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6.1.25. 인도성지순례 2일째, 사르나트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 무엇을 가장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안녕하세요. 사르나트에서 35차 인도성지순례 둘째 날이 밝았습니다. 오늘 스님은 사르나트에서 수계식을 진행하고, 오후에는 태국 절과 미얀마 절 주지 스님을 만났습니다. 저녁에는 온라인으로 성도재일 법문과 정토담마스쿨 졸업식 법문을 했습니다.

2,600년 전 사르나트에서 다섯 수행자가 부처님의 첫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부처님(불), 가르침(법), 수행공동체(승)가 갖추어졌고, 이 '삼보'는 불교가 수천 년의 세월을 지나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500명의 정토행자들이 같은 자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스님은 새벽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아침 식사를 하고 원고를 교정했습니다. 오전 9시 45분에 숙소를 나와 사르나트로 이동했습니다.

사르나트에 도착한 스님은 첫 설법지에 세워진 다르마라지카 스투파(Dharmarajika Stupa)를 참배하고, 이어서 부처님의 두 번째 설법을 하신 장소를 기념하는 다메크 스투파(Dhamek Stupa)를 참배했습니다.




500여 명의 순례단은 먼저 도착해 다메크 스투파 앞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습니다.

대중이 삼배로 스님께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순례단에게 사르나트 성지가 갖는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리신 곳, 바라나시 근교 사르나트에서 순례의 첫발을 내딛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여러분이 보고 계신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약 1킬로미터쯤 가면 영불탑(迎佛塔)이 있습니다. 오비구(五比丘), 즉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맞이한 곳이라 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사르나트, 법의 수레바퀴가 처음 굴러가기 시작한 곳

이 숲은 당시 시체를 버리던 장소였기 때문에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조용히 이 숲속으로 들어오시자, 다섯 수행자는 멀리서 걸어오는 부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비구는 서로 이렇게 말합니다.

‘고타마가 아닌가?’
‘그가 왜 여기에 오지?’
‘고타마는 수행을 포기한 사람 아니었나?’
‘오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가까이 와도 수행자로서의 예우는 하지 말자.’

당시 수행자들 사이에는 일종의 상호 예우가 있었습니다. 먼 길을 온 수행자에게 발 씻을 물을 떠주고, 발을 씻은 뒤 앉을 자리를 깔아주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고타마는 수행자가 아니라, 고행을 포기한 타락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예우는 하지 말자고 뜻을 모은 겁니다. 다만 예전에 함께 지냈던 사람이니, 인사 정도는 하자고 합의합니다.

부처님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오비구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경전은 아주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조롱 속에 갇힌 새가 사람이 다가오면 마음이 불안하거나 들떠 이리저리 날뛰듯이 결국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한 사람은 물을 뜨러 가고, 또 한 사람은 자리를 펴게 됩니다.

보통 우리가 싫어하는 사람이 오면 어떻습니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웃지만, 속으로는 마음을 닫지요. 그런데 이 수행자들은 의식적으로는 예우하지 말자고 했지만, 마음은 이미 예우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전히 ‘고타마는 수행자가 아니다’라는 생각은 남아 있었지만, 6년 동안 함께 수행하며 쌓였던 신뢰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인사를 건넵니다.
‘고타마 씨여, 신수가 좋구려.’

우리에게 이 말은 ‘얼굴이 좋아 보인다’는 칭찬이지만, 당시 수행자들의 입장에서는 약간의 비아냥이 섞여 있었습니다. ‘고행을 포기하고 쾌락을 좇아 잘 먹고 편히 지내더니, 몸이 좋아 보이구나.’라는 뜻이었지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더 이상 고타마라고 부르지 말라. 나를 타타가타라고 부르라.’

