는 성산읍의 광치기 해변이었지만, 바닷가에서 휘몰아칠 비바람이 걱정되었습니다. 대신 둘째 날로 계획되었던 다랑쉬 굴을 방문하기로 즉석에서 일정을 바꿨습니다.

다랑쉬굴로 가는 길은 비가 와도 물이 아래로 바로 빠져서 뽀송뽀송한 느낌을 주는 돌들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초속 15미터를 넘는 강풍과 비에 우산은 뒤집히고, 옷이 흠뻑 젖을 것이 뻔했지만, 참가자들은 한 명도 버스에 남지 않았습니다. 초등생 아이를 데리고 온 회원도 아이와 함께 다랑쉬굴로 향했습니다.

다랑쉬굴은 돌로 막아놓아 들어갈 수 없었고, 돌들이 어지럽게 놓인 입구를 보며 평화공원에서 본 굴 내부 모형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토벌대는 군불을 피워서 그 연기로 굴속에서 나오지 않는 11명의 사람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다고 합니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을 배경으로 설명을 듣고 난 우리는 희생자를 기리며 숙연한 마음으로 참배를 드렸습니다.

모두 흠뻑 젖었지만,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따뜻한 나누기를 하며 첫 날 일정을 마쳤습니다.


“오늘 내린 비가 희생자의 눈물 같아 저도 펑펑 울고 싶었지만 울음을 삼켰습니다. 이 역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오늘 순례하면서 안타까운 맘이 들었어요. 현명한 지도자를 뽑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픈 역사지만, ‘산사람은 살아진다’라는 말이 있듯이, 희생자들의 삶을 대신 살자는 다짐을 합니다”

“친할아버지가 희생자인데 이웃이 말해줘서 시신을 찾았고, 지금은 4.3 명부에 들어있습니다. 보상금을 500만원 받았는데, 할아버지의 생명값이라는 생각에 손대지 않고 가지고 있어요. 유족으로서 4.3 역사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회원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말한다면 ‘행복하게 살라’고 할 것 같아요. 비바람 덕분에 더 기억에 남는 기행입니다.”


둘째 날, 4월 13일

둘째 날 일정은 의귀리 현의합장묘, 송령이골, 소낭머리, 알뜨르비행장, 섯알오름, 백조일손묘, 영모원입니다.

둘째 날도 종합운동장 시계탑에서 버스에 올라타 첫 장소인 서귀포 남원읍 의귀 초등학교로 갔습니다.

의귀리에는 현의합장묘가 있는데, 의로운 넋이 함께 묻힌 묘라는 뜻입니다. 현의합장묘는 옛터와 새로 만든 묘지가 있었지만, 우리는 옛터 흔적을 찾아서 참배했습니다.

토벌대는 마을을 불태우고, 살아남은 주민들을 의귀초등학교에 수감했습니다. 많은 고초를 겪고 있던 주민들을 구하고자 무장대가 선제공격을 했지만, 사전에 계획이 탄로 나서 토벌대에 의해 전멸하다시피 하였습니다. 토벌대는 주민들이 무장대와 내통했다는 빌미로 의귀초등학교에 수감된 젖먹이 아기 포함, 주민 80여 명을 밭으로 끌고 가서 모두 총살하였습니다. 그 후 주민들의 시신은 3개의 구덩이에 함께 묻혔는데 이것을 현의합장묘라고 합니다.

1964년부터 유족들은 시신이 방치되었던 땅을 사들여 묘역을 돌보다가 1983년 현의합장묘를 건립했습니다. 이후 여러 번 마을 길 확장공사가 시행되면서 묘역이 돌출하는 상황이 되자, 2003년 남원읍 수망리에 새로 조성된 新현의합장묘에 유골을 이장하였다고 합니다.

송령이골

현의합장묘지와 멀지 않는 곳에 송령이골이 있어 이승용 님의 안내를 들으며 걸어갔습니다. 이 곳은 의귀초등학교에서 사살된 무장대의 시신을 토벌대가 한 곳에 집단 매장한 장소라 합니다. 지금까지 양민학살터만 보았는데, 송령이골은 ‘반역자’로 낙인찍혔던 무장대의 묘지라서 어떤 모습인지 궁금했습니다.




이곳은 오랫동안 폐허처럼 방치되어왔으나, 2004년 5월 14일, 실상사 회주 도법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전국을 순례하다가 유족의 사연을 듣고 표지판을 세우고 천도재를 치렀다고 합니다. 생명평화탁발 순례단이 세운 표지판에는 “우익과 좌익 모두를 이념대립의 희생자”이고, 학살된 민간인뿐만 아니라 군인·경찰과 무장대 등 “그 모두는 해방공간과 한국전쟁 때 희생된 내 형제 내 부모”라는 포용의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기독교단체도 이 곳을 참배하고 흔적을 남겨 놓았습니다.

