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법륜스님과 함께하는

생방송 여름명상

4박5일 / 7월 25일(금) ~ 7월 29일(화) *한국시간 기준
6박7일 / 7월 25일(금) ~ 7월 31일(목) *한국시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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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2025년 7월

법륜스님 해외 즉문즉설

일정 : 2025년 7월 9일(수) ~ 12일(토)
강연국가 : 싱가포르, 호치민, 홍콩,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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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한국어, 불어, 독일어, 일본어

정토담마스쿨 입학생 모집

마감 : 2025년 8월 5일(화)
입학 : 2025년 8월 28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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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오픈!

오늘, 첫 만남 입니다

정토회가 처음인 분을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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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행자의 하루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이아람 님은 온라인 정토회로 시작하여 지금은 전법회원이 되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이아람 님은 뉴욕의 가방 디자이너였습니다. 영화나 책 속에서 봤던 뉴욕 패션계 종사자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으니 흥미진진했습니다. 뉴욕의 패션 디자이너가 전법회원으로 거듭나는 스토리 들어볼까요? 계속 목이 말랐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가방 디자이너로 일하며 23년째 살고 있습니다. 20년 전 한국은 남녀차별, 연공서열이 심했습니다. 사회 분위기로 보아 한국에서는 경력 수명이 짧아 보였습니다. 미국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2000년 초 미국 경제는 활황이었고, 디자이너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많았습니다. 제가 디자인 한 가방은 업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미국 백화점 등에서 주문이 쏟아졌습니다. 미국 회사는 성별, 나이, 인종 상관없이 능력을 우선시했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았고 연봉도 올랐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초고속 승진하여, 30대 초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디자이너 시절, 미국 잡지에 실렸을 때 그러나 세상 멋져 보이던 수석 디자이너가 되니, 그때부터 머리가 아팠습니다. 디자이너로 내가 목표한 곳에는 이미 와 버렸고, 관리자가 되니 매출, 시장 동향, 생산 공장 관리, 내부 정치 등 챙겨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기쁨과 희열이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잠시였습니다. 나는 더 올라가야 하는데, 목표는 이미 달성했고, 다음 목표를 알지 못했습니다. 더 올라가기는커녕 현재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정체되었다고 느꼈고, 성장의 욕구에 목이 말랐습니다. 더 이상 회사 일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월급 때문에 달리 다른 수가 없어 꾸역꾸역 회사에 다녔습니다. 겨우 30대 중반인데, 앞으로 남은 긴 세월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고달프고 힘들었습니다. 이미 수석 디자이너로 이직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45년 동안 ‘때려치울까? 뭐 먹고 살지? 아까운데’ 갈등하다 개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쳇바퀴 도는 생활에서 벗어 나고자 회사를 과감히 관두었는데, 개인 사업은 더 큰 산이었습니다. 한참 개인 사업을 할 때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하루아침에 없어졌습니다. 허무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쉬어 갈 수 있어 반갑기도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공식적인 이유 덕분에 마음 편하게 쉬어 갈 수 있었습니다. 어 멈춰도 되네. 그 무렵, 작은언니가 행복학교 접수 링크를 보내주었습니다. 전에도 언니는 제게 불교대학이나 법문 영상 링크를 자주 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에 부정적인 저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심이 갔습니다. 언니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이혼 할 때 언니는 당장이라도 깨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습니다. 3년 후 다시 만난 언니는 천일 동안 300배 수행을 한다며 가족 여행 중에도 숙소 한 편에서 절을 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것 같던 이혼한 형부와 편하게 통화를 했습니다.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300배 하는 언니가 참 유난이다 싶으면서, 언니의 당당한 모습에 자꾸 마음이 갔습니다. 