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북미순회강연 열여덟 번째 날입니다. 오늘은 조지타운 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에서 이번 일정의 마지막 강연을 하고, 온라인으로 영어불교대학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5시에 정토미주회관에서 대중들과 예불을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오전에는 밀린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점심 공양을 하고 회관에 있는 명상홀의 시설들을 점검한 후 12시 30분에 오늘 일정을 시작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스님은 10월에 평화재단 행사에 참가하는 손님들이 묵을 숙소를 답사한 후 오늘 강연이 있는 조지타운 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로 이동했습니다.
조지타운 대학교는 1789년 미국 수도 워싱턴 D.C.에 설립된 명문 사립대학으로 외교학부(SFS)와 정치학 분야는 세계 수준으로 평가받는다고 합니다.
스님은 강연 시간 1시간 전에 도착해서 학교의 학생 휴게실에 앉아 강연을 준비하고 오후 2시 45분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강연장은 60개의 좌석이 마련된 강의실이었는데, 강연 시작 전에 이미 좌석이 다 차고 자리가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강의실 공간이 협소하여 몇몇 봉사자들은 청중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강의실 밖에 있기도 했습니다.
오후 3시 조지타운대학교에서 마지막 북미순회강연, 스물한 번째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우리가 음식을 차릴 때는 음식이 있고 음식을 담는 그릇이 있습니다. 음식물도 좋아야겠지만 그릇도 예뻐야 보기가 좋겠죠. 그처럼 어떤 진리를 이야기할 때도 그 진리의 내용물이 있고 진리를 담는 그릇이 있습니다.
진리를 담는 그릇은 언어일 수도 있고, 문화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형태로 있습니다. 즉, 같은 불교를 담는 것이지만 그릇은 다양할 수 있어요. 오늘은 이런 그릇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내용물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붓다는 즐거움이 있다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이 물건을 얻었을 때 기쁨이 있다면, 이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괴로움이 생깁니다. 내가 이 물건을 얻었을 때 특별히 즐거움이 없었다면 이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도 특별한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물건을 얻었을 때 즐거움이 일어났다면 이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 반드시 괴로움이 일어납니다.
오늘 우리들은 즐거움으로 행복을 삼기 때문에 괴로움이라는 불행이 뒤따라옵니다. 즉,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고 행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것이죠. 이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인도 전통에서는 사람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고타마 붓다의 가르침은 우리의 삶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계속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즐거움과 괴로움의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스트레스가 있어서 그 문제로 대화를 나눴습니다. 대화를 하다 보니 스스로 '어, 이거 별거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화를 냈는데, 잘 살펴보니 화낼 일이 아니네.' '내가 슬퍼했는데, 잘 살펴보니까 슬플 일도 아니네.’ 이런 대화, 즉 괴로움이 사라지는 대화를 법담, 담마 토크(Dharma talk)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의문을 갖고 있으면 마음이 조금 답답합니다. 의문이 풀리면 마음이 편안해지죠. 이런 의문에 대한 질문도 담마 토크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붓다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브라만이 와서 말하기를 '사람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갠지스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우리의 죄업이 다 녹아서 하늘나라에 태어난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제자가 생각할 때 '저 말이 맞다면 굳이 이렇게 명상할 필요도 없고, 바르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갠지스 강에서 목욕만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붓다에게 가서 물었습니다. '브라만이 말하기를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갠지스강에 가서 목욕을 하면 모든 죄가 다 없어지고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습니까?'
붓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갠지스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 하늘나라에 태어나겠구나.' 질문자는 문제가 해결이 됐습니다. '알았습니다, 부처님. 알았습니다, 부처님. 잘 알았습니다, 부처님.’
붓다는 답을 주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찾아가도록 도와줍니다. 붓다의 질문에 질문자가 스스로 깨달았죠. 붓다는 교리를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이렇게 편안하게 대화를 나눴지요. 그래서 오늘 우리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려고 합니다. 주제에는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없습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자, 누구든지 손을 드세요.”
저는 외교와 국제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서 더 큰 국익을 위해서 결정 내려야 할 때가 있고, 때로는 그 결정이 폭력적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책이나 정치를 공부할 때면 ‘내가 인간성을 지키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혼란에 빠집니다. 외교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살면서도 제 자신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자비와 공감을 가지려고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이 제 관점에만 머물러 한계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저에게 나쁜 태도를 보였을 때, 저는 '저 사람은 무엇이 좋고 나쁜지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다'라며 그 사람을 이해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태도가 저의 지식이나 관점, 경험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저를 나르시시스트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해도 찝찝하고 놀아도 불안합니다.
