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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정토회 전법회원들을 위한 법회와 방송·영화·연극·예술인들의 모임인 '길벗'에서 주관하는 법륜스님 초청 강연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오전 7시 30분에 김두관 전 의원이 찾아와서 조찬을 함께 했습니다. 식사 후 한 시간 동안 국민 통합을 위해 정치가 해야 할 역할과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개선 방안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오전 10시부터는 정토회관 방송실로 이동하여 전법회원 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오늘 전법회원 법회는 대중부 활동가의 수련 프로그램인 정일사 입재식을 겸해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법사단에서 정일사(정토를 일구는 사람들) 수련 프로그램에 대해 발표한 후 스님이 정일사 수련에 임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입재 법문을 했습니다.
“가을비가 촉촉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원래 가을에는 맑은 날씨가 이어져야 추수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비가 계속 내려 농사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는 여름 내내 이어지던 더위가 9월까지도 계속되었는데, 비가 내리면서 날씨가 한결 서늘해졌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혼란스럽고 국내 정치도 불안정한 상황이지만, 이럴 때 우리가 외부 상황을 탓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평화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부부 관계에서도 갈등이 생기고, 자녀를 키우며 어려움을 겪고,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건강 문제나 사회 혼란, 기후 위기까지 다양한 일이 일어나지만, 그런 일들을 하나하나 탓하다 보면 하루를 편안하게 보내기 어렵습니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고 유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수행자의 길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일은 오직 나 자신의 책임이며, 나의 문제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책임지는 태도가 바로 수행의 관점입니다.
동시에 세상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사회와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끼니를 잇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음식을 나누고, 아픈데 약이 없는 이들에게는 약을 주며,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한다면 학교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태야 합니다.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의지처가 되어주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심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수행자의 길입니다.
수행자는 안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 평화를 유지하고, 밖으로는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위로와 도움을 전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돌보며 평정을 지키는 것은 ‘지혜’라 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고 돕는 것은 ‘자비’라 합니다. 이처럼 지혜와 자비의 삶을 함께 실천하는 사람을 ‘보살’이라 부릅니다. 보살은 세상을 떠나서가 아니라 바로 이 세상 속에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남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고, 자식이 어떻고, 부모나 직장, 상사가 어떻다고 말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결국 괴로움을 합리화하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처할수록 더욱 분명히 ‘이것은 나의 문제다’라는 자각을 가지고 정진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진의 힘을 얻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부처님의 법을 쉽게 설명해 주어서 불법이 좋다고 느끼거나, 좋은 남편·아내·부모를 만나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은 수행이라 할 수 없습니다. 외부 환경이 좋으면 누구나 평안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수행은 오히려 환경이 나쁠 때, 그 영향에 휘둘리지 않고 열악한 조건을 스스로 극복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있습니다.
예전에는 생활 여건이 열악해 삶의 고난을 몸소 겪으며 이를 이겨내는 힘이 자연스레 길러졌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교육·경제 환경이 좋아지고, 사회적 차별도 많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역경을 극복한 경험이 부족해졌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예전보다 훨씬 쉽게 전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자기 뜻대로 되지 않거나 경제적 어려움, 인간관계의 갈등이 생기면 쉽게 무너지고 낙심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한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전환되면서 불법이 빠르게 널리 전해지는 장점이 있는 반면, 어려움을 직접 극복해 본 경험이 부족한 탓에 금세 포기하거나 그만두는 경우도 많아졌습니다. 그 결과 정토회를 찾는 사람도 늘었지만, 불교를 조금 공부하다가 금방 떠나는 사람도 함께 많아졌습니다. 제도를 개선하고 법문을 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데 집중하기보다는 외부 환경을 더 좋게 만드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면, 수행의 기풍이 점차 약화되고 수행의 풍토가 세속적 관점과 닮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매년 6월과 10월, 두 차례의 정진 기간을 정해 ‘정일사 수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상 속에서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해 보는 수행의 경험을 쌓기 위한 것입니다. 예전처럼 법당에 모여 함께 정진하고 나눌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지금은 온라인으로 전환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집이 곧 법당이다’라는 마음으로, 남이 보든 보지 않든 온라인으로 연결해 각자 자신의 정진을 꾸준히 이어가면 됩니다.
