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2.9 국립공과대학(NIT) 강의, 비베카난다 국제 재단 방문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노력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델리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오전에 인도 국립공과대학(NIT)에서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비베카난다 국제 재단(Vivekananda International Foundation)에서 열리는 국제 포럼에 참석한 뒤, 밤기차로 가야로 이동하는 일정입니다.

스님은 새벽 명상과 수행을 마친 후 원고 교정을 했습니다. 토스트 한 조각으로 아침 공양을 한 후 오전 8시 30분에 인도 국립공과대학(NIT)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이 이 학교에서 강의한 지도 어느덧 3년째입니다.

오전 10시 학교에 도착하니, 인도에서 강의가 열릴 때마다 실무를 도맡아 온 강혜정 님과 통역을 맡은 국제지부 김미선 님이 먼저 와 있었습니다.

"교수진과 학생들이 조금 늦어져 강의를 30분 정도 늦추면 좋겠다고 합니다.“

"네, 그렇게 하지요. 델리 대학교에서도 30분 정도 기다렸어요."

스님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매년 강의를 연결해 주는 현지 교수님과 인사를 나눈 뒤 대기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사이 여러 교수님들이 찾아와 스님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오전 10시 30분에 강의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강당에 약 6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어릴 적 과학자를 꿈꿨던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불교도 과학처럼 '왜 그런가'를 끊임없이 묻는 탐구의 자세로 접근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어릴 적 꿈이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하는 말이 좀 허황되게 느껴졌고,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지금은 종교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불교를 공부할 때도 여러분처럼 과학적인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과학적인 시각이란 늘 ‘왜 그런가?’,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어떤 권위도 그대로 따르지 않는 거예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여러분도 어떤 질문이든 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과학자니까 아마 불교 철학에 대해서 잘 모르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불교의 독특한 핵심적인 특징에 대해 제가 간단하게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어서 부처님이 발견한 중도와 연기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설명한 후 물의 분자 구조를 비유로 들며 불교의 핵심 사상인 ‘무아’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 사실과 맞닿아 있음을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의 핵심 사상은 ‘이 세상에 어떤 존재도 실체가 없고,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고, 그 관계는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파니샤드와 같은 인도의 고대 철학 사상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어떤 철학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자연과학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불교는 과학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과학적 시각으로 본 부처님의 가르침

여러분은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니까, 물을 비유로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물을 작게 쪼개고 또 쪼개고 다시 쪼개어도, 그것은 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고대 철학자는 물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즉 물이라는 변하지 않는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적으로 규명해 본 결과, 물의 실체는 없습니다. 물의 가장 작은 단위인 물 분자는 수소와 산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만약 수소와 산소가 분리되면 물이라는 성질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물이라는 실체는 없습니다. 물이라는 것은 존재하지만, 물의 실체는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구성하는 산소 원자와 수소 원자는 본연의 실체가 있습니까? 원자도 실체가 없습니다. 원자는 원자보다 작은 소립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소립자는 실체가 있나요? 소립자는 더 작은 쿼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만물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생물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이란 유전자에 의해서 형성된 고도의 물질적 결합입니다. 또 우리의 정신 작용도 ‘나’라는 실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아트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아트만의 실체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과 종교로서의 불교가 아니라, 붓다 담마(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종교가 아니라 상식적인 선에서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나누게 될 대화의 주제는 삶의 고뇌에 관한 것입니다. 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스트레스와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화의 가장 밑바닥에는 중도와 연기라고 하는 불교의 근본적인 사상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네 명의 학생이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중도의 가르침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다며 스님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중도의 가르침은 무엇인지 질문했습니다.

열 번 해야 될 일을 세 번 만에 하려니까 괴로운 겁니다

“What teaching of the middle way has been most transformative in your own life?”
(어떤 중도의 가르침이 스님에게 가장 큰 변화를 주었나요?)

