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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회 회원들이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는 수행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뒤 오전 5시에 두북수련원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습니다. 차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아침 해가 서서히 떠올랐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4시간을 달려 오전 9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했습니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뒤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기 위해 방송실로 향했습니다.

오전 10시 정각이 되자 4천여 명의 정토회 회원들이 화상회의 방에 접속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주간 정토행자의 소식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을 통해 새해를 맞아 파주 임진각, 경주 사천왕사지, 창원 봉림사지, 구미 아도모례원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정토회 회원들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기도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정토회 회원들은 삼배의 예로 스님에게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로봇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앞두고 수행과 봉사야말로 삶의 의미와 공동체의 건강을 지켜 주는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202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밀레니엄 시대라 하여 2000년을 맞이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2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한 세기의 4분의 1이 지나간 셈입니다. 다시 25년이 더 흐르면 2050년, 우리는 21세기 중반에 이르게 됩니다.
세계의 여러 보고서는 한국의 미래를 두고 서로 다른 전망을 내놓고 있습니다. 어떤 보고서는 한국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반면, 또 다른 보고서는 ‘세계 20위권 밖으로 추락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예측을 제시합니다. 이처럼 낙관과 비관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전망에 일희일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낙관적인 예측에 마냥 들뜨거나, 비관적인 전망에 겁먹을 이유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측 그 자체가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현실에 안주하며 도전을 포기한다면 비관적인 미래로 향하게 될 것이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도전 정신을 잃지 않는다면 낙관적인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정토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인구 감소와 고령화, 경기 침체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경제가 일정 수준 이상 발전한 선진국일수록 이러한 변화는 더욱 빠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종교 인구의 감소 또한 뚜렷한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최근 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성인 인구 가운데 무종교인의 비율은 51퍼센트, 종교를 가진 인구는 49퍼센트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연령대별로 살펴보면 양상은 크게 다릅니다. 70대 이상 노년층에서는 종교를 가진 비율이 70퍼센트를 훨씬 넘는 반면, 20대 청년층에서는 종교를 갖지 않은 비율이 70퍼센트를 넘습니다. 청년층과 노년층의 종교 인구 분포가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다면 특별한 변화나 노력이 없는 한 전체 국민 가운데 종교 인구의 비율은 점점 더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종교를 가진 비율이 높은 노령층은 자연 감소로 줄어들고, 종교를 갖지 않은 젊은 세대는 사회의 중심으로 성장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종교 인구의 자연적 감소는 피하기 어려운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또한 종교 인구의 고령화는 특정 종교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닙니다. 불교, 기독교, 천주교를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종교 인구 가운데 노령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종교는 불교가 아니라 천주교였고, 그다음이 불교, 그 뒤를 기독교가 잇고 있습니다. 다만 전반적으로 보면 종교별 큰 차이 없이 모두 노령 인구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은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도전 앞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지, 또 한국 불교인으로서 종교가 안고 있는 어려움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지라는 과제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보자면, 대한민국이냐 불교냐 하는 구분을 넘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종교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경제를 주로 ‘생산의 문제’로 바라보아 왔습니다. 생산을 위해서는 땅과 노동력이 중요했고, 대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많은 노예나 농노, 노동자를 거느리며 부를 축적해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러한 생산의 대부분을 로봇과 인공지능이 대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더 이상 생산에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고, 실제로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은 소수에 그칠 가능성이 큽니다. 이때 다수의 사람들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이 제기됩니다. 더 나아가 인구가 점점 줄어들면, 생산할 사람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아니라 소비할 사람이 없어 생산할 필요 자체가 사라지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경험해 온 사회적·경제적 과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과거 인간의 고뇌는 ‘어떤 일을 해서 먹고살 것인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해야 한다’는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래에는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질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과거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변화가 천국과도 같은 이상 세계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일하지 않는 인간이 과연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전혀 새로운 문제와 마주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일하지 않는 인간은 대체로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쾌락과 과소비, 마약과 같은 각종 중독에 노출되기 쉬웠기 때문입니다.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가 과연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합니다. 제 생각에는 그러한 사회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일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이 어떻게 건강하고 행복하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는 미래 사회가 반드시 풀어야 할 새로운 과제가 될 것입니다.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 사회는 이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미국 사회는 소수 집단인 인디언들이 일하지 않고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일정한 지원금을 제공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지원금의 상당 부분이 술이나 마약에 소비되면서, 인디언을 보호하려던 정책은 오히려 공동체를 붕괴시키고 삶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 사례는 앞으로 ‘일하지 않는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되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던져 줍니다. 수행은 단순히 삶이 힘들어서 마음공부를 하자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일하지 않고도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보람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수입이 되는 일은 아니지만 봉사하고 남을 돕는 정토회 회원들의 삶은, 어쩌면 미래 사회를 향한 하나의 중요한 실험이 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수행하며 봉사하는 삶은 지금 이 순간의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길일 뿐 아니라, 동시에 미래 사회에서 인류가 살아가야 할 바람직한 삶의 모델이 될 가능성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토회 회원들은 개인의 삶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동시에, 인류의 위기와 우리 사회, 그리고 불교가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함께 모색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현실에 안주하거나 소비에 매몰되는 삶이 아니라, 검소하게 살면서도 생기발랄하고, 남을 도우면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미 2600년 전, 수행자의 삶이라는 새로운 삶의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다가올 미래 사회의 방향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의 우리 역시 불확실하고 급변하는 세계 앞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우리는 방황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잠재울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아 나가야 합니다.”
