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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오전에 두북수련원에서 6기 법사교육 입재법문이 있고 저녁에는 부산에서 행복한대화 강연이 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한 후 원고를 교정하고, 오전 8시에는 두북수련원 방송실에서 미국에 있는 한반도 전문가, NGO 대표들과 함께 ‘북한의 최근 동향 및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온라인 간담회를 진행했습니다.
오전 9시 30분 온라인 간담회를 마치고 오전 10시부터는 두북수련원 강당에서 화엄반 6기 법사교육 입재법문을 했습니다.

6기 화엄반 법사 교육생 27명은 오늘부터 1년간 행자로 입재해서 법사 교육을 받을 예정입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하고 법사단장인 선주법사님의 인사말이 있었습니다.
“반갑습니다. 먼저 축하드리고 환영합니다. 오랫동안 봐 온 분들이라서 더욱 반갑고 축하하는 마음입니다. 이제 활동가에서 다시 행자로 마음을 새롭게 해서, 어쩌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시간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법사 교육 입재식을 할 때마다 저의 행자 생활이 생각이 납니다. (웃음) 저는 그때 20대였고 행자생활을 하면서 정토회를 시작했고, 수행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부족해서 도반들을 많이 시비했습니다. (웃음) 그러나 여러분들은 활동을 통해 모두 극복이 된 상태라 생각합니다. (웃음) 이제는 활동들은 모두 내려놓고 오롯이 나를 살피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도반들과 탁마하면서 함께 보내다가 1년 뒤 법사 수계식 때 뵙기를 희망합니다.”

선주법사님의 따뜻한 인사말씀이 끝나고 화엄반 6기 행자들은 청법가와 청법 삼배로 지도법사님께 입재법문을 청했습니다.

