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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청춘캠프 이틀째 날입니다. 스님은 오늘 문경 선유동연수원에서 새벽수행과 명상을 한 후, 원고를 교정했습니다.

아침공양을 한 후 오전 8시에 청춘캠프 마지막 강의를 하기 위해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청년들이 강당에 모여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번 강연은 ‘기후위기와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게 될 청년들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잠시 입정을 한 후 스님의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지구환경은 기온이 상승하고 온난화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온난화가 계속되면 해수면의 온도가 올라가고, 물의 증발량이 많아지면서 폭우가 쏟아지고 태풍이 강해집니다. 동시에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은 폭염이 심화되지요. 이렇게되면 우리나라도 영향을 받습니다. 과거에는 겨울 산불만 걱정했지만 올해처럼 심하게 가물면, 앞으로는 여름에도 산 불이 날 수 있어요. 이미 유럽에서는 여름 산불이 아주 심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기온 변화와 해수면 온도 상승, 그리고 그로 인한 기후 변화는 생태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예를 들면 바닷물이 따뜻해지면서 남쪽에 있던 물고기가 동해로 올라오거나,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재배하던 사과나무를 북쪽에서만 재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천천히 올 경우에는 많은 동물과 식물들이 기후 변화에 적응하면서 옮겨갈 것입니다. 그러나 기후변화가 빨리 와버리면 어떨까요? 적응을 못 하고 죽어 버리겠죠. 즉 멸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부터 조심한다고 기온이 다시 내려갈까요? 여기에는 특이점이 있습니다. 기온은 일정한 온도가 넘어가 버리면 그때부터는 자연적으로 기온상승이 이루어집니다. 즉, 처음에는 인간 때문에 온도가 올라갔지만, 어느 선을 넘으면 인간과 관계없이 자연현상 자체로 계속 온도가 올라가는 쪽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죠.
가장 대표적인 예가 툰드라 지역입니다. 기온이 상승해서 얼음이 녹으면, 그 얼음 속에 갇혀 있던 탄산가스가 분출하기 시작하면서 온난화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노력을 하나 안 하나 온난화는 계속 되는 것이죠. 그러면 기온은 끝도 없이 계속 올라갈까요? 아닙니다. 온도가 올라가면 고사리 같은 특정 생물 종이 과다하게 번성하게 되고, 이렇게 되면 다시 자연이 탄소를 흡수하는 양이 많아집니다. 그러면 거꾸로 반대 현상이 일어나서 다시 기온이 내려가는식의 기후 변화가 반복됩니다. 사실 지구 전체의 역사로 보면 이런 변화 자체는 늘 일어났던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들이 지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첫째, 이 거대한 변화를 인간이 인위적으로 유발해서 가속화 시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인류는 지금의 기후 환경에 최적화하는 방식으로 선택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기후가 급격하게 변하면 가장 먼저 큰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삶에 직결된 문제라는 것이죠.

