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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람 님은 온라인 정토회로 시작하여 지금은 전법활동가가 되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가 떠올랐습니다. 이아람 님은 뉴욕의 가방 디자이너였습니다. 영화나 책 속에서 봤던 뉴욕 패션계 종사자를 직접 만나 얘기를 들으니 흥미진진했습니다. 뉴욕의 패션 디자이너가 전법활동가로 거듭나는 스토리 들어볼까요?
저는 뉴욕에서 가방 디자이너로 일하며 23년째 살고 있습니다. 20년 전 한국은 남녀차별, 연공서열이 심했습니다. 사회 분위기로 보아 한국에서는 경력 수명이 짧아 보였습니다. 미국 유학을 선택했습니다. 잘한 선택이었습니다. 2000년 초 미국 경제는 활황이었고, 디자이너 제품에 대한 수요가 많았습니다. 제가 디자인 한 가방은 업계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미국 백화점 등에서 주문이 쏟아졌습니다. 미국 회사는 성별, 나이, 인종 상관없이 능력을 우선시했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았고 연봉도 올랐습니다. 신이 났습니다. 초고속 승진하여, 30대 초 수석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 멋져 보이던 수석 디자이너가 되니, 그때부터 머리가 아팠습니다. 디자이너로 내가 목표한 곳에는 이미 와 버렸고, 관리자가 되니 매출, 시장 동향, 생산 공장 관리, 내부 정치 등 챙겨야 할 것이 많았습니다.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기쁨과 희열이 있었지만, 그것은 너무 잠시였습니다. 나는 더 올라가야 하는데, 목표는 이미 달성했고, 다음 목표를 알지 못했습니다. 더 올라가기는커녕 현재 자리를 유지하는 것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정체되었다고 느꼈고, 성장의 욕구에 목이 말랐습니다.
더 이상 회사 일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월급 때문에 달리 다른 수가 없어 꾸역꾸역 회사에 다녔습니다. 겨우 30대 중반인데, 앞으로 남은 긴 세월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참 고달프고 힘들었습니다. 이미 수석 디자이너로 이직도 마땅치 않았습니다. 4~5년 동안 ‘때려치울까? 뭐 먹고 살지? 아까운데’ 갈등하다 개인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쳇바퀴 도는 생활에서 벗어 나고자 회사를 과감히 관두었는데, 개인 사업은 더 큰 산이었습니다.
한참 개인 사업을 할 때 팬데믹이 터졌습니다.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하루아침에 없어졌습니다. 허무하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쉬어 갈 수 있어 반갑기도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공식적인 이유 덕분에 마음 편하게 쉬어 갈 수 있었습니다.
그 무렵, 작은언니가 행복학교 접수 링크를 보내주었습니다. 전에도 언니는 제게 불교대학이나 법문 영상 링크를 자주 보내곤 했습니다. 하지만 종교에 부정적인 저는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심이 갔습니다. 언니가 많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3년 전 이혼 할 때 언니는 당장이라도 깨질 듯 아슬아슬해 보였습니다. 3년 후 다시 만난 언니는 천일 동안 300배 수행을 한다며 가족 여행 중에도 숙소 한 편에서 절을 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을것 같던 이혼한 형부와 편하게 통화를 했습니다. 더운 날 땀을 뻘뻘 흘리며 300배 하는 언니가 '참 유난이다' 싶으면서, 언니의 당당한 모습에 자꾸 마음이 갔습니다.
언니가 변한 궁금증과 '딱 한 달, 딱 네 번' 이라는 낮은 진입장벽 덕에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학교를 시작 했습니다. 한 달 과정의 행복학교는 제게 많은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이 공부의 근간은 무엇인지, 더 깊게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불교대학, 경전대학, 전법활동가 교육을 연이어 했고, 인도 성지 순례도 다녀왔습니다. 다섯 번의 진행자를 거쳐 지금은 영어 불교대학 담당과 인터뷰어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공부하며 머리가 여러 조각으로 쪼개어졌다가 다시 조립되었습니다. 삶의 관점이 재정립되었습니다. 락(樂)은 락이고, 고(苦)는 고지 ‘락이 곧 고’라는 말은 말장난 같았습니다. 그러다 큰 목표를 향해 신나게 달릴 때를 '기쁨'으로, 그렇지 못할 때를 '괴로움'으로 여겼음을 알았습니다. 내 고통이 어디서 왔는지 보였습니다.
또한 '삶은 그저 고통의 연속이고, 행복은 추상적인 것일 뿐,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불교대학 진행자, 돕는이로 봉사하며 목표를 향해 애써 달리지 않아도, 성장하지 않아도, 삶이 정돈되고 풍요로워졌습니다. 행복은 실재했습니다. 우물 밖 세상이 넓은데, 우물 안 세상에 갇혀 전부인 듯 이전투구처럼 괴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저의 명심문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입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 고등학교에 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에 가고, 뭔가를 계속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알고 계속 계획하며 살았습니다. 계획을 세워 계획에 맞춰 살아야만 하는 줄 알았습니다. 계획한다고 계획 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먼 미래를 가상으로 재현하는 행동이 오히려 불안을 키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마음이 미래를 떠올리며 불안할 때, 명심문을 떠올리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합니다.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고 평온해집니다.
이 명심문은 저의 일상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업상 정해진 일정이 없고 일이 몰릴 때는 몰리고, 없을 때는 없습니다. 정기적인 시간을 내어 봉사 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명심문을 떠올리며 너무 멀리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봉사하자’라고 마음을 냈습니다. 막상 봉사를 시작하니, 시간 관리가 더 체계적으로 되었습니다. 일이 몰리고 마음이 조급할 때, 명심문을 떠올리며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작업하다 보면 작업이 수월해집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정토회 활동이 있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딱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불현듯 떠올랐습니다. 미국인 남편과 영어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것입니다.
저는 독불장군처럼 '내 결정에 따르라, 내 의견이 맞다.'는 입장을 유지하며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결혼식 때, 꽃장식을 하거나, 멀쩡한 화장실을 낡았다고 수리하려는 남편의 행동은 제가 볼 때 쓸데없는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쓸데없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면, '내가 맞다'라고 최선을 다해 입증하고 피력했습니다.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내 의견을 받아들일 때까지 같은 얘기를 반복했습니다.
이제는 열을 내며 내 주장을 펼치다가도 삼인칭 시점으로 나 자신이 객관화되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삼인칭 시점으로 나를 바라볼 때 남편은 ‘아람이가 자기 객관화를 한다.’라며 저의 변화를 신기해합니다. 저도 제가 좀 말랑해진 것 같습니다.
아직 남편은 영어 불교대학을 하지 않습니다. 매사 태평하고 여유로운 남편은 정기적인 시간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기획 법회, 스님 영어 강연에 간혹 참여합니다. 계속 스님 관련 영상이나 기사를 남편에게 보냅니다. 예전에 언니가 제게 보낸 것들을 스쳐 지나갔듯 남편도 제가 보내는 자료들을 지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느 순간 언니의 변화된 모습에 관심을 가진 것처럼, 남편 역시 어느 순간 저의 변화된 모습에 관심을 가질 날이 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때면 아마 남편과 함께 영어 불교대학을 진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아람 님이 남편과 함께 불교대학을 진행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달콤합니다. 이아람 님 인터뷰 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라는 말이 맴돌았습니다. 글을 쓸 때는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어떻게 될지, 경제는 어떻게 될지, 마음이 불안했습니다. 그때 이아람 님의 명심문처럼 화분에 물이라도 주며,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 불안을 끊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글_고명주(국제지부 아태지회)
편집_김윤희(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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