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3.17. 봄나물 캐기, 병원 진료, 텃밭 가꾸기
“중도는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가요?”

안녕하세요? 스님은 오늘 봄나물 캐기, 병원 진료, 텃밭 가꾸기로 하루를 보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 후, 아침 식사를 하고 8시부터 봄나물 캐기를 했습니다. 어제저녁에 두북 농장과 마을을 둘러보며 채취할 수 있는 봄나물이 있는지, 얼마나 자랐는지 미리 살펴보았습니다. 스님은 울력복으로 갈아입고, 간단 도구를 챙겨서 원추리가 난 곳으로 갔습니다.

마른 지푸라기를 걷어 내니, 연두색 빛의 원추리가 보였습니다. 스님은 허리를 숙여 원추리를 잘랐습니다.

“시골이니까 깨끗하겠다고 생각하고 아무 데서나 나물을 뜯으면 안 됩니다. 요즘에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제초제를 밭둑에 뿌리기 때문에 밭 근처에서 나는 봄나물에 제초제가 묻을 수 있어요. 조심해야 합니다.”

스님은 봄나물을 캘 때 주의할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햇볕이 잘 드는 쪽의 원추리는 그늘 쪽 원추리보다 크기가 컸습니다.

다른 장소로 이동하니 이번에는 달래가 지푸라기 밑에 숨어 있었습니다.

“눈이 침침해서 잘 안 보이네.”

“스님,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잘 찾으세요?”

“시골에 살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해요. 어디 가면 원추리가 있고, 어디 가면 달래가 있고, 어디 가면 쑥이 있는지 알면 봄에는 나물만 캐서 먹어도 진수성찬이지요.”

원추리와 달래를 일단 채취하고, 상추 텃밭이 있는 마당으로 돌아와서 다듬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마을 한 귀퉁이에 빼곡한 대나무 사이에 고물로 보이는 물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가던 길을 멈췄습니다.

“저기 대나무 숲속에 있는 것이 뭔지 한번 봅시다.”

하얀색의 길쭉한 물건이 버려져 있었습니다. 철제 용품이면 농사용으로 재사용할 수 있을까 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농사용으로 재사용할 수 있는 철제 용품은 아니었습니다.

마당으로 와서 아침에 캔 원추리와 달래를 다듬었습니다. 누런 잎은 골라내고, 흙은 털어냈습니다. 한 끼 식사 재료로 충분했습니다.

나물 다듬기가 끝나자, 다음은 상추 모종을 텃밭에 옮겨 심는 력을 했습니다. 빈 텃밭은 모종 비닐을 덮어씌우고, 상추를 옮겨심기하기 전에 물을 흠뻑 주었습니다.

상추를 심으려고 보니, 햇볕이 강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상추를 옮겨 심으면 어린 상추 모종이 탈 수 있어서 스님은 해가 약한 저녁 시간에 상추 모종을 옮겨심기로 했습니다. 때마침 내일 아침에는 비 소식이 있어서 상추 모종 심기는 오후 늦게 하기로 했습니다. 상추밭에 물을 흠뻑 주고 아침 력을 마쳤습니다.

아침 울력을 마치고, 스님은 병원 진료를 받으러 외출했습니다.

외출 후, 스님은 잠깐 휴식을 취한 뒤, 늦은 오후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상추 모종 심기 력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지난 겨울 해외 출장을 가기 전, 텃밭에 상추씨와 고수씨를 뿌리고 비닐을 덮어 두었습니다. 2달간 해외 출장을 마치고 와 보니, 텃밭 비닐 안은 연둣빛의 상추가 빼곡히 자라 있었습니다.

스님은 적절하게 자란 상추 모종을 삽으로 펐습니다. 일부는 마당 텃밭에 옮겨 심고, 일부는 두북공동체 대중들이 키워서 먹을 수 있도록 농사 팀장에게 줄 계획입니다. 스님은 겨울을 이겨내고 텃밭에서 자란 모종을 봄에 옮겨 심으면 빨리 자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비닐하우스 안에 이렇게 비닐을 낮게 씌워서 모종을 키우고 관리를 잘하면 겨우내 쌈 채소를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스님은 삽으로 푼 흙덩어리의 상추를 뿌리가 상하지 않도록 옮겨심기 좋게 하나씩 나눴습니다.