“내가 법사라고 불릴 때에는 적어도 스승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토회에서는 계율 중에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계율이 있습니다. 남의 수행을 두고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수행적 관점에서 지도해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근데 수행이 덜된 사람이 그렇게 하면 그건 수행 지도가 아니고 시비가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지도법사만 그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도법사가 모든 사람을 다 만나 수행 지도를 할 수가 없어서 지도법사를 대신할 사람을 법사로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각 지부, 지회에서 지도법사를 대신해 법사들을 임명해서 수행지도 역할을 하게끔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법사단은 지도법사 산하에 있게 된 것입니다. 근본적으로는 지도법사의 분신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법사가 되려면 수행자로서 완전히 괴로움이 없는 사람의 수준에 이르러야 합니다. 내가 괴로움이 없는 사람에 이르려면 제법이 공함을 통찰하는 지혜를 터득해야 합니다. 본래 괴로움이 없는 줄을 터득했지만 찰나 찰나 내가 미혹에 사로잡혀서 괴로움이 발생해도 즉시 알아차리고 돌이키고 참회를 해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법이 공한 도리를 알게 되면 이 세상 어떤 사람도 내 사람이라고 할 수 없고, 그 어떤 물건도 내 것이라고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법사가 되려면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는 세속적 관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오늘부터 집에 돌아가더라도 가족을 바라볼 때 형식적으로는 내 남편, 내 아들, 내 아내지만 이미 세속적인 인연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편을 내 남편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한 중생으로, 한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아들도 내 아들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봐야 하고, 아내도 내 아내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 봐야 한다. 상대가 나에게 짜증을 내더라도 '아이고, 저 사람이 힘들어서 그렇구나.' 이런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합니다.
원래는 출가하려면 모든 속세의 인연을 다 끊고 절에 들어와서 행자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집에서 사는 것은 오늘 입재식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법사가 되기 위한 수행적 관점을 갖게 되면 속세와 인연을 끊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법사가 되는 수행적 관점을 갖는 순간 같이 살아도 한 사람으로 역할을 할 뿐 관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가 필요하다니까 같이 사는 거고, 그가 필요하다니까 가족의 역할을 해주는 것이지 더 이상 관계로 인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그가 필요하다니까 아내 역할을 하고 남편 역할을 하는 것이지, 더 이상 그 사람과의 소속 관계에서 비롯되는 생각은 끊어져야 합니다. 아들이니까, 엄마니까, 아내니까, 남편이니까, 부모니까, 자식이니까 이런 생각은 끊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관점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출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장을 했던, 교장을 했던, 뭘 했던 출가를 하는 순간 사회적 지위는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지금 그 역할을 하고 있다면, 사회적으로 그 역할이 필요해서 내가 잠시 보살이 화현하듯이 그 역할을 할 뿐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연기자가 역할이 주어지면, 교장 역할을 하고, 남편 역할을 하고, 아내 역할을 하는 것처럼 잠시 그 무대에서 내가 그런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 역할을 잠시 했다고 해서 내가 교장이나 남편이나 아내가 아닌 것과 같습니다.
소승 불교는 출가하기 위해서 모든 인연을 끊고 집을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대승 불교는 형식적으로 집을 떠나는 것보다는 마음에서 모든 인연에서 벗어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살생하지 않는다는 계율을 바라보는 관점도 조금 다릅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살생하지 않으면 계율을 지켰다고 봅니다만 대승 불교는 죽이고 싶은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계율을 어겼다고 봅니다. 소승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계율을 어기지 않는 것이 되고 대승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더라도 마음에서 탐진치 삼독심이 일어나면 벌써 계율을 어긴 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탐하는 마음을 내거나, 성내는 마음을 내거나, 어리석은 마음을 낸 것 모두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발로 참회를 할 때, 행위에 대한 참회도 하지만 마음으로 지은 업에 대한 참회도 하는 이유는 우리가 대승 계율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대승 불교는 겉으로 보기에 혼자 사는지 결혼해서 사는지를 중요하게 보지 않습니다. 결혼해서 남편 역할, 부인 역할을 할 뿐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관계에 얽매이지 않아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이 분명하게 잡혀야 합니다.
오늘 입재식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몸은 세속에 있더라도 마음은 출가자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말에 걸리지 말고, 연잎에 물이 떨어지면 물방울만 또르르 떨어지듯이 자기를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잘 지켜나갈 수 있으면 대중 속에서 살면서도 출가 수행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고 접촉하다 보니 정이 생기고 집착이 생긴다면, 물리적으로 관계를 정리하고 인연을 끊고 출가를 하거나 그냥 세속적으로 사는 방법이 있어요. 수행자임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관계를 완전히 끊는 출가 수행자를 하거나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재가 수행자가 수행자로서 본분을 지키기 위해서는 출가 수행자보다 더 원력이 크고 관점이 분명해야 합니다. 출가 못 하는 사람이 재가 수행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출가해서 수행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인연을 끊고 하는 것으로 더 쉬울 수 있습니다. 세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수행자로 살아갈 수가 있다는 원이 분명할 때 재가 수행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대승 불교는 중생과 함께 살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것을 자기 수행으로 삼습니다. 예컨대 욕심내지 않는다는 것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소승 불교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것으로 수행을 삼는다면 대승 불교는 베푸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 수행을 삼습니다. 베푸는 마음을 내버리면 훔치는 마음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대승은 거짓말 안 하는 것으로 계율을 지키는 게 아니고 항상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 원을 세웁니다. 그래서 소승은 행위를 중요시하고 대승은 원을 중요시합니다. 소승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때 장대가 없으면 못 합니다만, 대승은 장대를 주인의 허락 없이 가져다가 먼저 사람을 구하고, 나중에 장대를 허락 없이 쓴 것에 대해 변상을 합니다. 즉 내가 손실을 보거나 비난받더라도 감수하고 해야 할 일은 하는 것이 대승적 관점입니다. 나만 계율에 어긋나는 일을 안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기꺼이 도움을 주는 것이 대승적 관점입니다. 이렇게 대승과 소승은 수행적 관점이 조금 다릅니다.

