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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다니던 80년대는 전국적으로 민주화 투쟁의 열기가 뜨거웠고, 캠퍼스는 화염병과 최루탄 가스로 늘 소란스러웠습니다. 선배들을 따라 가두시위를 나갔다가 잡힐 뻔한 아찔한 순간을 겪은 후, 한 발 뒤로 물러나 구경꾼 속에 숨었습니다. 시위가 끝나면 그들에게 물을 건네주거나 밥을 사는 것으로 동료들에게 빚진 마음을 달래곤 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졸업 후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대학 선배를 만나 서른 무렵에 결혼을 했습니다. 가족들에게 선배를 처음 소개했을 때 모두 반대했습니다. 특히 온순한 성격의 친정 오빠들이 ‘이런 사람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처자식 고생시킨다’며 극구 말렸습니다. 저는 이 사람이 얼마나 정의롭고 세상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할 사람인지 침이 마르도록 설득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한 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오빠들의 염려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택시 기사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했습니다. 가정에는 무관심했고, 오로지 세상일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남편에 대한 신뢰가 깨지면서 이혼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반대하는 가족들을 설득하며 했던 결혼이라 자존심에 그도 쉽지 않았습니다. 고심 끝에 아이가 생기면 책임감도 갖고 가정에 충실할까 싶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를 갖기로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문제를 다른 곳에서 해결하려는 어리석은 마음이었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가정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아이가 생기자 다행히 남편이 좀 달라졌습니다. 일찍 귀가하여 함께 저녁을 준비하고 산책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며 태교에도 힘썼습니다. 노력하는 모습에 연애 시절의 감정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시민단체 행사 일정으로 바빴지만 태어날 아기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며 각오를 다지기도 했습니다. 결혼 전 꿈꿔왔던 장밋빛 인생이 쭈욱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난 지 백일이 되어갈 무렵, 한동안 잠잠하던 남편이 잔뜩 취해서 들어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실망스럽다며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습니다. 적은 월급을 아껴가며 겨우 생활하던 터라 아이를 키울 걱정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품에 안겨 있는 아기는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이 작고 소중한 생명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덜컥 두려움이 밀려오며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친정 엄마에게 아기를 맡기고 무작정 집을 나가 걸었습니다. 갈 곳이 없었습니다. 이리저리 몇 시간을 걷다가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공원 벤치에 앉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터진 울음은 쉬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울다가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모자를 하나 사 들고 미용실로 무작정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밀어 주세요”라고 했더니 미용사는 당황하며 머뭇거리다 “연극하시나 봐요?”라고 대꾸하면서 머리카락을 깨끗하게 밀어주었습니다. 거울 속의 낯선 저를 보며 ‘그래 더 이상 도망치지 말자. 오늘부터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거야. 난 엄마다.’라고 단단하게 마음을 다졌습니다.
1999년, 남편은 홍콩에 있는 인권단체에 인턴으로 들어갔고, 1년 후 정직원이 되었을 때 두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저도 홍콩으로 옮겨 갔습니다. 남편은 일로 바빴고, 저에게는 마음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낯선 타국에서 마음은 점점 지쳐가고 집이 감옥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외국 출장을 간 사이 아이가 경기를 일으켜 응급실로 급히 옮겨졌습니다. 아이의 눈동자가 돌아오고 파랗던 입술에도 핏기가 생기자 안도감에 아이를 안고 펑펑 울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남편 사무실로 전화해 다른 한국인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아이를 입원시켰습니다.
그 순간 참았던 남편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밀려왔습니다. 출장에서 돌아온 남편에게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느냐며 따졌습니다. 남편의 마음을 살필 겨를 없이 제 마음은 꽁꽁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더욱이 물가가 비싼 홍콩에서의 불안정한 생활로 우리 부부는 끊이지 않은 다툼 속에서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3년 만에 남편과 헤어질 결심으로 아이만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2002년, 저와 아이는 살 집을 구하지 못해, 미혼이었던 친정 언니와 엄마가 사는 아파트에 얹혀 지내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수첩을 뒤적이다가 옛 직장 동료의 번호를 보았습니다. 아들 셋을 키우며 가정에 무심한 남편을 원망하며 힘들어 했던 언니였습니다. 그 시절 결혼 전이었던 저는 언니가 왜 그렇게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제가 겪어보니 ‘참 힘들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병상련을 느끼며 밥이라도 한 끼 사고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6년 만에 언니를 만나 그동안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남편과 이혼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 저에게 언니는 마음의 휴식이 필요하다며 문경수련원을 권했습니다. 그렇게 문경수련원에서 <깨달음의장>으로 정토회와 첫 인연을 맺었습니다.
