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4.30. 박상은 영가 막재와 추도식, 미팅
“일회용품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남자 친구에게 분별심이 납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박상은 님 막재 추도식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은 막재 추도식에서 법문을 하고, 오후에는 미팅과 업무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스님은 새벽 정진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 스님은 이광재 전 강원도지사님과 조찬 미팅이 있었습니다.

오전 10시부터 정토사회문화회관 설법전에서는 고(故) 박상은 님의 막재 및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박상은 님은 정토회 초창기 시절부터 스님과 공동체 대중들의 주치의를 맡아 몸이 아픈 사람들을 돌봐주셨던 분으로 지난 3월 13일 81세로 별세하셨습니다. 스님은 5박 6일의 스리랑카 구호 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도착하자마자 고인의 장례식장에 조문했습니다. 장례식 이후 49일이 지나서 오늘 고인의 막재와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설법전에는 상주와 가족 및 지인들, 대중 1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10시 15분에 헌공예불을 올리며 추도식을 시작했습니다. 공동체지부법사인 대광 법사님이 헌향과 헌화를 하고 상주와 가족분들이 영가에 차를 올리는 다례의 의식을 했습니다.

박상은 님의 추모영상을 다 같이 보았습니다. 고인은 20년 7개월 동안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 생활을 하였습니다. 긴 수감 생활 동안 감옥에서 의술을 익혔습니다. 세상에 나온 뒤에는 그 배움을 고스란히 나눔으로 되돌려, 많은 정토회 대중들을 직접 치료해 주는 봉사를 이어갔습니다. 고인의 생전 사진과 영상을 보며 고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추도사가 있었습니다. 보수 법사님이 건강상 추도식에 참석하지 못해서 보수 법사님의 추도사를 묘수 법사님이 대독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약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풀과 음식 속에도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병이 들 때마다 전화를 드리면, 늘 가까이 있는 재료로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있도록 알려주시던 그 가르침은, 지금도 제 삶 속에 살아 있습니다.”

추모 공연이 있었습니다.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노래인 조용필 님의 ‘허공’과 ‘상록수’ 두 곡을 백일출가 51기 행자님들이 마음을 담아 불렀습니다. 이후 대중들은 영가천도의 노래인 ‘고운님 잘 가소서’ 노래를 같이 부르며 고인의 왕생극락을 발원했습니다. 가사를 생각하며 노래를 함께 부르니 고인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이 커졌습니다.

고인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스님께 청법가와 삼배로 천도법문을 청했습니다.

