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2.8. 인도정토회 이사회, 석가족 법회
“부처님 당시에는 법문 한 번 듣고도 깨달았다는데, 지금은 왜 안 되나요?”

안녕하세요. 상카시아에서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오전에 인도정토회 이사회에 참석하고, 수자타아카데미 초창기 활동가였던 수레스 님의 기숙학교를 방문한 후, 오후에는 석가족을 위한 법회를 했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하고 아침공양을 했습니다. 9시부터 인도정토회 이사회가 예정되어 있어서 오전에는 원고 교정을 하고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전 9시, 담마센터 3층에서 인도정토회 이사회를 시작했습니다. 삼귀의와 오계를 독송한 후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담마센터가 기공식을 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아직 건물이 안 올라가네요. (웃음) 준비한다고 수고들 하셨습니다. 올해 안으로는 공사가 이루어져야 하니까 다들 협력해서 잘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쁘라앙카님이 통역을 맡아 이사회를 진행했습니다. 인도JTS 활동가 김윤태 님이 2025년 진행 내용과 2026년 사업계획을 보고했습니다.

2025년에는 담마센터 기본 설계와 부지 측량을 완료했습니다. 2026년에는 해외기부금 등록(FCRA) 허가 신청을 추진하고, 시공사를 선정해 공사에 착수할 계획입니다.

스님은 보고를 들은 후 건축 설계에 대해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설계도를 보며 여러 문제를 짚었습니다. 부엌이 1층에 있는데 식당이 2층에 있으면 엘리베이터 없이 음식을 옮기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음식 동선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며, 부엌에서 바로 배식할 수 있도록 공간을 재배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건물 배치 방향도 논의했습니다. 스님은 상카시아 스투파 방향을 고려해 건물의 향을 정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차량 진입 동선에 대해서도, 정면으로 차가 들어오면 회전 공간이 필요해 강당 부지가 줄어드는 문제를 지적하고, 측면으로 진입하는 방안을 제안했습니다.

"오늘 이사회가 예상보다 길어지겠네요. 우선 여기 계신 분들이 현재 담마센터 부지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배치할 수 있을지 다시 구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끼리 논의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저와 함께 현장에서 땅을 보면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저는 10시부터 다른 일정이 있기 때문에 다녀와서 다시 합류하겠습니다."

스님은 이사회 구성원들에게 논의할 시간을 주고, 근처에 있는 수레스 님의 기숙학교를 방문했습니다.

학교 입구에서 수레스 님과 교사 몇 분이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야외 강당에 들어서니 60여 명의 학생이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먼저 불단에 참배하고 학생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나마스떼! 공부 잘 하고 있어요?“

"네!“

스님은 학년별 학생 수와 어느 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기숙하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학습하거나 운동할 때 필요한 게 있나요?“

"아뇨, 없습니다.“

"다행이네요. (웃음) 스님은 한국에서 온 불교 승려예요.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학생 두 명이 한국의 환경은 어떠한지, 어떤 농사를 짓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스님은 질문에 답하고 격려의 말을 건넸습니다.

"저도 시골에서 자랐어요. 학교도 먼 거리를 다녔어요. 한국도 옛날에는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한국이 오늘날 발전하게 된 것은 그 어려운 가운데 모든 아이에게 의무교육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농사를 지을 때는 특별한 교육 없이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지만, 산업화를 거치면서부터는 기술과 지식을 갖고 노동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앞으로 노동을 하더라도 기술과 지식이 있는 노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학습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알겠지요?“

"네!“

스님은 학생들에게 공책과 인도 전통 간식 미타이와 과자를 선물했습니다. 선생님들에게도 달력과 희망편지를 전했습니다.



이어서 수레스 님과 함께 기숙학교 시설을 둘러보고, 공사가 진행 중인 곳도 살펴보았습니다.


학교를 둘러본 후 스님은 수레스 님에게 학교 운영비에 보태 쓰라며 보시금을 전하고 담마센터로 돌아왔습니다.

곧바로 이사회 구성원들과 함께 건축 부지를 둘러보며 그간 논의한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구상하느라 고생했어요. 오늘은 이 정도로 이사회를 마무리합시다.“

점심공양 후, 스님은 수바스 님의 요청으로 태어난 지 10개월 된 손녀의 삭발 의식을 해 주었습니다.

