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8.10_동북아역사기행 셋째날_압록강, 장백, 이도백하
"북한에는 나와 같은 2,500만 명의 '사람'이 살고 있음을 기억해야합니다."

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셋째날입니다. 오늘은 압록강변을 타고 북쪽으로 이동하여 장백에 도착해서 탑산에 올라 발해의 영광탑을 참배하고 북한 혜산 시내를 내려다본 뒤, 백두산 북쪽 등산로 입구인 이도백하에 이르는 일정을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수행과 명상을 하고 원고를 교정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새벽 4시 50분, 참가자들은 가방을 버스에 실어두고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숙소 옆에 있는 새벽 시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동하는 일정이라 점심에 먹을 음식까지 미리 구입해 둬야합니다. 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에는 다행히 죽, 만두, 두부 등 먹거리가 많았습니다.

스님은 원고를 교정하느라 아침 공양을 제대로 하지 못한 채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오전 6시 10분 집안을 출발하여 압록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을 시작했습니다.

“집안에서 출발해서 압록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압록강이 있고 그 너머에 북한 땅이 있습니다. 지금은 시내를 지나고있어서 건물에 가려서 잘 안보이지만, 조금만 더 가면 북한 땅을 쭉 보면서 올라가게 됩니다.”

“지도를 보면 지금 우리는 신의주에서 위로 일직선으로 올라가는 압록강 중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전에 수풍댐이 있었고, 집안과 만포 위에는 운봉댐이 있습니다. 우리는 운봉댐 호수를 끼고 돌아서 중강진까지 가게 됩니다. 중국 땅으로는 집안에서 림강으로 가는 길이고, 북한 땅으로는 만포에서 중강까지 가는 길이 되겠습니다.

운봉댐을 지나는 길이 중간에 검문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지만, 우리 역사기행팀이 아직 한 번도 이 코스를 관통 못 해봤으니 오늘은 시도 해 보자고 해서 일정을 조정해 일찍 출발했습니다. 올라가면서 검문을 몇 번 하게 되는데, 검문할 때는 차에서 내리지 말고 안내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기행단을 태운 버스는 압록강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이동했습니다. 오른편으로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 땅이 보였습니다.


“오른쪽에 보이는 철길이 중국-집안에서 북한-만포로 가는 철길입니다. 하루 한 편씩 다니는데, 한 달은 북한 기관차가, 한 달은 중국 기관차가 끌고 다닙니다.

철길이 꺾여 들어가는 건너편 언덕 위에 북한의 만포시가 있습니다. 중국 쪽은 교역을 하려고 국경 변에 어마어마한 해관과 상가를 지어놓고 10년 전에 다리까지 놓았지만, 북한에서 열지 않아 현재 육로는 닫혀 있습니다.

만포시에는 최근에 다층 건물과 아파트가 많이 들어섰습니다. 예전에는 전부 단층이었는데 최근 북한의 건설 경기가 활발한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문을 닫았던 만포의 시멘트 공장도 요즘은 가동되고 있네요.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식량이 부족해 산이 민둥산이 되고 뙈기밭이 되었습니다. 개인이 개간한 뙈기밭은 아사를 극복하는 해결책이었지만, 국가 전체로 보면 들판 농사에 들어갈 노동력이 분산되고 홍수 때 산사태와 가뭄을 유발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자, 강 건너편은 자강도입니다. 자강도는 미사일이나 화약을 만드는 북한 최고의 군수공업지대가 있어 외국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지역입니다.

압록강에는 수풍댐, 태평만댐, 위원댐, 운봉댐 등 4개의 댐이 있습니다. 압록강은 800km 중 700km 가까이 배가 다닐 수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백두산 나무를 뗏목으로 만들어 서해안까지 운반했습니다. 지금은 댐들이 생겨 북한에서 내려오는 뗏목은 운봉댐이 마지막 정착지가 되며, 그 이후로는 육로로 옮겨야 합니다.

북한 건물들은 십여 년 사이에 집이 새로 지어지고 건물이 올라가는 등 외부에서 볼 때 정비가 많이 되었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아직 어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운봉댐 삼거리 검문소에 도착했네요. 잠시 신원 검사를 받기 위해 대기하겠습니다.”

