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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세아니아 강연 두 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오후에 시드니 대학에서 영어 강연이 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하고 숙소에서 아침 공양을 하고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정토행자 표정민 님이 운전하는 차량으로 시드니 대학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오후 2시 40분경 시드니 대학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강연 일정을 주선해 주신 이정재 교수님이 마침 출장 중이라 사전 차담이 없었기에 강연까지 아직 시간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스님은 파란 하늘 아래의 대학 교정을 천천히 산책했습니다.

오후 세 시가 되었습니다. 호주·아시아 두 번째 강연인 시드니 대학 (University of Sydney)에서의 영어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연을 하러 호주에 자주 오긴 하지만, 주로 한국 교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번에 시드니 대학에서 학생들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어서 반가운 마음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큰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후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을 비롯한 신기술입니다. 기후 위기는 인류가 발전을 위해서 그동안 노력한 결과 즉, 지나친 에너지 사용이 불러온 결과입니다. 우리는 더 많이 생산해서 더 많이 쓰는 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고 문명을 계속 진화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개발이 결국 우리 삶의 토대인 지구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과연 이것이 지속 가능한가?' 하는 큰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노동하지 않고 인간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휴머노이드 등에 의해 생산이 점점 자동화될 때, 인간이 생산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사회가 점점 도래하고 있습니다.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로 하는 소득은 기본소득이라 하여 정부가 제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직업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있고, 나머지 다수가 기본소득으로 생활한다고 할 때 과연 인간은 어떻게 일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마도 지금까지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상황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미래에 대해 심리적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아주 원초적인 질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이 일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작은 의문부터 문명에 관계되는 것까지, 우리들이 같이 대화해 볼 소재는 아주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분께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러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과 함께 대화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해보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네 좋을 대로 살아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당황해합니다. 만약 산에 사는 다람쥐나 토끼가 저에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물었을 때 '너 좋을 대로 살아라.' 한다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은 '네 좋을 대로 살아라.' 하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을까요? 그것은 현재 사람들의 삶이 그만큼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의무, 책임 등에 무겁게 짓눌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도 자연의 동물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제 좋을 대로 사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좋을 대로 살았는데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이죠. 내가 선택하고 내가 좋을 대로 살았는데 괴로움이 발생한다면, 그 괴로움의 책임은 나한테 있습니다. 그래서 나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왜 괴로운가? 이것이 괴로워할 만한 일인가?' 이러한 질문은, 붓다가 어릴 때 자신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괴롭지 않은 상태에 이를 수 있을까'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 스트레스가 없는 상태를 인도 말로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니르바나의 상태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요?
붓다는 그 길을 탐구했고 결국 길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길을 안내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신분이 높고 낮거나 경제적 부가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다가, 붓다를 만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로서의 불교와는 많이 다릅니다. 붓다의 원래 가르침은 '수행으로서의 불교'의 모습이며 현재는 아주 소수만 간직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것은 붓다의 원래 가르침인 '수행으로서의 불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의 대화는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물론 이 주제와 관계없는 다른 주제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현장에서는 총 네 명의 질문자가 손을 들고 스님에게 대화를 청했습니다.

불교를 배우고 집착을 끊으려 노력하다 보니, 오히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세상에 대해 냉소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제가 가르침을 잘못 적용하고 있는 건지, 이 정체성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지금 제 삶에 만족하고 행복한데, 꼭 힘들고 엄격한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깨어있음(알아차림)'의 차이는 무엇인가요?
공무원으로 일하며 보람도 컸지만, 과중한 업무와 주말부부, 육아 문제로 인해 일을 그만둘지 고민 중입니다. 제 개인과 가족의 행복을 위해 퇴직하는 것이 세상을 위하겠다는 공적인 꿈을 버리는 이기적인 선택일까요?
“저는 제가 행복한지 알고 싶습니다.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사랑, 증오, 열정, 야망을 경험했습니다. 무언가를 원하기도 했고,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느낀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아주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이 평온하고 충만합니다. 더 이상 어떤 일에도 예전처럼 마음이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예전만큼 생각도 많이 하지도 않고, 감정도 크게 느끼지 않습니다. 고통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그저 흘려보내고 물 흐르듯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문득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회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과 단절된 채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지금의 변화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하고, 이상적인 상태인지 알고 싶습니다.”
“지금 좋은 상태는 아닌 것 같아요. 정말 좋은 상태라면 저에게 물어볼 필요가 없겠죠. (웃음) 뭔가 지금 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끼니까 한번 점검해 보려는 거잖아요.