모종으로 심기 적절한 것만 모아서 다른 텃밭으로 옮겨 심었고, 너무 많이 자라서 모종으로 사용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상추는 식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따로 담았습니다.

옮겨 심은 어린 상추가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긴 철사로 활대를 만들고 그 위에 부직포로 덮어 주었습니다. 며칠간 한 낮에 상추가 햇볕에 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어 있던 4개 고랑이 상추 모종으로 꽉 찼습니다. 나무 장작으로 부직포가 날아가지 않도록 입구도 잘 덮어 두었습니다.

상추 모종을 퍼낸 움푹 파인 흙자리를 평평하게 정리하고 어린 상추 모종을 다시 심었습니다. 물을 흠뻑 주고 다시 비닐을 덮었습니다.

상추 옮겨심기 울력을 마치려고 하는데, 스님은 딸기밭 귀퉁이에 방치된 어린 상추 모종을 발견했습니다. 모종으로 심기에는 너무 작아서 함께 울력했던 행자가 한쪽에 모아 두었습니다. 스님은 작은 나무 꼬챙이로 땅을 파서 방치된 어린 상추 모종을 하나씩 심었습니다.

상추 옮겨심기를 다 마치고, 작업 도구를 정리하고는 오후 력을 마쳤습니다.

스님은 휴식을 취하고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 수행법회에 참석하고 두북농장 봄 농사 발대식을 한 후 병원 진료를 받을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으므로, 지난 3월 15일 정토사회문화회관 특별지부 회원의 날에 진행된 즉문즉설 내용을 소개하며 ‘스님의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중도는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인가요?

“저희 어머니가 불자이셔서 저도 자연스럽게 불교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접한 불교는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정해진 것은 없다.’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중도’라는 게 정말 있는지, 그것은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동네 있는 절의 스님께 ‘중도는 스님들이 술 마시고, 고기 먹으려고 만든 거 아니냐’라고 여쭤봤더니, 저를 때리시더라고요. (청중 웃음)”

“중도(中道)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의 철학적 상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이 생존 시 인도에는 두 개의 큰 철학적 조류, 사상적 조류가 있었어요. 하나는 당시 주류였던 브라마니즘, 브라만교입니다. 이 철학의 핵심은 브라만이라는 절대 신이 화현해서 개인의 영혼과 이 세상 모든 곳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원하면, 신이 이루어 준다고 믿습니다. 이런 논리가 수백 년을 이어왔는데, 당시 인도 사회는 약육강식과 빈부격차가 심하고, 심지어 억울하게 죽는 사람도 많았어요.

브라만교의 논리대로 신이 모든 걸 다 안다면, 인도 사회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설명되어야 하는데,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류 사상에 반하는 새로운 이론이 많이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나타난 신흥 사상가를 슈라마나 śramaṇa (श्रमण, [ʃrɐmɐɳɐ]), 우리말로 사문(沙門)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는 절대적인 존재는 없고, 여러 작은 요소들이 모여서 자아와 세계가 형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철학적으로 브라만교는 신으로부터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전변설(轉變說)이라고 하고, 사문은 여러 요소가 모여 쌓여서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해서 적취설(積聚說)이라고 합니다. 적취설은 철학적으로 보면 일종의 유물론적이고, 절대 신을 부정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행적 관점에서 보면 브라만교는 쾌락주의에 속하고 사문의 길은 고행주의에 속합니다. 마치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만큼 서로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왕족으로 태어나서 어릴 때는 주류 사상을 배웠지만,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브라만교에 대해 모순을 느끼고, 새로 등장한 비주류 철학에 동조해서 출가 사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두 가지 수행 방법을 모두 다 해봤습니다. 실제로 해보면서 각각의 장단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후, 부처님께서 처음 설하신 것이 중도입니다.

중도는 이것과 저것의 중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것도 모순이 있고 저것도 모순이 있으니, 이것과 저것을 뛰어넘는 제3의 길이 중도입니다.