여러분은 대승 수행자, 즉 보디사트바의 길을 가는 사람이므로 집에서 지내면서 직장을 다니면서 수행하도록 허용합니다. 그러나 법사가 되기 전의 마음가짐과는 달라야 합니다. 마치 수행자가 그곳에 파견을 가서 함께 하는 사람을 도와준다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경쟁하고, 시비하고,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그들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으로 직장 생활과 가정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세속과 절연하고 부처님께 귀의해서 부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수행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지도법사와 담당 법사님을 스승으로 생각하며 공부해야 합니다. 이렇게 1년 동안 행자 생활을 잘해 나가길 바랍니다.
대승 불교는 승단을 승려로만 구성하지 않고 보살로 구성합니다. 현재 정토회는 전법행자로 승단이 구성되어 있지만, 좀 더 좁혀서 정토회의 승단은 법사단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중의 귀의처가 되는 일이니 드러난 언행뿐 아니라 사물을 보는 관점도 바뀌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행정 능력, 즉 일을 잘한다. 못한다는 것으로 평가받았다면 그것을 내려놓고, 수행적 관점을 지키고 대중을 어여삐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보살이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말씀드리고 이제 출가 의식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입재 법문이 끝난 후 출가의식이 진행되었습니다. 대중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스님의 안내에 따라 출가의식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금까지 인연 맺은 모든 세속의 인연고리를 끊고 관계를 다시 맺어야 합니다.
첫째, 이 자리에서 부모님에게 삼배를 드리는 것으로 해서 이제는 부모와 자식 관계를 끊고 한 노인을 보듯이 합니다. 그동안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삼배를 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그동안 부부의 연으로 잘 살았던 아내와 남편에게 부부의 인연을 끊는 삼배를 하겠습니다. ‘여보 그동안 고마웠소. 이제는 수행자로 살겠습니다.’ 하는 삼배를 드리겠습니다.”

“세 번째, 자식과의 인연도 끊습니다. 그동안은 잘했든 못했든 아이들을 보살피고 키웠습니다. 이제는 각자 자기 생활을 하도록 하고 내가 만 중생의 부모이지 더 이상 한 아들 한 딸의 부모는 아닙니다. 자식과의 인연을 끊는 삼배를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는 모든 친척이나 친구의 인연을 끊겠습니다. 만 중생을 누구도 특별하게 보지 않고 평등하게 보겠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인연을 맺었던 모든 사람에 감사 인사를 드리고 연을 끊겠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수행자가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인연을 다 끊고 털고, 삼계대도사 부처님만 오직 나의 유일한 스승으로 모시겠다. 하여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겠습니다.“


“스승이라 하는 것은 옳으니 그르니 시비하면 부처님도 스승이 아닙니다. 내가 시비하는 마음이 없다면 길 가는 사람도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스승이란 훌륭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스승으로 모실 때 스승이 됩니다. 지도법사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삼배를 하겠습니다.”

“지도법사가 늘 여러분과 함께 하기는 어렵기 때문에 5개 반으로 나누어서 담당법사를 두고 교육하려 합니다. 5명의 담당법사님과 법사단장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행 정진 하겠다는 삼배를 드리겠습니다.”

행자님들은 스님의 안내에 따라 모든 의식을 잘 마쳤습니다. 이어서 사홍서원을 하고 사진촬영으로 6기 화엄반 행자 입재식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입재식을 마치고 곧바로 작업복을 갈아입고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상추밭의 상추가 어제보다 더 푸릇하고 빼곡하게 자랐습니다. 스님은 상추의 겉잎을 따주고 점심에 먹을만큼만 수확을 했습니다.
스님은 점심을 먹고 조금 휴식한 뒤에 내일 평화재단 연구위원들의 워크숍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숙소를 확인하기 위해 향존 법사님과 함께 방을 점검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배치했습니다.
스님은 조금 휴식을 하고 오후 5시 30분경 부산 ‘행복한 대화’ 강연을 위해 디자인센터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7시 부산디자인센터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로비에서 봉사하는 분들께 인사를 하고 강연자 대기실에 들어갔습니다.


