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8.8. 동북아역사기행 첫째날_ 요녕성박물관, 백암산성, 환인도착
“잃어버린 우리 역사를 찾아가는 여행, 동북아역사대장정”

안녕하세요. 명상수련과 안거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부터 스님의하루도 발행을 시작합니다.

스님은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온라인으로 1000여명과 함께 명상수련을 하고 봉화수련원으로 이동하여 50여명의 공동체 실무자들과 함께 안거를 보낸 후, 동북아역사기행 사전준비를 하기 위해 심양으로 먼저 출국했습니다.

오전 9시경, 143명의 기행단이 탑승한 비행기가 중국 심양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중국 해관은 다른 여행객들이 다 지나갈때까지 역사기행단을 기다리게 하는 등 첫날부터 불편을 주기 시작해서 입국심사 시간이 한 시간 이상 길게 소요되었습니다. 스님도 어제 해관에서 이유없이 1시간 이상 세워놓고 다른 여행객이 다 지나간 후에 마지막으로 통과시켜주었다고 했습니다. 불편하게 해서 오지말라는 것인지 방문객에 대한 기본 예의도 갖추고 있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긴 입국심사를 모두 마치고 출국장으로 나가니 해외지부 아시아지회 정토행자들이 환영문구를 들고 환한 미소로 동북아역사기행단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스님도 공항에 나와 역사 기행단을 맞이해준 아시아지회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행단을 공항에서 환영해 주었습니다.


공항 밖으로 나가자 이번 6박 7일 대장정을 함께 할 3대의 버스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버스에 짐을 싣고 탑승한 후 오전 10시 30분경 요녕성 박물관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스님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 버스 3대에 나뉘어 이동중인 기행단에게 박물관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해 주었습니다.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하기에 앞서서 시대별로 내부 전시 구성이 어떻게 되어있는지, 기행단의 관람 동선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과, 요하문명과 홍산문명의 의의, 그리고 한국 고대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곳은 요녕성박물관입니다. 요녕성박물관은 요녕성 지역에서 출토된 과거의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 지역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옥기시대, 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박물관은 3층 건물인데, 시대별 유물 전시는 주로 3층에 있습니다. 우리는 고대 유물 전시관을 차례대로 보고 내려오겠습니다.

고대 유물 전시관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문명이 시작된 시기, 두 번째는 하·상·주 시기, 세 번째는 전국시대부터 수·당시대까지, 네 번째는 요·금시대, 다섯 번째는 원·명·청시대입니다.

현재까지 발견된 유물과 유적으로 보면, 발해만 연안과 요하 상류 지역에 황하문명보다 1-2천 년가량 앞선 유물과 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이 문명을 ‘홍산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발해만 연안의 대릉하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었다고 해서 ‘발해연안문명’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는 요하 유역에서 발달한 문명이라는 의미에서 현재 '요하문명'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습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관에서는 만리장성 이북은 이민족인 북방 민족의 땅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만리장성 이북에서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 유적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기존의 역사관을 수정하게 되었습니다. 황하문명만을 중국 문명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황하문명과 요하문명을 함께 중국 문명의 기원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우리 고대사의 배달나라 단군조선 시기와 연결해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옥기시대는 배달나라 시기와 겹치고, 청동기 문화가 고도로 발달했던 시기는 고조선 시기와 겹칠뿐 아니라 그 활동 영역 역시 요하와 발해만연안 일대도 서로 겹친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이 지역의 고대 문명을 배달과 단군조선의 역사와 연결해서 살펴보기도 합니다.

박물관에 가보면 두 번째 전시관에는 '하·상·주 시대'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만 보면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기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유물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기에 이 지역에서 만들어진 유물이라는 시간적 구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상·주나라가 존재했던 시기에 요녕성 지역에서도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고, 그 유물들이 이곳에서 출토되었다는 뜻 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이 정도를 염두에 두고 전시관에 들어가서 유물을 살펴보겠습니다.”

버스는 약 40분 정도 이동하여 오전 11시경 요녕성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박물관에는 매우 사람이 많았습니다. 스님은 기행단을 안내하여 요녕 지역의 구석기 유물 전시관부터 전체적으로 쭉 둘러보았습니다.




약 1시간 가량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차에 탑승하니 따뜻한 옥수수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행단은 얼굴만한 크기의 옥수수를 손에들고 즐겁게 점심식사를 시작했습니다.