다음은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한 시간 동안 세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아픈 딸과 남편에게 마음이 지나치게 매여 있는 것 같아 답답하다며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남편이 재작년부터 뇌경색 후유증으로 약을 먹으며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는 남편과 따로 살고 있습니다.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혼 초부터 술을 마시고 폭행과 폭언을 일삼았던 사람이라, 딸에 대한 걱정보다는 상대적으로 덜합니다. 저는 올해 스물여덟이 된 딸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딸은 사춘기 때 양극성 정동장애 진단을 받았고, 현재는 조울증으로 진단받아 치료 중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발병해 두 달 정도 입원한 적도 있습니다. 작년 1월에 제가 인도 성지순례를 떠나기 직전에도 비행기 타기 전에 딸이 전화를 해왔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나니, 제가 없으면 이런 일이 생기는 것 같아 아이를 두고 어디를 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지금 딸은 병원에 다니며 자기 생활을 비교적 잘해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딸을 한 사람의 어른으로, 남처럼 대하려고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매일 기도하고 참회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이 아이를 두고 정토회 활동을 잘해 나갈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꿈꾸는 제 쓰임을 하며 살아가고 싶은 마음과, ‘깨달음의 장’이든 ‘나눔의 장’이든 ‘인도 성지순례’든 무엇이든 하고 싶은 마음이, 마치 아이를 놓고 도망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괴롭습니다. 가능하다면 아이보다 하루만 더 사는 게 제 작은 희망입니다. 남편과 딸이 모두 아픈 상황에서 ‘아무 문제 없고 이만하면 다행이다.’라고 기도하고 있지만, 잘 안됩니다. 스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습니다. 개 한 마리를 키우면서도 ‘내가 없으면 안 된다’, ‘맡길 데가 없다’는 이유로 인도 성지순례를 못 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는 그래도 맡길 곳이 있을 수 있는데, 개 때문에 못 간다는 경우도 있는 것이지요. 또 어떤 사람은 재래시장에서 하루 벌이를 해야 겨우 먹고 사는데, 가게 문을 닫을 수가 없어서 어디를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경제적으로는 전혀 부족함이 없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움직일 수 없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처럼 못 가는 이유는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경제 형편 때문에, 강아지 때문에, 환자가 있어서, 부모님 때문에, 남편 때문에 못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만 여건이 안 돼서 못 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딸 때문에 못 간다’고 말하는 것은, 제 입장에서 보면 특별히 예외적인 사정은 아닙니다. 오히려 갈 형편은 되는데 돌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못 가는 경우는, 애초에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경우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매일의 삶 자체가 곤궁하지만, 딸 때문에 못 가는 것은 성지순례나 여행을 안 가면 그만이지, 일상 자체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딸이 조울증을 앓고 있다면, 엄마에게 의지하는 만큼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 심리적 불안이 커지고, 그로 인해 증상이 재발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딸을 돌보며 사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내가 조금 자리를 비워도 되겠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 한 번씩 다녀오면 됩니다. 혹시 다녀온 사이에 딸이 증상이 심해져 병원에 실려 갔다면, 돌아와서 병문안을 가면 되고, 상태가 안정되면 다시 데려오면 됩니다. 이것은 방치도 아니고 포기도 아닙니다.