‘고타마 씨’라는 말은 당시로서는 존칭이었습니다. ‘아무개 님’ 정도 되는 표현이었지요. 그런데 ‘타타가타’는 여래(如來), 곧 ‘오고 감이 없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오비구가 묻습니다.
‘그렇다면 미묘한 법을 얻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부처님께서 ‘그렇다.’라고 답하시자, 그들은 선뜻 믿지 못합니다. 그토록 혹독한 고행을 하고도 깨닫지 못했던 사람이, 수행을 포기한 뒤에 깨달았다고 하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겁니다. 그들이 의심하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오비구여, 우리가 함께 지낸 6년 동안 내가 한 번이라도 거짓말한 적이 있소?’

옛 기억을 더듬어 보니, 고타마는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 순간 신뢰가 다시 살아납니다. ‘수행을 포기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보니, 그는 거짓말할 사람이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오비구는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좋은 법을 우리에게도 들려주시오.’

이렇게 해서 법을 청하는 형식이 갖춰집니다. 부처님께서는 청하지 않으면 법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으신 후 무엇을 가장 먼저 말씀하셨을까요?

그들은 그곳에서 더 깊은 숲속으로 약 1킬로미터쯤 자리를 옮겼습니다. 초저녁에는 다 같이 깊은 명상에 들었습니다. 한밤중에는 명상을 풀어 마음을 편안히 했습니다. 그리고 후야, 즉 새벽녘에 부처님께서 다섯 옛 친구들에게 깨달음의 법을 설하십니다.

‘수행자는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

이것이 첫 설법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의 길을 모두 놓아야 한다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로 ‘이것이 괴로움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이것이 다시는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지하는 길이다.’라고 하는 사성제(四聖諦), 즉 네 가지 진리를 설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괴로움에 빠지지 않는 여덟 가지 길, 팔정도(八正道)를 설하셨습니다.

이 법문을 듣고 다섯 명 가운데 한 사람인 콘단냐가 깨달았습니다. 한문으로는 교진여(憍陳如)라고 합니다. 마치 어두운 밤에 등불이 켜지듯 마음이 환히 열리며 지혜가 드러난 것입니다. 콘단냐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스승에 대한 예를 올렸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오, 콘단냐가 깨달았구나. 콘단냐가 법을 이해했구나!"라고 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들어오시다가 입구 옆에 탑은 사라지고 기초만 남아 있는 흔적을 보셨죠? 그것이 첫 설법을 한 곳에 세운 다라마라지크 스투파, 곧 법륜탑입니다. ‘법의 수레바퀴’를 상징하는 탑입니다. 두 번째 설법을 한 곳에 세운 탑이 지금 여러분 앞에 보이는 다메크 스투파입니다. 이 탑은 지금도 이렇게 큰 규모로 남아 있습니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고, 다시 3일이 지나자 두 사람이 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깨달은 세 사람이 탁발을 나가고 부처님과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나눴습니다. 세 사람이 얻어온 음식을 여섯 명이 나누어 먹으며 대화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즉, ‘깨달음의 장’에서처럼 깨닫기 전까지는 어디가지 않고 계속 정진하는 겁니다.

다시 3일이 지나고, ‘앗사지’라 불리는 비구가 마지막으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비구의 이름이 모두 등장합니다. 첫 번째가 콘다냐, 마지막이 아싸지입니다. 이로써 수행자에게 가장 소중한 세 가지 보배, 삼보(三寶)가 성립됩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붓다, 깨달은 이가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하는 가르침인 담마, 그리고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음을 얻은 이들인 상가입니다. 상가(僧伽)는 복수형입니다. 수행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다고 해서 곧 수행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가는 ‘깨달은 이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곳에서 최초로 불법승, 삼보가 성립되었습니다. 첫 설법의 대상은 오비구였지만, 그 첫 설법의 범위 안에는 야사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야사의 가족까지 포함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스님은 야사 비구의 출가와 그의 가족·친구들까지 깨달음을 얻어 61명의 아라한이 탄생한 이야기, 그리고 이곳에서 '전법의 길을 떠나라'는 역사적 선언이 있었다는 설명까지 하고 성지 설명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대중은 사르나트와 관련된 경전을 읽고 명상을 했습니다.