언니가 변한 궁금증과 딱 한 달, 딱 네 번 이라는 낮은 진입장벽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학교를 시작 했습니다. 한 달 과정의 행복학교는 제게 많은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이 공부의 근간은 무엇인지,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교대학, 경전대학, 전법활동가 교육을 연이어 했고, 인도 성지 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다섯 번의 진행자를 거쳐 지금은 영어 불교대학 담당과 인터뷰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인도성지순례 중 머리가 여러 조각으로 깨졌다가 다시 조립되다. 공부하며 머리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졌다가 다시 조립되었습니다. 삶의 관점이 재정립되었습니다. 락은 락이고, 고는 고지 ‘락이 곧 고’라는 말은 말장난 같았습니다. 그러다 큰 목표를 향해 신나게 달릴 때를 기쁨으로, 그렇지 못할 때를 괴로움으로 여겼음을 알았습니다. 내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보였습니다. 또한 삶은 그저 고통의 연속이고, 행복은 추상적인 것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대학 진행자, 돕는이로 봉사하며 목표를 향해 애써 달리지 않아도, 성장하지 않아도, 삶이 정돈되고 풍요로워졌습니다. 행복은 실재했습니다. 우물 밖 세상이 넓은데, 우물 안 세상에 갇혀 전부인 듯 이전투구처럼 괴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영어 불교대학 졸업식 진행, 맨 아래 오른쪽 이아람 님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저의 명심문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에 가고, 뭔가를 계속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계속 계획하며 살았습니다. 계획을 세워 계획에 맞춰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계획한다고 계획 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먼 미래를 가상으로 재현하는 행동이 오히려 불안을 키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미래를 떠올리며 불안할 때, 명심문을 떠올리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집니다. 이 명심문은 저의 일상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업상 정해진 일정이 없고 일이 몰릴 때는 몰리고, 없을 때는 없습니다. 정기적인 시간을 내어 봉사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명심문을 떠올리며 너무 멀리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봉사하자’라고 마음을 냈습니다. 막상 봉사를 시작하니, 시간 관리가 더 체계적으로 되었습니다. 일이 몰리고 마음이 조급할 때, 명심문을 떠올리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작업하다 보면 작업이 수월해집니다. 나의 꿈 앞으로 하고 싶은 정토회 활동이 있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미국인 남편과 영어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2023년 뉴저지 강연 봉사, 가운데 이아람 님, 왼쪽 남편 저는 독불장군처럼 내 결정에 따르라, 내 의견이 맞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결혼식 때, 꽃장식을 하거나, 멀쩡한 화장실을 낡았다고 수리하려는 남편의 행동은 제가 볼 때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내가 맞다라고 최선을 다해 입증하고 피력했습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내 의견을 받아들일 때까지 같은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이제는 열을 내며 내 주장을 펼치다가도 삼인칭 시점으로 나 자신이 객관화되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삼인칭 시점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남편은 ‘아람이가 자기 객관화를 한다.’라며 저의 변화를 신기해합니다. 저도 제가 좀 말랑해진 것 같습니다. 아직 남편은 영어 불교대학을 하지 않습니다. 매사 태평하고 여유로운 남편은 정기적인 시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기획 법회, 스님 영어 강연에 간혹 참여합니다. 계속 스님 관련 영상이나 기사를 남편에게 보냅니다. 예전에 언니가 제게 보낸 것들을 스쳐 지나갔듯 남편도 제가 보내는 자료들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느 순간 언니의 변화된 모습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남편 역시 어느 순간 저의 변화된 모습에 관심을 가질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때면 아마 남편과 함께 영어 불교대학을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아람 님이 남편과 함께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달콤합니다. 이아람 님 인터뷰 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라는 말이 맴돌았습니다. 글을 쓸 때는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어떻게 될지, 경제는 어떻게 될지,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때 이아람 님의 명심문처럼 화분에 물이라도 주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불안을 끊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고명주 편집김윤희

