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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스리랑카 평화순례 3일째 아누라다푸라로 이동을 하여 주요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자프나로 이동했습니다.
스님은 새벽명상과 정진을 하고 오전 6시에 숙소 근처를 산책했습니다. 길을 따라 위쪽으로 걸어가보았습니다.

걷다가 보니 큰 바위산이 보여 올라갔습니다. 어제 방문했던 담불라 동굴사원이 있던 산처럼 화강암으로 된 산이었습니다. 산 위에 올라가니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스님은 잠시 앉아 산 밑을 바라다보며 휴식을 했습니다.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니 오전 7시가 되어 스님 일행은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7시 40분 차량에 탑승하여 아누라다푸라로 출발하였습니다.

이동하는 차량에서 스님은 종교인분들에게 아누라다푸라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습니다.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불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입니다. 기원전 3세기경 아쇼카 왕이 자신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를 스리랑카로 보내 불교를 전하게 했습니다. 마힌다 장로가 당시 왕을 만나 불법을 전했고, 왕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스리랑카에 불교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 보름날이 바로 그 날을 기념하는 날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 행사를 열었습니다. 여러분이 오면서 길가에 천막과 상점이 많이 있는 것을 보셨을 텐데, 아마 그 행사 때문에 장이 섰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1세기경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으로 문자로 기록됩니다. 당시 인도에서는 브라만들이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했지만, 부처님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던 팔리어로 설법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은 오랫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오다가, 처음 문자로 기록된 곳이 바로 스리랑카라고 합니다.
이곳은 원래 1300년이나 계속된 고대 왕국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런데 10세기경 남인도 타밀 세력이 침입하면서 왕국이 무너졌고, 이후에는 북쪽의 타밀 왕국과 남쪽의 싱할라 왕국으로 나뉘어 여러 왕국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7세기에 캔디 왕국이 들어서면서 마지막 왕조를 이어가게 됩니다. 쉽게 비유하면 아누라다푸라는 우리나라의 경주와 같은 곳이고, 캔디는 서울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콜롬보는 서양 식민지 시대에 조성된 도시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곳에는 오래된 탑과 유적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왕국이 번성하던 시기에는 수리시설이 크게 발달해서 인공 저수지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수지 대부분이 당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의림지 같은 저수지를 떠올리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또 아쇼카왕의 딸인 상가미타가 가져온 보리수를 이곳에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도 그 보리수가 남아 있습니다. 현재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도 예전에 고사한 뒤 이곳의 보리수에서 다시 옮겨 심어 이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곳에는 가장 오래된 탑과 가장 규모가 큰 탑, 그리고 가장 오래된 보리수가 모두 있습니다.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곳의 불교 승려들을 만나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유적지를 둘러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의 신도시는 동남쪽에 새롭게 조성되어 있고, 우리가 있는 이곳은 대부분이 유적지입니다. 어제 둘러본 담불라 동굴사원이나 시기리야도 모두 이 왕조의 왕들이 피신하거나 숨어 지내면서 활용했던 곳들입니다.”
9시 30분이 되어 아누라다푸라의 루완웰리세야(Ruwanweliseya)템플에 도착 했습니다.
스님 일행은 아누라다푸라 주요 8개의 성지를 총괄 관리하고 있는 주지스님(The Most Ven. Eethalawetunuwewe Gnanathilaka Thero)을 만나 인사했습니다.
주지스님은 루완웰리세야 템플에 대해서 소개해주었습니다. 이 템플은 약 2,1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매일 꽃 공양이 이어져 하루에 약 8트럭 분량의 꽃이 나오고, 아침에는 유미죽 공양도 두 트럭 정도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 곳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성지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고아원, 요양시설, 장애인 시설, 직업훈련센터 등 다양한 사회복지시설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지스님은 절이 기도만 하는 곳이 아닌 사회를 위해 일하는 곳이라고 설명하며 물 부족과 AI 등 인류가 직면하게될 새로운 시대적 과제가 있고, 그런 시대일수록 종교가 인간의 마음을 돌보고 사회를 이끄는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인류가 맞이하게 될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식수 문제입니다. 지구에 있는 물 가운데 사람이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은 1%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깨끗한 공기도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또 무기 기술은 생물학이나 신경과학, 생화학 기술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고, 여기에 AI까지 더해지면서 인류가 맞닥뜨릴 위험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일수록 종교가 해야 할 역할은 더 커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을 보면 서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절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사람들이 마음보다 머리로 판단하는 경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지금은 의료기기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몸은 예전보다 훨씬 건강해졌습니다. 하지만 정신건강은 오히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울증이나 두려움, 공포, 공황 같은 문제를 겪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그만큼 인간성을 잃어가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폰 구형을 쓰다가 신형이 출시되면, 갑자기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오래 유지하려면 새로운 것을 계속 갖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스님은 한국에서 준비해간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주지스님도 스님에게 탑 모형을 선물했고, 방문단 한분 한분에게도 염주를 선물하였습니다.
대화 후 감명을 받은 박남수 교령님이 말했습니다.
“주지스님은 시대의 흐름을 잘 읽는 정말 현대적인 지도자입니다.”

