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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짓고, 내가 만든 삶
이서후 님과의 인터뷰를 마치면서, 문득 두부가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연이은 부모님과의 이별, 새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맡게 된 조카들의 양육, 그리고 가장 존경하던 오빠마저 세상을 떠난 일까지. 그 모든 고통과 인고의 시간이, 마치 콩을 맷돌에 갈고, 비지를 걸러내고, 뜨거운 물에 데워 식히는 두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닮아 있었습니다. 지금의 이서후 님은, 불법을 만나 점점 단단한 두부가 되어가는 그 어딘가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것은 내가 만들고, 내가 짓는다”는 그 한마디 속에서, 이제는 묵직하고 단단해진 삶의 태도가 느껴졌습니다. 가족의 넘치는 사랑 저는 아버지가 마흔다섯, 어머니가 마흔셋에 나은 늦둥이 막내입니다. 늦게 본 자식이기도 하고 손도 귀한 집안이라 그런지 딸임에도 엄청 귀하게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날씨가 궂은 날은 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고, 추운 겨울철에는 방안까지 세숫물, 양칫물을 떠다주었습니다. 부모님이 불을 떼어 큰 대야에 물을 따뜻하게 데워놓고 제가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엄마가 때를 밀어주었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그랬습니다. 나이 차가 많아서 일찍 사회 생활을 시작한 오빠와 언니가 옷이나 학용품을 사서 보내줬습니다. 집은 넉넉하지 않았지만 사랑만큼은 정말 넘치게 받으며 자랐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 연꽃 만들기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신 뒤 1년 동안 병상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다음 해에는 아버지 병수발로 고생하시던 어머니께서, 이제 좀 편안해지시나 싶던 시점에 갑자기 쓰러지셨고, 하루 만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연이어 떠나보내고 나니, 제 마음이 어떤 감정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그저 무서웠습니다. 수원에 사는 오빠 집에 들어가 살다가 몇 달이 지나 거처를 옮겨 언니와 함께 지냈습니다. 뭐라도 배워봐야겠다 해서, 학원에 다니며 캐드를 배웠고, 토목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처음 경험하는 도시 생활과 사회 생활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습니다. 회사에서는 늘 바쁘게 움직였지만, 막내라서 예쁨도 많이 받으며 지냈습니다. 어느새 사람들과 잘 어울리게 되었고, 술을 배운 뒤에는 퇴근 후 타 부서 여직원들과 어울려 열심히 놀기도 했습니다. 갑자기 떠안은 어른의 자리 제가 한창 회사 생활에 몰두하고 있을 때, 새언니가 우울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빠는 다리가 불편한 1급 장애인이고, 조카 둘은 겨우 초등학교 1학년과 3학년이었습니다. 서운하고 안타깝고, 무엇보다 답답했습니다. 가족을 돌보겠다고 마음을 먹고, 다시 오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오빠의 손과 발이 되겠다는 각오로 돌아왔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저는 살림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었고, 힘든 일을 감당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물건 하나 스스로 사본 기억이 없었고, 돈 관리는 늘 언니가 맡아줬습니다. 보호받는 가족 안에서만 살던 제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야 하는 현실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조카들은 매일 씻겨야 했고, 학교 숙제와 준비물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동시에 직장 생활도 계속해야 했기에 몸과 마음이 점점 지쳐갔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을 나이였지만, 그럴 여유조차 없었고, 버거울 때는 술에 기대기도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처음 겪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한겨울, 아파트 하수도가 얼어 터진 날이었습니다. 오빠가 부품 사진을 보여주며 사 오라고 했지만, 어디서 파는지도 몰랐습니다. 발품 팔며 이곳저곳 찾아다녀도 아는 사람은 없었고,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돌아와야 했습니다. 형광등 하나 갈아 끼우는 일조차, 오빠는 할 수 없었고 저는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쁘띠팝업 모둠장 교육때 수원지회 도반들과 함께 회사를 그만두고는 돈을 많이 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날을 새우고 며칠씩 잠도 못 자며 일하다 보니 점점 지쳐갔습니다. 그 시기에, 매일 집 앞에서 기다리고, 쉬지 않고 저를 따라다니던 남편의 청혼을 받았습니다. 