“박상은 선생님, 각자 바빠서 서로 자주 뵙지 못하다가 오늘 오랜만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건 1989년 말이었지요. 처음 소개받을 때 선생님께서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지 약 3개월 정도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제가 몸이 좋지 않았는데, 아는 분이 ‘용한 선생님이 계시니 치료를 한번 받아보라.’라며 선생님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제 맥을 짚어 보시더니 ‘아니, 젊은 사람이 무슨 맥이 이렇게 노인 맥인가’라며 침과 수지침을 놓고 지압도 해주시면서 치료와 기력 회복을 도와주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젊은 시절 20년을 감옥에서 보내셨기에 ‘인생의 절반을 감옥에서 허비했다.’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지요. 또 ‘내 친구들은 결혼해서 벌써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고 집도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이 이제 시작한다.’라는 조급함과 억울함도 함께 안고 계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감옥에서 훌륭한 스승을 만나 의술을 배우셨습니다. 비록 의과대학 교육을 통한 자격증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진맥을 잘 짚으시고 치료도 잘하셨습니다. 또 그 안에서 목공 자격증도 따셔서 목수 일도 능숙하게 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밤낮없이 일하셨습니다. 낮에는 작업장에서 목공 일을 하시고, 저녁에는 사람들을 치료하셨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조급함과 억울한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목수 일은 생각만큼 돈이 벌리지 않았지만, 사람들을 치료하면 병이 나은 사람들이 보시를 하니 점점 치료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을 보며 약간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치료를 잘해도 무자격으로 하는 치료이기에 다시 감옥에 갈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치료를 그만두시라 권했더니, 화를 버럭 내시며 ‘내가 20년을 허송세월했는데 언제 돈을 벌어서 남들처럼 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라며, 지금처럼 조급하고 분노에 찬 상태로 일을 하면 다시 화를 자초할 수 있으니 3년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복을 지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어떻게 복을 짓느냐’는 물음에 저는 법당에서 돈을 받지 말고, 사람들을 치료해 주시라고 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으면 법적 위험도 없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니 복도 많이 짓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밤낮으로 일해도 남들처럼 될까 말까 한데, 또 3년을 그냥 살라는 거냐’라며 기가 차 하셨지만 결국 제 뜻을 따라주셨습니다. 하지만 포교당에 와서 한 방에 남자 다섯 명이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보시더니, 방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방 하나 얻는 데 20만 원, 차비와 용돈을 포함해 매달 40만 원을 드리기로 하고, 어떤 사람이 돈을 주더라도 받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만약에 기어이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법당 불전함에 보시하십시오.’라고 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좁은 홍제동 포교당에서 치료와 기도를 하셨습니다. 처음 1년은 잘 지내셨지만, 마음이 들떠 포교당을 나가겠다고 난리를 피우시기도 했어요. 겨우 설득해서 다시 가라앉혔더니 또 1년쯤 지나 어떤 여자분을 알게 되어 결혼하겠다고 난리였습니다. (웃음) 제가 보기에는 인연이 아닌 것 같아 말렸더니 ‘스님이 결혼 안 한다고 나까지 못 하게 하느냐’고 하셨어요. (웃음) 다시 설득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치료를 이어가며 3년을 채웠습니다. 많은 사람이 치료를 받고 나아져서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마침 대학생 불교 학생 운동을 하던 지금의 배원장님이 치료를 받으러 오셨다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웃음)

그 이후에도 선생님은 포교당에서 계속 치료를 하셨습니다. 박 선생님은 무료로 의술을 베풀고, 사람들은 고맙다고 절에 보시하니 돈을 주고받는 노동보다 훨씬 더 큰 복을 짓게 된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선생님의 삶 자체가 인연과보(因緣果報)의 원리를 그대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급한 마음으로 서둘렀다면 배 원장님과 좋은 인연을 맺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마흔 넘어 빈손으로 출소한 전과자가 어떻게 서울대 출신 여성을 만났겠습니까. (웃음)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지요. 이후 배 원장님은 선생님의 의술을 잇기 위해 한의대에 다시 진학하셨습니다. 처음에는 ‘6년을 어떻게 기다리려고 그러나?’ 싶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6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배 원장님은 한의원을 열고 아들 둘을 낳아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 뒤로도 선생님은 많은 사람을 무료로 치료하며 봉사하셨습니다. 특히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 동포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어렵게 마련한 집을 담보로 천만 원을 융자받아 보시하셔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데 앞장서셨습니다.

또한 저의 주치의로서 ‘마음공부는 제가 스님 말씀을 듣더라도 몸에 대해서는 스님이 내 말을 들어야 한다.’라고 하셨지요. 이렇게 선생님은 저의 명실상부한 주치의로서 제가 오늘까지 건강을 유지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요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보니 선생님이 안 계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정토행자들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평생을 봉사하며 매우 알차게 사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 선생님은 감옥에서 의술을 배우셨는데, 침이 없어 전화선 속 강철 심을 꺼내 시멘트에 갈아서 침으로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의술을 배우셔서 명의(名醫)가 되셨습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가장 힘들었던 일을 나누기하는데, 간첩 누명을 쓴 일이 가장 억울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게 왜 억울합니까?’라고 물었더니 ‘그게 어떻게 억울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셨어요. 다시 ‘그런데 왜 억울합니까?’라고 묻자, 감정이 북받쳐 화가 나서 수련장을 뛰쳐나가셨습니다. 만약 그대로 가버리셨다면 우리의 인연이 끊어질 수도 있었지만, 한 시간쯤 뒤에 다시 돌아오셨습니다. (웃음) 수련하면서 다른 것은 다 넘어가셨지만, 이 문제만은 넘기지 못하셨습니다. 결국 제가 그 피맺힌 한을 풀어주지 못했습니다. 그 억울함이 너무 깊어 깨달음으로 타파하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지나간 일은 잊어라.’라고 말씀드렸지만 재심을 신청하여 무죄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내가 억울해서가 아니라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기록을 남길 수 없으니, 법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하고 결심하시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결국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50년 전에 난 대법원판결을 뒤집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정성과 진심이 사람들을 움직였고, 결국 옛 증인들을 찾아내어 우여곡절 끝에 누명을 벗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자녀들과 손자들이 모두 박 선생님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기를 바랍니다.