절에서 나와 스투파를 탑돌이 하며 참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 일행은 신발을 벗고 탑돌이를 했습니다. 30도가 넘는 땡볕에 바닥이 달구어져 발바닥이 많이 뜨거웠습니다.
탑돌이 후 스님 일행은 아누라다푸라의 보리수를 보기위해 이동 했습니다.
10시 40분에 보리수가 있는 사원에 도착하여 보리수를 참배하였습니다. 이 보리수 나무는 기원전 3세기 인도 아쇼카 왕의 딸 상가미따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던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의 가지를 스리랑카에 가지고 온 것입니다. 담장 안쪽으로 보리수가 있어서 스님 일행은 담장 밖에서 보리수를 보았습니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의 보리수에서 가지를 가져와 심은 나무입니다. 금색 지지대로 받쳐 놓은 부분이 원래 나무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지가 말라 죽기도 하고 새로운 가지가 자라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왔습니다. 약 150년 전 보드가야의 원래 보리수가 죽었는데, 그때 이 나무에서 가지를 가져가 다시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보드가야에 있는 보리수도 이 나무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30년 전에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는 지금처럼 이렇게 정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가운데 아주 작은 가지 하나를 가리키며 '이게 원래 보리수 입니다'라고 설명했었습니다.“


보리수를 참배하고, 주지스님이 준비해 준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12시 즈음 자푸나로 이동하기 위해 모두 버스에 올랐습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아누라다푸라의 나머지 성지들을 간단하게 둘러보았습니다.

8개의 성지 중 가장 크다는 제타바나 스투파를 지나갔습니다. 스리랑카 참여불교 연대의 수칫님이 차에 함께 탑승하여 성지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지나가고 있는 제타바나 스투파가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스투파이며,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큰 인간이 만든 구조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했습니다. 이집트 기자의 두 개의 대피라미드 다음으로 큰 규모로, 세 번째 피라미드보다도 크고, 높이는 약 122미터에 달하며, 건축에는 수천만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제타바나 스투파 주변은 과거 거대한 사원 단지였고, 전성기에는 약 1만 명의 수행자가 이곳에서 생활하며 수행했다고 합니다. 또한 아쇼카 왕의 아들인 마힌다 장로가 스리랑카에 불교를 전한 이후 데바남피야티사 왕이 아누라다푸라 도시 전체를 승가에 바쳐 성지로 선포했다고 했습니다.

차창 밖으로는 곳곳에 작은 스투파와 유적들이 계속 나타났습니다. 수칫님은 아누라다푸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고고학 도시이기 때문에 이런 작은 스투파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으며, 그 안에는 고승들의 사리나 역사적인 유물이 봉안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자푸나에서 내일 INEB 이사장인 하르샤님과 만나는 것으로 약속을 했었는데 자푸나에 가는 길에서 오늘 만나자며 연락이 왔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유명한 힌두사원이 있다고 하여 스님 일행은 잠시 차를 멈추고 하르샤님을 만나 힌두사원을 둘러보았습니다.
무리칸디 필라이야르(Murikandy Pillaya)라는 사원이었습니다. 하르샤님도 이 사원에서는 예로부터 여행객들이 코코넛을 깨며 안전한 여행을 기원하는 장소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래서 스님과 방문객들도 사고없이 일정이 잘 끝나길 바라며 기도를 하기로 하였습니다. 코코넛에 불을 붙여서 기도를 한 후 바닥에 던져서 깨는 의식인데 박남수 교령님이 대표로 의식을 행하였습니다.