결국은 ‘인간이 과연 이 변화에 적응해나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기후변화의 속도가 느리면 인간은 어떻게든 적응하려 하겠지만, 지금처럼 급속도로 날씨가 더워지면 방마다 에어컨을 켜서 더위를 피하는 식이 됩니다. 하지만 에어컨을 돌릴수록 엄청난 전기를 쓰게되고, 그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지구는 더 뜨거워집니다.
인공지능을 사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효율을 높이고자 사용 하지만 에너지를 엄청나게 사용하게 됩니다. 즉 인간이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려 문명을 발달시킬수록 기후 변화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이 가장 큰 위기인데, 제가 볼 때는 이 모순을 극복하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이미 우리들이 현대 문명에 너무 익숙해져서 멈추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인공지능 개발을 멈추자’, ‘빅데이터 센터를 짓지 말자’ 고 한들 어느 국가의 지도자들이 동의하겠어요 ?
그렇다고 ‘그러면 어차피 해결하기 어려우니 아무런 노력을 안 해도 되겠네요’ 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인간의 삶에는 ‘바른 길’이라는 것이 있고, 바른길을 가다보면 해결책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고해서 자포자기 하면 안됩니다. 그저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묵묵하게 바른길을 가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공지능 발달’ 이라는 인류사의 큰 변곡점 위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 인류 문화사의 흐름을 보면, 신석기가 일으킨 큰 혁명, 철기가 일으킨 혁명, 산업화가 일으킨 혁명이 있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그 다음의 혁명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은 어떠한 시대를 불러올까요? 우선 엄청난 속도로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 변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부(富)가 편중되어 양극화를 심화시키고 권력의 편중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면, 바이오 기술이 발달하면서 돈이 있는 사람은 100살이 되어도 20대의 피부와 건강을 유지하며 수명을 연장할 수 있고, 돈이 없는 사람은 온갖 병에 걸리기 쉬워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사람 간에 수명과 건강의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질 위험이 커진 거예요. 그러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건강이나 미용에 돈을 쓸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다고 볼 수 있겠죠.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필연적으로 ‘성(性)의 편중’이 옵니다. 현재도 발생하는 상황이지만, 여성들이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을 갖추게 되면서 이제는 굳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남성과 억지로 결혼하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을 하려 하지요. 즉, 돈이 많아서 잘 가는 소수의 남성에게는 많은 여성이 따르겠지만, 경쟁에서 뒤쳐진 다수의 남성은 여성이 없어서 결혼을 못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없어서 결혼을 못 하는게 아니라 여성과 맺어질 기회 자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어떤 일이 발생하느냐하면, 서른 살 될 때까지 여자 하고 손도 한 번 못 잡아보는 남자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우리 청년 중에도 지금 늘고 있나요? (웃음)

그러면 국내에서 짝을 찾지 못한 남자들은 동남아나 해외에서 배우자를 찾으려고 하지만, 그 나라들 역시 시간이 지나면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이죠. 이러한 의미로 결혼 불평등, 다시말해 ‘성의 불평등’이 나타나고, 이것은 ‘출산의 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결혼조차 하기 어렵고, 겨우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키우기 어려워서 하나 낳는 것도 버거워 하지만, 부자들은 만나는 여성도 많고 자식도 많은 것이죠. 이는 사실 과거 역사에서도 겪었던 일입니다.
과거에도 사회의 초기구조는 90퍼센트의 평민이나 노예와 10퍼센트의 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귀족의 비율은 늘어나고 평민의 비율은 줄어드는 기형적인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일하지 않고 소비만 하는 사람은 넘쳐나고, 생산자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사회가 유지되기 어려운 현상이 발생했던 것이죠.
지금까지 연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했는데, 이 일들은 하나의 현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좌절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니까요. 이것이 바람직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바람직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개선해야 합니다. 다만 개선 가능성은 낮습니다. 왜냐하면 대세를 거스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세를 거스르기 위한 두가지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개인의 ‘수행’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기술 편중이나 부의 편중을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사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나 역량을 갖추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권력이나 부, 기술을 가진 사람은 소수이지만 수만 명, 수십만 명에 해당하는 힘을 갖습니다. 이러한 사회 구조를 바꾸려면, 그 힘을 이길 만큼 많은 대중이 단결해야 합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농민들이 단결해서 혁명을 일으켜 대응을 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대응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모든 것이 개별화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대인들은 재능있는 개인이 많이 갖는 것에 대해 마땅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능력이 있으니까 잘사는 것이지’ 또는 내가 노력하고 투자해서 번 것인데 무엇이 문제야?’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도 학교 교육을 통해 석차를 매기고 능력으로 인간을 평가하는 방식을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귀족도 없고 노예놈도 없는데, 우리는 늘 열등의식이나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부처님이 왕위를 버리면서 성차별과 계급 차별을 타파하셨듯이, 우리에게도 정신적 혁명이 필요합니다. 부처님 말씀처럼 ‘이것은 모두 형성된 카르마에 불과한 것이다’라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의 정신 혁명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설령 세상이 바뀌지 않더라도 나 자신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번뇌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民)이 주인이 되는 시대를 겪어서 오늘 이 자리까지 왔기 때문에 적어도 권력, 재물, 건강의 독점은 막아야 합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가질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독점은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가 후퇴하지 않는 길이며, 지속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런 면에서 더 이상 사회주의는 혁명사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과거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단결하여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개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노동 운동은 투쟁의 결과를 자기들끼리 나눌지는 몰라도 국민 전체에게 보편적인 혜택으로 돌려주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는 다른 곳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농민이 혁명의 주체였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가 혁명의 주체였다면,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는 과연 어떤 사람들이 변화의 주체가 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바로 청년, 여러분들의 과제입니다.
옛날에는 우리보다 30년, 50년 앞선 선진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사회를 보면서 ‘저 사회는 저런 문제를 저런 방식으로 풀어가는구나’ 하고 따라 배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세상의 맨 앞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따라 배울 곳이 없습니다.