"I start each day with high ambitions, but whether I spend it studying or going out, I end up feeling regretful and guilty either way. No matter how I spend my time, the day always closes with disappointment and dissatisfaction. How can I stop being pulled between my responsibilities and desires, and find genuine peace of mind at the end of the day?"
(하루를 열심히 보내려 계획하지만 하루 종일 공부만 하면 세상을 즐기지 못해 자책하고 놀러 나가면 공부를 덜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결국 하루 끝에는 실망과 후회만 남아 마음이 늘 불편합니다. 하루를 편안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마무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국식으로 결론부터 이야기 해야겠네요.(웃음) 결론부터 말하면 욕심입니다. 놀고 싶으면 노세요. 그러나 학위를 따려면 놀고 싶어도 공부를 해야합니다. 그건 괴로움이 아니라 내 선택입니다. 그런데 공부는 안 하고 놀고 싶고 학위는 따고 싶다면 이것은 욕심입니다.
여러분이 이 학교에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일단은 공부하려고 온 것 아니겠어요? 물론 목적을 바꿀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공부를 하려고 이 학교에 왔어요. 그러면 공부에 도움이 되는 행동을 선택해야 합니다. 내가 운동을 할 때에도, 이 운동을 해서 체력을 단련하는 것이 공부에 도움이 된다면 운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운동하는 것에 시간을 많이 뺏겨서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된다면 운동을 줄이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운동하고 싶은데 왜 운동 시간을 줄이라고 하느냐?’ 한다면 여러분이 목적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선택에는 좋은 선택, 나쁜 선택이 없습니다. 선택에 따르는 책임만 지면 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에 아주 맛있는 음식이 있습니다. 내가 배가 고파서 먹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붓다가 ‘거기 독 들었다’ 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먹어야 할까요, 먹지 말아야 할까요? 내 선택입니다. 먹고 안 먹고는 내가 결정합니다. 살고 싶으면 안 먹으면 되고, 먹고 싶은 게 더 크면 먹고 죽으면 돼요.(웃음) 선택은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늘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목적은 얼마든지 내가 다시 정할 수 있고, 그 목적에 맞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선택을 망설이는 이유는, 그 결과에 따르는 책임을 지기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선택하기 어렵다고 했지만 그건 진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늘 수많은 일들이 있으니까요. 질문자는 이 세상에 여자가 너무 많아서 선택을 못 하는 사람입니까? (웃음) 결국 선택지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놓치기 싫어서 어떠한 것도 선택하지 못하겠다는 것은 욕심 때문입니다.”
“Thank you so much.”
(감사합니다.)
AI가 일자리까지 대신하는 세상,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With AI rapidly replacing human jobs, we may soon enter an era where we can survive without working for food. However, this feels unnatural to human nature, much like mice in a zoo being fed without any effort. In a world where our knowledge and labor are obsolete, how can we live meaningfully and naturally?”
(AI의 급속한 발전으로 대다수의 일자리가 사라지면 일하지 않고도 생존하는 시대가 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마치 동물원 우리 안에 갇혀 먹이만 받아먹는 동물처럼 인간의 본성에 부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지식과 노동이 기계로 대체되는 사회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어떻게 자연스럽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급변하는 세상을 처음 경험하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세상이 급변하는 시점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가 신석기시대입니다. 인간은 수렵과 채취를 하고 유목생활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도구가 발달하면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면서 정착 생활을 했습니다. 이 때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어나고 인구도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기술은 빈부격차를 가져오는데, 새로운 기술을 먼저 사용하거나 독점하는 쪽에 부가 급격하게 증가하죠. 그래서 계급이 생겨난 거예요.
두 번째는 철기시대입니다. 석기시대에는 대부분 초원 지역에 문명이 발달했지만 철기시대가 도래하면서 산림 지역이 개척됐습니다. 철기가 들어오면서 나무를 자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빈부격차가 급격하게 일어났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권력 독점 형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제국이 출현했지요.
그러다가 산업화 시대에 이르렀고, 식민 지배를 하는 제국주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지금도 신기술이 발전하면서 빈부격차가 급속도로 벌어지고 있어요. 부가 한쪽으로 쏠리면 그것을 기반으로 해서 권력의 독점이 일어납니다. 지금 세상도 비슷한 양상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예의주시해야 합니다.