스님이 잘라준 머리카락을 손녀의 할머니가 받아 곱게 간직했습니다.

스님은 아이에게 선물도 주었습니다.

"나중에 자라서 20년 후에 결혼 지참금에 보태세요.”(웃음)

12시 30분, 스님은 석가족 법회를 하기 위해 담마빨 스님이 운영하는 절로 이동했습니다.

법회에 앞서 스님은 담마빨 스님을 만났습니다. 얼마 전 성지순례객들이 이 절에 머물렀는데 반응이 좋았다며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어서 절 운영 상태를 묻고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

스님은 법당으로 이동하여 참배했습니다. 깐노즈에서 온 부부가 스님에게 향수와 흰 천을 선물했습니다.

오후 1시, 빨리어로 삼귀의와 오계를 독송하고 석가족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약 100명의 석가족이 참석했습니다.

스님은 인도의 변화와 인도 정부의 불교 유적 정비 사업, 그리고 석가족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석가족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습니다.

세 시간 동안 이어진 대화에서 열 명이 차례대로 질문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부처님 시대에는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많았는데 왜 지금은 그런 사례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지 질문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법문 한 번 듣고도 깨달았다는데, 지금은 왜 안 되나요?

“부처님 당시에는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스님의 법문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지금은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현대사회에서는 깨달음이 불가능합니까?”

“부처님의 법은 그 당시보다 지금이 훨씬 더 깨닫기 쉽습니다. 우리가 ‘깨달음’이라는 것을 너무 높고 거창한 단계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어렵다고 느끼는 것뿐입니다. 실제로 현대사회에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삶이 바뀐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정토회 회원들도 대부분은 원래 불교와 인연이 없던 사람들입니다. 각자 깊은 고뇌 속에 살다가 부처님의 법을 만나 관점이 바뀌었고, 정토회 회원이 되어 꾸준히 활동을 해나가면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변화가 없는 이유는 질문을 자꾸 ‘지식’이나 ‘생각’으로만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이해해서 모르던 걸 아는 것은 지식을 늘리는 것일 뿐, 마음을 변화시키는 앎과는 다릅니다. 불교의 핵심인 사성제(四聖諦)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나는 지금 이것 때문에 괴롭습니다.’라는 자기 문제를 분명히 가지고 있어야 깨달음으로 가기가 훨씬 쉽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관념적인 질문은 내려놓고, 대신 여러분 삶 속의 구체적인 괴로움을 질문해 보세요. 그러면 대화의 차원이 달라질 것입니다.”

스님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석가족들은 여전히 불교를 어떻게 더 발전시킬지와 제도·역사·갈등 같은 주제를 중심으로 스님에게 질문을 이어나갔습니다.

  • 불법을 위해 활동하고 싶은데, 비구니가 되어 더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여성이 비구니가 되려면 어떤 방법이 있나요?
  • 부처님의 상가에는 비구·비구니·우바이·우바새가 있는데, 현재 인도 사회에서는 여성 활동가의 비중이 너무 적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성 활동가들이 더 많아지고 무게 있게 활동할 수 있을까요?
  • 30년 전에 비하면 이곳 상카시아에 절도 생기고, 법문을 듣는 사람도 늘었으니 이것도 분명 변화입니다. 이제 앞으로 불교를 발전시키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 베트남이나 다른 나라 스님들은 노란 가사를 입고 오는데, 한국에서 온 스님들은 회색 옷을 입고 옵니다. 한국 스님들은 왜 다른 색 옷을 입나요? 그리고 북한에도 불교 신자가 있나요?
  • 인도에서 배를 타고 한국에 간 아유디야 공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도 '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는데 정말인가요?
  • 석가족들은 점점 정치, 경제, 기술 세 갈래 길로 나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로 힘을 합칠 수 있을까요?
  • 고타마 싯다르타가 부처님이 된 후, 석가족과 모리야족 왕족이 모두 왕의 길을 내려놓고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 이곳 상카시아에 부처님의 성지가 있다는 것을 스님은 어떻게 아셨나요? 그리고 저 스투파의 소유권을 두고 다른 종교와 갈등이 있는데, 상대방이 무조건 싸우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