버스는 백암산성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기행단에게 동북아 역사기행 전체 일정과 여행 중 주의해야 할 점들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번 동북아역사기행 일정은 6박 7일이고, 주요 내용은 역사유적지 답사와 자연 풍광입니다. 역사 유적지 답사는 고구려 시대 유적과 발해 시대 유적, 그리고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볼 예정입니다. 오늘과 내일은 주로 고구려 유적을 둘러보고, 그 다음은 발해 유적을 보고,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갈 예정입니다. 자연풍광으로는 압록강을 따라 백두산까지 올라가는 일정과 백두산에 오르는 일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일정을 보내고 마지막 날에는 다시 심양으로 돌아와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스님은 이번 여행에서는 무엇보다 예상하지 못한 통제와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고 당부했습니다.

"우리가 다니는 곳은 북경이나 상해 같은 일반적인 관광지가 아닙니다. 중국에서도 동북 3성, 그중에서도 대부분 북한과 접경한 국경 지역이고, 또 일반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다닙니다. 그래서 중국 공안의 통제와 감시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작년의 경우를 보면 일정에 잡혀 있어도 가지 못한 곳이 많았습니다. 지금 가고 있는 백암산성도 통제 지역입니다. 압록강변도 그렇고 독립운동 유적지도 그렇습니다. 가서 못 보고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면 당연히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웃음)"

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에는 구체적인 생활수칙을 하나씩 알려주었습니다. 주의사항에 대한 설명을 마친 스님이 참가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잘 들었습니까?“

"네.“

"자, 이제부터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같이 헤쳐 나갑시다.(웃음)"

일정에 대한 설명을 마친 뒤에는 우리가 여행하는 중국과 동북 3성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번에 여행하는 동북 3성은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입니다. 흔히 만주라고 부르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중국에서도 중요한 곡창지대로, 버스를 타고 가면서 주변을 바라보면 넓은 옥수수밭과 논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한동안 설명을 이어가던 스님이 조용한 버스 안을 둘러보며 웃으며 말했습니다.

"다 자고 있어요? 듣는다고 조용한 게 아니라 잔다고 조용한가?"

차 안에 웃음이 번졌습니다. 버스가 백암산성에 가까워지자 스님은 본격적으로 고구려 역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성벽 한 단에 새겨진 고구려의 지혜, 백암산성

"지금 우리가 가는 백암산성은 옛날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입니다. 고구려가 대륙을 경영할 때 중심지가 요동성이었고, 그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이 백암산성입니다.

고구려는 수도를 환인과 집안의 산악지역에 두었지만, 대륙 경영의 중심지로 요동성을 크게 발전시켰습니다. 그리고 평지에 자리한 요동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여러 산성을 쌓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백암산성입니다.

백암산성은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 가운데 성벽의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곳입니다. 남아 있는 성벽 가운데에는 높이가 8미터에 이르는 곳도 있어서 고구려 산성의 웅장함을 직접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웅장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성벽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백암산성은 동쪽이 태자하를 낀 절벽으로 되어 있어서 별도의 성벽이 거의 필요하지 않았고, 공격에 가장 취약한 서쪽에는 성벽을 높고 두껍게 쌓았습니다. 남쪽에는 성문이 있었습니다.

성벽을 쌓은 방식에도 고구려의 축성 기술이 담겨 있습니다. 아래쪽은 계단식으로 쌓아 안정성을 높이고 위쪽은 수직에 가깝게 쌓아 적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돌과 돌을 서로 맞물리게 쌓아서 일부가 무너지더라도 성벽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게 했습니다.

또 성벽을 공격하는 적을 옆에서 방어할 수 있도록 돌출된 '치'를 만들고, 가장 취약한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옹성을 두었습니다. 성벽 위에는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여장'을 설치했습니다.

산성 안에는 물을 구할 수 있는 샘터도 있습니다. 평상시에는 군인들이 주둔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임시로 피신하는 방어용 산성이었습니다. 높은 곳에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 망루가 있었고 그 망루를 보호하기 위해 다시 내성을 두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이곳을 '연주성'이라고 표시하고 연나라 시대의 성이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이 곳은 고구려의 백암산성입니다. 성을 석회암으로 쌓아서 돌의 색깔이 희기 때문에 '백암산성' 또는 '백암성'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언제 처음 축성했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547년에 성을 수리했다는 기록과 549년 돌궐의 침입을 막아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차창 밖으로 백암산성이 가까워졌습니다. 스님이 설명을 마무리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명을 길게 하는 이유는 현장에 가서 설명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얼른 가서 사진 한 장 찍고 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잠시 후 스님이 창 밖을 가리켰습니다.