기행단은 처음 보는 북한의 모습이 신기해서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농토도 보이고, 새로 지은 집단 거주지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강의 폭이 넓지 않은 곳에서는 걸어서도 북한에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것만 같은 북한의 모습을 실제 눈으로 보니 분단된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몇 차례 검문소를 지나야 해서 작년처럼 시간이 오래 걸릴까 염려가 있었는데, 가이드를 해주는 조신님이 사전 답사를 하며 필요한 업무를 미리 해두어서인지, 우려했던 것과 달리 검문소에서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검문소를 통과하고 다시 북한땅을 바라보며 계속 이동 했습니다. 소 달구지에 무언가를 싣고 있는 사람도 볼 수 있었습니다.

“전에는 뙈기밭으로 산 전체가 민둥산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졌네요.”

스님이 북한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북한난민 지원을 한창 할 시절에는 이 지역을 한달에 한번씩 방문해서 북한의 기아 실태를 알리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했습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스님은 말했습니다.

“당시에는 북한 쪽만 봐도 눈물이 났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괜찮네요. 어쨌든 세월이 흐르니까 과거의 상처도 모두 자연 속에서는 덮히는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그냥 지나가면 옛날의 아픔은 다 없어지고 그저 경치만 남는 거예요.

이곳부터 백두산 쪽에서 흘러내리는 골짜기를 따라 1도구부터 24도구까지 동네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중국 쪽에서 지대를 높여 도로를 만드는 바람에 홍수가 나면 물이 둑이 낮은 북한 쪽으로 넘어가기도 합니다. 요즘 북한에서 건설 붐으로 시멘트가 부족해 중국 시멘트를 많이 수입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압록강변 너머로 보이는 북한 땅을 바라보며, 북한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차가 이동 할 때마다 다르게 펼쳐지는 차창밖의 모든 풍경을 하나 하나 설명해주었습니다. 책을 통해서 읽을 수도 없는, 지난 30여년간 스님이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또 사람들을 만나고 경험했던 것들이 생생히 담겨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림강부터 중강까지의 압록강 상류 지역은 강폭이 좁아 난민들이 넘어오기 쉬운 지형입니다. 그러나 건너편 자강도가 북한 내부 교통이 불편해 접근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로 접근이 쉬운 양강도 혜산에서 장백으로 많이 넘어왔습니다. 하지만 장백은 빠져나가는 길목이 딱 막혀 있어서 건너온 난민들 대부분이 체포되어 강제 송환되었습니다. 반면 두만강 쪽은 넘어오면 조선족들이 살고있어서 보호받기 쉽고 도망치기도 쉬웠습니다. 그래서 탈북 난민의 60% 이상이 함경북도 출신입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옛날 이름이 '후창'이었던 김형직군이 나옵니다. 1988년에 이름을 바꿨는데, 조선 시대 4군 중 하나인 무창군과 후주군을 1869년에 합쳐서 만든 것이 후창군입니다. 건너편 김형직군 읍내에는 새로 리모델링한 건물들과 주체탑, 그리고 어린 시절 책가방을 메고 평양을 떠나던 김일성의 노란 동상이 있습니다. 다음은 과거에 ‘신파’였던 김정숙군을 지나 장백에 이릅니다.

이제 장백까지는 약 3시간 걸릴 예정입니다.”

오후 3시경, 영광탑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영광탑이 산 위에 있어서 참가자들이 먼저 계단을 올라가고 스님은 뒤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올랐습니다.


먼저 도착한 기행단은 양강도의 중심 도시인 혜산을 내다보며 이곳에서 25년 전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이승용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춥고 배고픈 난민들을 도왔던 이야기에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곧 이어 스님도 탑 앞에 도착했습니다.

