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10.31. 행복시민 역사 기행, 출국
“짧게 하는 명상이 효과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오늘은 행복시민 역사 기행을 하고 오세아니아 강연 일정을 위해 출국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한 후 오전 8시 오늘 행사를 답사하기 위해 일찍 경주 남산으로 출발했습니다.


며칠 동안 경주에는 비가 왔습니다. 스님은 행복시민을 맞이하기 위해 행사장으로 걸어갈 길의 상태는 어떠할지, 동선이나 이동시간은 어떠한지 등을 확인했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오세아니아 강연을 위해 출국하는 날이기도 했기에 행사를 마치면 기차역까지 급히 이동할 수 있는 코스까지도 함께 둘러보았습니다.

오전 10시, 행복시민 역사 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550여 명의 행복시민이 무열왕릉에 모여있었습니다. 사회자의 활기찬 진행으로 각 지역의 행복시민들이 소개되었습니다.


스님과 함께하는 행복시민 역사 기행에 참여하기 위해 해외에서 비행기로 이동하여 오늘 자리에 참석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행복시민들의 열렬한 환호와 함께 스님의 말씀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행복시민 여러분. 그런데 제가 이 자리에 있으니, 해의 방향 때문에 여러분의 얼굴이 잘 안 보이네요. 자리도 제가 앉은 곳이 높다 보니, 여러분들은 뒤로 넘어가겠어요. (웃음) 저와 여러분들의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모두 뒤로 앉아주세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과 뒷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탄성과 환호 속에서 스님은 야트막한 곳에 자리를 재정비하고, 무열왕릉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행복시민 여러분 경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경주는 제가 나고 자란 곳입니다. 남산 골짜기부터 시내 구석구석까지 모르는 데가 없을 정도입니다.(웃음) 오늘 여러분을 경주에 초대한 것은 무엇보다 가을 나들이의 의미가 큽니다. 그렇다고 행복시민들이 그저 놀러만 갈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통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가을 나들이 삼아 경주 역사 기행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역사 기행의 주제는 ‘평화와 통일’입니다.

신라는 어떻게 민족사의 주류로 성장했는가

우리 민족의 시원은 환인의 한나라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뒤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 해모수의 부여, 주몽의 고구려, 대조영의 발해로 이어집니다. 동부여, 고구려, 백제는 모두 부여를 계승한 나라들이에요.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는 부여의 정통성을 누가 계승하느냐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습니다. 광개토대왕비의 내용을 보면, 만주 벌판을 정벌한 기록이 많을 것이라고 예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록의 대부분은 백제의 성을 얼마나 빼앗았는지에 관한 내용이 제일 많습니다.

신라가 왜를 물리치는 데 고구려가 도움을 준 것도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우리 민족사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나라들임에 비해, 신라는 우리 민족사의 주류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의 작은 부족 사회로부터 출발했고, 광개토대왕 때만 해도 가야의 침략을 받고 나라가 멸망할 만큼 세력이 미약했습니다. 고구려가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도와준 것도 당시 신라가 고구려에 조공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신라가 결국 우리 민족사의 주류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역사적 사실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당시 세계 문명에 한참 뒤처져 있던 변방의 작은 나라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 민족사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통일의 주역까지 되었을까요? 오늘은 이 문제를 중심으로 경주를 둘러보겠습니다.

여섯 마을의 연합에서 출발한 신라

역사 기록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박혁거세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삼국 가운데 신라가 가장 먼저 세워진 셈입니다. 그런데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웠다는 것은 서라벌 일대에 살던 여섯 씨족사회가 박혁거세를 부족장으로 추대했다는 뜻입니다. 그 세력이 점차 커져 신라라는 왕조를 이루었으나 처음부터 왕국의 형태를 갖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규모로 보면 오늘날 경주 일대의 여섯 씨족이 연합한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울산이나 영천, 포항도 포함하지 않는 경주 벌판에 자리 잡은 작은 부족 국가였던 것입니다.