“중도에 ‘어떤 중도’라는 건 없습니다. 곡예사가 줄타기하는 모습을 본 적 있습니까? 줄을 하나 길게 쳐 놓고 그 위에서 중심을 잡으며 걸어가는 사람 있잖아요. 어떻게 떨어지지 않고 줄 위를 걸어갈 수 있을까요? 무게 중심을 이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저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면 됩니다. 말로 하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해 보면 잘 안 돼요. 몸을 한쪽으로 기울이면 그쪽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안 떨어지려고 애쓰면 반대쪽으로 떨어져 버려요.

그렇다면 중심을 잡는 건 불가능한 걸까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꾸준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이쪽으로도 넘어지고 저쪽으로도 넘어지는 수없는 실패를 통해서 결국 가능해집니다.

여러분이 어떤 연구를 할 때를 생각해 보세요. 수없는 실패를 합니다. 그러나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실패를 통해서 우리는 원리를 발견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실험을 백 번 정도 해야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실험했을 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계속 실패를 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많은 실패를 한다는 건 점점 원하는 결과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연습을 통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실패했을 때 절망하거나 좌절합니다. 그 좌절과 절망이 실패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실패는 계속해서 성공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욕심으로 빨리 성공하려고 하기 때문에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구할 때도 많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실패 자체가 좌절을 가져온 게 아닙니다. 열 번을 시도해야 가능한 일을 두 번이나 세 번 만에 성공하려고 하니까 좌절이 오는 거예요. 그러므로 꾸준히 해야 합니다. 이렇게 중도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에 맞게 방향을 조절해 가면서 꾸준히 연습하는 것입니다. 질문자는 여자 친구 있어요?”

“없습니다.”

“앞으로 여자 친구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여자가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면 다른 곳으로 가버립니다. 적절하게 조절해야 합니다.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가 ‘노’ 하면 한 발 물러나고, 여자 친구가 조금 멀리 가려고 하면 가까이 가서 잡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번 도전이 실패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험을 가지고 다음에는 좀 더 조절을 잘하면 됩니다. ‘여자가 나를 싫어한다. 나는 여자하고 잘 사귀지 못한다.’라고 여기는 건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라고 그 여자가 반드시 나를 좋아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교제가 가능할 수도 있고,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연구과제를 해결해 나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실험을 한 뒤에 ‘이건 안 되는 거야’ 하고 포기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은 실패가 아닙니다. 우리는 또 새로운 과제를 가지고 다시 한번 해 볼 수 있습니다. 중도의 관점을 지니면 우리는 다만 할 뿐이지, 괴로움은 없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밝혀 나갈 수가 있습니다. 즉, 치우친 것을 조절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쪽으로 치우치기도 하고, 저쪽으로 치우치기도 했다가 점점 좁아지는 것, 이것이 중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자기 내면에서 경험한 평화와 깨달음이 사회에도 꼭 필요하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 경험을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사회에 퍼뜨릴 수 있을까요?
  • 스님이 일상에서 실천하는 명상 수행법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중 어떤 수행이 평정심 유지와 깨달음에 가장 도움이 되나요?