저는 남편의 청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외모가 뛰어나다거나, 특별히 강하게 끌렸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빠나 제가 할 수 없던 일들을 살뜰히 챙겨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만의 기준과 판단으로 한 선택이었습니다. 13살 터울인 오빠는 어릴 때부터 제가 자립할 수 있도록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제게 아버지 같은 존재였고, 가장 존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습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은 2015년 8월, 오빠가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모님을 여의었을 때보다 더 힘든 이별이었습니다.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었을까. 오빠를 좀 더 챙기지 못한 아쉬움과 제대로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 같은 죄송함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너무나 큰 충격이고 큰 슬픔이라 오빠를 보내고, 하루도 울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출근하고 아이들은 등교하고 혼자 남은 집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수원지회 정토불교대학 홍보때 도반들과 마음 자리를 찾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가을쯤 정토회를 다니던 막내 시누이가 일산의 한 법당으로 불렀습니다. 남편과 함께 일산 정토 법당으로 갔습니다. 불교도, 법륜스님도 몰랐기에 사이비일까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법문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빠의 죽음 후 언니의 제안으로 안성에 있는 일반 사찰에서 오빠 이름을 올리고 천도재를 지냈습니다. 영가에게 좋을 거라고 해서 뜻도 모르면서 정성 들여 천도재 책을 읽었습니다. ‘오빠가 좋은 곳으로 가셨겠지.’ 하면서 말입니다. 그 인연으로 백중 때마다 사찰에 찾아갔고 불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불교가 알고 싶다고 시누이에게 넌지시 말했습니다. 3월 불교대학 입학식 전날 시누이가 입학금을 내주겠다며 불교대학에 접수하라고 했습니다. 입학식 당일 직접 법당 주소를 검색해서 찾아갔습니다. 단지 궁금해서였습니다. 법당에 신발을 벗고 들어서자 봉사자가 직접 써준 이름표를 달아주었습니다. 그 순간, 낯설던 공간이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입학 법문은 물론 환영식도 좋았습니다. 나누기 시간에 저는 솔직한 마음을 내어놨습니다. 각자 고민을 말하기도 하고 우는 분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여려선지 나누기를 계속 듣다 보니 감정이 복받쳤습니다. 울다가 눈이 퉁퉁 부었습니다. 조원모둠 모둠활동때 도반들과 나는 행복한 사람 2020년, 인도 성지 순례를 진짜 여행으로 생각하고 갔습니다. 숙소 앞에 딱 섰는데 깜짝 놀라서 앉지도 서지도 못했습니다. 인도처럼 사는 곳은 처음 봐서 놀랐습니다. 화장실 볼일도 못 보겠고 침대에 눕지도 못할 것 같았습니다. 짐도 못 풀고 안절부절 하다가 은박매트를 깔고 겨우 잤습니다. 그렇게 못 사는 나라는 처음 가봤습니다. 계속 떠오르는 생각은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편한 것들에 익숙해졌습니다. 길거리 쓰레기 더미, 도로 상태, 사람들 모습을 보며, 나 혼자만, 내 나라만 잘 살아서 될 게 아니구나. 생각했습니다. 정토회에서 배웠던 연기법, 인연법이 확 와닿았습니다. 마지막 날 호텔에 와서 뜨거운 물에 샤워하고 다시 4명이 한 방에 잤는데 바닥에서 자겠다고 먼저 나섰습니다. 거부감이 사라져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수원지회 jts거리홍보 연습하면 됩니다 경전 대학 다닐 때만 해도, 꾸준히 공부해서 법사까지 가는 것도 어렵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마음도 나누는데 봉사는 못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정토회에 뼈를 묻겠다고 생각할 정도였고 소임 욕심이 많았습니다. 성지순례에 같이 갔던 도반이 희망 리포터를 해보라고 해서 ‘예’하고 했습니다.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는데, 사실 어려웠습니다. 경전대학생으로 경전반 온라인 돕는이가 됐습니다. 희망 리포터도 하고 불사 소임도 했습니다. 자잘하게 여러 소임을 하다 보니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상태에 도달했습니다. 매일 입술이 터지고 잠도 못 자면서 견뎠습니다.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습니다. 알면 알수록 부족함을 깨달았습니다. 정토회에 이바지하고 싶었는데 자괴감도 들고 화도 났고 우습게 봤던 도반에게 미안했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어서 못 하면 못하는 대로 하면 됩니다. 주변이 다시 보였습니다. 소임을 맡은 모든 도반이 커 보이고 멋졌습니다. 희망 리포터는 회향했고, 돕는이와 진행자는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다행히 물러날 생각은 없습니다.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면 되지 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다행히 욕심이란걸 알고 있고 적당히 들 수 있는 정도면 계속 갈 수 있습니다. 