신라가 실제로 고대 왕국으로, 우리가 말하는 삼국의 한 축이라고 할 만한 세력을 갖춘 것은 적어도 6세기 이후입니다. 그전까지는 아주 작은 나라였어요.


가야와 왜의 침공으로 위기에 놓인 신라

서기 400년경, 제17대 왕인 내물왕이 재위하던 때에는 가야와 왜의 침입으로 신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지금의 대한해협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 남해안에는 가야가 있었고, 그 너머에는 왜가 있었습니다. 당시 가야는 신라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특히 철기 문명이 아주 발달해 있었죠. 가야와 왜의 연합 공격으로 신라는 거의 멸망할 위기에 처했으나, 고구려가 신라에 5만의 군대를 파견하여 가야와 왜의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가야는 점차 쇠퇴했고 반대로 신라는 힘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신라의 부흥은 법흥왕 때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를 대략 세 시기로 나누어 보면, 신라가 영토를 확장해서 그 영역을 세 배 정도 넓힌 ‘법흥왕, 진흥왕의 시기’, 넓어진 영토를 유지하고 다스리는 데 힘쓴 ‘진지왕, 진평왕의 시기’,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막아내고 마침내 삼국 통일을 이룬 ‘선덕여왕, 진덕여왕, 무열왕, 문무왕의 시기입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에 많은 영토를 빼앗겼으니, 신라를 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당시 신라는 두 나라의 침공을 받아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위기에 몰린 신라가 선택한 전략이 바로 ‘당나라와의 동맹’이었습니다. 그동안 방어 중심이었던 국방 정책을 공격 중심으로 바꾸고, ‘삼한일통’이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삼국 통일을 추진한 것입니다. 결국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해서 문무왕 때 삼국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전통적인 역사관에서는 이렇게 ‘신라의 삼국 통일’로 이해해 왔지만, 사실은 고구려가 멸망한 뒤 발해가 세워졌으니, 지금 시각으로 보면 ‘삼국 통일’보다는 ‘남북국 시대’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입니다.


가야와의 경쟁 대신 통합을 선택한 신라

앞서 말한 것처럼, 신라는 제23대 왕인 법흥왕 때부터 국력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가야의 침공으로 나라가 멸망할 뻔했으니, 신라 내부에서는 ‘가야에 복수하자’라며 공격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가야 안에도 신라에 맞서 저항하자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양쪽의 강경 세력이 대치하면서 다시 전쟁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신라의 젊은 지도자들 가운데는 생각이 다른 이들도 있었습니다. 백 년 전에는 가야가 원수였지만, 이제 신라의 경쟁 상대는 고구려와 백제이지 이미 세력이 약해진 가야가 아니라는 것이었죠. 굳이 가야와 전쟁을 벌여 국력을 소모할 필요가 있느냐는 주장이었어요.

오늘날 대한민국도 북한과 싸워 이기는 데 국력을 소비하는 것이 나을까요, 중국이나 일본과 경쟁할 대비책을 세우는 것이 나을까요?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산업 기반이 모두 파괴된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남겠습니까? 그사이에 중국이 우리를 앞서가겠지요. 눈앞의 승패만 보면 전쟁이 유리할지 몰라도 주변 정세 전체를 보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라의 젊은 지도자들도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가야와 전쟁하는 데 힘을 쏟기보다 달라진 국제 정세에 맞춰 미래를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야의 젊은 지도자들 역시 ‘신라와 싸워 이기기 어려우니, 우리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평화적으로 통합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시대든 강경 세력이 주도권을 잡기 마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와 가야의 지도자들은 전쟁 대신, 미래 정세를 내다보며 평화적 통합이라는 새로운 길을 모색했던 것입니다.