“힘들어서 계단 숫자를 세면서 올라왔어요. 총 500개 였어요.(웃음)”

스님은 기행단과 함께 탑 앞에 모여,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동북아역사기행에 참가하는 대중을 위해 축원기도를 해 주었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저희 역사기행 대중 일동은 발해의 영광탑 앞에서 발해 멸망 후 천년이 지나 이렇게 찾아와서 참배드립니다. 그동안 자주 찾아뵙고 참배 드리지 못함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동시에 앞으로 늘 찾아와 불탑에 참배 드리고 부처님을 찬탄할 것을 발원합니다. 또한 고난의 행군 시기 식량 부족으로, 또 의약품 부족으로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간 수백만 북한 동포들의 넋을 위로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고 외면한 잘못을 깊이 참회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이 땅에, 이 민족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저희들이 살피고 살펴 지원하겠습니다.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 저희들의 이러한 참배와 축원의 공덕으로 돌아가신 모든 사람들 왕생극락하게 하옵소서. 또한 오늘 이렇게 참배한 대중 일동의 역사기행이 무사히 끝날 때까지 아무 탈 없이 잘 지내고 돌아갈 수 있도록 천룡팔부신중님들께서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축원을 마치고 다함께 탑을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발해는 그 무덤 안을 돌로 만들지 않고 벽돌로 만들었습니다. 벽돌을 쌓아서 만들고 거기에 회칠을 해서 무덤실을 만들었어요. 그것이 고구려와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아마도 평지에 주로 살다 보니 벽돌을 많이 사용했던 것 같고, 중국 문화의 당나라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탑도 돌을 깎아 만든 탑이 아니고 벽돌로 쌓은 전탑입니다.

발해 시대의 탑이 일제강점기 때까지 이것 말고도 훈춘 지역에 한두 개가 더 있었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지고 없어졌고요, 발해 시대의 탑으로는 이 영광탑이 유일하게 남아있습니다.”

스님은 산 아래에 펼쳐진 혜산시를 바라보았습니다. 푸른 언덕 아래로 길게 조성된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도 이제 건물을 지어서 색깔을 입히고있네요. 위에서 쳐다보면 중국하고 북한하고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해져 가고 있어요.

혜산은 본래 '혜산진'이라고 해서 배가 올라올 수 있는 마지막 지점, 즉 가항거리입니다. 압록강을 따라 서해안에서 여기까지 배가 들어왔다는 얘기예요. 혜산진역 다음에 위연역입니다. 지금은 다 혜산시 안에 들어있지만 지명으로는 이 위를 위연이라고 해요. 위연에서는 북한이 더 가까이 보입니다.

혜산시쪽에는 승용차가 많이 다니네요. 아파트도 최근 들어 많이 새로 지어졌어요. 1년 만에 싹 다 지었습니다. 요 앞에 회색 건물이 원래 있던 건물들이에요.


제가 여기를 다니기 시작한지 1997년부터니까 딱 30년 가까이 되었는데요. 전반기 20년 동안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정말 건물 하나 안 지어질 정도로 변화가 없었는데, 김정은 시대 들어오고부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하더니 코로나 시기부터 빨리 변화하고 있습니다. 건설 경기만 보면 북한은 지금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요.”

영광탑 앞에서 장사를 하는 아주머니가 스님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해왔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매년 스님을 만나니 아주머니는 스님을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인사를 했습니다.

“잘 지냈어요? 올해 더워서 어떻게 지냈어요. 아주머니도 이제 머리가 희게 변했네요.”

“네 스님,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도 이 곳에서 장사한지 벌써 35년이 넘었네요”

스님은 기행단을 인솔해서 백두산으로 이동하기 위해 다시 차에 탑승했습니다.

“여기서 직진해서 압록강 따라 쭉 올라가면 백두산 남문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한때는 이 길로 많이 다녔는데 지금은 남북 관계가 나빠지면서 못 가고 있는 도로입니다.

가다가 한 번 더 검문소가 있습니다. 백두산 주봉 옆에 기생화산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2,000m 넘는 능선을 넘어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전에 이 능선에 터널이 뚫려서 이제는 예전보다 쉽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장백에서 나오는 길에도 검문소가 있어서 오늘 총 5개 검문소를 지났는데, 예상과 달리 시간 지체 없이 통과되었습니다.