딸을 죽든 살든 내버려두고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태도는 분명 이기심입니다. 그러나 병을 가진 딸에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듯이, 그런 딸과 남편을 둔 질문자에게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없으면 딸에게 사고가 날 것이다’라는 생각은, 차 사고가 날까 봐 차를 못 타고, 비행기 사고가 날까 봐 비행기를 못 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깨달음의 장에 가고 싶다면 갔다 오면 됩니다. 다녀오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돌아와서 그 일을 처리하면 됩니다. 깨달음의 장에 참여하는 도중에 사고가 났다고 해서 중간에 돌아온다면, 애초에 그 자리에 참여할 준비가 덜 된 것입니다. 깨달음의 장에서는 누군가 돌아가셔도 수행 중에는 연락을 주지 않습니다. 끝나고 장례식에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의 관점이 되어야 비로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죽을 사람은 죽고, 아플 사람은 아픕니다. 그런 일을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내가 가서 살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 모든 상황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일들에 지나치게 매이면 우리는 결코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의 장이란, 어떤 관점을 가져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는지를 배우는 자리입니다. 설령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내가 그 자리에 간다고 해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끝나고 가서 문상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연락이 오면 곧바로 달려가고, 친척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즉시 수련을 그만두고 집으로 향하는 관점을 가져서는, 진정한 자유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딸은 이미 스물여덟 살의 어른입니다. 그 인생을 질문자가 끝까지 책임질 수는 없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내가 죽으면 딸이 어떻게 살까’ 걱정하고, 또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딸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생각이라는 것은 본래 이렇게 모순적입니다. 만약 내가 죽은 뒤에 딸을 돌볼 사람이 없다면, 논리적으로는 ‘차라리 내가 살아 있을 때 딸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야 맞고, 딸이 나보다 먼저 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죽은 뒤에도 딸은 잘 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관된 관점입니다. 이쪽으로 생각해도 문제고, 저쪽으로 생각해도 문제인 생각을 붙들고 있으면, 결국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다면, 지금처럼 따로 사는 것이 낫습니다. 뇌경색 후유증이 심해져서 술도 안 마시고 폭언도 하지 않으면, 그때는 환자로서 돌보면 됩니다. 두 가지 고통을 동시에 겪는 것보다는 하나만 겪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한다고 달라질 가능성이 없으니 ‘그래, 네가 사는 데까지 살아보고, 병이 나서 아무도 돌볼 사람이 없으면 내가 부인이니까 돌봐주겠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집에 늦게 돌아오면 뇌경색 후유증이 심해지지 않아서 다행이고, 뇌경색 후유증이 심해지면 빨리 돌아와서 또 다행입니다. 술을 마셔서 문제지만 뇌경색이 안 오면 다행이고, 뇌경색이 오면 술도 못 마시고 폭언도 못 하니 또 다행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남편이 지금 와도 괜찮고, 나중에 와도 괜찮습니다. 딸이 먼저 죽어도 괜찮고, 나중에 죽어도 괜찮으며, 남편이 병에 걸려도 괜찮고 걸리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사물을 보면, 지금 상황 그대로 두고도 충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기복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술도 마시지 않고 뇌경색 후유증도 안 심해지기를 바라고, 딸은 정신 차리고 잘 살기를 바라는 기도 말입니다. 이런 기도는 아무리 해도 자유로워지기 어렵습니다. 기도와 수행이란, 일이 어떻게 되어도 괜찮다는 도리를 아는 것입니다. 비가 오면 씨앗을 심을 수 있어서 좋고, 해가 나면 약을 칠 수 있어서 좋다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비가 오고 흐린 것은 기후의 일입니다. 그것은 그대로 두고, 나는 그 조건에 맞게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자유로운 삶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비가 오거나 날이 맑은 것까지도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니 뜻대로 되지 않으면 ‘날씨마저 나를 괴롭힌다’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관점으로는 아무리 기도하고 경전을 읽어도 자유로움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습니다. 평생 주변 조건에 매여 살게 되는 겁니다.”