신라, 가야와 평화 통합을 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다

그렇다면 가야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가야의 김수로왕은 왕위에 오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에서 배를 타고 온 아유타 공주와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이때 장유화상이라는 스님도 함께 들어와 불교를 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야는 처음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불교 국가였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불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가야는 신라와 평화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첫째는 가야의 왕족을 신라 왕족과 같은 지위로 대우해 달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가야의 신앙인 불교를 신라에서 공인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통합하려면 그들의 지위와 신앙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죠. 이 문제를 두고 신라 조정에서는 큰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젊은이들이 먼저 움직였습니다. 불교가 금지된 나라에서 공개적으로 흥륜사라는 절을 지은 것입니다. 보수 세력이 크게 반발하며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법흥왕의 측근이었던 젊은 왕족 이차돈은 ‘나라가 발전하고 국민이 행복해지려면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라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고 순교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이차돈은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이야기처럼, 자신의 말과 신앙이 진실이라면 기적을 보여 달라 했다고 합니다. 이차돈의 목을 베자 흰 피가 솟구치고 하늘에서 흙비가 내리는 기적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저들이 무엇을 잘못했느냐’며 민심이 뒤집혔다고 해요. 결국 반대하던 보수 세력이 물러나면서 528년 신라는 불교를 공인하게 되었고, 이렇게 이차돈의 순교가 통합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입니다.

마침내 532년, 신라와 가야는 평화적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신라는 가야 왕실과 혼인을 맺고 김해를 제2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비록 반발한 일부 세력도 있었지만, 이 평화적 통합을 통해 신라는 가야의 우수한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고 김유신을 비롯한 가야 왕실의 강력한 군사 인재를 확보했습니다. 신라보다 앞선 문명과 인재를 끌어안으면서 신라는 비약적인 발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한강을 차지하며 삼국의 강자로 떠오르는 신라

법흥왕의 뒤를 이은 진흥왕 때, 중국의 북위가 분열되면서 국제 정세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북쪽이 어지러워지자, 고구려는 북방에 군사력을 다시 배치해야 했지요. 이 틈을 타 신라와 백제가 힘을 합쳐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를 밀어내고, 백제는 한강 하류를 신라는 한강 상류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그러자 고구려가 신라에 은밀한 제안을 해왔습니다. ‘백제의 평양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신라가 점령한 땅을 모두 그대로 인정해 주겠다’라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땅을 빼앗아도 전쟁이 끝나면 다시 돌려줘야 하는데, 뺏은 땅을 상대편이 먼저 인정해 주겠다고 하니 신라로서는 거절하기 어려운, 괜찮은 제안이었습니다.

결국 신라는 백제와의 약속을 깨고 평양성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백제가 신라를 공격했지만, 신라는 백제군을 격퇴하고 한강 하류까지 몽땅 독차지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신라의 영토는 북쪽으로 함경도까지 크게 넓어져 마운령과 황초령 순수비를 세웠고, 한강 유역에는 북한산 순수비를 세웠습니다. 금관가야와 통합하고 대가야를 무너뜨려 낙동강 유역을 얻은 데 이어, 한반도에서 가장 비옥한 한강 유역까지 거머쥔 것입니다. 이로써 신라는 약소국에서 벗어나 삼국 가운데 강력한 한 개의 국가로 떠올랐습니다.

신라가 이렇게 강성해지자 위협을 느낀 고구려와 백제가 다시 손을 잡았고, 왜와 돌궐까지 가세해 신라를 사방에서 포위했습니다. 고립된 신라는 이 위기를 뚫기 위해 바다 건너 수나라와 손을 잡으며 새로운 활로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진지왕과 진평왕이 진흥왕 때 넓혀 놓은 영토를 빼앗기지 않고 지키려고 약 50년의 시간을 보낸 것입니다.


선덕여왕의 즉위와 김춘추의 등장

진지왕이 폐위된 뒤에는 큰 조카가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진평왕입니다. 진평왕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데 아들이 없었어요. 신라는 부모가 모두 왕족이어야 하는 엄격한 골품제 사회였는데 왕위를 이을 성골 남성이 아예 없었던 것입니다. 진평왕의 딸과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 사이에서 태어난 김춘추가 있었지만,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상태였습니다. 결국 성골 혈통에 남자가 없는 상태에서 진평왕의 딸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입니다.
하지만 여성이 왕이 되었다는 이유로 나라 안팎에서 반란과 시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기에는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아주 심했지요. 이때 진골로 밀려나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김춘추가 젊은 지도자로서 선덕여왕을 보필하며 실질적인 국정을 이끌었습니다.