"여기 팻말에 연주성이라고 써놓았죠? 연주성이 바로 백암산성입니다."

버스는 고구려의 옛 성벽을 향해 계속 달려갔습니다.

오후 1시30분 백암산성 앞에 도착했으나 중국 정부의 문물보호국에서 진입을 막아 올라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개인입장객은 드나드는 눈치였으나 중국정부에서 백암산성에 가는 진입로에 줄을 쳐놓고 기행단의 진입을 막았습니다.

성 안에 들어가지 않고 입구까지만 갔다 오겠다. 밖에서만 보겠다고 제안했지만 무조건 안된다고 했습니다. 아쉽지만 돌아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님은 기행단에게 멀리에서라도 백암산성을 보여주기 위해 다시 차를 돌려 성이 보이는 공터에 차를 대고 기행단을 차 밖으로 모이게 한 후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백암산성은 현재 남아있는 고구려 성 중에 가장 잘 남아있는 성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기를 쓰고 가보려는거예요. (웃음) 안에 들어갈 수 없다면 밖으로 돌아보겠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니 방법이 없습니다. 자, 시간만 낭비하지 말고 이 곳에서 백암산성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고 이동하겠습니다”

스님은 차에 탑승해서 기사들에게 요청하여 약간 돌아가더라도 백암산성의 전체적인 모습을 멀리에서나마 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백암산성을 둘러본 뒤 오후 2시 30분 버스는 고구려의 첫 수도였던 환인을 향해 출발했습니다.스님은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요녕성의 지형을 짚어가며 이 지역의 역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심양에서 동쪽으로 가면 무순이 있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단동이 있습니다. 남서쪽으로 내려가면 요양, 안산을 지나서 대련까지 이어집니다.”

스님은 심양 부근을 고구려의 개모성과 연결해 설명하고, 지금의 요양은 요동성, 안산 지역에는 안시성이 있었으며, 요동반도 끝의 대련에는 비사성이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성들이 길게 이어져 고구려가 외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선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스님은 우리 고대사의 큰 흐름을 환인과 환웅의 배달나라에서 단군의 조선나라로, 다시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계승 관계를 설명하고, 고구려는 옛 고조선 지역에 설치된 한나라의 4군을 밀어내며 동북지역의 강국으로 성장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는 그 영역에서 발해가 일어났고 이후 동북지역에서는 거란, 여진, 몽골등 여러 북방민족이 주도권을 이어간 반면, 한반도에서는 신라와 고려, 조선으로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와 중국 및 여러 북방민족의 역사를 함께 이해해야 동아시아 역사의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설명이 잠시 끝나자 스님이 물었습니다.

“잘 들려요?”

“네.”

버스는 계속 동쪽으로 달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은 고구려의 수도에서 대륙으로 진출하던 통로였습니다. 환인에서도 요동성으로 나왔고, 집안에서도 요동성으로 나왔습니다. 고구려가 강성했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는 수도에서 이 길을 따라 요동으로 나와 대륙을 경영했습니다.

반대로 중국과 북방민의 각 세력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에도 먼저 요동성을 공격한 뒤 이 길을 따라 산속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국내성으로 들어왔습니다. 산악지형 덕분에 대부분의 침략을 중간에서 막아냈지만 때로는 적군이 수도까지 침략해서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과거 역사의 현장의 길 위를 달리고 있는 것이예요.”

잠시 후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자면서 가기엔 좀 아깝다.”

차 안에 다시 기행단들의 웃음이 번졌습니다.

스님은 앞으로 고구려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 역사의 전체 흐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며 삼황오제, 하·상·주, 진·한, 위진남북조, 수·당, 송·원·명·청등 중국 오천 년 역사를 정리하는 역사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우리 고대사의 시작 환인·환웅의 전승에서 시작해 오늘날 남북 분단에 이르기까지 우리 역사의 큰 흐름을 설명했습니다.

“역사를 공부할 때 중국 역사만 따로 놓고 볼 수도 없고, 우리 역사만 따로 볼 수도 없습니다. 또 몽골족, 선비족, 거란족, 여진족 같은 북방민족들의 역사도 함께 봐야 동아시아 역사가 제대로 보입니다. 이번 동북아 역사기행에서 실제로 눈으로 보고 발로 밟는 중심은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고구려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려면 부여를 봐야 하고, 부여를 이해하려면 고조선을 봐야 하며, 고조선의 기원을 설명하려면 다시 배달나라에 대한 이야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길고 긴 역사 이야기를 들으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고구려의 첫 수도 환인이 한층 가까워져 있었습니다.