못하니까 스트레스긴 하지만 결국 연습하면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은 수원지회 모둠장소임을 3년째 하고 있습니다. 모둠 활동은 전법, 환경 실천 등을 위주로 합니다. 아이디어는 모둠원 회의를 통해 정합니다. 정토회 봉사자들을 보면 존경스럽고 멋있습니다. 모자이크 붓다는 못돼도 메꾸는 정도만 돼도 훌륭합니다. 혼자서는 어렵고 도반과 부딪히고 돌이키며 배우고 성장합니다. 도반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수원지회 체육대회에서 모둠원들과 당연한 일이 아닌 감사한 일 많은 이별을 견디게 해준 힘은 감사함이었습니다. 일어난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니, 마음엔 감사만 남았습니다. 당연하게 여겼던 일들이 감사로 느껴지고, 공부를 통해 그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과정이 놀랍고 즐겁습니다. 정토회 활동가인 저는 남편의 배려로 존재합니다. 적극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봉사할 때 짐을 실을 수 있도록 차도 사줬습니다. 자주 쓸 일은 없지만 그 마음이 고맙습니다. 정토회에 와서 마음을 돌이키고 편안해지니 남편과 싸우지 않습니다. 남편은 “언젠가 법륜스님을 뵈면 삼배해야겠다.”고 합니다. 제가 화가 나서 돌면 눈빛이 바뀌곤 했는데 지금은 달라졌다며 감사하다고 합니다. 남편은 제2의 부모처럼 저를 대해줬습니다. 본인이 해줄 수 있는 일도 제가 직접 해보게 했는데, 그땐 원망스럽고 얄미웠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저를 키운 것이었습니다. 자녀가 셋인데 못 챙겨줄 때 많아서 항상 미안합니다. 정토회 활동이 애들에게 방해가 될까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잘 살펴주었고 아이들도 스스로 잘 해냈습니다. 성지순례를 다녀올 때도 아이들이 수술하고 입원한 상태였는데 남편이 잘 챙겼습니다. 큰 딸 중학교 졸업식도 못 갔지만 아이는 별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남편은 가끔 “이 활동을 언제까지 할 거냐”고 묻고, 냉장고를 열어보며 잔소리도 합니다.그냥 들을 만하니까 듣는 거라고 지나갑니다. 각자 자기 할 일 잘하고 있고, 저도 제가 할 일을 합니다. 가족에게 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집은 대체로 평화롭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공양간 야채썰기 봉사 만든 것도, 짓는 것도 전부 나 23년 전, 애들이 다 크면 문경 정토수련원에 들어갈 거라고 남편에게 선언했습니다. 남편이 정색하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너랑 살 수 없다’라고 하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남편이 제가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저를 꿈에서 깨웠습니다. 그러고 나니 그동안 법륜 스님 말씀도 잘못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아, 내가 뜬구름 잡는 생각을 하고 있구나.’ 딱 알아차린 순간입니다. 경전 대학에 다니고 일반회원으로 활동할 때는 그냥 법문을 받아적기에 바빴습니다. 요새 배우는 점이 많고 공부에 재미를 느낍니다. 지금 왜 불편한지, 짜증이 나면 왜 그럴까 곰곰히 돌아봅니다. 알아차리는 순간 기분이 나아지고 마음이 편안합니다. 제게는 큰 발전입니다. 소임으로 수행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알아준 것도, 만드는 것도, 짓는 것도 전부 나라는 걸 알았습니다. 전부 내가 하고 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터뷰가 미뤄지면서 취소되는 게 아닌지 염려했습니다. 마음을 내어준 이서후 님께 고맙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면서 한결같이 든 생각은 무엇일까요? 제가 마주치는 일상, 내게 주어지는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회, 가정에서 동료와 가족의 배려가 있습니다. 정토회에는 모자이크 붓다, 도반이 있습니다. 그들과 만나서 행복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글여수연 편집김난희
2000년 전 역사, 오늘의 거울 _대전충청지부 부여 역사 기행
주몽의 첫째 아들 유리의 등장으로 남하해 ‘백제’를 세운 온조의 결단력, 아버지의 안타까운 죽음과 전쟁의 패배 앞에서 깊은 슬픔과 회한을 느낀 위덕왕, 그리고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낙화암의 절절한 사연까지— 약 2000년 전의 이 모든 역사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닌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행동입니다. 맑게 갠 부여에서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나다 새벽부터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150여 명의 회원들이 참석하는 역사 기행인데 괜찮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차량에서 푹 자고 났더니 어느새 도착한 부여. 신기할 만큼 활짝 갠 날씨에 다행스러운 마음입니다. 정토회가 그동안 공덕을 많이 쌓은 덕분일까요.