북미유럽지회 2025.07.02. 1,717 읽음

정토행자의 실천

아픈 과거에서 평화의 길을 배우다_대경지부 DMZ 철원 역사기행

6월 14일 토요일, 대구경북지부는 DMZ 철원으로 역사기행을 떠났습니다. 출발지로부터 6시간이나 걸리는 먼 곳이기에, 새벽 3시쯤부터 대구와 경북 각지에서 버스 세 대가 출발했습니다. 회원들은 오전 6시 문경휴게소에서 모두 합류했습니다. 출발할 때는 비가 많이 내려 걱정이 되었습니다. 휴게소를 두 군데 거치며 자다 깨기를 반복하니, 어느새 비는 그치고 땅은 말라 있었습니다. 오전 9시, 화창한 날씨 속에 철원 김화읍 화강 수변의 쉬리공원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좋은벗들 사무국장 이승용 님을 만나 함께 입재식을 가졌습니다. 저격능선 전투전적비와 김화의 사라진 마을 입재식을 마친 후, 영화 고지전에서 소재로 등장한 저격능선 전투 전적비가 있는 곳으로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left 전투 전적비가 있는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당시 북한국, 중국군과 전투를 벌였던 방호가 남아 있었고, 전적비 양쪽에는 실제 사용했던 대포를 모형으로 전시해 놓았습니다. 이승용 님의 설명을 들으며, 당시 철원 김화와 평강을 오가며 대치된 전투가 바로 이 자리에서 전개되었다고 생각하니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전적비를 둘러본 뒤, 다시 쉬리공원으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김화의 사라진 마을 이야기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은 전쟁이 치열했던 철의 삼각지대에 자리한 김화군 생창리의 이야기입니다. 전쟁 마지막까지 남북한이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지역입니다. 결국 김화군 중간에 휴전선이 그어지면서, 김화읍 전체가 사라져 버린 비운의 마을이 되었습니다. 공공 건물들을 비롯해 마을 발전을 위해 결성된 모임들, 그리고 오밀조밀한 건물들로 한때 활발했을 시가지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번성했던 마을이 전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모습을 보니, 전쟁이 남긴 허무함과 잃어버린 생기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습니다. 충렬사와 승일교와 고석정 다시 버스를 타고 충렬사로 향했습니다. 충렬사는 조선 인조 14년, 서기 1636년 병자호란 당시 공을 세운 충렬공 홍명구와 충장공 유림을 모신 사당입니다. 특히 북한과 가까운 지역이어서 더 이색적이었습니다. 우리 군에 미리 견학을 허락받고, 군인의 동행 하에 군에서 정해주는 방향으로만 사진을 찍으며 둘러보는 경험이 특별했습니다. 충렬사를 둘러본 후, 고석정으로 향하는 길에 승일교가 있습니다. 승일교는 북한 정부에서 공사를 진행하다 전쟁으로 중단되었고, 이후 남은 구간을 남한에서 건설한 교각입니다. 조금 지체된 일정 탓에 내려서 보지는 못하고, 가까이 천천히 지나가며 설명을 들었습니다. 남쪽과 북쪽이 각자의 시공법으로 완성하게 된, 좋게 보면 합작품인데, 건설 중에 전쟁이 끼어 사연 많은 다리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이름도 이승만의 승과 김일성의 일을 따서 승일교라 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렇다면 북한에서는 일승교라 불릴까 하는 궁금증도 생겼습니다. 어쨌든 북한과 남한의 서로 다른 모양으로 합체된 승일교를 지나 고석정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철원의 축제 기간과 겹쳐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고석정 주차장 여기저기 그늘진 곳을 찾아 조별로 옹기종기 모여 점심을 챙겨 먹고 고석정 자유 투어를 했습니다. 고석정으로 내려가는 길은 돌계단으로 되어 있었는데, 북한의 평강 지역에서 분출되어 흘러나온 용암이 돌이 되어 현무암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흡사 제주도처럼 구멍이 송송송 뚫려 있는 현무암 계단을 내려가 한탄강까지 가보니, 한복판에 치솟은 10여 미터 높이의 기암 양쪽으로 옥같이 맑은 물이 휘돌아 흐르는 경관이 빼어나게 수려했습니다. 하루 종일 책상과 집 안에만 머물던 눈과 머리에 시원하게 바람을 불어넣는 것 같았습니다. 돌계단을 내려가 정자와 고석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미리 알려준 시간에 맞춰 주차장에 도착해 버스에 탑승했습니다. 백마고지 전적지 버스는 20여 분을 달려 백마고지 전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은 한국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북한군과 중공군 1만 명 이상의 사상자와 포로, 그리고 한국군 3천4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곳입니다. 비 오듯 쏟아진 포격으로 산등성이의 나무들이 사라지고 하얗게 드러난 바닥이 마치 백마가 누워 있는 모습과 같아 백마고지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입구의 백마상과 전승비를 지나 올라가는 길은 좌우로 자작나무와 함께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어, 마음이 더욱 비장했습니다. 태극기 길을 따라 위령비에 이르면, 전투 전사자들의 이름이 가득 적힌 비석이 보이고, 그 옆으로는 멈춰 선 6.25 시계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전쟁 승리 일자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전사자들의 위령비와 함께 전쟁의 아픔이 더욱 마음에 새겨지는 듯했습니다. 다시는 남북한 간에 이처럼 참담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시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 양쪽으로 간략하게 마련된 백마고지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백마고지 전투에 대한 기록을 찬찬히 살펴본 후, 바로 이어져 있는 전적비에 도착했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전적비와 커다란 태극기에서는 자유를 향한 숭고함이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전적비 뒤편에 있는, 머리 없는 사람들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습의 탄피 조형물을 볼 때는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종각이 있는 전망대에서 단체 사진도 찍고, 건너편 DMZ에 위치한 실제 백마고지도 확인했습니다. 노동당사와 소이산 전망대 그리고 회향식 .right 해가 오후를 넘어가는 즈음에 노동당사에 도착하여 이승용 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그늘에 앉아 이야기를 듣다 조는 회원들의 모습도 정겨웠습니다. 노동당사는 전쟁 전 북한이 사용했던 건물입니다. 옛 건물이라 그런지 벽체가 두껍고 보기에도 굉장히 단단해 보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전쟁으로 인한 포탄과 총탄 자국이 건물 곳곳에 빼곡히 박혀 있음에도 건물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노동당사를 한 바퀴 돌아 나오는데, 갈라진 건물 틈새로 피어나 바람에 흔들거리는 야생화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답사지인 소이산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날씨가 습하고 햇살은 뜨거워 땀이 많이 났습니다. 소이산 전망대에서 보이는 북한을 바라보며 이승용 님의 지리적인 설명을 집중해서 들은 뒤 회향식을 했습니다. 돌아오는 버스에서는 이산가족에 대한 생각과 전쟁 당시 희생한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거리가 멀어 계획하기 힘든 이 역사기행을 정토회 덕분에 알차게 하게 되어 모두 감사해 했습니다. 그리고 이념과 편견, 갈등을 전쟁으로 풀면 안 되고 대화로 풀도록 해야겠다는 나눔까지 이어졌습니다. 모두 평화에 대한 기원을 하게 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밤이 늦도록 달려 9시가 넘어 집에 도착했지만, 알찼던 평화 공부에 모두 참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글과 사진정수옥