박상은 선생님, 제가 들려드리는 이 옛날이야기를 잘 듣고 계십니까? ‘스님이 또 저런다.’ 하며 웃고 계시는 건 아닌지요. (웃음) 돌아보니 우리가 만난 지 벌써 37년이 되었네요. 세월이 참 빠릅니다. 이제 한(恨)도 푸셨으니 아무런 미련 없이 편히 쉬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우리가 그렇게 원하던 통일도 이루지 못했고, 평화도 완전히 정착시키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하실 일은 충분히 해내셨습니다. 남은 일은 저희가 이어가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제가 선생님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선생님의 삶에 죽음의 길을 뛰어넘는 걸림 없는 길을 가시도록 마음을 다해 천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이 세상에 ‘좋은 곳’이 있다면, 선생님이 살아오신 모든 삶이 바르셨기에 특별히 형식을 갖춘 종교의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당연히 좋은 곳에 가실 것입니다. 박 선생님이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좋은 곳에 갈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저희는 그렇게 믿지만, 그래도 마지막으로 정성을 다해 선생님의 왕생극락(往生極樂)을 염원하는 의식을 행하겠습니다.

박상은 영가시여, 살아생전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머리로 생각하며, ‘이것이 내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옳다.’라고 주장을 하셨는데 이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지금에 이르러 어떤 것을 두고 ‘나’라고 할 것이며, 어떤 것을 두고 ‘내 것’이라 할 것이며, 어떤 것을 두고 ‘옳다’라고 하겠습니까? 영가시여, 이제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냄새 맡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생각할 수도 없는 이때, 어떤 것이 박상은 영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까?

한 번 더 묻겠습니다. 박상은 영가시여, 지금 어떤 것이 박상은 영가의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까?

만약 영가께서 이 법사의 질문에 쾌활하게 대답하셨다면, 이미 해탈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혹시라도 이 법사의 질문에 머뭇거림이 있고 망설임이 있다면, 여기 모인 대중들의 염불의 힘을 빌려서, 지은 업은 소멸되고 지은 공덕의 힘으로 저 극락세계에 왕생하시어 아미타 부처님을 친견하고, 아미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해탈 열반을 증득하시기 바랍니다. 혹시나 하여 영가를 떠나보내는 가족, 친지, 친구, 모든 수행 대중이 영가의 왕생극락(往生極樂)을 발원하며 함께 염불할 것이니, 이 염불의 공덕으로 부디 왕생극락하옵소서.”

스님의 법문이 끝나자 유수스님을 법주로 향자재 법사님이 집전해서 모든 대중이 함께 마음을 다해 천도기도를 했습니다.

상주들과 대중들이 영단에 차를 올렸습니다. 스님도 영단에 차를 올렸습니다.

왕생극락의 노래 ‘빛으로 돌아오소서’를 부르고 천도의식이 끝나자, 추도식에 참여한 고인의 친구분인 권낙기 님의 소회를 들었습니다.

“박상은 님과 오래 살다가 나왔고, 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여기 추모식에 와서 새로운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서 보니까 너무 허전했습니다. 상은이가 뿌린 만큼 못 거뒀구나… 왜 부고 소식을 많이 알리지 않았습니까, 섭섭하게 가시는 것 같다고 제가 배 원장님께 항의 겸, 질문 겸 물었습니다. 배 원장님은 많이 알리지를 못했다고 하는데, 법륜스님도 장례식장에 와 계셨습니다.