역사를 보면 그 변화가 바람직하지 않았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변화 속에서 희생되었습니다. ‘이것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큰 과제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 두려워할 일은 아닙니다.
인공지능시대가 온다고 해도 인간의 직업에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농경 시대에 인구의 90%가 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3%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은 다 직업이 없이 놀고 있습니까?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업이라는 직업이 그만큼 사라졌을 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업은 많이 줄어들겠지만 다른 직업군이 생겨나겠지요.
제가 40년 전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손톱을 손질하는 가게를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런 일도 직업이 될 수 있나 싶었지만, 지금은 너무나 보편적인 직업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앞으로 어떤 새로운 직업이 생겨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은 익숙하던 직업들이 사라지니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자녀 세대는 처음부터 그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전혀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질문자가 내 기준, 내 경험으로만 세상을 바라보니 혼란스러운 거예요. 지금처럼 변화가 급격할 때는 미래를 예측하기 어렵고, 잘 모르기 때문에 자연스레 불안해지는 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럴 때일수록 마음의 중심을 잡아주는 붓다의 가르침이 더욱 필요합니다.
앞으로는 기본 사회보장제도로 생존을 위한 지원이 이루어져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행복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나의 일상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즐거움에는 중독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칫하면 게임 중독이나, 마약 중독 같은 것이 더 확산될 위험도 있겠죠. 그러면 중독되지 않으면서 삶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찾아내야 할 일입니다.
저는 ‘자원봉사’를 대안으로 제시합니다. 항상 내 노동과 지식을 팔아서 대가를 받고 살았는데, 이제는 ‘나의 재능을 세상을 위해서 쓰자’하는 게 자원봉사입니다. 자원봉사를 하면 ‘보람’이 생깁니다.
이렇게 한번 예를 들어볼게요. 여기 춤추는 디스코장이 있습니다. 무대 위에는 댄서가 와서 1시간에 100달러를 받고 춤을 춥니다. 무대 밑에는 사람들이 1시간에 10달러를 내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돈을 내고 춤을 추는 사람은 지금 놀고 있지만, 무대 위에서 100달러를 받고 춤을 추는 사람은 지금 노동을 하고 있어요. 그 때 ‘춤추는 시간을 30분 연장합시다.’ 한다면 무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러나 무대 위에 있는 사람들은 노동 착취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노는 것과 노동의 차이는 돈을 내면 노는 것이 되고. 돈을 받으면 노동이 되는 거예요. 그 이유는 돈을 낸다는 것은 그 행위의 주체가 내가 되는 것이고, 돈을 받는다는 것은 그 행위의 목적이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강연을 할 때 돈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은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여러분과 놀고 있는 중입니다.(웃음) 제가 만약에 강사료를 받았다면 노동을 하고 있는 거겠죠. 그러니까 일을 한다고 해서 노동인 것이 아니라, 내 행위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노동인지 놀이인지를좌우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학생 여러분도 공부를 놀이 삼아 하세요. 여러분은 공부할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욕심을 내기 때문에 공부가 부담스러운 거예요. 여러분은 공부하는 즐거움을 버리고 중노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웃음) 붓다는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준 게 아니라 이렇게 관점을 전환시켜서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안내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연이 끝나자 학생들의 박수 소리가 강연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다수의 학생들은 노트에 필기를 해가며 스님의 법문을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오후 4시 40분 강연을 마친 후, 스님은 봉사자들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강연을 준비한 주최측에서 스님에게 꽃다발을 전달했습니다. 스님도 국제지부 정토회원인 베로니카 님과 학교 종교협력회 부회장인 엘샤 님에게 스님의 책을 전달했습니다.
엘샤님은 이런 행사를 함께 준비하고 진행하여 즐겁고 기쁜 시간이 되었다고 말하며, 내년에는 더욱 크게 준비해서 진행해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법해 법사님은 봉사자들과 나누기를 진행했습니다.
“이런 행사를 총괄하는 봉사는 처음이었어요. 준비하는 동안 어려운 순간도 있었고요. 그래도 행사가 잘 끝나고 참석자도 충분히 와서 기쁩니다. ‘정말 좋았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다고 들었어요. 이 행사를 위해 많은 시간을 내어 주신 봉사자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미 스님과 공부하고 계신 분들을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도 더 배우고 싶어서 오늘 봉사하러 왔습니다.”
