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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명예결사행자인 실상화 김동윤 보살님의 추도식에 참여하고, 평화재단에서 여러 사회 인사들과 미팅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정진과 명상을 하고, 원고 수정을 하였습니다.

오전 7시부터 조찬이 있어 스님은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공양간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조찬은 조재국 교수님과의 시간이었습니다. 공양간에서 식사를 마친 후 평화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더 나누었습니다. 조재국 교수님은 한국의 대인지뢰 전문가로, 평화나눔 상임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스님과의 두 번째 만남입니다. 시리아 내전으로 시리아 곳곳에 매설된 지뢰로 많은 인명 피해가 있어 시리아 지뢰 제거를 위해 한국에서 어떤 지원이 가능한지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하였습니다.

회의를 마친 후 JTS 사무국장과 함께 현재 캄보디아에서 짓고 있는 여학생 기숙사와 고등학교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준공식 날짜에 대해서 잠시 의논을 하였습니다.
오전 10시, 스님은 3층 설법전에서 실상화 김동윤 보살님의 추도식에 참석하였습니다.

실상화 보살님은 1991년 스님의 강연을 처음 들은 것을 계기로 정토회와 인연을 맺은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행과 전법, 보시와 봉사의 길을 걸어온 정토회 결사행자입니다. 지난 9월 13일, 향년 98세로 별세했습니다.

당시 스님은 북미 순회강연 중이어서 문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실상화 보살님의 49재 중 3재를 맞아 정토행자 결사행자장으로 추도식이 봉행되었습니다. 며칠 전 미국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스님도 오늘 추도식에 참석해 고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습니다.

먼저 고인의 영정 앞에서 공동체 지부법사인 대광법사님이 분향과 헌화를 했습니다. 이어 청혼과 다례가 진행되고, 상주는 영가 전에 차를 올렸습니다.

이어서 추모 영상을 통해 실상화 보살님이 걸어온 삶의 발자취를 함께 돌아보았습니다. 영상에서는 보살님의 생전 육성으로 스님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서울에 아주 훌륭한 분이 있다고 해서 내가 그 길로 홍제동 정토포교원에 찾아가 청주에 와서 법문을 해 주십사 스님께 요청했고, 금강회관에서 금강경 강의를 시작했어요. 내가 거기에서 법문 듣는데, 세상에 저런 법문도 있구나.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어요. 내가 부처님 가르침이 너무 좋아서….”
영상 속 고인의 모습에서는 정토회에 대한 깊은 애정과 스님을 존경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이어 백일출가생들의 추모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생전에 고인이 좋아했다는 <고향의 봄>과 추모의 마음을 담은 <바람의 노래>가 설법전에 잔잔히 울려 퍼졌습니다.

영상과 노래를 들으니 보살님이 더욱 그리워졌습니다. 보살님을 떠나보내는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눈물을 훔치는 대중도 있었습니다.

대중은 다 함께 해탈발원문을 읽고, 청법가와 청법삼배로 스님께 천도 법문을 청했습니다. 상주는 보살님의 영정과 위패를 스님 앞에 모셨습니다. 스님은 영정을 바라보며 마치 실상화 보살님과 대화를 나누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법문을 시작하였습니다.