휴식을 마치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스님은 힌두교·자이나교와 불교가 같은 용어를 쓰지만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하나하나 풀어주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갖는 고유한 특징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 인도에는 브라만교가 있었고, 불교가 등장하던 당시의 인도 사회에는 매우 다양한 사상과 종교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굽타 시대에 이르러 브라만교는 힌두교로 재편되며 다시 부흥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종교가 함께 사용하는 용어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니르바나’라는 말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힌두교나 다른 인도 종교에서도 사용됩니다. ‘담마(Dharma)’라는 말 역시 힌두교에서도 사용하는 용어로 공통적으로 쓰입니다. ‘붓다’ 또한 고유명사가 아니라 ‘깨달은 이’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자이나교에서는 마하비라를 ‘붓다’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윤회 사상 또한 인도 전통 종교 전반에 걸쳐 공유되는 관념입니다. 그렇다면 브라만교·힌두교·자이나교와 구별되는, 불교만의 근본적이고 독창적인 특징은 무엇일까요?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독창적인 특징

첫째는 중도(中道)입니다. 중도라는 개념은 불교에서 처음 제시된 용어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를 모두 떠난 길을 의미합니다. 이 중도의 통찰에서 바로 팔정도가 전개됩니다. 중도는 불교만이 지닌 독자적인 핵심 사상입니다.

둘째는 연기(緣起)입니다. 이것 또한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불교 고유의 개념입니다. 사리푸트라는 원래 산자야의 제자였으나, 부처님의 제자인 앗사지로부터 연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듣고 즉시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또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에서 이 연기법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기의 통찰 위에서 부처님은 네 가지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를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괴로움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 길이다.’

이 중도와 연기, 그리고 사성제야말로 불교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앞으로 누군가 ‘이것이 불교다’, ‘저것이 불교다’라고 주장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이거나 무조건 배격하지 말고, 나의 가르침인 중도·연기·사성제에 비추어 보아라. 그 내용이 그것들과 일치하면 붓다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버려라.’

이 연기법으로부터 나온 것이 무상과 무아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우파니샤드 철학이나 베단타 철학과 불교는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을까요? 우파니샤드와 베다 전통에서는 브라만을 성스러운 절대적 실재로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본질적이고 절대적인 ‘성스러움’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성스럽다고 생각하면 성스러워지고, 성스럽지 않다고 생각하면 성스럽지 않을 뿐, 존재 자체에 고정된 성스러움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힌두 전통에서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아트만’이라는 영원하고 성스러운 자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러한 아트만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의 가르침입니다. 힌두교가 어떤 영원한 실체의 존재를 전제한다면, 부처님께서는 ‘영원한 것은 없으며,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상입니다.

열반을 추구한다는 점, 깨달음을 통해 붓다가 된다는 점에서는 불교와 인도 전통 사상이 비슷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 유사성은 핵심이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은 중도(中道)와 연기(緣起) 사상에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과학이 발달하면서, 과학적으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에 더 가깝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카르마는 운명이 아니라 습관입니다

‘카르마(karma)’라는 개념 역시 인도 전통 사상에도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불교와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인도 전통에서는 카르마를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반면 부처님께서는 카르마를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즉 카르마란 타고난 운명이 아니라, 반복된 행위와 의식이 만들어 낸 습관의 구조입니다.

사람의 성격이나 성향이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은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습관은 고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꿀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담배에 중독됐다’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전생부터 담배를 피우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이 아니라, 반복된 행위로 그런 습관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러니 바꿀 수 있습니다. 결국 부처님의 가르침은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형성된 어리석음과 무지가 지혜를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과 무지가 사라지면 누구나 지혜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람이든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그 괴로움이 없는 상태가 바로 니르바나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하거나 특별히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카르마, 곧 습관에 끌려다니기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하루 종일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하루만 못 피워도 괴롭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괴로운 이유는 담배를 피우는 습관, 즉 담배 피우는 카르마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담배 피우는 카르마를 가진 사람에게는 담배를 안 피우는 일이 엄청난 괴로움이지만,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에게 그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습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누구나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인도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인도의 삶은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인도의 삶이 매우 고되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들이 인도에 오면 왜 괴로워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한국에서 형성된 자신의 습관, 곧 자기의 카르마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한국에 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맛있다고 여기는 음식을 여러분은 도무지 먹지 못합니다. 그 음식이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 역시 습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근본 원인은 환경이나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붙들고 있는 자신의 습관, 곧 카르마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우리는 어디에서든 괴로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환경이 아니라 습관에 있습니다