매년 8월 15일 개인과 단체가 와서 제사를 지내고 벌초를 한 덕인지 잘 가꾸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공식 4.3희생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무장대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음으로 묵념했습니다.

소낭머리

다음은 서귀포 자구리 해안의 소낭머리입니다. 잠시 자구리해안에 내려가서 번쩍이는 바다를 보며 순간 ‘관광객 모드’로 전환하여 회원들은 정답게 사진을 찍었습니다.


소낭머리(또는 소남머리)는 소나무가 많은 언덕, 또는 소머리를 닮은 곳이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소낭머리와 주상절리 해안 정방폭포 사이에서 250여 명이 학살되었습니다. 소낭머리 언덕으로 가는 입구에는 4.3 사적지로 표시가 있어 기대했지만, 정작 들어가니 그 어디에도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하는 팻말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소낭머리 근처에 4.3위령비를 세우고자 했으나 주민들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다가 2023년 우여곡절 끝에 정방폭포 근처에 4.3위령비를 세워 추모공간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대정읍 알뜨르 비행장

소낭머리를 뒤로 하고 근처 걸매공원 풀밭에 자리를 깔고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서귀포를 떠나 제주도 서쪽 남단에 있는 대정읍으로 출발했습니다. 먼저 일제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던 알뜨르 비행장 근처 섯알오름에 4.3희생자들의 학살지와 추모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가 만든 비행장 터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관제탑 같은 곳에 올라가 보니 산방산과 격납고 외에 넓디 넓은 들판이 보였습니다. 오랫동안 관제탑으로 여겼던 이곳에는 식수 공급을 위한 수조가 있었다고 합니다.

송악산 섯알오름 학살터

유채꽃 밭을 뒤로 하고 섯알오름 학살터로 걸어갔습니다. 섯알오름 추모공간 위쪽에는 일제 탄약고를 미군이 폭파하면서 생긴 거대한 웅덩이 하나와 조금 작은 웅덩이가 있었습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하고 학살했는데, 모슬포경찰도 관내에서 예비검속된 사람들 252명을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하고 암매장하였습니다. 두 차례 집단 총살하면서 암매장 구덩이도 두 개 남아있습니다.


2015년 조성된 추모공간의 위령비 아래에는 다른 추모공간에서 보지 못했던 고무신들이 나란히 놓여있었습니다. 체포된 이들이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한 짝씩 벗어서 흘린 것이라 합니다. 날이 밝자 가족들이 고무신을 따라 학살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군경의 저지로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피눈물을 삼키며 6년이 지난 1956년에야 구덩이에서 유해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32구의 엉킨 뼈는 누구의 시신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유족들은 모두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죽은 ‘백 할아버지의 한 자손’이라는 의미에서 백조일손이라 칭하고, 유족들이 사들여 조성한 백조일손묘역에 안장했습니다. 유족회는 1959년 어렵게 비석을 세웠지만, 박정희 정권 하에서 경찰은 이 비석을 파괴하였습니다. 현재의 비석은 1993년에 다시 세운 것입니다.

백조일손묘 역사관

섯알오름에서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족들은 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진실 규명을 위한 자료를 찾고 보존하며 백조일손묘역을 돌보았습니다. 이런 노력이 2024년 8월에 <백조일손 역사관> 개관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유족회가 부지를 제공하고 국비 지원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유족회의 적극적인 참여로 제주도의 4.3 역사관 총 5개 중 비교적 고증이 잘 된 역사관에 속합니다.



역사관 한 쪽 벽에 붙어있는 방문자들의 메모는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합니다.

“몰랐어서 미안합니다. 편히 쉬시길 기원합니다”

“백조일손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그 험난한 시국에 수고하셨습니다. 실제 총을 맞아가며 밝혀지지 않는 세월을 사느라 고생했어요. 그곳에서 편안하시길 그리고 기억하겠습니다”

역사관의 수장고에는 아직 전시되지 않은 자료들이 많다고 합니다. 다시 방문할 수 있기를 기약하며 역사관 앞의 위령탑 앞에서 묵념한 후, 제주 4.3일정의 마지막 기행지인 영모원이 있는 애월읍으로 향했습니다.

영모원

찬란한 태양이 정점을 지나 하강 곡선으로 가고 있을 때 애월읍 하귀리에 위치한 영모원에 도착했습니다. 첫 눈에 놀라운 것은 세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 비석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기리는 위국절사 영현비, 4.3과 전쟁으로 죽은 호국영령 충의비, 그리고 제주4.3희생자 위령비입니다. 항일운동가의 영현비와 4.3 희생자의 위령비가 함께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위령비를 함께 모신 것은 드문 일입니다.