예를 들어서 서울 가는 길을 물었더니, 어떤 사람은 동쪽으로 가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서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동쪽과 서쪽의 그 중간인 북쪽으로 간다는 말이 아니지요? 서울 가는 길이 동쪽이다, 서쪽이다 이렇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동쪽이 될 수도 있고, 서쪽이 될 수도 있고, 또는 북쪽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상황에 따라 인연에 따라 가변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내 위치가 정해지면, 내 위치에서 서울이 북쪽일 수도 있고, 동쪽일 수도 있고, 서쪽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서울은 동쪽이다, 서울은 서쪽이다.’ 이렇게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중도입니다.

중도는 가장 바르고 정확한 길

그러면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수행하는 목적은 해탈입니다. 해탈은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해탈에 이르는 가장 바르고 정확한 길이 중도입니다. 그런데 가운데 중(中)자를 쓰니까 흔히 중간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옥편을 찾아보면 가운데 중(中)자는 여러 의미가 설명되어 있는데, 열세 번째 뜻으로 ‘적중’의 의미도 있어요. 적중의 중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적중이라는 것은 화살이 날아가서 과녁의 한가운데를 딱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의미에 따르면 중도는 화살이 날아서 과녁의 한가운데를 맞추는 길입니다. 가장 바른 길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중도라 하기도 하고, 정도라고 하기도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하는 8가지 바른길을 말할 때, '말을 바르게 하라' 를 정어(正語)라고 합니다. 이렇게 중도를 여덟 가지로 나눠서 설명한 것이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이제 질문자 스스로 중도를 경험해 봐야 합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가장 바른 길인 중도는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서 또는 어떤 처지에 있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깨가 아플 때 어떤 사람은 접골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스트레칭을 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침을 맞아야 낫는다고 합니다. 이때 어깨가 어떻게 아프냐에 따라서 어떤 때는 이래야 낫고, 어떤 때는 저래야 낫는 게 중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픈 원인에 맞는 치료법이 중도입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거다, 저거다 이렇게 단정 지어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질문자처럼 중도를 잘못 해석하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네.’하고 자기식으로 이해하니까 스님들이 괜히 만든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술을 먹는 게 바른길이다, 안 먹는 게 바른길이다, 이렇게 정할 수가 없어요. 술을 먹고 취하면 그건 바른길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약 지을 때, 약재 성분을 잘 우러나게 하려고 막걸리 넣는 거 본 적 있어요? 요리할 때, 소주를 조금 넣는 것을 본 적 있지요? 이렇게 약재나 음식에 넣을 때는 술이 아니라, 약의 재료이고 음식의 재료입니다. 그러니까 술을 먹어도 된다,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정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때에 어떤 용도로 쓰이느냐에 따라서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은 약이야.’, ‘저것은 독이야.’ 하고 단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물질에는 약성도 없고 독성도 없어요. 다만 그것이 작용할 때 약성으로 작용하면 약이라고 불리고, 독성으로 작용하면 독이라고 불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중도(中道)는 곧 공(空)이 되는 겁니다."

“스님 말씀이 너무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불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정토경전대학에 입학을 신청했습니다.”

“잘 했습니다. 제대로 알려면 공부해야 합니다. 하지만 ‘중도’는 그 특성상 지식으로만 알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나라 전통놀이인 외줄타기를 예로 들어 봅시다. 부채 하나 들고 외줄 위를 건너가는 줄광대에게 줄 타는 법을 가르친다고 해봐요. 그러면 ‘이쪽으로도 넘어지지 말고, 저쪽으로도 넘어지지 말고, 균형을 잡고 똑바로 가라.’ 이렇게 가르칠 거예요. 말은 간단합니다. 그러나 밧줄에 올라가서 실제로 하려고 하면 잘 될까요? 잘 안됩니다. 그럼 불가능한 것이냐? 그렇지 않아요. 다만, 많은 연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수많은 연습을 통해 흔들거리며 중심을 잡아 나가는 법을 몸으로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중도입니다.

형편에 따라 다른 바른길, 중도

중도는 적중, 즉 바른길이라는 뜻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그 바른길이라는 것은 형편에 따라 다 다릅니다.