“스님께서 학생들에게 깊이 있게 말씀해 주시는 모습이 감동스러웠습니다. 모두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후 6시 30분, 스님은 정토회 미주회관에 도착하여 저녁공양을 하고 영어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한 즉문즉설 방송을 준비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 20여 명의 학생들이 온라인에 접속한 가운데 영어불교대학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정토회 미주회관 법당에서 온라인으로 접속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정토 담마스쿨 학생 여러분. 입학하고 시간이 조금 지났는데 공부는 잘해 나가고 있습니까? 오늘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공부한 것을 중심으로 의문이 있으면 질문을 하고 또 고민이 있으면 이야기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네 사람이 먼저 질문 신청을 했네요. 먼저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 규칙을 어기거나, 소란을 피우는 것을 보면 종종 화가 납니다. 다른 사람들의 행동에 덜 신경 쓸 수 있도록 돕는 조언이 있을까요?
제 불안감의 상당 부분은 미래를 위해 올바른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두려움에서 옵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저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하지 못했을 때 죄책감이 듭니다. 이것을 내면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타인의 기대를 우선시하기보다 제 여정에 집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깨달으면 어떤 상태가 되나요?
"How do I know when I've reached enlightenment—is it like an on/off switch, or a continuous effort to stay awake?”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나요? 깨달음은 스위치 같은 것인가요, 아니면 끊임없이 깨어있으려 노력하는 과정인가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면, 깨달음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항상 살아있듯이 움직이는 겁니다. 내가 만약에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잖아요? 내가 눈을 떠야 보입니다. 항상 눈을 뜨고 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눈을 감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이지 않을 때 알아차립니다. '내가 눈을 감았구나.' 그래서 눈을 뜨면 됩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을 때 '내가 눈을 감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둡다'고 생각하고 불을 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원래 밝은 채로 있습니다. 내가 눈을 뜨고 있으면 항상 밝게 보이는데, 내가 눈을 감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뜨면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눈을 감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불을 켜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눈을 뜨면 됩니다.
항상 눈을 뜨고 있으나, 때로는 눈을 감았다가 뜨나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질문자는 눈을 항상 뜨고 있다는 절대적인 상태를 ‘깨달음의 상태’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으면 항상 밝은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감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는 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리면 됩니다.
사람은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행동이나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으면 화날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이 관점을 놓쳐서 화가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때는 내가 관점을 놓쳤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면 화가 일어나다가 사라져 버립니다. 설령 그것마저 놓쳤다면, 화가 순식간에 올라옵니다. 우선은 응급치료를 해야 합니다. 즉, 참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래되면 스트레스를 받지만, 잠시는 괜찮습니다. 일단 참고, 화낼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러면 화가 사라집니다. 이렇게 항상 스스로 스트레스 없는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일어나지 않거나, 일어났다 하더라도 사라집니다.
우리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일상을 살다 보면 일어났다 사라졌다 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깨달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게 아니고, 내게 번뇌가 일어날 때 '아, 내가 잠시 눈을 감았구나'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저는 지금 워싱턴 D.C.에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같은 시간대에서 지금 얘기하고 있습니다. (웃음) 저는 지난 3주 동안 미국에서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순회강연을 했고, 오늘 조지타운 대학에서 마지막 강연을 했습니다. 다음 즉문즉설은 제가 한국에 돌아가면 만나겠네요. 그때 다시 만나겠습니다."
즉문즉설을 마치니 밤 9시가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마지막 온라인 강의까지 모두 마치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오늘 조지타운대학교에서의 강연을 마지막으로 2026년 북미순회강연을 원만히 마무리했습니다. 지난 9월 8일에 시작하여 오늘까지 총 18개 도시를 다니며 21회의 강연을 했고, 이 중 17회는 대학 강연으로 진행했습니다. 이번 대학 순회강연에서는 각 학교의 종교학과뿐 아니라 동아시아학과, 한국어학과 등 다양한 학과에서 기쁜 마음으로 공동 주최를 하고 준비에 동참해 주었습니다. 또한 한인학생회 학생들이 헌신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국제지부 회원들이 '모자이크 붓다'가 되어 먼 지역에서 한달음에 달려오며 한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하고 진행해 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있습니다. 내일부터 1박 2일 동안 국제지부 북미지역 활동가 대회에 참석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