스님의 즉문즉설에 앞서 지역 문화 활성화와 재능기부에도 적극적인 ‘마린뮤즈콰이어’ 공연팀의 아카펠라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연팀과 객석에 있는 관객들이 한데 어우러져 노래하니, 어색했던 분위기가 살짝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스님의 소개영상과 함께 즉문즉설이 시작되었습니다. 550석의 객석이 꽉 찼습니다. 사전 질문 신청자 5명과 현장 질문 신청자 8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고등학생 딸 문제로 고민하는 여성의 질문을 소개합니다.
“저는 고등학생 딸 문제로 질문드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제 딸은 태어날 때부터 ‘나에게 온 부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낯가림이 매우 심하고 예민해서 무엇 하나 쉽게 넘어가는 일이 없었고, 새로운 일이나 환경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주변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나중에 자기 일은 성실히 하고 공부도 잘한다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다르게 아이는 매우 게으르고 힘든 것을 싫어하며, 무엇이든 열심히 하지 않는 편입니다. 대신 결과에는 매우 집착해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스스로 너무 괴로워합니다. 시간 관리도 잘되지 않고 뒤늦게 몰아서 하는 습성이 있어서 학원에 다닐 때는 매일 새벽 3~4시에 잠을 자곤 했어요. 그러니 학교에 가면 잘 수밖에 없고 시험 시간에도 잠드는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학원을 모두 끊은 상태입니다. 지금은 그저 제시간에 잠만 자고 고등학교만 무사히 졸업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이를 대하고 있어요.
그런데 정작 아이는 성적에 전혀 맞지 않는 높은 대학, 높은 학과만 바라보면서 자괴감을 느끼고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을 힘들어합니다. 저는 ‘네가 하는 걸 보면 전교 꼴찌를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어떻게든 학교만 졸업하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이렇게 말해 주고 있어요. 그런데 아이는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결과만 얻으려는 심보가 너무 강해 보입니다. 부모로서 이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고 싶지만 제가 그럴 능력이 없는 것 같아, 이대로 살게 두자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모의고사 때 언어 영역 시간에 처음으로 잠을 자지 않고 문제를 끝까지 읽었는데 성적이 하위 20%에서 상위 20%로 올라갔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러니 ‘지금 깨우쳐 주면, 아이 인생이 바뀔 수도 있겠다.’ 하는 기대가 생기고, 그래서 자꾸 방법을 찾게 됩니다. 아이 본인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데 아직 마음을 먹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언제 마음을 먹을지는 본인도 모르겠다고 해요.
이런 아이를 바라보는 제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스님께 조언을 구합니다.”