불교에서는 그 형편을 ‘인연’이라고 합니다. 인연에 따라 늘 중심을 맞춰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집에 일찍 와야 한다.’ 혹은 ‘늦게 와도 된다.’라고 정해진 법은 없습니다. 상담하다 보면, 남편이 집에 매일 늦게 온다고 하소연하는 아내도 있지만, 반대로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에 쏙 들어오는 남편 때문에 못 살겠다고 하는 아내도 있습니다. 이 남자는 친구도 없나? 술도 마시고 밖으로도 좀 돌아다니다가 오면 좋겠는데, 남편이 집에만 있으니까 아내 본인도 꼼짝을 못 한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형편에 따라 인간의 고뇌는 제각각입니다. 그 각각의 경우에 딱 맞는 법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중도입니다."

“그러면 정해진 것이 없다는 뜻인가요?”

“정해진 것이 없다고 해서 '방법이 아예 없다'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정해진 것이 없다는 말은 ‘인연을 따라 다르게 정해진다’라는 의미입니다. 형편이 주어지면 그 형편에 맞는 바른 법은 분명히 있다는 뜻입니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옷을 입어야 하는지 벗어야 하는지는 미리 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목욕탕에 들어갈 때는 옷을 벗어야 하고, 밖으로 나올 때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방법이 너무 막연해져서, 자칫 사견에 빠지거나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지 않을까요?“

"물론 거꾸로 적용해서 밖에서는 옷을 벗고 목욕탕에는 입고 들어가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옷을 입어야 한다.’ 혹은 ‘반드시 벗어야 한다.’라고 한쪽에 고정해 버리면 더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신사답게 행동해야 한다며 부부가 침실에 들어갈 때 정장을 차려입고 들어갈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하나의 원칙만을 고집하는 것을 ‘극단’이라고 합니다."

“스님,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고 느껴지는 것은 질문자의 사고가 경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연의 이치는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손을 오므려야 합니까, 펴야 합니까?’라는 질문과 같습니다. 물건을 집을 때는 손을 오므리고, 물건을 놓을 때는 손을 펴야 합니다. 오므려야 할 때 오므리고 펴야 할 때 펴는 자유로움이 바로 중도입니다. 만약 ‘손은 무조건 오므려야 한다.’라고 하면 펴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것이고, ‘무조건 펴야 한다.’라고 하면 쥐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인연을 따라 오므리기도 하고 펴기도 하는 것, 날씨에 따라 옷을 입기도 하고 벗기도 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중도는 사실에 기반한 자연스러움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를 만나면 나는 딸이 되고, 아이를 만나면 나는 엄마가 됩니다. 남편을 만나면 나는 아내가 되고, 학교에 가면 나는 학부모가 됩니다. 인연에 따라 내 역할이 바뀌는 것이 현실입니다. ‘나는 회사원이다.’, ‘나는 남편이다.’ 하고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습니다. 그 인연 안에서 잠시 그렇게 불릴 뿐입니다.

만약 결혼한 사람이 마치 미혼인 것처럼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은 내 자유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인연에서 어긋난 극단입니다. 반대로 사별하거나 이혼하여 그 인연이 끝났는데도 ‘나는 한 번 결혼했으니 다른 사람 만나면 안 된다.’라고 자신을 가두는 것도 극단입니다. 혼자 살고 싶어 혼자 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이유는 없습니다. 인연이 닿아 부부가 되면 부부의 예의를 지키고, 인연이 끝나면 다시 혼자가 되는 것. 이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삶이에요. 중도는 사실에 기반한 자연스러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중도를 자기 좋을 대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밖에서 옷을 벗어 던지거나 목욕탕에 옷을 입고 들어가면서 ‘이건 내 자유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질문자가 보기에 그런 사람들이 중도를 악용하는 것 같아 이상하게 느껴졌다면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편한 대로 이용하는 것은 중도가 아닙니다. 인연에 맞지 않는 길을 가면서 말로만 중도라고 주장하는 것일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전체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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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빛

자신의 인연에 맞게 가는 것이 중도이기에 사실에 기반한 자연스러움 이라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인션따라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2026-03-20 07:22:50

지명화

고맙습니다

2026-03-20 07:17:03

구자정

고맙습니다.

2026-03-20 07: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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