선덕여왕의 리더십과 당나라와의 전쟁을 끝낸 삼국 통일

여성이 왕위에 오르자, 주변 나라들이 신라를 얕보았습니다. 당 태종도 신라 사신에게 ‘너희 나라는 어찌 남자 가운데 왕이 될 만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여자가 왕이 되었느냐?’ 하며 조롱했지요. 백제와 고구려의 침공도 더욱 잦아졌고, 내부적으로도 왕권을 둘러싼 갈등과 반란이 아주 심했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여러 중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후세 사람들은 삼국 통일을 이룬 주역으로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을 꼽지만, 사실 이들은 선덕여왕이 즉위했을 당시 젊은 지도자로서 외교관이나 장군을 맡아 국정에 참여하며 왕을 도왔던 인물들입니다. 따라서 삼국 통일의 든든한 기반을 마련해 준 선덕여왕의 리더십도 반드시 재평가해야 합니다.

재미있는 점은, 선덕여왕을 비웃었던 당 태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고종의 부인으로 당나라에서도 권력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측천무후’였다는 사실입니다. 여성이 왕이 되었다는 이유로 역사에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실제로 당나라의 정치적 안정을 이끌었고, 전쟁을 더 이상 이어가는 것이 무익하다고 판단해 신라와 평화협정을 맺은 이도 측천무후였습니다.

신라는 바다에서는 기벌포 전투, 육지에서는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하며 끈질기게 맞섰습니다. 마침내 676년 한반도에 주둔하던 당나라 군대를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영토를 확정했습니다. 선덕여왕 대에 발탁되어 훈련된 인재들이 끝내 당나라와의 오랜 전쟁을 매듭짓고, 신라를 명실상부한 한민족사의 주류로 우뚝 세운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역사는 약 150년에 걸친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 50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평화적으로 통합하는 일이 얼마나 큰 시너지 효과를 내는가’ 하는 점입니다. 신라는 가야와 전쟁을 벌이는 대신 평화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인재와 영토, 앞선 문명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마지막 50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내부 통합도 중요하지만, 외교 역시 매우 중요하다’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의 실책은 무엇이었을까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가 성장하던 시기에는 중국 대륙이 여러 나라로 분열해 있었지만, 고구려 말기에는 수나라와 당나라에 의해 통일되었습니다. 국제 정세가 바뀌었는데도 고구려는 과거의 자존심만 내세우며 끝까지 싸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국력은 계속 약해졌고, 내부의 불만을 누르기 위해 연개소문의 강압적인 독재에 의존하게 되었지요. 결국 독재자가 죽자, 아들끼리 권력 다툼을 벌이면서 당나라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멸망하였습니다. 반면에 신라는 국제 정세를 살펴 강성해진 중국과 손을 잡고 나라를 발전시키는 길을 택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 역시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거나 통일을 이루려면 세 가지가 필요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남한 내부의 국론 통일이고, 둘째는 남북 간의 협력이며, 셋째는 중국,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국의 동의와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이루어져야 평화와 통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제가 오늘 하루 종일 이야기할 내용을 대략 다 말씀드렸습니다. (웃음) 자, 그러면 이제 한 바퀴 둘러보겠습니다.”

스님은 행복시민들을 인솔하여 김유신장군묘로 이동했습니다.




"자, 어디 앉든지 저만 보고 앉으면 돼요. (웃음)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김유신 장군 묘입니다. 김유신은 신하인 사람 중에 왕의 칭호를 받은 역사상 유일한 사람이에요. 우리가 오늘 김유신 장군 묘에 와서 단순히 옛날 묘 하나 둘러보고 가는 게 아니에요. '저 작은 신라가 어떻게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는가?' 이걸 봐야 합니다.