박남수 교령님은 코코넛에 불을 붙여 코코넛을 깨는 장소로 이동을 하였습니다. 코코넛을 바닥에 던지기 전에 잠시 기도를 하고 코코넛을 바닥에 힘차게 던졌습니다. 코코넛이 잘 깨지자 일행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반겼습니다.

“교령님께서 못깨면 어떡하나 했는데 저보다 힘이 좋으시네요!”
“저도 못깰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 깨졌습니다.(웃음)”
하르샤님이 설명했습니다.
“스리랑카 내전 당시 LTTE(타밀엘람해방호랑이) 군인들이 정부군과의 전투에 나서기 전에 이 사원을 찾아 코코넛을 깨며 승리와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이를 듣고 스님은 말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우리는 평화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웃음)”
오후 3시 30분, 근처 찻집에 가서 차 한잔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했습니다.

아누라 목사님이 몸이 좋지 않아 콜롬보로 돌아가게 되어서 피르도스 마우리아님도 함께 목사님과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오후에 하기로 했던 미팅은 두 종교인이 없는 관계로 콜롬보에서 하기로 연기하고 이후에 숙소에 도착하면 일찍 휴식하기로 하였습니다.
오후 5시 30분 스님 일행은 스리랑카의 최북단인 자프나에 도착하였습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잠시 휴식 및 정비를 한 후 7시에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스님은 저녁식사 후 원고를 수정한 후 휴식을 취했습니다.
내일은 날루르 칸다스와미 사원 방문 및 힌두 사제와 미팅을 하고 만쿨람 세인트 아그네스 성당에 방문을 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어 지난 5월에 있었던 즉문즉설의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저는 19개월 된 아기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현재 육아휴직 중인데 다음 달이면 복직을 앞두고 있습니다. 복직을 하면 아이를 오전 8시에 어린이집에 보내고 저녁 7시에 데려와야 해서, 하루에 한두 시간밖에 함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퇴사를 해야 하나 고민인데,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분이 걱정입니다. 지금 직장은 10년째 다니고 있고, 일이 비교적 수월한 데다 연봉도 좋아 그만두기가 아깝습니다. 또 경력이 단절되면 나중에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해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년 뒤 새로운 일을 구하더라도 지금보다 더 힘들고 수입은 적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망설여집니다. 주변에서는 좋은 직장을 다니면 아이도 나중에 자랑스러워할 것이라며 버텨보라고 합니다. 게다가 남편이 다음 달 회사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 저라도 계속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도 커서, 남편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합니다.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너무 행복해서 이 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다가도, 현실을 생각하면 다시 두려워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좋을까요?”
“인생이라는 게 늘 최선의 선택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최선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차선을 선택해야 하고, 때로는 차선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상황도 있어요. 그럴 때는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합니다. 차악이라는 건 선택하면 손해를 보는 길이에요. 그런데 선택의 폭이 없을 때는 어차피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많이 손해 보느냐, 적게 손해 보느냐의 문제만 남게 되죠. 그럴 때는 적게 손해 보는 쪽을 선택해야 해요. 이것이 인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어서, 적게 손해 보는 선택을 피하려다가 오히려 더 큰 손해, 즉 최악의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마치 이리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나는 것과 같아요.
남편이 직장을 다니고, 질문자가 아이를 36개월이 될 때까지 돌보며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아이에게는 가장 좋은 선택일 수 있어요. 그러나 인생이 늘 그런 최상의 조건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지금처럼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고, 질문자가 안정적인 직장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선택만을 하기는 어렵다는 거예요. 그래서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경우입니다.