오후 4시 20분,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식당에 들렀습니다. 백암산성에서의 일정이 축소되면서 예상보다 일찍 식당에 도착하게 되어 음식을 기다리며 참가자와 내빈 소개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과 기행단은 식사를 마치고 오후 5시 40분 환인으로 다시 이동하여 오후 8시,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참가자들에게 숙소에 짐만 두고 강당에 오도록하고, 8시 30분부터 저녁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해서 먼 곳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도로 사정이 좋아서 일찍 도착했다기보다 백암산성 일정이 취소되면서 예상보다 조금 빨리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첫날이라 많이 피곤하실 텐데, 이번 답사를 시작하기 전에 전체 여정과 답사의 관점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어서 먼저 강의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동북아역사기행을 하는 이유

인도성지순례를 가도 부처님께서 살아가셨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너무 오래전입니다. 그래서 막상 가보면 생생하게 남아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별로 없습니다. 부처님의 생애나 경전에 기록된 내용을 잘 모른 채 가면 ‘맨날 부서진 벽돌더미만 보면서 다니네’하는 생각이 들기 쉽지만, 미리 부처님의 일생과 경전에 기록된 내용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면 곳곳에서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만큼 더 큰 감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우리 동북아역사기행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중국 땅에 있는 우리 선조들의 유적도 일부 유적을 제외하면 크게 볼거리가 있는 편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나라 영토 안에 있었더라면 발굴하고 복원도 해서 잘 관리해 놓았을텐데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저 먼 변방에 살던 소수 민족의 역사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리가 소홀하게 된 부분도 있겠지요.

그래서 역사기행도 그 취지를 이해하고 관점을 바르게 갖고 다녀야 피곤하다거나 끌려다닌다는 느낌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다니는 곳마다 중국 공안의 감시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늘 긴장하며 다니기 쉽습니다. 그러니 첫날인 오늘 역사기행의 취지를 바르게 이해하시고, 앞으로 답사 동안 고생하며 다닌 성과를 얻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는 민족의 성산이라고 불리는 백두산과,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흐르는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가 우리 민족이 출발한 곳이라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은 현재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높은 산입니다. 우리 민족은 백두산을 머리에 이고 출발했기 때문에 백두산은 그저 높고 아름다운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에게 신앙의 대상이자 정신적 지주가 됩니다. 중국 사람들이 백두산을 찾는 이유는 천지가 있는 높은 산을 관광하기 위해서 방문하지만 우리에게 백두산은 의미가 다릅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백두산 주변 지역, 즉 현재 동북아시아 지역은 과거에 우리 민족이 약 6천 년 전부터 터를 잡고 살아오던 땅입니다. 그런데 세월을 흐르면서 기후변화에 따라 한반도로 이주하기도 했고, 다른 민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남쪽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처음 살던 삶의 중심 지역에서 벗어나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옛 땅을 되찾자고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아닙니다. 우리 선조들이 이 땅에서 오랜 기간 살아왔고 이 환경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정체성이 형성되었다는 점을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역사기행에서 우리 민족에 대한 애착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겨레의 얼, 민족혼의 뿌리를 돌아보는 데 의미를 두시면 좋겠습니다.