김유신의 탁월한 군사력과 고도의 정치적 역량

김유신이라는 인물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독특한 사람이에요. 신하 신분인데 공적이 워낙 크다 보니까 '각간'에서 '대각간', 나중에는 '태(太)' 자를 더 붙여서 '태대각간'이라는 전무후무한 벼슬까지 올랐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후대에 가서는 '흥무왕'이라고 신하가 왕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신하가 죽어서 왕으로 추존된 건 김유신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여기 묘를 보면 규모는 신하의 무덤이라 작지만, 십이지신상과 둘레돌을 갖춘 완벽한 왕릉의 형태를 띠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김유신이 단순히 칼 잘 쓰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올랐느냐?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김유신은 망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이에요. 신라 진골 귀족들 틈바구니에서 출신 성분의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그런데 김춘추와 격구를 하면서 일부러 옷자락을 밟아 찢고, 동생 보희와 문희를 김춘추와 혼인시켰잖아요. 선덕여왕이 남산을 순행할 때 연기를 피우는 행위를 벌여가며 기어이 여동생을 왕후 자리에 앉혔습니다. 이게 요즘 관점으로 보면 이상해 보일지 몰라도, 가야 왕실과 신라 왕실을 혈연으로 묶어서 권력의 분열을 막고 신라 내부의 왕위 계승 분란을 잠재운 고도의 정치적 결합이었던 거예요.

내부적으로는 그렇게 국론 분열을 막아 권력을 하나로 뭉치고, 밖으로는 뛰어난 군사력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당나라가 신라를 인정하지 않고 지배하려고 하니까, 늙은 몸을 이끌고 나당전쟁의 진두지휘를 맡아 당나라와 맞서 싸울 정도로 당당했단 말이에요. 외세에 비굴하게 굴지 않고 자기들의 권익을 지켜냈습니다.

우리가 김유신 장군에게서 배워야 할 핵심은 바로 이겁니다. 내부의 분열을 막아내는 탁월한 정치적 지혜, 그리고 외세 앞에서도 결코 굴복하지 않았던 당당한 자주성. 이 두 가지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그 보잘것없던 작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유신 장군에 대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부를 품어내는 지혜와 스스로의 중심을 잃지 않았던 김유신 장군의 기개와 당당함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전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자, 설명 끝났으니 이제 저 계단에서 500명 단체 사진을 딱 한 장 찍겠습니다. 계단 빈틈없이 촘촘하게 서야 다 나와요. 사진 찍고 내려가서 흥무공원에서 점심 먹고 사천왕사지로 이동하겠습니다.“

김유신장군묘에서 다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점심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도 준비해 온 도시락으로 점심 공양을 하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신문왕릉을 산책하며 고즈넉하고 조용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후 3시, 사천왕사지에서 다시 행복시민을 만났습니다.

호국(護國)과 평화가 담긴 자리, 사천왕사지

”이곳이 바로 사천왕사지입니다. 절이 들어서기 전 신라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일곱 군데의 성스러운 곳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신들이 노닌다는 ‘신유림’이에요.


당나라 군사가 쳐들어온다고 하니까, 신들이 있는 이곳에 사대천왕을 모시고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자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하는 방식을 ‘문두루비법’이라고 합니다. 절을 지을 겨를이 없어서 임시로 풀과 짚으로 절을 짓고 짚으로 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비법을 행했더니, 서해에서 폭풍이 일어나 배가 다 침몰해서 1차 공격을 막아냈다고 합니다. 3년 뒤에 당나라가 또 쳐들어왔을 때도 스님들이 다시 문두루비법을 행해서 막았다고 해요. (웃음) 이렇게 이 절은 나라를 지키는 호국사찰입니다.

저기 대웅전 터 뒤에 가보면 돌마다 구멍이 뚫려 있는 주춧돌이 딱 열두 개씩 있어요. 문두루비법을 행할 때 신상을 만들어 꽂은 자리로 추정되는 유적입니다. 다른 어떤 절에도 이런 유적은 없고 여기만 남아 있어요.