다음으로 수계식을 진행했습니다. 수계식은 수행자로서 지켜야 할 계율을 받는 의식입니다. 순례단은 다메크 스투파를 바라보며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독송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을 수계법사로 청했습니다.


스님은 수행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대중은 계를 받기 전, 지난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지은 잘못을 참회하고 연비를 진행했습니다.


참회의 시간이 끝나고 순례단은 다시 한번 삼보에 귀의하고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순례단이 계를 받아 지키겠다는 다짐과 서원을 하자, 스님은 대중에게 축원을 해 주었습니다.

"13일 동안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보고 듣고 행하면서 부처님처럼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내었습니다. 부처님의 10대 성지를 한 걸음 한 걸음 걸으며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수행자로서 정진하겠습니다. 오늘 수계받고 발원한 공덕이 고통받는 일체 중생들에게 회향되어 그 고통이 사라지게 하여지이다.“

이어서 가사와 발우 수여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가사는 수행자가 입는 옷이고, 발우는 수행자가 사용하는 그릇입니다.


"지금 수여하는 가사와 발우는 13일 후 상카시아에서 반납합니다. 여러분들은 계를 받았으니 지금부터 성지순례 기간 동안만큼은 부처님처럼 살아보겠습니다. 지금부터 가사와 발우를 수여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사와 발우를 드립니다' 하고 이야기하면 '잘 받았습니다' 하고 가사와 발우를 이마 위로 살짝 들어 올립니다. 출가수행 대중들에게 가사와 발우를 드립니다."

"잘 받았습니다."

"자, 이제 가사를 모두 입어보세요."

대중은 발우를 내려놓고 가사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인솔 법사님들은 아직 가사가 낯선 대중들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순례단이 모두 가사를 수하자 사르나트 녹야원이 노란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지나가던 외국인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대중은 다메크 스투파를 향해 예불을 드린 후 스님께 법문을 청했습니다.

“이제 성지순례를 출발하기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한 사람의 수행자로서,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초전 법륜을 설하신 이곳에 예불과 공양을 올렸습니다.

부처님은 6년 동안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기 위해 고행하신 것은 아니지만, 숲속에서 잠자지 않고 먹지 않으며 수행하셨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쾌락의 극치까지 가보셨고, 수행의 과정에서는 고행의 극치까지도 가보셨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해탈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욕망을 알아차리는 길, 사르나트에서 처음 설해진 중도

우리에게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이 충족되면 즐거움이 생기고, 충족되지 않으면 괴로움이 생깁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서로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부처님은 이 둘의 뿌리가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셨습니다. 그 뿌리가 바로 욕망입니다.

뿌리는 그대로 둔 채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을 가지고 대응하는 것과, 뿌리 자체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접근입니다.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것은 ‘고행주의나 쾌락주의나 결국 하나의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둘 다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즐거움도 사라지고 괴로움도 함께 사라집니다. 그때 윤회가 끊어집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새로운 발견이었습니다.

부처님은 이 해탈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먼저 고행과 쾌락이라는 두 극단을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드러난 현상만 보지 말고, 그 뿌리로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욕구나 욕망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참을 것인가, 따라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지요.

그런데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고, 따라가면 과보를 받으니, 어느 쪽도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길은 전혀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이 ‘알아차림’이 바로 붓다가 발견한 새로운 길입니다.

이곳에서 제자들에게 처음 가르침을 펼치실 때도, 부처님은 이 관점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중도의 관점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리 열심히 해도 깨닫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가르침이 ‘양극단을 피하라.’는 중도의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도는 이것과 저것의 중간을 적당히 택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질을 꿰뚫어 보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가르침은 고제(苦諦)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라는 진리입니다. 이때 말하는 괴로움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괴로움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즐거움이 괴로움으로 바뀌고, 괴로움이 다시 즐거움으로 바뀌며 끊임없이 윤회하기 때문에, 그 즐거움마저도 괴로움이라는 뜻입니다. 이 점을 꿰뚫어 알았을 때, 비로소 ‘고를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깨닫는다는 것은, 즐거움이 곧 괴로움임을 분명히 알아차린다는 의미입니다.