오늘 여기 추모식에 와서 보니, 내 식으로 말하면 ‘이 친구 잘살았네’ 이렇습니다. 비전향장기수 분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제가 상주 노릇을 하는데, 오늘 같은 추도식은 새로운 경험입니다. 스님은 상은이한테 돈 갖지 말라고 하셨지만, 저는 상은이한테 돈 많이 벌라고 했습니다. 상은이 한테 여기저기 많이 후원하라고 했습니다. 진보 연대에서 8.15 대회 한다고 하면 경비 좀 내어놓으라 했고, 양심수 후원하는 것에도 많이 지원했습니다. 상은이한테 이야기했어요. 돈 버는 것은 기술이지만, 돈 쓰는 것은 예술이 되어야 한다. 잘 쓰라고 했습니다. 사회활동에도 후원을 많이 했습니다. 장기수들을 만났을 때마다 그 사람들이 상은이 안부를 많이 물었습니다. 상은이 추도식에 와서 보니까. 내 친구지만, 참 잘 살았고,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셔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권낙기 님의 솔직한 소회로 한바탕 웃고 나니 추도식의 분위기가 무겁지 않고 밝아졌습니다. 박상은 님이 생전에 베풀어준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마음으로 대중들은 손을 잡고 함께 ‘사랑으로’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상주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상주를 대표해서 큰 아들인 박준혁 님이 나왔습니다.

“제 기억 속에 유치원 다닐 때, 친구들이 너희 아빠 나이 많다고, 아빠 아니고 할아버지 아니냐고 그랬을 때도, 아버지가 한의사 자격은 없지만 치료 봉사를 하신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저랑 동생이 이 정도면 많이 컸다고, 맛있는 것 사주시면서 울면서 과거 이야기해 주셨을 때도, 많은 분한테 뜯어 먹히고 다니실 때도, 한 번도 어떤 순간에도 아버지가 자랑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로 흠집 내기에는 아버지가 굉장히 큰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아버지 꿈을 많이 꿨습니다. 꿈속에서 이별을 말씀하세요. 편안한 모습으로 말씀하시더라고요. 편안하게 가시려고 하는 것이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아버지가 편하게 쉬시길 바라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상주 대표로, 아버지 대신해서 감사 인사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고인의 배우자인 배정순 님의 인사말도 함께 들었습니다.

“남편은 다른 여자분들이 결혼하자고 하면, 자기는 서울대생 아니면 결혼 안 하겠다고 농담으로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서울대 여대생인 저한테 걸려서…. (청중 웃음) 제가 남편을 보고 ‘이 사람이면 내가 결혼해도 되겠다.’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인연이었던 것 같아요. 법륜스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공덕을 미리 쌓다보니까 그 힘에 의해서 묻어간 게 아닌가. 법륜스님께 너무 감사드립니다.

남편이 돌아가시기 5년 전에 수술을 하셨는데, 잘 사시다가 1년 반 전부터 악화되셨어요. 그때부터 미리 장례도 준비했었고, 요즘 장례식을 소소하게 하는 편이라서 그냥 소소하게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정토회를 많이 좋아했습니다. 정토회는 늘 바쁘시고 일이 많잖아요. 저는 남편 장례를 그냥 소소하게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않게 장례식장에 매일 사람들이 와서 시타림해주시고, 법사님들 모두 와주시고, 법륜스님이 친히 오셔서 망자 법문도 해주시고, 저는 생각지도 못했던 예우를 해 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남편도 생각지도 못한 법비를 맞으셨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저도 마음이 너무 편했고, 남편도 좋은 마음으로 극락왕생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정성을 다해서 많은 배려를 해주셔서 장례를 잘 치렀습니다. 너무너무 감사드리고, 이 추모제도 생각 못 했는데, 뜻깊은 자리를 마련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가족들의 인사말에 이어 사홍서원을 끝으로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습니다. 박상은 님의 보살핌을 받았던 사람들이 많이 참석했습니다. 영가님이 가시는 마지막 길을 온 정성을 다해서 보내드리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중들은 마지막 기념 촬영을 하면서 그 마음을 모아 크게 외쳤습니다.