이제는 외국에서 한국 문화를 따라 하듯이, 정치, 환경,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대응 방법을 창조해 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창조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남을 따라 하는 데만 익숙해져 있어서, 따라 할 모델이 없으면 방황하게 됩니다. 누군가 앞에서 이끌어주고 챙겨주지 않으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누군가를 따라갔지만 이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하니 막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없이 시도하고, 새로운 길을 찾고, 또 다시 도전해야 합니다. 남을 따라갈 때는 열 명 중 아홉 명이 성공 했다면, 새로운 길을 개척할 때는 열 명 중 아홉 명이 실패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실패를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단번에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남의 것을 모방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길을 따라갈 때는 한두 번 만에 갈 수 있을지 몰라도, 창조는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새로운 길을 발견해 내는 과정입니다. 혼자 하는 것보다 함께 연대할 때 훨씬 더 지혜롭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청년회 활동이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개인의 삶도 그렇고, 청년회의 활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길을 여는 집단이 되었으면 합니다."
스님의 강연이 끝나자 청년들의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저는 ‘예, 하고 합니다’라는 관점이 궁금합니다. 삶의 방향을 정하고 함께 활동하다 보면 자기 생각이 강해지기도 하고, 각자 추구하는 욕망도 다릅니다. 특히 요즘 청년들은 배운 것도 많다 보니 그런 경향이 더 강한 것 같은데, 그런 상황에서 ‘예, 하고 합니다’라는 태도로 함께하려면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요? 또 그것이 수행적으로 어떤 도움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예, 하고 합니다’라는 태도는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칼날의 양면과 같습니다. 한쪽 면에서는 자기 주체성을 잃고 종속될 위험, 즉 맹목적인 믿음이나 미신, 맹신으로 흐를 위험이 있고, 또 다른 면에서는 자기 고집을 버리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 즉 마음속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의 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토회에서 말하는 ‘예, 하고 합니다’는 후자의 의미예요. 그런데 좋은 칼도 잘못 사용하면 흉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 하고 합니다’를 무조건 강요하거나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에게까지 강제로 적용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스라이팅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이런 부분은 항상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실 여러분은 자기 생각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자기 생각이라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 배운 지식이나 경험, 습관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객관적인 것은 아니에요. 밥을 먹고 자란 사람은 밥이 제일 맛있다고 주장하고, 김치를 먹고 자란 사람은 김치가 제일 맛있다고 주장합니다. 또 어릴 때부터 특정한 방식으로 옷을 입어 온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함께 살아가면서 자기 방식과 맞지 않으면 상대가 틀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갈등이 생기고 결국 자기 번뇌가 생기는 거예요.

이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내려놓고 저건 안 내려놓겠다’라고 하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죠. 처음에는 아무런 조건 없이 전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처음 절에 와서 백일 출가를 할 때도 바로 이런 관점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해탈이 가능합니다. 자기 번뇌로부터 벗어나는 길에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빨리 못 내려놓으면 살아가면서도 계속 자기 습관과 고집을 움켜쥐게 됩니다. 그러면 삶이 힘들어져요. 말로는 수행자라고 하면서도 늘 짜증 내고, 화내고, 집에 가니 마니 하면서 5년, 10년, 20년을 사는 거예요. 보통은 예순쯤 돼서야 내려놓는 것 같아요. 그때는 갈 데가 없으니까요. (웃음) 가능한 한 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탁 놔버려야 해요. 밥 먹자고 하면 먹고 가자고 하면 가고 오자고 하면 오는, 이렇게 탁 놓는 연습을 먼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래도 큰 차이가 없고 저래도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해요.