괴로움의 원인은 사로잡힘, 즉 집착인데 이것은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욕망을 알아차린 다음에는, 거기에 대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욕망을 따르지도 않고, 욕망을 거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먹고 싶다’는 마음이 올라올 때, ‘먹어야지’ 하는 것도 아니고, ‘먹지 말아야지’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아, 먹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고뇌에서 벗어나는 해탈의 길을 발견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번 순례에서 공양을 올리고, 예불을 하고, 가사를 수하는 것은 불교 전통에 따른 문화적 행위입니다. 좋다 나쁘다로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늘 붓다 담마의 핵심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법문을 듣고, 자기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남을 봐서는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를 봐야 합니다.

어제저녁만 해도 제가 ‘힘든데 괜찮겠어요?’ 하고 물으니, 여러분은 ‘괜찮습니다.’, ‘좋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법문이 조금 길어지니까 어떻습니까? ‘스님이 이렇게 오래 법문을 해주시는데, 밥을 안 먹고라도 들어야지.’ 하는 마음이 아니라, ‘아, 배고파라.’ 이렇게 반응이 올라옵니다. 법문을 오래 할수록 더 좋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본래 이런 모순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순을 어느 순간 또렷하게 자각할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중요한 것은 항상 마음이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좋고 나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이 좋고 나쁜 마음에 끌려다니지 말고, 금방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그 마음을 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피부를 살짝 누르면 지압이 되지만, 조금만 더 누르면 통증이 됩니다. 가까이 가면 사랑이 되지만,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추행이 됩니다.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올까요? 이런 미묘한 차이와 모순을 자각하는 순간, 여러분을 묶고 있던 큰 속박의 장벽이 무너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미묘한 법’이라고 말합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말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하기에는 너무 쉽고, 쉽다고 하기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마치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담배를 안 피우는 게 얼마나 쉬운지 설명하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안 피우는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지만, 피우는 사람에게는 이해가 안 되고 죽을 것처럼 힘든 일이죠.

이런 법을 붓다는 2600년 전에 처음 제시했고, 그 가르침은 당시 세상에 큰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관념화되어 이론으로 남았다가, 중국에 와서 ‘선(禪)’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파격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마저도 흐지부지해진 상태입니다.

여러분도 이 법을 자각해서, 오래 살아도 좋고, 일찍 죽어도 좋고, 여기 있어도 좋고, 저기 있어도 좋고, 이 사람과 살아도 좋고, 안 살아도 좋은 그런 경지에 이르러야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성지순례를 왔지만 끝날 때까지 여기만 있어도 괜찮고, 이곳저곳 다녀도 괜찮아야 합니다. 많이 구경해도 좋고, 가만히 있어 편안해도 좋아야 합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경지를 여러분이 증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먹고, 입고, 자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는 안 먹을래.’ 하는 단식은 결심과 각오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먹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먹고 안 먹고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안 먹는 것이 곧 자유는 아닙니다. 이런 무유정법이 바로 이곳에서 처음 설해졌습니다.”

법문을 마치고 스님과 순례단은 전법선언을 했습니다. 부처님 말씀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수행자들이여, 이제 모든 천인과 인간들 속에서 그들을 제도하라.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안락을 주기 위하여,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이익과 안락을 주기 위하여 속히 떠나거라...(중략)“

스님과 대중은 전법선언을 마치고 탑돌이를 시작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부르는 소리가 점차 커져 사르나트를 가득 채웠습니다. 스님의 뒤를 따라 선 500여 명의 행렬은 출렁이는 가사와 함께 하나의 거대한 물결처럼 이어졌습니다.




다섯 시간에 걸친 사르나트 참배를 마친 뒤 다 함께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이후 대중은 사르나트 박물관으로 향했고, 스님은 숙소로 돌아갔습니다.