“ 박 선생님, 고맙습니다. 박 선생님, 편히 쉬세요.”

추도식이 끝나고 차를 올리지 못한 대중들은 영단에 차를 올리며 고인을 추모하며 마지막 인사를 했습니다.

추도식이 끝나고 스님은 지하 식당으로 이동하여서 가족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 1시에는 JTS 국장단 회의가 접견실에서 있었습니다. 스님은 인도 JTS 사무국장 보광 법사님, 필리핀 JTS 사무국장 향훈 법사님, 한국 JTS 사무국장인 박영숙 님과 함께 JTS 사업에 대해 점검하고 논의했습니다. 오후 3시에도 한반도 평화를 위한 또 다른 미팅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저녁 식사 후에 업무를 보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침치료를 받고, 저녁에 온라인 즉문즉설에서 질문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오늘은 환경 실천에 대한 즉문즉설 내용을 소개하며 글을 마칩니다.

일회용품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남자 친구에게 분별심이 납니다

“제 남자 친구는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굉장히 많이 씁니다. 어디 놀러 갈 때 모든 것을 지퍼백에 넣어서 챙깁니다. 옆에서 플라스틱 사용하는 것을 보면 분별심이 일어나는데, 제가 가르치기는 그렇고 그냥 보자니 분별심이 일어납니다. 남자 친구의 플라스틱 일회용품 과사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자가 플라스틱 안 쓰기 운동하는 것보다 그 남자를 더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어요. 그 남자를 만날 때는 그냥 쓰는 수밖에 없다고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만약에 내가 플라스틱을 안 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남자 친구에게 '플라스틱 일회용품 쓰지 마라' 이런 말은 하지 말고, 플라스틱 일회용 컵에 음료를 따라 주면 자기가 안 먹으면 됩니다. 제가 이번에 인도 해외 방송 촬영하러 갔을 때, 스태프가 일회용 컵에다가 음료수나 물을 따라 줬어요. 제가 안 먹었어요. 그러면 옆에서 '아니, 스님, 왜 안 드세요?' 하고 물어보지요.

저는 일회용품을 써서 쓰레기를 나오게 만들면 내일 아침에 참회의 절을 해야 하는데, 지금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절을 잘 못합니다. 일회용품 한 개 쓸 때마다 세 번 절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절하려면 힘들어서 못 하겠어요. 안 먹고 안 하는 게 나아요. 이렇게 말하면, 상대가 '아이고 그러세요.' 이러면서 더 권유하지 않아요. 일회용 물티슈를 주면서 사용하라고 할 때, 제가 '내가 이것을 쓰면 참회의 절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음부터는 '죄송합니다.'라고 합니다. 3일 반복하니까 일회용품에 든 것을 주거나 권유가 일절 없고 어디 가서 컵을 구해서 음료수를 담아서 권했습니다.

'플라스틱 그것 환경에 나쁘니까 쓰지 마라.' 이런 말을 하지 않고도 '아이고 난 그거 사용하면 참회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더 이상 권유를 안 해요.

그러니 야외에 놀러 가서도 플라스틱 일회용품에 음식을 담아주는 남자 친구에게 '나는 그런 거 안 먹어.' 이렇게 말하지 말고, '아이고 우리 정토회에서는 이렇게 플라스틱 일회용기에 담은 것 먹으면 108배 절을 해야 하는데, 난 안 먹을래.' 이렇게 이야기하고, 반복적으로 말하면 남자 친구가 다음부터는 플라스틱 일회용품들을 안 챙겨 올 겁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현명한 말씀 고맙습니다.”

전체댓글 29

0/200

수미향

박상은님의 명복을 빕니다. 고인의 삶 앞에 마음이 경건해 집니다. 고맙습니다.()()()

2026-05-03 23:54:27

CACTUS

박상은님의 명복을 빕니다. 너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것 같은데, 제발 이런 일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6-05-03 23:11:29

보각

고맙습니다.

2026-05-03 22:44:33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