붓다 담마(부처님의 가르침)란 연기법, 중도, 열반, 니르바나와 같은 용어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붓다 담마는 자기 경험 속에서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지를 스스로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인도 음식을 먹다가 ‘도저히 못 먹겠다. 인도에 살기에는 음식 때문에 너무 힘들다’고 느꼈다고 해봅시다. 그때 괴로움의 원인은 음식이 아니라 내 습관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붓다 담마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괴로움 없이 어떤 음식이든 먹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괴로움의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습관과 집착에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됩니다.

제가 인도 성지순례에서 순례객들에게 호텔이나 좋은 음식 대신 순례자 숙소와 불편한 환경을 제공하는 이유도, 그들을 고생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 체험을 통해 괴로움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 그것을 체험적으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옛날 사회와 교육제도에서는 여성을 차별하고 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성이 본래부터 남성보다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생에 복을 못 지으면 여자로 태어나고, 복을 지어야 남자로 태어난다’는 논리까지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도 교육을 받고 차별을 없애 버리면 남자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운명이 아니잖아요. 붓다 담마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습니다.

니르바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라는 말도 인도 전통에서 쓰는 의미와 불교에서 쓰는 의미가 서로 다릅니다. 인도 전통에서 윤회란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맥락에서 니르바나는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는 이런 생사 반복의 의미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욕구가 충족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것을 ‘즐거움’이라 합니다. 반대로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는데, 그것을 ‘괴로움’이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이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과정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1만 루피를 얻으면 기분이 좋고, 1만 루피를 잃으면 괴롭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기쁘고, 아들이 죽으면 괴로워집니다.

반면 길에서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고 합시다. 그러면 크게 기분이 즐겁지 않습니다. 그 돌멩이를 잃어버렸다고 해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큰 만큼 괴로움도 커지는 것,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입니다. 즉 고(苦)와 락(樂)이 되풀이되는 흐름입니다.

담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면 기분이 좋고, 못 피우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것 역시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윤회의 한 형태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피울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지금 담배를 피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그대로 알아차려 보는 것입니다. 피우지도 않고 억지로 참지도 않은 채, 단지 ‘피우고 싶어 하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면 즐거움도 사라지고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락의 윤회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붓다 담마에서 말하는 니르바나입니다.

만약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니르바나라면, 지구의 인구가 모두 사라지면 그것이 니르바나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니르바나란 괴로움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도 전통과 불교에서 같은 용어들이 쓰이다 보니, 붓다 담마를 힌두 담마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혼동이 생깁니다. 여기서 어느 쪽이 옳고 그르냐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붓다 담마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나 다 붓다 담마에 따라서 수행하면 실제로 괴로움이 줄어들고, 나아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다시 질문을 받고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한 분이 손을 들고 어떻게 해야 일상생활 속에서 붓다 담마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지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일상 속에서 어떻게 붓다 담마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매일 일하고 활동하며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붓다 담마를 지키며 살 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잘못된 일도 많고 장애물도 많은데, 어떻게 해야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을까요?”

“밖을 한번 보세요. 작은 벌레들이 나뭇잎을 갉아 먹으며 삽니다. 그들은 누가 도와줘서 사나요, 아니면 스스로 살아가나요? 저 작은 새들도 누가 도와줘서가 아니라 자기 힘으로 살아갑니다. 작은 새도 스스로 사는데, 하물며 사람이 스스로 살기가 어렵겠습니까?