예를 들어 오늘 산책을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정이 바뀌어서 못 가게 되면 ‘간다고 해놓고 왜 안 가요?’ 하며 입이 삐죽 나오잖아요. 그런데 내일 아침에 일어나 보면 어떨까요? 산책을 갔든 안 갔든 별 차이가 없어요. 오늘 아침에도 ‘졸린데 왜 프로그램을 바꿔서 스님이 또 법문을 하시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막상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 보면 역시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사실은 자기 생각을 탁 내려놓으면 오히려 자기 의견을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스님한테 의견을 말할 때도 ‘스님이 뭐라고 하실까?’ 하며 불편해하잖아요. ‘내가 너무 고집하는 건가?’ 하는 자기 생각 때문에 말하기가 어렵죠. 그러나 자기를 탁 내려놓으면 오히려 거리낌이 없어집니다. ‘스님께서 이 방향으로 가자고 하셨는데, 저 방향은 어떻습니까?’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고집하는 것이 아니니까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해서 말을 한번 해보는 거예요. 그리고 스님이 ‘아니다. 이 방향으로 가자’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하고 따르면 됩니다. 고집할 것이 없으니 가능한 일입니다.

이렇게 되면 제안을 자유롭게 할 수 있고, 결정이 내려지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어려운 점은 다양한 의견을 모으는 것은 좋은데, 하나의 결정이 내려진 뒤에도 각자가 자기 의견을 내려놓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열이 일어나죠. 반면에 독재는 하나로 통일된다는 일사불란함이 있는데, 개개인의 심리가 억압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불만이 쌓이고 결국 반항이 일어나게 됩니다.
탁 내려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세뇌되거나 굴복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기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편안함을 만드는 일이고, 또 서로 대화해서 어떤 결정이 내려지면 ‘그렇게 해보자’ 하고 의기투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네, 그러면 의견을 말하지 말라는 건 아닌 거죠?” (웃음)

“의견은 언제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나가 봉사할 때 저는 보통 100일 동안은 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처음에 가면 자기 생각과 다른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에요. 분별심이 엄청나게 일어납니다. 그럴 때는 환경을 바꾸는 데 집중하는 것보다 자기 분별심을 내려놓는 데 더 집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 곳에서 오래 살다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기는데, 안주하게 돼요. ‘원래 그런 거지’ 하고 개선점이 눈에 잘 안 들어옵니다. 그때는 오히려 새로운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좋아요.
정토회에 처음 들어왔을 때 눈에 보이는 문제는 자기 분별심일 가능성이 큽니다.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사람들의 시선이 더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늘 같은 환경에 있다 보니 익숙해져서 마치 장판에 낀 때를 뭉개고 살 듯 개선점을 잘 발견하지 못하게 됩니다. 반면에 새로운 사람들은 신선한 시각으로 볼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무조건 따라 하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강의를 마치고 서울로 이동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 사이 청년들은 서울로 이동하시는 스님께 인사드리기 위해 선유동 연수원 입구에 하나둘 모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양떼처럼 모여있는 청년들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오늘 오전 산책을 같이 못해서 미안해요. 비가 멈췄으니까, 이 정도면 계곡 산책이 위험하지는 않을거예요. 조심히 잘 다녀오세요.”
“스님. 감사합니다. 살펴올라가세요”
스님이 이동하는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청년들이 자리에 서서 스님차를 배웅했습니다. 스님은 서울로 이동하는길에 용추 계곡 산책길에 잠깐 들렀습니다. 어제 하루종일 비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계곡의 물 양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이 정도면 청년들끼리 산책하는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오늘 처리해야할 업무가 많네요. 서둘러서 올라갑시다”

스님은 차 안에서 끊임없이 업무 소통을 했습니다. 눈 깜짝 할 사이 오후 일정이 회의시간으로 꽉 찼습니다. 오전 11시 30분경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치고 평화재단으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 총 4팀과 회의를 연달아 하면서 내년도 국제협력팀 사업들과 일정을 정리하다보니 오후 6시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파키스탄 출국 준비가 잘 되고 있는지 점검 하고, 저녁공양을 한 후 일찍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공항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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