2017년도 한반도에 전쟁의 위험이 있었을 때, 우리도 광화문에서 집회도 하고 여기에서 ‘전쟁 방지 문두루비법’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쨌든 전쟁은 결과적으로 없었단 말이에요. (웃음) 이곳은 그렇게 나라를 지키고 전쟁을 막아 평화를 이루고자 했던 간절한 기도가 담긴 자리입니다.“

"자, 이제 저 낭산 위에 있는 선덕여왕릉으로 올라가서 즉문즉설을 하겠습니다. 길이 좁으니 제가 앞장서서 대웅전 터와 문두루비법 터를 둘러본 뒤, 네 줄로 맞춰서 따라오세요. ”

스님은 행복시민을 인솔하여 대웅전터와 문두루 비법 터를 둘러보았습니다.


스님을 따라 550여 명이 사천왕사지 터를 둘러보는 모습은 언덕 굴곡에 따라 마치 거대한 물결이 움직이는 듯 장관이었습니다.


스님과 행복시민은 오늘의 마지막 여정인 선덕여왕릉으로 이동했습니다.



선덕여왕릉을 둘러 550여명이 자리에 앉았습니다. 즉문즉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행복센터 회원들이 앞으로 나와 장기자랑을 했습니다.

쑥스러운 미소와 어색한 구호로 모두 한바탕 즐겁게 웃고 가벼운 마음으로 즉문즉설을 청했습니다.

오늘은 총 일곱 명의 질문자가 있었습니다.

  • 저는 불안증과 트라우마 때문에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는 잠잘 생각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 짐조차 쌀 수가 없습니다. 이런 질환과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제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인정하고 마주해야 할까요?

  • 세상은 AI 기술 등으로 빠르게 변하는데, 저는 배움의 열정도 예전 같지 않고 안주하는 것 같아 자꾸 뒤처질까 봐 불안합니다. 지금의 편안함 속에서도 계속 고개를 드는 이 조급함과 두려움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 지난주에 서른두 살 된 아들 집에 갔다가 우연히 항우울제 약병을 보고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성인이 된 아이에게 잔소리가 될까 봐 지켜만 보고 있는데, 과거 상처를 준 부모로서 지금처럼 가만히 두는 게 맞을까요?

  • 두 달에 한 번 겨우 나가는 힐링 모임인데, 한 친구가 매번 남편 욕과 시댁 불만만 끝없이 쏟아내서 돌아오면 몸과 마음이 너무 지칩니다. 모임은 계속 나가고 싶은데, 이 친구와의 불편한 관계를 어떤 마음으로 풀어가야 할까요?

  • 평소엔 잘 자는데 일 년에 서너 번씩 회사 일이나 잡생각이 꼬리를 물어 꼬박 밤을 새우고 출근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찾아오는 이런 불면의 밤엔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할까요?

  • 경계선 지능과 정서적 미숙함이 있는 딸이 21개월 된 아기를 방치하고 위험하게 다루는 것 같아 곁에서 지켜보는 제 가슴이 타들어 갑니다. 아이와 딸을 위해 친정엄마인 제가 어디까지 개입하고 어떤 태도로 이 가정을 지켜봐야 할까요?

그 중 명상에 대해 질문했던 마지막 질문자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

”행복 시민 모임에서 명상을 배운 뒤 매일 잠들기 전 1분에서 5분씩 호흡을 지켜보며 연습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짧게 하는 명상으로도 효과가 있는지, 명상을 할 때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고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명상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하기 때문에 1분을 해도 명상이고 5분을 해도 명상인데, '수행'이라는 관점에서의 명상은 '자기 알아차림'이에요.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알아차리는 것이죠.