“네, 감사합니다. 제 고집과 욕심을 내려놓고, 가볍고 편안하게 살겠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질문에 모두 답하고 나니 법회를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해외 일정으로 인해 생방송을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한 후 12시가 다 되어 수행법회를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점심식사를 한 후 공동체 지부 인사배치 논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6층 국제회의장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에 상주하는 공동체 지부 구성원과 공동체 법사단 30여 명이 자리했습니다. 인사배치 논의를 하기 전에 모두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인사말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정토회의 인사배치 원칙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원을 세우고 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은, 부처님께서 왕위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걸식하며 새로운 삶의 길을 여신 그 정신을 따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이유만이라면, 자칫 과거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에 머물 위험이 있습니다. 지금은 분명히 기후위기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날의 우리 역시 그렇게 살아야만 기후위기 시대에 근본적으로 지속 가능한 삶이 가능하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길을 다시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채식의 문제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인도에서 역사 자료를 조사해 보면, 부처님이 채식주의자였다는 명확한 근거는 사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이나교는 분명한 채식주의 전통을 갖고 있지만, 불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승불교 전통을 잇는 정토회에서 채식을 실천하는 것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 전통에 해당합니다. 여기에 더해 기후위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축산업이 기후위기를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도 분명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전통을 굳이 버릴 필요는 없고, 오히려 오늘의 현실에 맞게 계승하고 살려 나갈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출가 정신은 가치의 문제이고, 절에서 채식하는 문화는 전통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옛것을 지키자는 것이 아니라, 기후위기 시대에 맞게 불교의 가치와 문화적 전통을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살려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전통과 현재의 과제를 함께 결합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원칙’입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모여서 살아가는지를 먼저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개인이 편하게 살기 위해 모인 공동체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원칙이 흔들리고 훼손되는 분위기가 되면, 상가는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칙은 분명히 세워지고 지켜져야 합니다. 그러나 원칙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시비가 많아지고, ‘왜 원칙을 지키지 않느냐’는 말 속에서 원칙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마치 죄를 지은 것처럼 느끼기 쉽습니다. 그렇게 되면 불교의 또 다른 핵심 가르침인 자비와 포용을 잃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칙과 함께 포용성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문제는 원칙을 세우되, 그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경우를 어디까지 받아들이고 함께 갈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불교적 가치로 말하면, 지혜와 자비가 함께 충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행적 원칙만 강조하면 분위기가 살벌해지고, 반대로 포용만 강조하면 원칙 없이 착한 사람들만 모인 세속적 집단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칙은 원칙대로 분명히 세워 지켜 나가되, 사람마다 처한 조건이 다르고 어떤 사람은 끝까지 따라오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얼마나 포용하면서 함께 갈 것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상가를 운영해야 합니다.

다만 ‘포용’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지면 문제가 됩니다. 원칙을 어기는 포용이 반복되면 결국 원칙은 무너지게 됩니다. 포용이 지나치면 원칙이 허물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 둘을 어떻게 중도적으로 조율하느냐가 상가 운영의 핵심이자 가장 어려운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절에서는 채식을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체질이나 건강상의 이유로 육식이 꼭 필요한 사람을 어디까지 포용할 것인지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입맛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과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하게 다뤄야 합니다. 또 규칙적인 공동체 생활이 원칙이지만, 건강 문제로 그 생활을 도저히 따라오기 힘든 사람을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의 문제도 있습니다.