민족의 정체성을 돋우는 상고사의 올바른 이해

우리 역사 약 6천 년 가운데 그래도 약 2천 년 전 고구려시대부터의 유적은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유실된 부분도 많지만 성곽이나 무덤, 유물 등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재 발굴된 고구려의 유물이나 유적에서는 다른 민족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문화와 양식이 나타납니다. 특히 성곽이나 무덤을 쌓는 양식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가 약 30년 전에 이 역사기행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러한 양식은 고구려 사람들이 처음 고안해 낸 독창적인 것이라는 견해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중국이 요하 지역에서 유적을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하고 발굴이 진행될수록 이곳에는 황하 지역을 중심으로 한 문명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형성된, 더 발전된 문명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알려진 대로 요하 문명, 또는 홍산 문명이라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천 년 전부터 4천 년 전 사이에 형성된 문명으로 추정됩니다. 고구려의 시작을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이라고 본다면 이 문명은 고구려보다 수천 년이나 앞선 문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밌는 점은 그 무덤의 양식이 고구려와 비슷한 점이 아주 많다는 사실입니다.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방식인 줄 알았던 무덤이나 성을 쌓는 방식이 이 시대의 것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 유적의 발굴을 통해 고구려가 성이나 무덤을 쌓는 양식은 고구려인들이 독창적으로 고안해 낸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문명이나 기술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신화나 설화로만 여겨졌던 환웅의 배달나라나 단군조선 같은 우리의 상고사가 요하 문명과 연관되었다고 가설을 세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신화나 설화로만 여겨지던 단군신화 또는 배달나라에 관한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하는 유물들이 요하 문명 유적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 학계에서 정설로 받아들이거나 충분히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요하 지역에서 발굴된 유물이나 유적에는 중국의 한족 중심의 역사나 신화, 전설로 연관되는 흔적은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역사에 전해지는 배달나라나 고조선에 관한 이야기와 연결해 볼 수 있는 흔적들이지요. 현재 위서로 취급되는 환단고기에 기록된 시기나 내용에 견주어 볼 수 있는 여러 유물이 이 요하 지역에서 발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환단고기가 허무맹랑한 소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진 것입니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중국의 역사와 고사를 배우면서 우리 문명을 중국 문명의 아류, 중화 문명의 변방에 있는 소수 민족문화라고 알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문화를 변방의 아류 문명처럼 여기게 된 거예요. 그런데 단군 설화나 배달 문명의 얘기는 전혀 다릅니다. 독자적인 문명일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앞선 문명처럼 전해 내려왔습니다.

아무런 유물과 유적이 없어도 ‘이게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서 후대에 내려오는 얘기구나’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지금은 유물과 유적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설령 인정하지 않더라도 연구 대상은 삼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있어요. 저는 이게 바로 민족의 열등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도 성장했고 한류도 생기면서 어느 정도 자긍심이 생겼지만, 저는 우리 국민에게는 아직도 무의식적인 열등의식이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가 상고사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과 우리 문명이 중국 문명의 아류이고 변방 문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이 대범하면 ‘대륙적 기질’이라고 하고, 한국 사람은 ‘반도 기질’이라고 말을 하지요. 또 우리 민족성을 이야기할 때도 은근과 끈기 같은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합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무의식을 반영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왜 이런 아류 의식이 생겼을까요? 문명이 중국에서 시작되어 우리가 전수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당나라의 발달한 문명이 신라로 넘어왔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전해진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명의 시원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는 어떻습니까? 중국의 삼황 오제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고 단군신화는 허무맹랑하게 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중국과 비교하면서 만들어 낸 열등의식의 결과입니다. 단군 이야기를 조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열등의식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역사를 과장해서 우리가 앞섰다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현재 우리에게 전해지는 설화와 요하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을 함께 살펴보면,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잊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현재 발견된 유물과 유적을 중심으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얘기와 비교 연구해 보면 ‘아, 이 두 문명은 누가 더 잘났다 못났다는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뿌리가 서로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문명도 비슷한 지역에 있었지만 서로 뿌리가 다릅니다. 나중에는 가까이 살면서 교류했지만, 세계 문명의 발상지를 이야기할 때도 나일강의 이집트 문명과 유프라테스강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구분하지요. 그 이유는 문명의 시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황하강 유역의 황하문명과 요하유역의 배달 문명도 서로 다른 뿌리에서 출발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고고학적으로는 요하 지역에서 발견된 유물과 유적이 시기상 천 년에서 이천 년 정도 시기적으로 앞서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확인한다면 ‘우리가 살던 터전을 잃고 역사책이 유실되고, 삶의 터전이 바뀌면서 결국 우리의 역사를 잊어버렸구나, 그리고 그 빈 공간을 중국의 역사로 메어 왔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상고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특히 어린 시절부터 이런 공부가 이루어져야 민족 우월의식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상고사를 바르게 이해하여 열등의식을 치유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상고사를 공부할 필요가 있고, 오늘날 우리가 옛 선조들의 활동무대였던 고구려 발해를 직접 밟고 다니면서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우리민족의 독립운동사를 찾아서

두 번째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입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서 아직도 많은 피해의식과 열등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단순히 일본의 침략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임진왜란 때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은 싸워서 물리쳤습니다. 아무리 피해를 많이 입어도 마지막에 이기면 피해는 남아도 피해의식은 크게 남지 않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과 싸워서 이긴 결과로 해방되었다고 배우지 않고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우리가 해방되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니 무의식 속에는 '우리는 우리 힘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하는 생각이 남게 된 겁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제의 침략에 끊임없이 저항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일본을 우리 힘만으로 물리치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사는 실제 독립운동의 일부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온전히 복원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해방된 민족'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저항했는지를 알게 되면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도 조금씩 치유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일본이 과거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진솔하게 사과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피해의식을 스스로 치유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잊히고 가려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제대로 찾아야 합니다.