백두산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이승용님에게 백두산 노래를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승용님이 말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 백두산 노래를 배워보겠습니다. 백두산 노래는 지금 차 안에서 열심히 부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백두산에서는 백두산 노래를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웃음)”

차 안에 기행단의 웃음소리가 퍼졌습니다.

노래를 하며 신나게 이동하다보니 어느새 백두산 속으로 들어와 울창한 숲 속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탈북 난민들의 통한의 길, 만강검문소

“만강검문소는 북한 난민들에게 참 피눈물 나는 곳 입니다. 당시에는 압록강 쪽으로는 비포장도로에 길도 제대로 안 되어 있었습니다. 연길로 가야지 조선족을 만날 수 있던 난민들은 주로 무송으로가는 이 길로 많이 넘어왔습니다. 압록강 쪽으로 가면 전부 한족이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길로 넘어와 조금 더 가다 보면 '만강검문소'가 나옵니다. 여기에서 대부분 잡혀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죠. 만강검문소는 난민들에게 정말 피눈물 나는 통한의 검문소였는데, 지금은 검문을 하지 않고 있네요.

우리가 구한 난민 중에 별명이 '빠삐용'인 분이 계셨습니다. 북한에서 4번 잡혀가고 5번 탈출해 온 의지의 사나이이자 불굴의 청년이었습니다. 감옥 창문을 뛰어넘어 물받이 관을 타고 내려와 탈출할 정도였죠. 그분이 그 당시에 북한에 들어가 전국으로 다니며 소식을 전해 낸 책이 바로 ‘두만강을 건넌 사람들’입니다. 개인들의 인터뷰도 있지만 그분의 기록이 절반 이상입니다.

제가 위험하니 북한에 그만 가라고 말렸지만, 그분은 자신이 한 사람이라도 더 돕고 북한 내부의 소식을 알려 인도적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100달러짜리 지폐를 돌돌 말아 비닐종이에 싸서 삼킨 뒤, 북한에 들어가 배변으로 꺼내 쓸 정도로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분을 처음 만난 곳은 이 터널의 입구 쯤이었습니다. 차로 오다 보니 완전 거지 차림이었는데, 가방을 뒤져 보니 쓰레기통에 버려진 음식을 모아 넣고 있더군요. 난민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이 마지막으로 북한에 들어간 뒤 소식이 끊겼습니다. 혹시나 돌아올까 싶어 한국에 온 뒤에도 여러 연락처를 준비해 두었지만, 결국 잡혀갔는지 죽었는지 끝내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 길에는 이처럼 많은 한이 서려 있습니다.

'소리 없는 전쟁'이 남긴 역사적 심판

만강검문소 동네는 지금 백두산 여행의 기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아무것도 없이 경비 초소와 벌목공들만 살고 있던 곳이었습니다.

2000년대 동북삼성의 난민 실패를 조사했을 때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민은 최소 12만에서 최대 30만 명에 달했습니다. 그 후 한국으로 온 분들도 있고 중국에서 신분을 세탁해서 사는 분도 있으며, 대다수는 북한으로 되돌아가거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국에는 현재 약 4만 명 정도가 들어와 있습니다.

장백에서 만난 탈북 난민 중 한 분은 대전에서 우연히 마주쳤는데 몇 년 후에 토론토 강연장에서 또 마주치기도 했습니다. 자식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캐나다까지 왔다고 했어요. 참 수많은 사람이 죽고 고통을 겪었지만, 이렇게 의지 하나로 전세계를 누비며 살아남은 분들도 계십니다.

과거 일제강점기 때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온 수많은 나그네들을 위해 도문 일광산 아래에서 수월 스님이 고갯길 나무 위에 주먹밥을 매달아 놓고 짚신을 놓아두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난민을 돕던 일 역시 60~70년 전 우리 선배들이 했던 일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한 북한 정부는 물론이고, 이를 외면했던 당시 한국 정부의 지도자들 역시 역사적 심판을 받아야 마땅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불렀습니다. 전쟁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아무런 아우성이 없는 조용한 전쟁이자 조용한 학살이었습니다.”