“실상화 김동윤 영가시여! 오늘 영가의 49재 중 3재를 맞이해서 영가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과 손자, 가족 일동, 그리고 영가님을 사랑하고 추모하는 우리 정토회 청주지회 대중 일동과 정토회 법사님들, 임원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영가님을 추모하고, 왕생극락을 발원하면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기도 발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가님의 모습이 이제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목소리가 귀에 들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조금 전 추모 영상을 통해 지난 영가님의 모습을 보며 진실한 마음을 느꼈습니다. 이처럼 영가님께서는 영가님을 추모하고 그리워하는 우리 곁에 지금 함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새로운 불교 운동을 시작할 때 주로 젊은 청년들을 모아서 그들을 위해 법문을 하고 교육과 훈련을 하면서 부처님의 바른 법을 이 땅에 실현하자고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고,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각종 차별에서 벗어나도록 돕고, 여러 사회적인 모순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르게 알리기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많이 만들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 강의를 들으면서 불법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저보다 나이가 어렸습니다. 그때 당시에 기성세대라고 불리는 분들, 특히 전통적 불교 신앙이 있는 분들은 주로 큰 사찰이나 유명한 스님들을 찾아가 법문을 듣고, 복을 빌기를 원했습니다. 그런 시기에 제가 머리를 기른 모습으로 법사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오직 부처님 법만 보고 귀의하는 마음을 내신 분 중 첫 번째가 자재법사님이셨습니다. 정토회에 처음으로 저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 참여한 경우였습니다. 그때가 1984년쯤이니까, 제가 아마 30대 초반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소림선원에서 나와서 비원 앞에다가 작은 공간을 빌려서 바른 불교 강의를 했는데, 너무 초라해 보이는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오지 않았습니다. 설령 오더라도 스님도, 교수도 아닌 젊은 사람이 법문하니까 대부분 금방 왔다가 가버렸는데, 그중에서 강의를 듣고 귀의하는 마음을 낸 분이 광음법사님이셨습니다. 그렇게 학생이나 청년 중심이었던 정토회에 소위 전통적 신앙을 가진, 저보다도 나이가 훨씬 많은 일반 신자분들이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독특하신 분이 오늘 추도식의 주인공인 실상화 보살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분은 어떻게 소문을 듣고 아셨는지, 제가 홍제동에 정토포교원을 열어서 법회를 하고 있을 때 청주에서 올라오셔서 법문을 해 달라고 요청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청주 금강회관에서 법문하게 된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저보다 한 25살이나 많은 부모 세대가 되시는데, 저의 겉모습이나 형상에 집착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제자의 마음을 내서 진실하게 법에 귀의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청주 금강회관에 가서 금강경 강의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강의 내용을 깨알같이 다 메모로 기록하셨습니다. 어쩌면 녹음한 것보다 더 잘 기록해 놓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이상 금강회관에서 법문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집을 내어 법회를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몇 번 법회 장소를 옮기다가, 드디어 청주 법당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스승을 따르는 데는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실상화 보살님은 참으로 특이하고 맑은 분이셨습니다. 본래 사회 개혁적인 의식을 지닌 분이 아니었음에도, 정토회의 사회적 실천 활동에 추호의 거부감도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아주 맑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지요. 제가 머리를 기르고 있든 깎고 있든, 자신보다 훨씬 어린 법사를 따르는 것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부처님의 법만 바라보며, 마치 하얀 천에 물감이 저절로 스며들듯 있는 그대로 가르침을 받아들이신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수행을 하다 보면 스승을 믿고 따르다가도 때로는 실망하여 멀어지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면서 그러다 다시 믿고 따르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보살님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런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저를 만나기 전, 이미 당대의 큰스님들과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신행 활동을 해 오셨음에도, 정토회에서 불법을 처음 만난 사람처럼 어떤 비교나 의심 없이 온전히 가르침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니 저를 만나 비로소 진실한 수행자가 되었다기보다, 이미 진실한 마음을 낸 수행자로 계시던 중에 저를 만나 함께하게 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정으로 얽힌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가까이 있든 떨어져 있든, 곁에 있든 없든 그 믿음은 늘 한결같고 진실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법을 바르게 이해한 수행자는 생을 마치고 새로운 생을 받을 때 오고 감이 없다고 합니다. 굳이 옛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즉시 환생’하는 것입니다. 수행의 깊이에 따라 하루 만에 새로운 생을 받는 것을 ‘상품중생(上品衆生)’, 일주일 만에 받는 것을 ‘중품중생(中品衆生)’, 49일 만에 받는 것을 ‘하품상생(下品上生)’이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품상생에 해당하기에 우리가 49재를 지내는 문화가 생겨난 것입니다. 보살님은 능히 상품(上品)에 드는 수행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실 49재를 굳이 지낼 필요도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49재라는 문화적 전통이 있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일종의 안전장치라 여겨 이렇게 49재를 올리는 것입니다. 마침, 49재 때는 제가 해외 일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어, 최소한 중품중생은 되실 분이기에 오늘 3재에 추모제를 겸하게 되었습니다. 살아 계실 때 보살님께 법사 수계를 해드리려 했으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보살님 영전에 정토회 지도법사로서 법사로 추서하고자 합니다. 49재 때는 법사 수계첩을 올려, 비록 사후이지만 보살님을 정토회 법사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정토회 대중들은 보살님이 참 좋고 착한 분이셨다는 것은 잘 알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흔들림 없는 경지였는지는 잘 모를 수 있습니다. 마음의 흔들림이 없다는 측면에서 보면, 정토회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참된 수행자이셨습니다. 비록 여성의 몸, 할머니의 몸, 재가 신자의 몸으로 사셨지만, 겉모습만 보지 마시고 이분이 얼마나 위대한 수행자였는지를 여러분이 꼭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고 가사를 수했다고 해서 다 수행자가 아닙니다. 마음의 흔들림이 없어야 수행자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보살님은 부처님 당시로 치면 최고 수준의 득도를 하신 분에 속합니다. 평생을 가정주부로, 어머니로, 아내로 사셨기에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절에 다니는 착한 할머니’ 중 한 분으로 보였겠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위대한 수행자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든, 어떤 역할과 지위가 주어지든, 수행자는 과연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추모제를 통해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정토회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정토회가 그리고 있는 정토행자의 모습, 수행자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 말입니다. 어떤 재능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적 관점에서 볼 때 가장 모범적인 수행자의 모습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법사님께 마지막으로 천도 법문을 해드려야겠습니다.