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 차례차례 도착한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부모님과 참석한 어린 학생들도 눈에 띕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햇살보다 맑은 아이들 오전 9시가 되자 좋은벗들 사무국장 이승용 님이 백제의 건국과 발전 그리고 고구려 신라와의 항쟁의 역사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고구려 주몽의 아내 소서노와 아들 비류, 온조는 주몽의 첫째 아들 유리로 인해 주몽의 뒤를 잇지 못하게 되자,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백제의 문화는 고구려와 유사하나 고구려에 대한 경쟁의식이 강했습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국력이 강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하자 도읍을 공주로 옮겼고, 성왕은 좁은 공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이곳 부여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에 심취했네요. 특히 이곳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백제금동대향로를 제작한 비화가 저의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아버지 성왕의 안타까운 죽음과 신라와의 전쟁에서의 패배, 이로 인한 아들 위덕왕의 슬픔과 회한이 고스란히 짐작되니, 어느새 1400년 전 백제의 역사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박물관에서는 회원들이 국보 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 앞에서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향로를 보니 그냥 보는 것과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승용 님의 설명대로 진품 향로가 주는 신비감과 아우라가 대단했습니다.” 맑아지고 있는 하늘 아래 서동요의 시작인 궁남지를 아시나요 두 번째 답사지는 궁궐 근처에 조성되었던 인공 연못 궁남지와 계백 장군의 5,000 결사대 충혼탑입니다. 궁남지 속 그림이 된 정토 회원들 문무왕이 탐낸 궁남지 넓게 탁 트인 궁남지의 전경이 시원스럽게 아름답습니다. 궁남지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어서인지 소풍 온 아이들처럼 참가자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포룡정으로 향하는 발걸음 신라의 문무왕도 태자 시절 백제를 공격하러 이곳에 왔다가 궁남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여 신라에 가서도 비슷한 연못을 만드는데, 그 연못이 바로 월지라고 합니다. 선화공주와 서동 “망해가는 백제의 기틀을 다시 잡은 분이 무왕입니다. 이곳 궁남지에서 살고 있던 용이 여인을 품어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서동입니다. 자라나 무왕이 됩니다. 서동은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신라 진평왕의 딸을 만나기 위해 신라로 가서 서동요를 만들죠. 드라마를 보셔서 내용은 다 아시죠.” 서동요와 관련된 이승용 님의 재미난 해설이 이어지자 회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자주 터졌습니다. 궁남지에 자라난 엄청난 크기의 연잎들 사이를 걷다 보니 이상한 거인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기분도 들었습니다. 궁남지를 지나 조금 걷다 보니 5천 결사대의 충혼탑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가족마저 버린 계백 장군과 5천의 결사대 그리고 이들에 맞선 어린 화랑들. 그들의 마음이 스쳐 지나가니 여러 감정이 밀려옵니다. 나라를 지키고자 가족마저 버린 그들의 비장함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낙화암의 3천 명은 모두 궁녀가 아니었대요 세 번째 답사지는 부소산성입니다. “부소산성은 산 아래 남쪽에 있는 궁궐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으로 지금으로 보면 수도방위사령부 같은 곳입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 맞서 싸웠던 마지막 결전지입니다. 백제 패망의 현장이기도 하고요. 낙화암의 3천 궁녀 얘기가 유명하죠. 근데 궁녀가 3000명이라는 얘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서 삼천이란 삼천대천세계라는 표현처럼 아주 많은 숫자를 뜻하죠. 황산벌과 금강 입구에서 패배하고 나당 연합군이 부여로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아들 부여융을 데리고 공주로 피신을 가버립니다. 백화정 왕을 포함하여 떠날 사람 다 떠나고 이제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성과 어린이 등 약자들 정도겠지요. 이들은 오갈 데도 없고 피신할 데도 없으니까 부소산성 위로 올라갔고 적들이 계속 공격해오고 강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낙화암의 소녀. 그들의 아픔을 위로 하는 걸까. 쫓기고 쫓겨서 막다른 이곳에 이르러 저 아래 짙은 백마강을 내려다 봤을 백성들의 절망과 비탄을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은 결국 약하고 평범한 이들. 씁쓸한 마음입니다. 젊어져라 젊어져라 낙화암 답사 후 참석자들은 잠시 부근에서 쉬기도 하고,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에 내려가서 3년은 젊어진다는 약수를 마시고 젊어져 오기도 했습니다. 