백두산 자연림 길을 지나며

이 길을 따라 1시간 반 정도 달리면 이도백하가 나오고 '북파' 코스로 백두산에 오르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서파, 남파, 북파 세 갈래 길로 백두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비록 관광 도로로 넓어져 과거 숲속을 바로 달리는 기분은 줄었지만, 지금 자연림 속을 달리는 최고의 코스를 지나고 있습니다.

백두산에 왔기 때문에 백두산에 대해서 잠깐 먼저 공부를 하겠습니다.

백두산은 한반도와 북경 이북, 동북삼성, 연해주를 포함한 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그래서 '백두산 아래'라는 말은 이 주위 전체가 백두산 아래에 속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봐야 합니다.

백두산 정상은 16개의 봉우리로 되어 있는 데 북한 쪽에 8개, 중국 쪽에 8개가 있습니다. 16연봉을 따라 오르내리며 한 바퀴 돌려면 하루 만에는 못 돕니다. 백두산의 최고봉은 장군봉(2,750m)으로, 현재 북한 땅에 있습니다.

천지의 크기는 남북으로 4.85km, 동서로 3.35km로 타원형입니다. 호숫가를 따라 한 바퀴 도는 둘레는 14.4km이고, 수면의 높이는 해발 2,189m입니다.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383m로, 평균 수심이 깊어 어마어마한 양의 담수가 고여 있습니다.

천짓물은 갇혀 있지 않고 북쪽으로 터져 있습니다. 이 물꼬를 '달문'이라고 합니다. 달문으로 흘러나온 물이 약 1.25km를 경사지게 흘러내려 가는데, 이 물줄기를 '승사하'라고 부릅니다.

승사하를 따라 흐른 물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장백폭포(비룡폭포)입니다. 높이가 68m에 달해 수량도 풍부하고 장관을 이룹니다. 이 물은 '이도백하'라는 골짜기를 따라 흘러갑니다. 이 물이 흘러 송화강이 되고, 송화강은 다시 흑룡강으로 이어집니다.

8월은 산이 높아서 바람이 불면 상승기류로 구름이 생기고 안개가 자주 낍니다. 그래서 아래쪽 날씨가 맑아도 천지는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날이 더 많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백두산에 들어와 있습니다. 백두산에 들어와 있는데 자꾸 백두산을 못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아직 백두산 천지를 못 봤을 뿐이지, 여러분은 백두산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합니다 (웃음)”

오늘은 기행단의 숙소위치가 각각 떨어져 있어서 저녁강의 시간에 한데 모일 장소가 없었습니다. 스님은 지금 이동 하면서 저녁강의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저녁 강의 주제는 '북한의 식량난과 북한 사회'입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는 한반도 남쪽은 주로 식량 수탈을 위한 농업 기지로 삼았고, 북쪽은 중공업과 군수공업 기지로 개발했습니다. 그래서 북쪽에 수풍댐, 장진댐, 허천댐, 부전댐 등을 만들어 수력발전을 일으키고 흥남, 청진 등지에 중화학 공장을 세웠죠.

그 결과 해방 후 남북이 분단되었을 때, 공업이 발전한 북한이 경제력 면에서 유리한 편이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북한은 소련을 배경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이 안정적으로 주도권을 잡았고, 남한은 일제 잔재의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민중의 반발이 크고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김일성은 남로당의 주장을 바탕으로 6·25전쟁을 일으켰습니다.

6·25전쟁 한 달 만에 낙동강 전선을 제외하고 남한 전역이 점령되었으나, 미군과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국면이 전환되었습니다. 유엔군과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중국이 미국의 침공을 중국이 원조한다는 '항미원조'를 명분으로 6·25전쟁에 참전하면서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서로에게 엄청난 피해를 남긴 채 휴전으로 끝났습니다.

처음에는 북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쟁 후 북한은 1960년대까지 빠르게 재건을 이루어 이른바 '대동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빠른 경제 성장을 보였습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박정희 정권이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1970년대 들어서 남북 간 경제 규모는 비슷해졌습니다. 힘에 의한 통일이 불가능해지자, 1972년 최초의 남북 대화인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습니다.