실상화 김동윤 영가시여! 우리가 살아생전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것이다. 내 생각이 옳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고, 감촉할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이 지점에서, 내가 그렇게 말하던 ‘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것’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옳다고 하겠습니까? 김동윤 영가시여, 영가의 본래면목이 무엇입니까. 만약 이 법사의 질문에 쾌활하게 대답하실 수 있다면, 살아생전에 어떤 모습으로 살았든 그 모든 것이 다 한바탕 꿈과 같습니다. 눈을 뜨면 꿈이 모두 사라지듯이 영가는 해탈 열반을 증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가께서 이 질문에 조금이라도 머뭇거림이 있고 답답함이 있다면, 영가께서는 아직 꿈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하고 세상의 칭찬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꿈속의 일이기 때문에 영가는 아직 해탈 열반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저희는 영가께서 능히 단박에 눈을 뜨고 해탈 열반을 성취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혹시 그러지 못하셨다면, 오늘 이 대중이 영가를 위해서 이와 같이 정성을 기울여 부처님께 기도하고 염불하오니, 그 공덕으로 저 극락에 왕생하옵소서. 그리고 극락세계에서 아미타부처님을 친견하시고, 그 부처님의 무량한 법문을 들으시고, 지혜의 눈을 뜨시어 해탈 열반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실상화 김동윤 영가를 위해서 이와 같이 천도재를 지내고 추모제를 지내는 공덕으로, 가족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대중은 업장이 소멸되고 수행이 순조롭게 이루어져 해탈 열반을 성취하게 하소서! 뿐만 아니라 이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오니, 고통받는 모든 중생이 이 공덕으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지이다. 오늘 천도하고 발원한 공덕으로 김동윤 영가뿐만 아니라 유주무주 모든 고혼도 왕생극락하옵소서.

김동윤 영가님께서는 본인이 원했던 생애보다 한 20년 정도 추가로 더 사셨어요. 원래 70대 후반에 돌아가시려고 저하고 몇 번 의논하셨어요. ‘스님, 저 갈래요’. 가시겠다는 이유가 간단했습니다. ‘스님이 늙기 전에 내가 다시 태어나서 내가 스님 제자가 되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늦게 죽으면 스님이 늙어버리셔서 다시 제자가 되어 공부할 기회가 없어지잖아요. 이쯤에서 가면 스님이 아무리 못 살아도 80까지는 살 거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다시 와서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어요. ‘그거 뭐 다시 오고 가고 할 게 뭐 있어요. 우리 수행의 목표가 오고 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인데. 뭐 갔다가 또 오려고 해요. 그냥 받은 이 몸으로 끝내지요’. 이렇게 말씀드려서 말렸고, 사실은 그래서 20년을 더 사신 것입니다. 본인은 그때 막 삶을 마감하는 것을 꽤 진지하게 생각하셨어요. 그러니까 너무 아쉬워하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족들도 단지 98세까지 사셨다고 생각하기보다, 원래 생각하셨던 것보다 20년을 추가로 더 사셨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백두산도 갔다 오고, 인도도 갔다 오고, 미국도 갔다 온 뒤에 ‘이만큼 다 다녀왔으니까 이제 정리하렵니다’ 하셨는데, 제가 좀 말렸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들이 와서 효도를 많이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들 생각을 별로 안 하시더니, 나중에는 저만 보면 늘 말씀하셨어요. ‘아들이 효자요’. 여든이 넘어서 아들이 오셨고, 사실 보살님은 정토회에서 다 뒷받침을 해야 했는데 아들이 와서 돌봐 주니까 저도 손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저한테 ‘아들이 효자’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참 잘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드님께서 마지막까지 어머님을 잘 돌보고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게 해 주신 데 대해서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이렇게 우리가 실상화 김동윤 보살님의 천도재를 맞아서 한 수행자가 어떻게 삶을 살았는가를 함께 돌아보면서, 여러분께서도 삶을 좀 가볍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흔들림 없이 살아가면 좋겠지만, 좀 흔들리더라도 넘어지지 않고 다시 중심을 잡으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실상화 김동윤 보살님! 왕생극락하옵소서.”

법문이 끝난 후 스님은 고인에게 차를 올리며 절을 하였습니다. 이어 대중들도 차를 올리고 추도식을 이어 나갔습니다.


스님은 낮 12시 대구대학교의 최철영 교수님과 점심 식사를 하고, 평화재단으로 자리를 옮겨 대화를 이어 나갔습니다. 나날이 분열이 심화되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국민 합의를 위한 공론의 장이 필요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습니다.

오후 5시에는 충남대학교의 김지운 교수님과 미팅을 하였습니다. 현대 사회가 당면한 기후 위기, 인공지능의 발달, 빈부 격차의 심화, 사회적 갈등의 확대 등 여러 사회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고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에 대해 폭넓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녁 7시에 회의를 마친 스님은 저녁 식사를 하고 일찍 휴식을 하였습니다.
내일은 정토회 천일결사 입재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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