의자왕의 가묘 앞에서 마지막 답사지는 부여왕릉원입니다. “이곳은 부여 왕릉원 또는 능산리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왕들의 무덤이 여기 있습니다. 제 뒤편으로 있는 두 개의 무덤은 가짜 무덤입니다. 하나는 의자왕의 무덤이고 하나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무덤입니다. 의자왕은 부여융과 함께 공주로 피신했다가 결국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죠. 기록에 따르면 10만 명에 달하는 백제의 인재들이 노예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하기 전 부여에서는 믿기 힘든 해괴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의자왕은 점쟁이들을 포함하여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 버리고, 아첨하는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삼국사기의 이런 기록들은 의자왕의 무능과 부패를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당시 왕실이 민심을 많이 잃었다는 사실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여러 국민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은 나라를 패망시키고 국민을 고통에 빠뜨린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부여왕릉원 답사를 끝으로 부여 역사 기행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부장 권유숙 님이 정리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대전충청지부장 권유숙 님 “우리 모두 지금 하늘처럼 표정이 환해진 것 같아요. 이렇게 환한 마음으로 집에 가셔서 환하게 쓰이고 도반들과 함께 환하게 정토 활동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행사를 빛낸 우리 모두에게 손뼉을 쳐보겠습니다.” 권유숙 님의 말처럼 회원들 모두가 하루 종일 이어진 답사 일정에도 뿌듯하고 환한 표정이었습니다. “활동가다 보니까 온라인 활동이 대부분이고, 제가 사는 곳의 위치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동안 지부 지회 실천 활동지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이곳에 관광은 왔어도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번 기행에 얼른 참여했어요. 오늘 저랑 인연이 있었던 학생 분도 만나고 그분이 활동하는 모습도 보고, 온라인에서만 만나던 분들도 뵈니 더욱 좋았습니다.” 이번 역사 기행의 실무총괄을 맡은 대전충청지부 지원담당 김영은 님과도 짧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역사 기행 실무총괄, 김영은 님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는 행사라 기획하기 조금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어요. 놀며 배우며 다녀서인지 오늘 하루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마음은 뿌듯합니다.” 오늘 역사 기행의 해설을 담당하였던 이승용 님과 잠깐 인터뷰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리포터 해박한 역사 지식에 놀랐습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이승용 님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자주 오다 보니까 자주 공부하게 되고, 설명해야 하고 그러면서 저도 계속 공부를 하게 되는 거죠. 경주도 많이 다니고, 부여도 예전에 북한 이탈 주민들하고 함께 기행 왔었습니다. 왼쪽부터 실천리포터 김성욱 님, 해설자 이승용 님, 리포터 부여 역사 기행만의 특별한 점이 있을까요. 이승용 님 아무래도 신라와 고구려가 망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유적지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또 그때의 여러 가지 사회 현상 그리고 세 나라의 지도부는 어떻게 판단했는지 그런 기록이 잘 남아 있다 보니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는데 부여가 굉장히 좋은 소재가 되는 것 같아요. 대전지회 세종지회 천안지회 청주지회 충주지회 오늘 하루 우리 곁을 소중히 지키고 있던 백제의 문화유산들을 통해 신라, 고구려에 비해 조금은 관심이 덜했던 600년 백제의 역사와 그 시절 동아시아 국가들의 치열했던 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전쟁 속에서 두렵고 아파했을 선조들의 삶을 떠올려보니,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정토회와 그 속에서 모자이크 조각이 되어 밝게 빛나는 참가자 한 분 한 분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첫 기사인지라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달려와 준 리포터들 덕분에 든든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역사를 배우고, 행동하는 우리는 정토행자입니다. 글김성욱 사진이시안, 대전충청지부 지원장수린, 박미경, 김난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