강연을 마칠 무렵 마지막으로 한 학생이 손을 들었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노력하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There is a belief in destiny — that everything we are meant to accomplish in life is already predetermined. If that is the case, is there any point in making an effort to achieve something? On the other hand, if nothing is predetermined, and we may not get the results we want, then why do we work so hard?"
(세상에 태어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운명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삶에 있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반면에 정해져 있지 않아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열심히 일하는지 궁금합니다.)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정해져 있지 않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맞느냐가 아니라 믿음이 다를 뿐입니다. 만약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믿을 때 질문자처럼 따지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정해진 대로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이치로 보면 맞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원래 과학자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승려가 되었어요.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원래 승려가 될 운명이니까 아무리 과학자가 되려고 해도 결국 승려가 될 운명이었다’ 이렇게 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은 결과론적 해석입니다. 그러나 붓다는 이런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선택하는 겁니다. 열심히 할 건지 안 할 건지도 자기가 선택합니다. 즉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정해진 삶은 본래 없습니다. 그것이 좋으면 그렇게 내가 만들어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지 않으면 그렇게 안 살아도 됩니다. 그것은 본인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혼자 결정할 수 만은 없습니다. 부모님도 관여하고, 스승님도 관여하고, 친구도 관여합니다. 결혼하면 아내도 내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듯 세상 온갖 것들이 다 관여합니다. 우리는 그런 관계와 상황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내 삶을 산다기보다, 그때그때 주변에서 오는 자극과 분위기, 관계 속에서 생기는 감각과 느낌에 반응하며 따라갈 때가 더 많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아, 이게 나의 운명인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말씀처럼 운명이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처한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습니다. 마치 어떤 습관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습관에서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방금 곡예사가 외줄을 타는 비유로 설명했는데,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외줄을 타는 일은 쉽지 않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결국 각자의 삶입니다. 가령 스승님이 저를 강제로 스님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따져 보면 그 상황과 환경 속에서 제가 그렇게 살기로 선택한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앞에 앉아 계신 이 교수님이 지금 가지고 있는 핸드폰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해 봅시다. 제가 달라고 해도 안 주십니다. 그런데 누가 총을 들고 와서 머리에 총부리를 대고 ‘핸드폰 내놔!’ 하면 결국 내어놓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교수님은 나중에 ‘나는 핸드폰을 빼앗겼어요.’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따져 보면 꼭 그렇게만 말할 일은 아닙니다. 그 순간에는 목숨과 핸드폰 둘 중에서 무엇을 택할지, 하나를 결정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핸드폰이 소중해도 내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으니, 그때는 목숨을 선택한 겁니다. 그래서 핸드폰을 포기한 것이죠. 그럼 이것을 누가 그렇게 한 것입니까? 결국 내가 한 겁니다. 그러니 이 일에 대해 후회할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목숨보다 소중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선택을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사회적으로 보면, 다른 사람이 다시 이런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 신고를 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핸드폰을 잃어버렸다고 괴로워만 하지, 정작 신고는 잘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괴로워한다고 핸드폰이 돌아오는 건 아니에요. 괴로워한다고 이런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럴 때 내가 선택했다는 것을 알 때, 마음의 평화를 가져옵니다. 또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필요한 개선 조치를 평화적인 방식으로 해나가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스님이 강연을 마무리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교수들과 학생들은 다음에 스님이 인도를 방문했을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습니다.

낮 12시 10분에 강의를 마친 뒤, 스님은 곧바로 비베카난다 국제 재단(Vivekananda International Foundation)으로 이동했습니다.

비베카난다 국제 재단은 2009년 뉴델리 차나캬뿌리에 설립된 인도의 대표적인 공공정책 싱크탱크입니다. 안보, 외교, 공공정책 분야를 아우르며, '삼바드(Samvad)'라는 힌두교-불교 대화 프로그램을 통해 갈등 해소와 평화를 주제로 국제 대화를 해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인도, 한국,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 등 5개국의 불교 지도자와 학자들을 초청해 현대 사회 문제에 대한 불교적 접근을 논의하는 국제 포럼을 개최했습니다.

오후 2시에 사전 차담을 하고 3시에 포럼을 시작했습니다. 사회자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 속에서 불교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사회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스님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스님은 인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인 평화, 기후 위기, 빈곤 문제에 대한 해법을 이야기했습니다. 먼저 세계 질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 온 국제 협력의 틀이 흔들리고 있는 현실에서, 서양적 가치관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짚었습니다.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기후위기를 초래했다면, 사람과 자연이 서로 연관되어 공존한다고 보는 동양적 관점에서 새로운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불교 국가 간 협력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특히 불교 국가의 어려움을 이웃 불교 국가들이 서로 돕지 않고, 서양 국가들이 와서 돕고 있다며 각성을 촉구했습니다.