이번 역사기행에서 독립운동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단순히 '일본이 우리를 침략했다'는 사실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침략에 맞서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결합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민주주의

세 번째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이것은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과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서양에 침략당했다는 피해의식보다는 '서양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는 열등의식을 오랫동안 가져왔습니다. 어릴 때부터 노란머리에 파란눈 인형을 갖고 놀면서 우리가 접한 아름다움의 기준도 서양 중심이었고, 학교에서 배우는 학문과 과학기술도 대부분 서양에서 들어왔습니다. 민주주의를 비롯한 정치제도도 서양에서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서양 사람이나 서양 문명을 보면 주눅이 들게 되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과학기술도 발전하고, BTS를 비롯한 한류 문화가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예전처럼 서양의 평가에만 매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우리 것이 최고다' 하고 주장한다고 열등의식이 극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양을 열심히 따라 배워서 어느 정도 그 수준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따라 배우는 것만으로는 앞서갈 수 없습니다. 이제는 창조적인 사고가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원래 있었던 것과 외부에서 들어온 것을 잘 결합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오늘날 한류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류는 서양 음악을 그대로 흉내 내서 세계적인 문화가 된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문화와 우리의 전통문화가 만나면서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 것이죠.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를 서양에서 배워 왔다고 생각하지만 우리 역사 안에도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생적인 민주 정신이 있었습니다. 동학의 후천개벽사상은 임금이 나라의 주인이던 시대에서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했습니다. 이것은 서양의 민주주의를 배워서 나온 생각만은 아니었습니다. 동학혁명과 3·1운동,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민중이 스스로 권리를 찾으려는 흐름으로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니 서양에서 들어온 민주주의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자생적으로 발전해 온 민주 정신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둘이 만나 새로운 민주주의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것을 무조건 높이는 것도 아니고, 서양의 것을 무조건 따라가는 것도 아닌 자세가 필요합니다. 배우되 주눅 들지 않고, 우리의 것을 살리되 우월의식에 빠지지 않는 것, 이것이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잃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찾아서, 동북아역사대장정

이렇게 보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세 가지 열등의식이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는 상고사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중국 문명의 변방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우리 문명의 뿌리를 사실에 근거해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입니다. 식민지배의 피해만 기억할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던 우리의 저항과 독립운동의 역사를 온전히 복원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입니다. 서양을 따라 배우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의 전통과 외부에서 들어온 문명을 창조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이번 역사기행에서는 먼저 첫 번째인 상고사의 문제, 즉 우리 문화의 뿌리에 대한 열등의식을 치유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고구려와 발해의 옛터를 다니면서 단순히 옛날 유적을 구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이 위대했다' 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역사의 흔적을 직접 찾아가서 사실에 근거해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발해의 옛터를 밟으면서는 우리 고대 문명의 뿌리를 살펴보고,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는 일제의 침략만이 아니라 그에 맞섰던 선조들의 저항을 함께 봅니다. 또 분단의 현실과 북한을 바라보면서는 아직 온전히 복원하지 못한 독립운동의 역사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번 역사기행을 '누가 더 위대했느냐'를 확인하는 여행으로 보면 안 됩니다. 중국보다 우리가 앞섰다거나, 일본보다 우리가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여행도 아닙니다. 열등의식을 버린다는 것은 우월의식을 갖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왜 잊어버리게 되었는지, 지금 남아 있는 흔적은 무엇인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우리는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조금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도 피해의식에만 머물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되고, 다른 문명을 대할 때도 주눅 들거나 반대로 지나친 우월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역사기행은 단순히 과거를 공부하는 여행이 아닙니다. 잊어버린 역사를 찾아가면서 오늘 우리의 열등의식을 치유하고, 앞으로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를 배워 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님은 밤 10시가 다 되어 강의를 마치고 참가자들은 조별로 하루 나누기를 진행했습니다. 길고 긴 동북아역사기행 첫 날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홀본산성과 환도산성에 찾아갈 예정입니다.


2026 9월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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