스님은 오후 3시 30분에 숙소에 도착해 늦은 점심 식사를 하고 잠시 휴식했습니다. 오후 5시 30분에 태국 절 주지 스님을 만났습니다.

사르나트에 있는 태국 절은 코로나 이후 4년째 정토 성지순례단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태국 절 주지 스님은 스님을 반기며 언제든 머물 수 있다고 했습니다. 덕분에 대중은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감사의 뜻으로 선물과 보시금을 전했고, 주지 스님은 초전법륜상과 아쇼카 석주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곧바로 성도재일 법회 방송을 위해 미얀마 절로 이동했습니다. 성도재일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방송 전 미얀마 절 주지 스님을 만났습니다. 작년 성지순례 때도 순례단에게 숙소를 제공해 주어 인사를 나눈 분입니다. 스스로를 라카인족이라 소개한 주지 스님도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미얀마 내부를 돕고 싶지만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했고, 미얀마 절 주지 스님은 접근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정부가 너무 많은 것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구호 단체들을 모두 막고 있어서 저조차도 미얀마 내부 지원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내부로 들어가려면 비공식적인 연결이 있어야 할 거예요.“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스님께서 도움을 주실 수 있다면 JTS는 얼마든지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네, 스님. 저도 스님 하시는 일이라면 돕고 싶습니다.“

방송 시간이 다가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저녁 6시부터는 성도재일 전야법회 생방송을 하기 위해 온라인에 접속했습니다. 한국 시각은 밤 9시 30분이었습니다. 영상팀이 숙소에서 방송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를 해놓았습니다. 죽비 소리에 이어서 스님이 법문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음력으로 12월 7일입니다. 내일이면 음력 12월 8일,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성도일(成道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밤새 정진하신 끝에, 이튿날 새벽 마침내 깨달음을 얻으셨습니다. 우리 정토행자들도 이 뜻깊은 날을 맞아, 오늘 저녁 마음을 모아 함께 정진하고자 이렇게 성도 전야에 자리를 함께했습니다.

성도 전야의 가르침, 알아차림으로 드는 선정

우리는 흔히 명상을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리가 아프네.’, ‘등이 가렵네.’ 이렇게 몸의 감각에 끌려다니다 보면, ‘다리를 펴야 하나?’, ‘등을 긁어야 하나?’ 하며 또다시 생각이 이어집니다. 어떤 때는 옛날 일이 떠올라 몸은 여기 앉아 있지만, 생각은 과거로 가 있기도 합니다. 내일 해야 할 일이나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 때문에 생각이 이리저리 헤매기도 하지요. 이런 상태를 우리는 흔히 ‘망상을 피운다’고 말합니다. 겉으로는 자세를 잡고 떡하니 앉아 있어도, 머릿속은 여전히 분주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태를 두고 선정에 들었다거나, 제대로 명상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무릇 선정이란 생각이 끊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바른 자세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하는 분별의 생각을 멈추는 일입니다. ‘통증을 참을까?’, ‘다리를 펼까?’ 이런 생각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선정에 들 수 없습니다. 통증이 있으면 그저 ‘통증이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숨이 들어오면 ‘숨이 들어오는구나.’, 숨이 나가면 ‘숨이 나가는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몸이 가려우면 ‘가렵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감각을 알아차리고,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 선정과 명상에는 오직 이런 알아차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에 생각을 이어 꼬리를 뭅니다. 이것은 사유나 사색, 망상이라고는 할 수 있어도, 명상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선정이라고 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를 악다물고 긴장해서 참는 것도 선정이 아니고, 편안한 가운데 졸고 있는 상태도 선정이 아닙니다. 편안한 가운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 역시 선정은 아닙니다.