통일 2025.07.04. 417 읽음

정토불교대학

삶을 바꾸는 공부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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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체득하는
정토경전대학

※ 정토불교대학 졸업 후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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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생 이야기

우연히 찾아온 정토불교대학과의 만남

윤정숙 님 - 2018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지금까지 남보다 더 가지고, 더 빛나고, 더 잘 입고, 더 잘 살기 위해 살았는데, 어느 날 문득 이게 무슨 큰 의미가 있나? 싶었죠. 우연히 친구와 얘기하다가 알게 된 정토불교대학.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의 기준점을 찾고 싶어 입학하게 되었지요. 집착과 이기심이라는 어리석음으로 내 스스로를 괴롭게 만들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지금은 주변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제 삶에 만족해요.

부부에서 도반으로

이용준·김서화 님 - 2019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도반으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있어요. ‘아내는 이러한 사람’, ‘남편은 이러한 사람’라는 고정관념이 내 삶을 고단하고 힘들게 만들었음을 불법공부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잘 풀리지 않는 부분도 법문을 들으면 해소가 되고 처방전을 받은 듯 시원해요.

이혼소장을 멈추게 한 정토불교대학

최영미 님 - 2015년 정토불교대학 졸업

13년 내내 총성없는 전쟁과 같았던 결혼생활. 이혼장을 쓰던 중에 정토불교대학 입학홍보문자를 받게 되었어요. 남편과의 싸움은 제 인생의 풀지 못하는 숙제 같았는데, 그게 해결되니까 풀지 못하는 숙제가 없어졌어요. 제가 변하고 나니 남편이 불교대학 홍보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