이후 남한은 미국과의 관계 및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으로 크게 발전한 반면, 북한은 사회주의 권역의 경제 침체와 80년대 말, 90년대 초 동유럽 사회주의 블록의 붕괴로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았습니다. 외환 고갈로 에너지 수입이 막히면서 전력난이 발생했고, 이는 비료 공장 가동 중단과 농업 생산량 급감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가뭄·홍수 등 자연재해와 김일성 사망, 김정일 집권이라는 정치적 혼란이 겹치면서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라 불리는 극심한 식량난이 북한을 덮쳤습니다. 첫 번째 식량난을 겪은 사람들은 함경도 공업지대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식량 배급이 중단되어 이들이 굶어 죽는 일이 벌어진 것이죠. 조금 더 시간이 흐르니까 농업지대에 있는 사람들이 굶어 죽기 시작했고, 시간이 더 흐르니까 노동당 당원까지 굶어 죽기 시작했습니다. 굶어 죽는 일이 북한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1970년대에 북한이 남쪽보다 경제가 괜찮다고 알고 있었어요. 그때는 탈북하는 사람이 없고 월북하는 사람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북한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설마 굶어 죽겠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한 1, 2년은 긴가민가 하면서 지나갔습니다.

내 눈으로 보았던 어린아이의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저는 멈출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1995년도에 북한의 현실을 직접 목격하고, 북한에 대한 자료를 미국에서 구해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북한의 식량 부족 현상이 심각하다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1996년도에 북한 돕기 운동을 시작하려고 준비를 했는데 그때 ‘강릉 잠수함 사건’이라는 것이 터졌습니다. 북한에서 남쪽에 비밀공작원을 파견하는 것이 들통이 나서 남북관계가 초 긴장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국내에서 북한을 지원하던 모든 사업들, 하물며 적십자 사업까지도 모두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가 북한 인도적 지원 운동을 하자고 나서는 것에 대해 주위에서는 모두 말렸습니다. 이러다가는 국민의 저항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었죠.

그러나 그때 제 생각은, 압록강변에서 내 눈으로 보았던 그 어린아이의 굶주림이 해결되지 않았는데, 그 아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강릉 잠수함 사건을 이유로 북한 돕기 활동을 중단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저 그 아이에게 음식과 약을 제공하려는 목적 뿐 이었으니까요. 그 아이가 강릉 잠수함 사건이 무엇인지나 알겠어요? 잠수함 사건이나 특공대가 파견된 것은 그 아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잖아요. ‘그 아이의 배고픈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닌데 중단한다면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이렇게 생각해서 저는 북한 돕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강경하다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 아마 그 때문인 것 같아요.(웃음)

당시 저는 역사기행을 하면서 중국에 아는 조선족 분들이 있었고, 중국에서 조선족 사기 피해 사건이 많이 발생한 시기에 피해자들을 도와주다 보니 중국 연변 조선족 사회에 많은 지인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북한 난민 돕기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북한의 식량난을 한국이나 미국 사회에 알려서 국제적으로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으로 넘어온 북한 난민들의 실태를 조사해서 유엔에 보고하고, 난민들을 보호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선은 제가 북한 난민들을 도우면서 동시에 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UN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북한의 식량난은 인도적 지원으로 해결하고, 중국에 있는 난민들의 삶은 이들이 난민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UNHCR을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중국에서는 우리의 활동을 간첩 행위로 규정하고 좋은벗들 활동가들이 중국 공안에 체포돼서 옥고를 치르고 추방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북한이 식량난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끊임없이 밝히는 작업을 이어갔습니다.이를 위해 북한 난민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인터뷰하고 통계 숫자를 작성하여 미국에 지속적으로 정보를 제공했습니다.

결국, 북한과 대화가 시작되고 6자회담으로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 정부(USAID) 책임자와 의회, 국무성, 유엔에서 움직이기 시작했고, 한국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결국 대북 인도적 지원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과 북한의 대화도 시작되고, 결과적으로 6자회담으로 연결되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는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기였기에 가능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사람들이 식량을 구하러 다니면서 이동을 하게 되니, 북한의 통제가 자연스럽게 이완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난민들과 정보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이죠. 우리도 북한 안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반 정보를 알 수 있었고, 지금의 이러한 북한 사회의 변화도 오게 된 것입니다.