원칙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런 사람들은 죄책감을 느끼며 심리적으로 위축되기 쉽고, 반대로 예외가 너무 쉽게 허용되면 공동체 전체의 질서가 흐트러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균형을 늘 세심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지금도 우리 공동체 안에서 반복해서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회의를 하거나 규율을 정할 때에는, 원칙은 가능한 한 지키는 방향으로 방침을 세우되, 그 원칙을 지키기 어려운 개인에게는 포용의 정신을 살려 도반으로서 함께 간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대원칙입니다. 원칙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관점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원칙은 지키되, 어떻게 포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함께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이어서 본격적으로 2-2차 천일결사 공동체 지부 인사배치를 어떻게 할지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해외 파견, 평화재단, JTS 등 각 부서에 누구를 배치하면 좋을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각각에 대해 스님이 조언도 해주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열띤 토론과 대화가 이어졌습니다. 최종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논의를 마무리하면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정토회가 하고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 농사가 갖는 비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정토회가 농업을 하려는 이유는 단순히 농사를 짓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마트팜을 하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만약 그 정도라면 사람들에게 스마트팜 농장을 한 번 구경시켜 주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정토회에서 농사를 짓는 핵심은, ‘수행이 생산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에 있습니다. 지금의 수행을 생산과 소비의 관점에서 나누어 본다면, 수행은 주로 소비의 영역에 속해 있습니다. 이 수행을 어떻게 생산의 영역과 연결할 것인가, 이것이 첫 번째 관건입니다. 역사적으로 수행은 늘 소비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를 생산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고추를 따고 풀을 뽑는 일상적인 노동 속에서도, 명상하듯이 알아차림을 유지하며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일체의 장’에서 어느 정도 실험되고 있지만, 여전히 가장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두 번째 과제는 기후위기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목표는 전부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학농을 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이 문제는 지금 너무 극단적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은 일정 부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스마트팜이라고 해서 온종일 불을 켜놓고 전기에 의존해 농사를 짓는다면, 그것 역시 환경친화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환경을 생각한다고 해서 현실 조건을 무시한 채 전부 유기농만을 고집하는 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농사짓는데 적용할 수 있느냐는 점입니다. 이 지점을 우리가 개발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정토회가 자연과 함께 가는 하나의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농사에 자꾸 비중을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쌀을 생산해서 우리가 먹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농사를 통해 어떤 삶의 방식을 만들어 갈 것인가, 앞으로 개발해야 할 목표는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환경 관련 시설을 반드시 보강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문경수련원의 경우 우리가 사용하는 오폐수가 정화시설을 거쳐 그 물로 채소를 키우고, 다시 자연으로 순환되는 과정을 실제로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말로만 환경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비용이 들더라도 그런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현재로서는 이러한 시설을 설치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춘 곳이 문경수련원이 가장 적합하지만, 아직까지는 실행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환경을 이야기하지만, 실제 삶의 방식은 일반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머리로만 환경을 생각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환경 운동을 한다며 동물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관건입니다. 조건이 허락한다면, 이런 시설을 두북수련원에 설치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오폐수를 하수구로 흘려보내는 방식이 아니라, 자체적인 친환경 정화 시스템을 갖추어야 합니다. 또는 올해부터 새로 불사를 하게 되는 천룡사에서 먼저 시도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수도와 하수도를 단순히 연결하는 수준에 머문다면, 그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절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것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모습입니다. 하수가 정화되고, 그 물로 밭의 작물이 자라며, 다시 우리가 그 작물을 먹는 순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화학제품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인체에 해로운 세탁 세제를 사용하지 않는 등의 규칙도 필요해질 것입니다. 비누나 세탁기를 사용할 것인지 여부도 함께 논의해야 합니다.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졌을 때, 국제적인 행사나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사람들이 견학을 오면, ‘아, 이런 방식으로도 농사를 짓고 절을 운영할 수 있구나’ 하고 직접 보고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의 건물들을 보면, 일반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말로는 친환경 건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태양광 패널 몇 개 얹어 놓은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용 문제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새 건물을 짓게 된다면, 비용이 조금 더 들더라도 이런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어 견학이 가능한 모델로 만들어 갈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환경 아파트’를 만들자는 제안을 여러 차례 드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이렇게 바쁜데 왜 농사에 인력을 투자하느냐’는 문제를 제기를 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농사를 짓거나 건물을 짓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삶의 모델을 만들어 보자는 제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농사와 공동체의 방향을 조금 더 깊이 있게 고민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후 4시에 전체 논의를 마친 후 오래 활동한 실무자들 중심으로 미진한 논의를 한 시간 더 이어간 후 오후 5시에 모임을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에는 공동체 법사단과 온라인으로 인사배치 논의를 이어갔습니다. 오후 토론에서 종결하지 못한 내용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토론을 진행한 후 밤 9시가 넘어서 회의를 마쳤습니다.
내일 새벽 4시에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출발해 인천국제공항으로 이동한 뒤, 비행기를 타고 인도네시아 아체주로 향합니다. 아체주는 최근 집중호우로 인한 홍수와 산사태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국제사회의 지원이 충분하지 않아 많은 주민들이 생존의 어려움에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내일부터 이틀 동안 피해 지역을 직접 답사하며, 긴급구호활동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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