요동치던 마음을 붙잡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던 불안한 마음이 <깨달음의장>을 다녀온 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남편 때문에 불행하다는 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신선한 공기에 숨을 고르고 정신이 든 것만 같았습니다. 마음공부를 계속해야겠다는 생각에 문경수련원을 소개해 준 언니에게 물어 매주 법회도 참여했습니다. 작은 사무실에서 대여섯 명이 모여 비디오테이프로 법문을 듣고 나누기를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누기를 하면서 제 삶을 되돌아보고 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는 걸 느끼자, 그해 6월에 문경수련원에서 1차 만일결사 4-2차 백일기도에 입재하고 새벽 정진도 시작하였습니다. 깜깜한 어둠속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습니다.
문경 수련원 입재식에서 소박하면서도 맑고 정갈한 도반들의 모습은 제 가슴에 깊이 새겨져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TV에서 특집 다큐로 방영된 <길 위의 불자들>에 나왔던 법륜스님을 직접 봬서 깜짝 놀랐습니다. 인도에서 수자타 아카데미라는 학교를 만드시는 것을 보면서 찾아가 보고 싶어 ‘법륜스님’이라고 수첩에 써 놓은 적이 있는데, 눈앞에 계시니 꿈만 같았습니다. 스님의 법문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눈을 덮고 있던 장막이 한 꺼풀 벗겨지는 것 같았습니다. 입재식이 끝나고 입구까지 내려와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며 인사해 주셨던 법륜스님과 법사님들의 따뜻함이 문경수련원을 영원히 마음의 고향으로 기억하게 했습니다. 이런 분들이 가는 길에 함께 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남편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양육권을 갖기 위해 다시 직장을 구하면서도 천일결사 입재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정성껏 기도를 했습니다. 백일 동안 기도를 하면 기도문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에 희망적인 기도문을 기대했는데, 느닷없이 ‘남편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기대가 컸던 탓인지 머릿속이 하얗고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정토회를 그만 나가야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기도문을 받아들이기 싫은 마음이 너무 강해서였는지 기도문이 적힌 종이를 들고 깊은 바다로 들어가 큰 바위 밑에 버리고 오는 꿈까지 꿨습니다. 하지만 거부하려 해도 ‘남편의 종이 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하루빨리 남편과 이혼해서 이 기도를 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이혼 계획을 세웠습니다. 마침 한국에 직장을 구하고 서울로 들어 온 남편에게 주말에 광주로 내려와 무등산 등산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산꼭대기 바위에 앉아 비장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요즘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보고 ‘남편의 종이 되겠습니다’라고 기도 하라네. 그건 당신이 나를 종으로 생각한다는 반증일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그 생각을 바꾸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랑 같이 못 살아. 어떻게 할 거야?”
따지듯이 묻자 가만히 듣고 있던 남편이
“어디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하며 어이없다는 듯 산을 내려가 버렸습니다.
그렇게 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1년 정도를 그저 흉내만 내는 수행자로 살았습니다. 남편을 고치든지 아니면 이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가정 법회에 참석하며 금강경 강의를 들었습니다. 바가지를 거꾸로 든 채로 물이 채워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저의 어리석음을 그 때는 몰랐습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이 강하고, 내 뜻대로 하려는 고집이 센 줄을 그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2004년 2월 광주법당 개원식 날, 금강경 강의를 70% 이상 들은 회원들에게 오계 수계식에서 법명이 주어졌습니다. 처음으로 법복을 사 입고, 목욕재계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금광명’이라는 법명을 받았습니다. 법명의 의미를 설명해 주시고 수계첩을 건네시던 스님께서 제 눈을 마주하고 갑자기 “결혼했어요?”라고 물으셨습니다. 세 번을 물으시는데도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수많은 대중 앞에서 남편이 싫어서 곧 이혼할 거라고 당당히 밝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대답을 하지 못하는 제게 스님은 제가 어떤 마음으로 기도문을 받아들이고 기도해야하는지 말씀해 주셨지만 그 순간은 창피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억울함이 밀려올라와 왜 이런 기도문을 주셨는지 따지고 싶었습니다.
개원식이 끝나고 다섯 살인 아들의 손을 잡고 집으로 가는 내내 흐르는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법당에 가서 기도를 올리는데 108배를 하다가 주저앉아 엉엉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렇게 기도를 할 때마다 눈물이 쏟아져 멈추질 않았습니다. 일주일 쯤 지나자 문득 스님의 말씀이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그래, 해보고 날마다 남편에게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있는 서울로 이사를 했습니다.
바가지를 거꾸로 든 채 물이 채워지기만 기다렸다는 최란 님은 기도문의 진짜 의미를 언제 알아차렸을까요? 남편에게 문제가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남편이 있는 서울로 이사한 최란 님의 남은 이야기는 수요일에 이어집니다.
글_이영자 희망리포터(광주전라지부 서광주지회)
편집_김난희(강원경기동부지부 원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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