‘북한’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그 속에 살고있는 2,500만명의 ‘북한 주민’을 기억해야합니다
북한의 민간인과는 소통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소통할 수 있는 창구는 북한 정부 대 한국 정부 또는 한국 민간단체의 관계 밖에 없어요. 그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민간 NGO 단체가 북한 주민과 접촉할 수 있었다는 것, 북한에 대한 지원이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지고 대책도 세울 수 있었던 점, 즉 대북정책에 있어서 민간의 영역이 생겨난 것은 고난의 행군 시기에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남한 사회 안에서도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하자’는 것과 ‘우리가 보내준 식량이 총알 되어 돌아온다’ 하는 이념 갈등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당시 북한에 대한 남쪽 보수세력의 증오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많은 장애가 되었고, 한국의 대학생 운동권 중에 소위 통일세력이라고 하는 진보세력은 북한 주민이 굶어 죽는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한 주민의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이념적 갈등에서 눈을 뜨게 되고 북한 주민들의 고통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대량 아사 사태는 많은 희생을 치르고 어느 정도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압록강, 두만강 너머에 있는 북한 땅을 봤습니까? 우리는 단순히 북한 땅을 보는 게 아니라 ‘북한’이라는 이름 속에 묻혀 있는 ‘북한 주민들’ 을 봐야합니다. 그곳에 살고 있는 2,500만의 사람, 그 사람들의 고통을 우리는 봐야 합니다.

그런 얘기를 조금 하고 싶었습니다. 젊은이들은 까마득한 무슨 옛날 얘기 하는 것 같죠? (웃음)

자, 이제 식당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수고하신 기사님들과 여행사 조신에게 감사 박수를 부탁합니다. 오늘 14시간이나 운전해 주셨어요. 원래라면 밤 12시에 도착 했어야하는데 8시에 도착했습니다.”

강의를 하는 동안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있었고, 이도백하에 도착했습니다

식당에 따뜻한 음식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하루종일 이동일정에 새벽시장에서 장 봐 둔 것으로 요기한게 전부 였던 터라, 저녁식사를 맛있게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스님은 식당에서 오늘의 저녁강의를 이어서 진행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다같이 모여서 강의할 장소가 마땅치가 않습니다. 남은 저녁강의는 이 자리에서 진행하고 숙소로 이동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드는 의문점이나 궁금한점이 있는 사람은 질문 하시기 바랍니다.”

청년 한 명이 번쩍 손을 들었습니다.

광활했던 고구려 옛 영토를 지금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봐야 할까요?

“스님 안녕하세요. 질문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어제 고구려 영토를 다니면서 고구려인들의 기상을 느꼈습니다. 정말로 여기에서 우리 민족이 살았었다는 것을 눈으로 보니, 지금도 굉장히 벅차고 잠이 안 올 정도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입니다.

지금의 한반도뿐만 아니라 고구려 땅까지 포함하는 우리나라 지도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지도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모두 한반도 중심의 지도만 있고 고구려 땅을 포함하는 큰 지도는 없었습니다. 과거 우리의 영토였던 이 땅들이 포함된 우리나라 지도는 없을까요? 큰 지도를 가지고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동북아에 오지 않은 일반 청년들에게도 이 감동을 전하고 싶어서 여쭤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세상은 항상(恒常) 하지 않고 늘 변합니다. 변하기 때문에 ‘나’ 라는 사람도 한 곳에 살지 않고 이동해 갑니다. 그런데 자꾸 지나간 과거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지금의 현실을 보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영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따뜻한 데를 찾아서 이동을 하든, 적에게 쫓겨서 이동을 하든, 역사 속에서는 이동을 하게 돼 있어요. 그런데 과거에 살았던 것을 빼앗겼을 때는, 힘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 되찾는 게 가능합니다.

그러나 빼앗긴 것도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버리면 되찾는 것도 단순한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갈등도 똑같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그 땅을 ‘2천년 전에 우리가 살았던 곳이다’ 라면서 들어가지만 그 땅에서 2천년 동안 살아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어떻게해요? 1백년 산 것도 아니고 2백년 산 것도 아니고, 2천년이나 살았잖아요?