오늘부터 매일 300배씩 정진을 하게 됩니다. 물론 300배를 하다 보면 몸이 힘들고, 절을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 그 마음을 그대로 따라가면 결국 정진을 중단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하기 싫은 마음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직장일도 해야 하고, 아이도 돌봐야 하고, 가정일과 정토회 활동, 불교대학 공부까지 하다 보면 절을 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것입니다. 안 그래도 바쁜데 여기에 매일 300배를 더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정진 기간을 두는 이유는, 일부러 짐을 더 짊어짐으로써 그 무게를 이겨내는 경험을 해보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높이뛰기를 연습할 때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훈련하다가 모래주머니를 벗으면 훨씬 가볍고 자유로워지듯, 이 정진 기간에 기존의 일은 그대로 하면서 하루 300배 정진을 더해 보는 것입니다.
정진을 하다 보면 하기 싫은 마음, 번뇌, 불만이 끊임없이 올라올 것입니다. 그때 그 번뇌에 휘말려 주저앉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이겨내고 극복하면 마음이 한결 상쾌해지고, 자신감이 생깁니다. 그렇게 얻은 체험을 바탕으로 도반들과 함께 모여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수행의 기쁨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정일사 정진입니다.
함께 활동하다 보면 문득 상대를 보며 ‘정말 좋은 분이신데, 이 한 가지만 조금 바꾸면 더 훌륭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집에서 남편을 볼 때도 ‘우리 남편은 다 좋은데 이 점만 고치면 더 좋을 텐데’ 하고 느낄 때가 있지요. 하지만 이런 말을 일상에서 바로 꺼내면 자칫 갈등의 씨앗이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정일사 수련에서는 이런 마음을 ‘선물’의 형태로 나누는 시간을 갖습니다. ‘당신이 이 한 가지를 개선한다면 당신의 인격이 더 빛날 것 같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서로의 수행을 돕는 선물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이는 상대의 행동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고 비판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과 애정을 담아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제안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서로에게 건넨 선물을 가지고 정진해 나가면, 앞으로의 삶에 큰 도움이 됩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우리는 자신을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도반의 밝은 눈을 빌려 나의 허물을 자각하고 개선해 나가는 정진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특히 올해는 천일결사 3년의 마지막 해입니다. 여러분은 전법회원으로서 불교대학, 경전대학, 행복학교를 진행하거나, 모둠장·지회장·지부장·팀장·국장·담당·돕는이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아 정토회의 일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러분 모두가 많이 힘들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동시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어려운 일을 기꺼이 해내는 과정에서 보살의 힘이 자라납니다.
보살은 원력(願力), 즉 큰 서원을 가진 사람입니다. 원력이 커질수록 그만큼 큰 힘이 생깁니다. 이번 정일사 수련은 바로 그 보살의 원력을 키우기 위한 수행입니다. 그러니 전국의 모든 도반들이 이 정일사 수련에 함께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정일사 수련의 첫날부터 그런 원력의 마음으로 정진을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각종 행사로 점점 더 바빠지는 시기이지만 무엇보다 정진을 가장 우선으로 하기로 정일사 입재 법문을 마쳤습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활동하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한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11시 30분이 되어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업무를 보다가 손님을 만나기 위해 다시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4시에는 윤재웅 동국대학교 총장님과 박기련 건학위원회 사무총장님이 스님을 찾아왔습니다. 총장님은 스님을 동국대학교로 모실 테니 학생들을 위해서 좋은 강의를 해주십사 요청했습니다. 스님은 그 뜻에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도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대신 매년 두 차례 동국대학교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위해 즉문즉설 법회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면담을 마친 뒤, 함께 3층 설법전과 15층 옥상 법당을 참배하고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은 방송·영화·연극·예술인들의 모임인 '길벗'에서 법륜스님 초청 강연회를 하는 날입니다. 해가 저물자 방송과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강연을 하기 전에 저녁 6시 20분부터 2층 쉼터에서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주 보던 유명한 배우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배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240여 명이 자리를 메운 가운데 사회를 맡은 배우 임세미 님이 오늘 강연회의 취지를 소개했습니다.