선정에 들기 위해서는 먼저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긴장하지 않아야 하고, 애쓰지 않아야 하며, 의도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집중입니다. 호흡에 집중한다는 것은 결국 감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숨을 들이쉴 때 일어나는 감각, 내쉴 때 일어나는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지요. 몸이 가려울 때도 ‘긁어야지.’ 혹은 ‘참아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렵구나.’ 하고 감각을 알아차립니다. 눈을 감고 편안한 가운데,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다만 알아차리면 됩니다. 편안함과 집중, 그리고 알아차림, 이 세 가지가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알아차림을 놓쳤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놓쳤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 '나는 왜 이렇게 안 될까?' 하며 다른 생각을 덧붙일 필요도 없습니다. 놓치면 놓친 줄 알고 다시 알아차림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그저 알아차림이 있을 뿐입니다. 알아차림이 유지되거나, 놓쳤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오거나, 이 두 가지뿐입니다.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을 하고 있다면 호흡을 알아차리고, 알아차림을 놓쳤다면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린 뒤 다시 호흡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이어져야 합니다.

이처럼 편안한 가운데 집중하는 것을 정정(正定)이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을 정념(正念)이라고 하고, 놓치면 다시 알아차리고 또 놓쳐도 다시 알아차리는 이 꾸준함을 정정진(正精進)이라고 합니다. 이 정정과 정념, 정정진을 합해서 우리는 선정(禪定)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선정에 드는 연습을 반복하다 보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집중이 잘 되고, 편안함을 깊이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일상에서 마음이 들뜨거나 긴장될 때도,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감은 채 호흡에 집중해 보세요. 금세 편안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오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시기 전 이 전야에, 우리도 함께 선정에 들어보겠습니다.”

기념 법문을 마친 후 대중들은 성도재일을 맞아 다 함께 정진을 했습니다. 새벽 1시까지 30분 명상을 4회 진행한 후 깨달음의 서원을 각자 작성하고 성도재일 특별정진을 마쳤습니다.

법회를 마치고 스님은 태국 절로 돌아가 원고 교정을 한 후 다시 미얀마 절로 갔습니다. 저녁 8시부터는 영어로 진행되는 불교대학 과정인 ‘정토담마스쿨’ 3기 졸업식에 온라인으로 참석하여 법문을 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35명의 수강생들이 시차를 초월하여 오전, 오후, 저녁 시간에 생방송에 접속했습니다.

오늘은 지난 5개월 동안 함께 공부해 온 수강생들의 졸업을 축하하는 자리입니다. 경과보고, 스태프들의 축하 메시지를 영상으로 함께 본 후 졸업장을 수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3기 과정에서는 영어권 7개 그룹을 비롯하여 한국어반에서 첫 번째 졸업생들이 배출되었습니다. 학생들을 대표하여 브렌트 펠드만 님이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이어서 개근상을 수여한 후 졸업생들의 소감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 명의 학생이 졸업 소감을 이야기한 후 가족 친지, 선배 졸업생의 소감도 함께 들어 보았습니다. 모두 정토담마스쿨을 통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솔직한 이야기를 편안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중 수강생인 요하나(Johanna) 님의 소감 일부를 소개해 드립니다.

“I was originally an atheist who felt a strong resistance toward religion. So I hesitated a lot about learning Buddhism. But my mother, who attended Buddhist College, changed noticeably. She became much more patient, more understanding, and overall more peaceful and happy. Seeing her transformation made me wonder, “What could possibly change a person like this?” That curiosity led me to join Jungto Dhamma School. Before long, I realized something important. This place is not about believing in a religion. It is about learning how to look at one’s own mind and let go of attachment. I used to live with constant anxiety, clinging to shopping and obsessing over results. Now, I no longer fixate on the past or the future—I can stay present. I feel far more peaceful, and for the first time, I truly understand what inner stability feels like. Now, whenever someone comes to me with their worries, one thought immediately comes to mind: “Jungto Dhamma School would definitely help.” So to anyone who is hesitating, I want to say this: just try it. You will be surprised by how much you can change.”
(저는 원래 종교에 반감이 있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래서 불교를 배우는 일 자체가 망설여졌습니다. 그런데 불교대학을 다닌 어머니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더 인내심이 깊어지고, 평온하고 행복해지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이렇게 바꿀까’ 하는 궁금증으로 정토담마스쿨에 들어왔습니다. 곧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종교를 믿게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바라보고 집착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저는 쇼핑과 결과에 집착하며 늘 불안 속에 살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훨씬 더 평온해졌고, 마음의 안정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누군가 고민을 털어놓을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정토담마스쿨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이것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는 망설이는 분들께 말하고 싶습니다. 그냥 한번 해보시라고요. 스스로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분명 놀라게 될 것입니다.)