이건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영토 분쟁은 지금 자기가 점령했다고 무조건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지만, 과거에 내 소유였으니 지금도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에요. 그렇기 때문에 이 둘 사이에서 우리는 평화적이고 합리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만약 ‘과거에 내 것이었으니 지금도 내 것이다’라고 하면 전 세계가 지금 난리 나겠죠. 인디언도 아메리카 대륙이 전부 자기네 땅이라고 해야 될 것이고, 호주 원주민들도 모두 자기네 것이라 주장할 것이고, 베트남 사람들도 원래 광동성에서 살았으니 그 일대를 다 자기네 땅이라 할 것입니다. 수많은 문제가 발생할 거에요.

우리가 옛날에 그 곳에 살았다고해서 ‘여기는 원래 우리 땅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세계사적으로 혼란을 야기시킬 위험이 있고, 평화를 크게 저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힘이 있다고 남의 땅을 침략해서 쥐고있다고 자기 땅이라 주장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사이에서 적절한 조화 즉, ‘시기가 어느 정도 됐는지, 어떤 방식으로 취득했는지’ 이런 것들을 고려해서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가는 게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여기가 지금 누구의 땅인지를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옛 선조들이 살았고, 그때 역사적 사건은 이런 것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떤 정신을 갖고 살아갔는가? 이런 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새긴다면 ‘땅을 찾는다’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되겠는가?’입니다.

지금 우리는 광활했던 고구려 영토를 되찾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자칫하면 지금의 한반도에서 북한 영토를 영원히 잃어버릴 수가 있어요. 북한을 계속 적대하니까 북한도 자기 살려고 지금 두 개의 국가론을 주장하잖아요? 두 개의 국가가 된다는 건 별개 국가가 아니겠습니까?

만약에 북한이 중국이나 러시아와 군사 동맹을 맺었다면 유사시에 북한에 대한 우선권이 한국에 있겠습니까? 중국이나 러시아에 있겠습니까? 중국이나 러시아에 있겠죠. 한국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주도권이 미국에 있을까요? 북한에 있을까요? 미국에 있겠죠. 그러니까 이 두 개의 국가론은 현실의 평화를 지키는 데는 매우 필요하지만 어떤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는 우리의 영토를 잃어버리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겁니다.

역사는 늘 변하니까 과거에는 우리가 그 곳에 살았지만 지금은 또 다른 소유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질문자처럼 생각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이것 원래는 내 것이다’ 하는 방식은 분쟁을 야기합니다. 그 면을 유의해야 됩니다. 그러나 생각을 크게 갖는것이 필요하고, 역사를 보는 시야를 넓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옛날에는 주 생산물이 거의 토지에서 나왔기 때문에 영토가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땅에는 많은 광물 자원이나 식량 자원이 있기 때문에 여전히 중요하긴 하지만 미래 사회에서는 영토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즉, 기술 같은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영토가 비록 작더라도 다른 것들을 개발하면 작은 영토를 커버할 수 있는 방법도 있어요.

대륙의 역사를 쭉 봤는데, 몽골이 중원을 지배할 때도 있었고, 반대로 몽골이 망해서 몽골 땅까지 모두 빼앗긴 때도 있었죠. 만약에 우리가 중국을 지배했다면 그 시기 백 년 이백 년은 굉장히 좋은 일이겠죠. 그러나 영원히 안 가고 망하면 한반도까지 다 중국 땅이 될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일은 규모가 너무 작아도 존재하기 어렵지만 크다고 해서 꼭 유리한 것도 아니에요. 그런 면에서 영토 문제도 너무 좁게 생각하면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닙니다.”

오늘은 종일 이동하는 일정이었지만, 그 어떤 유적지를 둘러보았을 때보다 깊은 감동을 느낀 하루였습니다. 30년간 역사기행을 이끌어 온 스님의 원력이 담긴 경험담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좋은벗들'의 숨은 활동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기행단은 식당에서 나와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해 각자 오늘 묵을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스님도 오늘 하루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휴식을 했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넷째날입니다. 다 함께 백두산에 오르는 일정으로 하루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2026 9월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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