이승용 님의 설명에 의하면 제주도내에서 항일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 하귀리 마을이고, 주민들 스스로 의논해서 2003년 영모원을 조성했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보지 못한 형태의 추모 공간에 서니 더욱 숙연해지고 마음이 넓어지는 듯 감동이 일었습니다. 희생자 유가족의 큰 마음이 아니었다면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었던 만큼 세계적 차원에서도 보기 드문 화해의 고귀한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5년 4월 11일, 영모원 기록을 포함한 제주 4.3기록물이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던 것도 제주 4.3 희생자들의 수준높은 평화 역량과 화해의 정신이 인류의 모범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인정한 것일 겁니다. 아우슈비츠와 수많은 나치학살지에 희생자들의 위령비와 가해자의 비석이 함께 서 있는 경우를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영모원을 만들어낸 제주도민의 차원 높은 화해 정신을 잘 표현해 놓은 비문 <여기 와 고개 숙이라>를 소리내어 읽고 묵념하였습니다. 50여년 전 국가가 국민에게 소위 ‘빨갱이’를 죽이는 것이 애국이라고 주입시켜왔고, 그것을 믿고 행했던 가해자들도 결국은 국가 폭력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들어있습니다. 이 감동적인 비문은 <빙벽>으로 유명한 고원정 작가가 집필했다고 합니다. 긴 비문이지만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 전문을 인용합니다.


여기 와 고개 숙이라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여기와서 옷깃을 여미라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 6·25의 아픔이 한반도에 닥치기도 전에
이 죄 없는 땅, 죄 없는 백성들 위에 아직도 정체 모를 먹구름이 일어나서
그 수많은 목숨들이 지금도 무심한 저 산과 들과 바다 위에 뿌려졌으니,
어느 주검인들 무참하지 않았겠으며 어는 혼백인들 원통하지 않았으랴.
단지 살아 있는 죄로 소리내어 울지도 못한 마음들은 또 어떠했으랴.
죽은 이는 죽은 대로, 살아남은 이는 살아 있는 대로
제 자리를 찾지 못한 채 허공에 발 디디고 살아오기 어언 50여 년.
아버지보다 오래 살고 어머니보다 나이 들어서야 여기 모인 우리들은
이제 하늘의 몫은 하늘에 맡기고 역사의 몫은 역사에 맡기려 한다.오래고 아픈 상채기를 더는 파헤치지 않으려 한다.

다만 함께 살아남은 자의 도리로 그 위에 한 삽 고운 흙을 뿌리려 한다.
그 자리에서 피가 멎고 딱지가 앉아 뽀얀 새살마저 살아날 날을 기다리려 한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모두가 희생자이기에 모두가 용서한다는 뜻으로
모두가 함께 이 빗돌을 세우나니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

이제야 비로소 지극한 슬픔의 땅에 지극한 눈물로
지극한 화해의 말을 새기나니,
지난 50여 년이 길고 한스러워도 앞으로 올 날들이
더 길고 밝을 것을 믿기로 하자.
그러니 이 돌 앞에서는 더 이상 원도 한도 말하지 말자.
다만 섬나라 이 땅에 태어난 이들은 모두 한 번쯤 여기 와서 고개를 숙이라.


제주4.3 역사기행을 마치며

이번 역사기행의 백미인 영모원 참배를 끝으로 모든 일정을 마치며 마음은 너그러워져 따뜻하고, 감동의 여운은 오래 남았습니다. 갈등은 폭력으로 해결하지 않고 서로 포용하며 상생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 4.3희생자 유족의 큰 마음이 제주 4.3기행의 결론으로 다가왔습니다.

이틀 동안 제주도를 한 바퀴 돌면서, 무고한 피를 흘린 희생자들의 역사를 진지하게 대하는 정토회원들의 진실된 마음을 엿볼 수 있어 기행 내내 감동이었습니다. 태풍급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날씨에도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이까짓 비바람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진지한 자세로 임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짧은 삶을 강제로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이들을 생각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회원들을 보며, 대한민국의 상위 1%는 정토행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글_ 이경분 희망리포터(서제지부 관악지회)
사진_제주지회, 이경분(서제지부 관악지회)

전체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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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복

이경분님 글 잘 읽었습니다.
4.3사건으로 너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네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
다시는 이 땅에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2025-05-16 22:18:55

김형주

생생한 역사기행의 글과 사진을 따라가며 함께 있는듯 울고 미소짓게 됩니다. 알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5-05-16 22:07:08

이선후

기행 잘 보았고 기록에 감사드립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5-05-16 11: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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