아이에게는 지금 이 시기에 엄마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는 데에는 경제적 기반도 필요하고, 여러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100점짜리 선택이 아니더라도, 예를 들어 90점 정도의 선택을 하고 장기적으로 도움이 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아이에게 조금 부족해지는 부분은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합니다. 신발에 비유하자면, 가벼운 신발을 신으려면 발바닥이 아플 수 있고, 발이 편하도록 두꺼운 신발을 신으려면 무거움을 감수해야 하는 것과 같아요.
아이도 이제 19개월이면 두 돌이 가까워졌으니, 가장 손이 많이 가는 시기는 어느 정도 지났다고 볼 수 있어요. 이런 상황이라면 직장에 복귀하고, 아이는 어린이집에 보내되 남편이 당분간 집에 있다면 엄마의 빈자리를 어느 정도 채울 수 있습니다. 대신 질문자는 퇴근 후에 추가로 업무를 한다든지, 회식이나 모임에 나간다든지 하는 일은 최대한 줄이고, 직장 밖의 시간만큼은 아이에게 온전히 쓰겠다는 관점을 가져야 해요. 그래서 퇴근 후에는 어떤 약속도 잡지 말고, 회사에서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아이 때문에 안 됩니다.’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좋습니다. 집에 오면 다른 일은 미루고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하루에 몇 시간밖에 못 본다.’라고 생각하기보다, 두세 시간이라도 온전히 함께 보내고 아침 시간도 함께하는 식으로 아이와의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 시간을 부담으로 여기지 말고 아이와 함께하는 행복한 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인생에는 이것도 최선이고 저것도 최선인 길은 없습니다. 한쪽을 유지하려면 다른 한쪽에서 약간의 손해를 감수해야 해요. 지금 상황에서는 아이에게 최선인 선택만을 하기는 어려운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퇴근 후에는 가능한 한 아이와 함께 보내고, 아침에도 어린이집에 보내기 전까지 아이와 충분히 함께하는 거죠. 그런 범위 안에서 직장생활을 이어가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에요.
또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살림을 완벽하게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집안일은 조금 덜 해도 괜찮고, 주말에 보충하는 정도로도 충분해요. 이 시기에는 회사의 주말 행사나 추가 업무, 승진 기회도 과감하게 내려놓는 것이 좋아요. ‘그걸 다 하려면 차라리 퇴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회사의 양해를 구하는 거예요. 지금은 회사에서의 성취보다 아이에게 집중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에요. 다만 직장에서 현재의 자리를 유지하는 수준까지는 책임을 다하고 그 이상은 욕심내지 않는, 이런 흔들림 없는 관점을 가지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관점만 잘 잡는다면 직장에 복귀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여기서 관점은 아이와 얼마나 같이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아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가 핵심이에요. ‘직장이 더 중요해서 아이를 맡기고 간다.’ 하는 태도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직장에 나가지만 내 인생의 1순위는 너다.’라는 마음이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해요. 만약에 자영업을 한다면, 아이를 등에 업고 일하는 경우 생후 한 달 된 아이라도 키울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으로 직장에 복귀한다면 괜찮습니다.”
“남편은 본인이 이직에 성공할 가능성도 크고, 어느 정도 모아둔 돈으로 버틸 수 있다고 말하거든요. 만약 남편이 이직한다는 전제라면 제가 그만두는 선택은 어떨까요?”
“어떤 선택이든 결국 본인이 하는 것입니다. 다만 질문자가 말했듯이, 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둔다면 그 선택을 아무 미련 없이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새로운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지거나 상황이 나빠졌을 때 ‘그때 계속 다닐걸’ 하고 후회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는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방해한 게 되는 거예요.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고생한다.’라는 마음이 생긴다면, 아이에게 좋은 일이 아니에요. 이 문제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은 필요하다면 빚내서라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질문자의 가치관에서는 지금 직장을 그만두면 나중에 후회할 수준이에요. 만약 ‘경력이 단절되어도 상관없고, 어떤 일을 하게 되어도 괜찮다. 나는 아이와 함께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만둬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이후의 경력이나 경제적인 부분을 계속 걱정하고 있다면, 현재로서는 직장을 유지하는 쪽이 더 낫습니다. 당당한 엄마가 되는 게 중요하지, 아이를 위해 선택했다고 하면서도 마음속으로 아이를 원망하는 엄마가 되면 안 되잖아요. 따라서 차라리 직장을 다니면서 그 안에서 아이에게 최선을 다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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