다시말해, 내가 약간 기분이 나쁘다 하면 기분 나쁜 거를 금방 알아차리고, 몸에 열이 난다 하면 열이 남을 알아차리고, 발끝에 약간 찬 기운이 돈다면 그 감각을 알아차리고, 느낌을 알아차리고, 자기 생각을 알아차리고,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즉, 알아차림이 명상의 가장 핵심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평소에 정신없이 살기 때문에 알아차림이 없어요. 그래서 모든 동작을 멈추고 눈을 감고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알아차리거나 또는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는 건데, 이걸 연습 하려면 한 번 할 때마다 한 30분씩 하루에 열 번, 열흘은 해야 '아, 내 마음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3분, 5분 명상하는 것으로는 알 수 없어요. (웃음). 요즘 현대인들이 너무 정신없이 사니까 ‘하루에 1분이라도 내 자신을 살펴보자’ 하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면 돼요. 그런 의미로 1분도 괜찮아요. 눈을 딱 감고 자기 상태, '내 상태가 지금 어떠냐? 아, 내가 지금 불안하다. 아, 내가 지금 껄떡거리는구나.' 이렇게 자기 상태를 잠시 점검하는 정도로만 해도 도움이 됩니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30분씩 하루에 열 번, 열흘간 하면 내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알거예요. 그래서 ‘위빠사나 명상’은 열흘 코스(10-day course)'가 최소 코스예요. 그 정도 해야 이게 자기 점검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명상만 하면 사람들이 힘들어하니까 4박 5일짜리도 만들고, 2박 3일짜리도 만들고, 하루짜리도 만들고, 10분짜리도 만들고, 5분짜리도 만들고, 3분짜리도 만들고, 1분짜리도 만드는 거예요. (웃음) 그러면 그 1분짜리의 효과는 무엇일까요? 1분이라도 잠시 나의 숨 고르기를 해 보는 겁니다. 잠시라도요.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공동의 울력을 하다가 1분 멈춤을 적용합니다. 밭을 매면 정신없이 매잖아요. 그러다가 30분이 되면 종을 '땡~' 칩니다. 그러면 아무리 급한 일을 하더라도 딱 멈춥니다. 잠시 1분간 육체적·정신적으로 멈추고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우리가 보통 어떤 일을 할 때 '정신없이 했다.' 이렇게 말하잖아요, 좋게 말하면 좀 집중했다는 뜻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기 점검이 안 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일과를 하다가도 이 두 가지를 멈춰야 해요. ‘동작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아,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하는 생각을 멈추고, 동작을 멈추고 잠시 이렇게 있으면 내 상태, '아,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내가 조급하구나, 내가 지금 집착하고 있구나, 내가 지금 들떠 있구나' 이런 게 점검이 됩니다. 그렇게 하루에 몇 차례 점검하면 정신 차리고 사는 쪽으로 가는 데 조금씩 도움이 됩니다.


생각이 멈춰지지 않는다는 걸 질문자가 알았잖아요. 자기가 생각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았잖아요. 그럼 자기가 생각이 그렇게 많으면 남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올까요? 안 들어올까요? (안 들어옵니다) 자기가 생각이 많다는 건 자기 생각대로 살지 남의 말이 귀에 안 들어온다는 거예요. 남편이 뭐라고 하든 애가 뭐라고 하든 잔소리처럼 들리는 겁니다.

'아, 생각이 멈춰지지 않는구나.' 이 말은 '내 생각에 빠져 있구나. 그래서 남이 말하면 소리는 들리지마는 내가 그 말의 뜻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구나. 내가 남편하고 이야기하거나 다른 사람하고 소통이 잘 안 되겠구나' 하고 자기 점검이 돼야 해요.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나는구나, 멈춰지지 않으면 멈춰지지 않는구나'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그걸 그냥 알 뿐이에요. 그게 명상입니다.“

오늘 시드니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오후 네 시에는 선덕여왕릉에서 출발해야 했습니다. 스님은 즉문즉설을 마치고 곧바로 경주 기차역으로 이동해서, 밤 9시 50분 비행기에 탑승했습니다.

내일부터는 오세아니아 순회강연이 시작됩니다. 올해 마지막 해외 순회강연입니다.

전체댓글 0

0/200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