저는 ‘내생이 있다’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내생이 없다’라고 생각한다는 뜻도 아니에요. 즉 ‘있다’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내 삶에 아무런 장애가 안 된다는 것이죠. 저는 인생에 어떤 의미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살아가면서 할 일이 없다거나 게으르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도 작용 원리가 있습니다. 여기 물건 하나가 있다고 해봅시다. 내가 이 물건을 갖고 싶었는데 실제로 갖게 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이 물건을 잃어버리거나 누군가에게 빼앗기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 물건으로 인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잃어버렸을 때는 그만큼 기분이 나빠지는 거예요. 그런데 이 물건을 가졌을 때 특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잃어버려도 별다른 괴로움이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가졌을 때 기분이 좋았던 만큼 잃었을 때 기분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혼할 때는 기분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래서 이혼하면 기분이 아주 나빠지는 거예요. 아이를 낳았을 때는 기분이 좋지만, 아이를 잃으면 그만큼 괴롭습니다. 돈을 벌었을 때는 기분이 좋아지지만, 돈을 잃으면 그만큼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것은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분 좋은 것을 행복의 기준으로 삼으면 기분 나쁜 불행도 함께 따라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기분 좋은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잖아요. 그러니까 기분이 나빠지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붓다는 바로 이런 마음의 작용을 살펴본 것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이 충족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죠. 이 기분 좋은 상태를 즐거움이라 하고, 기분 나쁜 상태를 괴로움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때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으니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싶으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것을 즐거움의 기준으로 삼으면 괴로움이 생겨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즐거움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즐거움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 즐거움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에요. 이렇게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인도의 전통사상과 불교는 모두 윤회라는 용어를 같이 사용하지만, 그 개념은 전혀 다릅니다. 인도의 전통적인 윤회관에서는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고, 다시 죽었다가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한 윤회는 우리의 마음이 괴로웠다가 즐거웠다가 하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을 말합니다. 인도의 전통사상에서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다시 안 태어나는 것이 목표라면 좀 이상하지 않나요? 불교에서 윤회를 벗어난다는 것은 괴로움이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니르바나’, 즉 ‘열반’이라고 합니다.
같은 행복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여러분은 즐거움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불교에서는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말하는 행복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윤회 속의 행복이지만, 불교에서 말하는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지속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욕망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욕망이 없는 상태도 포함하지만, 욕망이 있어도 상관없어요. 다만 원하는 대로 되든 안 되든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되면 다행이고, 안 돼도 그만이다. 필요하면 다시 한번 해보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렇게 생각하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괴롭지 않습니다. 이럴 때는 행복이 지속 가능합니다.
질문자가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있다면 좋은 일입니다. 다만 욕구를 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즐거움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즐거움이 없는 상태가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미없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즐거우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즐거워해도 돼요. 다만 즐거움 뒤에 괴로움이 올 때 그것을 거부하지 말고, 기꺼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욕구가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가능하면 그 욕구를 좇아가지는 말라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괴로움이 줄어드는 대신 즐거움도 줄어들겠죠. 자연에 사는 동물들은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괴롭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즐거울 것도 없어요. 꼭 즐거워야 잘 사는 것일까요? 다람쥐와 토끼는 무엇이 즐거워서 살아갈까요? 즐거움이 없어도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늘 선택과 책임을 말합니다. 즐거움을 추구해도 됩니다. 다만 그에 따르는 괴로움을 피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괴로움이 싫거든 즐거움도 추구하지 말라는 겁니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내가 지금 돈이 필요하다면 돈을 빌릴 수도 있고, 빌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돈을 빌린다면 이자까지 갚아야 하겠죠. 이자까지 갚기 싫으면 어렵더라도 빌리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공부하러 이곳에 오는 것을 선택했잖아요. 여러분이 예순 살쯤 되어 지금을 돌아본다면, 밥 먹고 공부만 해도 되는 지금이 참 좋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죽을 지경이지요. 학생 때는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좋아 보이고, 결혼해서 사는 사람들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분들은 학생 때가 좋았다고 합니다. 한국에 살 때는 호주가 좋아 보이고, 여기에 살다 보면 다시 한국이 좋아 보입니다.
얼마 전에 북한에서 온 분들과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그분들은 어릴 때 고향에서 동생과 냇가에서 놀던 때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때는 그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지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천금으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좋은 때였다고 하면서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다시 북한 가서 산다면 어떨까요? 한국에서 누리던 자유로움이 그리워지겠죠. ‘아, 그때는 통닭도 마음대로 시켜 먹고, 놀러도 마음대로 다녔는데’ 하면서요. 우리의 삶이 늘 이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가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학생에게는 공부할 때가 가장 좋을 때입니다. 우리는 욕망대로 하려는 마음에 메어 있기 때문에 괴로워집니다. 욕망이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을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대신 그 결과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내 운명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에요. 삶에는 늘 변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예측하기 어렵듯이, 길을 가다가 이쪽으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 저쪽으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관점으로 삶을 바라본다면 조금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님은 강연을 마치고 봉사자들과 단체 사진을 찍은 후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6시에는 숙소에 도착해서 운전 봉사를 해주신 표정민 님께 책을 선물하고 업무를 보고 휴식했습니다.

내일은 시드니에서 자카르타로 이동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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