이어서 수강생들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졸업을 축하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강조하며 앞으로도 수행을 계속 이어 나갈 것을 당부했습니다.

“정토담마스쿨에서 부처님의 일생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과 실천적 불교 사상을 배웠고, 이제 부처님의 일생까지 모두 마쳤으니 여러분은 정토담마스쿨 과정을 졸업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지금 인도에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법하셨다고 전해지는 바라나시 근교 사르나트에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고 있습니다. 약 500여 명이 오늘부터 출발해, 2주 동안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현장 학습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처님에 대해 공부할 때 단순히 책으로만 접하면 자칫 신과 같은 추상적인 존재로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그분이 실제로 사셨던 장소에 와서 기록을 따라다니며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함께 이야기하다 보면, ‘아, 이분은 우리와 다르지 않은 역사적·사회적 실존 인물이었구나.’ 하는 느낌을 훨씬 더 깊이 받게 됩니다.

부처님의 삶을 통해 오늘의 길을 묻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단순히 전통으로 내려온 불교를 그대로 믿고 따르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2600년 전 붓다가 어떤 시대적 환경 속에서 어떤 문제의식으로 어떤 가르침을 펼쳤는지를 다시 연구하고, 초기 가르침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재현해 내는 것이 현대 사회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토담마스쿨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과정 중 절반을 부처님의 일생, 즉 그분의 삶을 공부하는 데 배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도 이 과정을 잘 마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는 과거의 선조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자연 자원이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이 이제는 분명한 현실로 다가오고 있고, 우리가 과도하게 생산하고 소비한 결과 공기와 물, 쓰레기가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며 우리의 삶의 토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버린 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 코로 들어오고 입으로 들어와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즉, 우리가 오염시킨 것이 곧 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지금의 소비 중심 문명은 기후 위기와 환경오염이라는 큰 위험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생산은 넘치는데 소비할 사람은 줄어드는, 전혀 새로운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동안 인류의 소원은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까?’였는데, 이제는 그 가능성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삶이 인간에게 행복한 삶일까, 이것이 또 하나의 새로운 질문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복잡한 사회에서 어떻게 괴로움 없이 살 것인가, 그리고 변화한 사회 속에서 인간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지속 가능한 삶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붓다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새로운 해답을 제시해 주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붓다의 가르침을 공부한다는 것은 단지 개인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미래를 함께 모색하는 일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길을 여러분과 함께 걸으며, 함께 답을 찾아가고 싶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마친 여러분께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도 함께 수행 정진해 나갑시다.”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사홍서원을 봉독하고 생방송을 마무리했습니다. 수강생들은 다 함께 단체 사진을 찍은 후 그룹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진 후 졸업식을 모두 마쳤습니다.

스님은 방송을 마치고 다시 미얀마 주지 스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보시금을 전달했습니다.

"이 보시금은 스님이 하시는 활동에 보탬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드립니다. 공식적인 절차로 협력이 가능하다면 JTS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스님께서 미얀마를 도울 방법을 알아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보시금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지 스님과 인사를 하고 태국 절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로 이동하여 수자타아카데미에서 성지순례 참가자 환영식을 하고, 전정각산과 유영굴을 순례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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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오행

늘 함께 합니다.고맙습니다.()()()

2026-01-28 08:25:43

하니

감사합니다

2026-01-28 08:22:47

구자정

고맙습니다.

2026-01-28 07:4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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