자비를 말하면서 왜 이웃의 고통은 외면합니까

“이 지구상에는 절대 빈곤에 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아시아, 아프리카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돕는 이들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사람들입니다. 왜 불교 국가의 어려움을 이웃에 있는 불교 국가들이 돕지 않고, 기독교 국가들이 와서 도울까요? 불교가 자비와 사랑을 얘기하면서 왜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다 보니 돕는 것은 좋은데, 그 도움이 결국은 전통문화와 공동체를 파괴할 때가 있습니다. 서구인들을 배격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좀 각성하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더 협력해서 우리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자는 겁니다. 동남아시아는 대부분 불교나 힌두교 국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협력해서 평화 문제, 환경 문제, 그리고 빈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하는 측면에서 대화가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전통문화를 존중해야 하지만, 전통문화가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그 차별을 극복하고 평등을 지향하는 관점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즉, 여성의 교육이나 사회활동, 장애인과 소수민족의 교육 등의 문제들은 전통의 이름으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이 꼭 서구의 사상에 의해서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 사상 안에도 성평등이라든지 인간의 존엄 등 많은 가치가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꼭 서양에서 온 것은 아닙니다. 불교 상가의 운영에도 많은 민주주의적 운영 방식이 있습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 문화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것들 속에도 많은 좋은 내용을 담은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세상은, 누구를 본받아 그대로 따라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로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서구의 가치관에서 발생했기 때문에, 서구 사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당장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새로운 관점에서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래 문명을 만들어가는 관점을 가지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며칠간 인도의 대학들을 방문한 소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저는 요 며칠 사이에 네루 대학, 델리 대학, NIT 대학, 이렇게 세 군데 대학에 가서 학생들과 대화했습니다. 그 학생들은 인도에서 가장 재능 있는 학생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는 그 재능을 전부 돈을 버는 데만 쓸 것인지, 아니면 돈을 버는 데서 생기는 부작용을 해결하는 데도 쓸 것인지 물었습니다. 누군가가 어지럽히면 청소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10퍼센트라도 있어야 세상이 유지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 모두가 소비를 줄이고 평화를 사랑하며 살아가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어렵다고 봅니다. 그러나 여러분같이 재능 있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평화를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환경을 아끼는 것과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참여해야 이 지구가 지속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고, 이렇게 곳곳을 방문하며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우리가 더 많은 연구와 실천을 해야 합니다. 어떤 방법이 있을지, 또 그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런 문제를 보완하는 방법 정도는 충분히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역할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의 발전만이 아니라, 이 발전 이후에 일어나는 부작용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도 함께 찾아나갔으면 합니다.”

이후 질의응답 시간에는 한반도 평화 문제, 종교와 국가 권력의 관계, 핵억지력과 동양 철학의 균형 등 폭넓은 주제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 스님이 동양의 지혜로 현재의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핵무기를 가진 김정은이나 권력을 쥐고 전쟁을 원하는 세계 지도자들이 현실에 존재합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동양의 지혜와 고대의 사상으로 어떻게 진단하고 대응할 수 있을까요?
  • 힌두교와 불교는 삶의 방식에 가까운 종교로 조직화되어 있지 않은 반면,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는 다른 종교들은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조직화되지 않은 불교와 힌두교가 어떻게 이러한 종교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요?
  • 강대국이 약소국의 권리를 무시하는 현실에서 인도는 핵억지력으로 외부 위협에 대응해 왔고, 동시에 인도 철학은 상대방의 관점까지 고려하는 대화의 공간을 열어 줍니다. 현실주의적 핵억지력과 인도 철학의 대화 원칙 사이에서 올바른 균형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스님은 전 세계의 어떤 문제든, 설령 갈등이 있더라도 대화는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당장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상황이 더 악화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대화를 마무리했습니다.

오후 4시 20분에 포럼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찍고 비베카난다 국제 재단 이사장님과 별도로 면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포럼에 함께 참석한 INEB(국제참여불교 네트워크) 이사장 하르샤 님, 사무국장 무 님을 만나 인근 식당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오후 9시에 아난드비하르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대합실에서 원고를 교정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 10시 45분 기차에 올라 가야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내일은 오후에 가야에 도착해 수자타아카데미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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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오행

늘 함께 합니다, 고맙습니다.()()()

2026-02-12 08:21:21

운정

스님의 법문 속에 평화를 향한 꾸준한 지향과 실천 그리고 안타까움이 전해져 마음이 뭉클합니다. 지구에 적어도 한반도에 지속 가능한 평화가 올까요...스님의 법문을 접하는 한순간만이라도 평화의 소중함을 깨닫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지는 아침입니다. 고맙습니다.

2026-02-12 08:12:24

구자정

고맙습니다.

2026-02-12 07: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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