이 도리를 알면 사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새가 모이를 먹으려는데 누가 치워 버렸다고 합시다. 새가 괴로워하며 화를 낼까요? 아닙니다. 이게 없으면 옆에 있는 걸 먹으면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일을 하려다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어떤 사람과 결혼하려 했는데 그 사람이 싫다고 하면, 다른 사람과 하면 되잖아요. 왜 꼭 그 사람이어야 합니까? 그걸 ‘집착’이라고 합니다. 이 집착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입니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시험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 결과 시험에 떨어질 수도 있어요. 그러면 다시 공부하거나 다른 일을 하면 됩니다. 괴로워할 일이 아니에요. 괴로워한다는 것은 거기에 집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하고 말씀하신 거예요. 집착이 바로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하신 겁니다.

이런 붓다 담마를 알면 삶에서 괴로움이 사라지거나 줄어듭니다. 그 결과 삶이 자유로워져요. 여러분이 좌절하거나 절망하는 것은 일이 안 돼서가 아니라,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저 또한 이 담마 센터를 짓는 데 집착하면 괴로울 거예요. 30년 전부터 짓고 싶었지만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잖아요. 그러나 집착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는 않고, 그저 인연 닿는 대로 해나갈 뿐입니다.”

대화를 마칠 무렵 마지막 질문자가 손을 번쩍 들고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정말 나쁜 영향을 줄까요?

“우리는 살면서 부정적인 생각에 자주 휩쓸리곤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실제로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주나요?”

“맞습니다.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면 나쁜 영향을 받습니다. 옛날 부처님 당시에는 불가촉천민들이 죽으면 화장을 안 하고 숲에 버렸습니다. 개나 쥐가 죽으면 버리듯이 숲에 버렸습니다. 그러면 시체를 버린 숲은 부정한 곳인가요? 성스러운 곳인가요?”

“부정한 곳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내가 그곳에 가면 재수가 없다거나 나쁜 일이 생긴다’는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곳에는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만나지 않고 수행을 하는 수행자에게는 그런 곳이 오히려 좋습니다. 부처님은 그곳에서 수행을 했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 처음 설법한 곳을 부정한 곳이라고 하나요? 성스럽다고 하나요?”

“성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장소에 부정한 것, 성스러운 것이 있는 거예요? 아니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거예요?”

“마음에 있습니다.”

“붓다 담마의 관점에서는 부정한 것도 없고, 성스러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늘 부정한 것이나 성스러운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체를 버리면 부정하다고 생각하고, 부처님이 계셨다고 하면 성스럽다고 생각합니다.

사르나트는 원래 시체를 버리던 숲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부처님이 수행자들에게 설법을 했기 때문에 성스러운 곳이라고 하잖아요. 이 옷은 부정한 옷일까요? 성스러운 옷일까요? 원래 부정한 옷이에요. 왜냐하면 시체를 덮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입었기 때문에 성스러워졌어요. 이처럼 존재에는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 마음에 부정한 생각, 성스러운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붓다 담마는 알면 알수록 정말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교로서의 불교를 믿거나 힌두교를 믿거나 기독교를 믿는 것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붓다 담마는 진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오후 4시가 넘어 법회를 마쳤습니다. 4시 30분, 스님은 담마센터에 남아 있는 활동가들에게 인사하고 델리로 출발했습니다.

"저는 델리에서 일정을 마치고 밤에 기차로 가야로 이동하겠습니다. 모두들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만납시다.“

차를 타고 약 7시간을 이동해 밤 10시 30분에 델리 인근 숙소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인도 공과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오후에는 비베카난다 국제 재단을 방문한 후 밤 기차를 타고 가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2026 3월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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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연우

諸行無常 !!!
카르마로부터 편안함!!!
스님 덕분으로 조금씩 한발 나아갑니다.
고맙습니다 🙏

2026-02-11 08:25:41

루퓌어스

이번에 인도성지순례를 참가하고 돌아와 스님의 하루를 꾸준히 보게 됩니다.
스님의 법문이 현장에서 듣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늘 들었던 내용이지만 새롭게 들리는 부분도 있네요.
불법은 종교가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있고, 그 법을 만남에 감사합니다.

2026-02-11 07:38:37

김대영

모든것이 다 내 마음이 일으키는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2026-02-11 07: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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