“내가 묻는 말에 대답해 보세요. 이 아이는 누가 낳았어요?”
“제가 낳았습니다.”
“누가 키웠어요?”
“제가 키웠습니다.”
“그럼, 누구를 닮았을까요?”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청중 웃음)”
“어미 개가 새끼 개를 낳아 키웠는데 키워 놓고 보니 고양이더라, 이런 일은 없습니다. 내가 낳아서 내가 키웠다면 기본적으로 나의 영향을 받아 자라는 겁니다. 만약 할머니나 유모가 키웠다면 거기에 영향받아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보고 배우며 자라거든요. 그러니까 이것은 나를 닮아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이렇게 잘살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도 결국 잘 살 것이다.’ 이렇게 먼저 안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두 번째로 아이의 증상을 보면 약간 정신적인 병이 있을 가능성도 있어요. 그러니까 야단을 치거나 설득하려고 하기보다는 먼저 의사와 상의하고 병원에서 상담이나 진료를 받아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무기력감이 심하면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해야지, 스스로 해 나갈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당뇨병 환자가 당이 떨어졌는데 ‘마음먹고 버텨라.’ 한다고 해결이 되겠습니까? 또 어떤 사람에게 성적 흥분을 유발하는 주사를 놓고 ‘욕구를 참아라.’ 한다면 그 사람이 참아낼 수 있겠어요? 안 돼요. 몸에 이상이 생겨서 특정 물질이 과다하게 분비되거나 부족하게 분비되면 자기 통제가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이의 건강 상태를 먼저 검사를 해볼 필요가 있어요. 아이가 보이는 무기력증이 우울증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질병으로 이런 상태에 놓여 있는지 확인해야 해요.
이런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체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라온 환경이나 트라우마 같은 정신적인 문제예요. 신체적인 원인이라면 약물 치료가 필요한데, 환경이나 심리적인 원인이라면 상담이나 심리 치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치료해야 할 문제를 상담 치료로 해결하려고 하면 효과가 날까요? 안 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신과 치료에는 좀 문제가 있어요. 정신과 의사만 약물 처방을 할 수 있고 상담사는 그런 권한이 없어요. 약물 치료를 받으면 비교적 간단히 해결될 문제를 상담사가 붙들고 몇 달 동안 상담해도 효과가 크지 않지요. 반대로 정신과 의사는 환자와 오래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서, 보통 잠깐 이야기하고 바로 약 처방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 무조건 약물 치료 중심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약물 과다 처방이 생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상담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런데 외국에서는 정신과 의사와 상담사가 함께 팀을 이루어서 일을 해요. 일차적으로 상담사가 충분히 상담하고, 그 결과를 의사가 보고 상담 치료를 할 건지, 약물 치료를 할 건지 결정합니다.
그래서 상담사는 내담자와 이야기를 해보고, 약물치료가 먼저 필요하다 싶으면 바로 정신과로 보내야 합니다. 저도 여러분들 이야기 들어보고, 바로 정신과로 가서 체크해 보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질문자도 아이를 먼저 병원에 데려가서 확인해 보는 게 필요합니다.“
"병원은 다녀왔습니다."
"병원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네, 아이가 자기 머리가 나쁘거나, ADHD 같다고 하길래 검사해 봤는데 이상이 없었습니다."
"한 병원에만 가지 말고 다른 병원에도 가보세요. 엄마는 선입견을 갖고 아이들을 보기 쉽습니다. 즉, '우리 아이는 문제가 없다'라는 쪽으로 보기 때문에 엄마가 보고 판단하는 건 정확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알코올 중독자나 마약 중독자가 각오나 결심을 한다고 중독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요? 안 됩니다. 격리하거나 제삼자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처럼 아이가 도움이 필요한 상태일 수 있으니, 병원에서 확인이 필요하고 만약에 기질이나 성향이라고 한다면, 이럴 땐 엄마가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 엄마도 잘사니까 너도 잘 살 거다.' 이렇게 내버려둬야 합니다. 환자일 때는 도울 일이 있지만, 환자가 아닌 경우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예를 들어서 청년들이 연애하다 헤어져서 괴로워한다면 이것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울증이나 정신질환으로 간다면 병원에 가서 치료받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그게 아니면 그냥 놔둬야 합니다.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정신을 차리게 되는 거예요.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치유가 되기 때문에,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사람을 사귀면서 이런 경험을 한두 번 하게 되면, 인간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배우게 됩니다. 이 배움의 과정을 부모가 간섭해서는 안 됩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정신과에 가서 검진을 해보고, 심리상담사와 상담도 해봐야 합니다. 이렇게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면 다행입니다. 그다음에는 그것을 아이의 성향이나 특성으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이를 돌봐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깨우치겠다.' 이런 목표는 세우지 마세요. 자기나 깨우치세요. (청중 웃음)
자기도 깨우치지 못하면서 자꾸 남보고 깨우치라고 하는 건 옳지 않습니다. 또한 내가 남을 깨우치게 해준다는 생각도 위험합니다. 저도 여러분을 깨우치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대화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그 대화 과정에서 스스로 깨칠 때가 있을 뿐입니다. 깨우침이라는 것은 자각(自覺)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이와 많은 대화를 나누되, 무엇을 하라고 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면 그 과정에서 아이가 스스로 '내가 지은 인연이 있어서 과보를 받나?', '내가 욕심만 많나?'하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엄마가 ‘공부를 해야 결과가 좋지! 공부도 열심히 안 하면서 좋은 결과를 바라는 건 바보 같은 짓이지!’ 라고 하면 아이는 깨우칠 수 없습니다. 그냥 기만 죽습니다. 이처럼 깨우침이라는 것은 대화하다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서 '내가 고집이 센가?', '내가 욕심이 많나?'하는 생각이 들 때 깨우침이라는 쪽으로 한 발 들여놓게 되는 것입니다. 자각 없는 깨우침은 불가능합니다. 깨우침은 도와줄 수 없습니다. 다만,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줄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을 깨우쳐주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과 이런 얘기 저런 얘기하는 과정에서, 여러분들 스스로 '별일 아니었네?'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최고의 깨우침은 '별일 아니네'라고 아는 것입니다. 별일이 아니니까 해결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깨우침입니다.
그보다 낮은 수준의 깨우침은 '이러면 되겠네' 입니다. 즉, 자기 나름대로 해결책을 찾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가 길을 찾아놓고는 '스님이 나에게 정답을 딱 주셨다'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이러면 되겠네'라는 최고의 깨우침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별일 아니네' 하고 깨달으면 애초에 아무런 할 일이 없습니다.
이처럼 아이를 깨우쳐야겠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아이와 평등한 위치에서 아이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잘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아이가 어느 순간에 자각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럴 때만 깨우침이 있을 수 있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은 행복한 대화를 마치고 로비에서 책 사인회를 하고 오늘 강연을 진행하느라 수고한 봉사자들과 사진을 찍었습니다.
두북으로 이동하니 22시 30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정비를 하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후 2시에 통영에서 강의가 있고, 평화재단 연구원들의 1박 2일 워크숍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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