“올 한 해 길벗에서는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요. 아프고 힘든 시간도 참 많았습니다. 누군가는 본인이나 자녀가 아팠고, 누군가는 부모님의 병환이 깊었습니다. 또 몇몇은 부모님과 마지막 작별을 했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길벗이 공통적으로 한 말이 ‘함께 마음을 살피는 공부를 하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마음을 조금 더 가까이 살펴보려 합니다.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도 어떻게 마음을 바라보고 행복할 수 있는지 법륜스님의 말씀 속에서 함께 길을 찾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길벗의 전혜진 부대표님이 인사말을 한 후 스님의 최근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얼마 전 스님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에 답사를 다녀온 모습이 스크린에 펼쳐졌습니다.
영상이 끝나자 박수갈채를 받으며 스님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스님은 이번 동남아 답사 내용과 더불어 JTS가 세계 곳곳에서 하고 있는 활동을 소개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영상에 나온 동남아 답사를 마친 뒤 다시 미국 동부로 이동해 보름 동안 열 개의 강연을 진행했습니다. 워싱턴 D.C.를 방문해서는 ‘북한과 미국의 대화를 어떻게 견인할 것인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할 때 김정은 위원장과 깜짝 회동을 할 가능성이 있는가’ 등의 주제로 미국 의회, 정부, 싱크탱크 관계자들과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한반도의 전쟁 위험은 작년에 비해 많이 낮아졌지만, 최근 북한의 당 창건일 행사를 보면 여전히 남북 관계를 적대적인 두 국가로 규정하고 대립을 유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작년에는 남한이 북한을 계속 자극하여 적대감을 고조시켰지만, 올해는 정권이 바뀌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닫힌 마음이 쉽게 열리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전쟁만은 절대 안 된다’는 신념으로 각계의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시리아 내전 이후 전후 복구 작업을 돕고 있습니다. 내전의 상처 위에 지진 피해까지 겹쳐 시리아 전역의 건물들이 거의 파괴된 상태입니다. 또한 미얀마 난민들을 지원하고 있는데, 미얀마 역시 군부 쿠데타와 내전으로 폭격이 이어지고 있으며, 지진 피해까지 더해져 수많은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제가 스님이니 절을 지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미얀마와 태국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난민을 보호하려면 절의 형태로 보호소를 운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난민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하면 어렵지만, 남자아이들은 머리를 깎아 스님이 되게 하고 여자아이들은 ‘넌(nun)’이라 불리는 여성 수행자의 모습으로 보호합니다. 이렇게 머리를 깎고 ‘넌너리’(여성 수행자의 처소)에 머무는 것은 절이라기보다 고아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곳 아이들의 숙소와 학교 교육, 생활 지원 등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를 살펴보고 왔습니다.
미얀마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넘어온 난민들은 불법 입국자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태국은 불교 국가이기 때문에 승복을 입고 있으면 아무도 체포하지 못합니다. 쿠데타에 실패한 군인이 절로 도망쳐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승복을 입으면 체포되지 않습니다. 절 밖으로 나오거나 승복을 벗으면 잡히지만, 승복을 입고 있는 동안은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아이들은 그렇게 보호받을 수 있지만, 태국은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자아이들은 보호받을 방법이 없습니다. 미얀마에는 여자아이를 머리 깎아 보호하는 넌너리 시스템이 있지만, 태국에는 그 제도가 없어 현실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번 답사에서는 바로 이 여자아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지를 논의했습니다.
이런 현장을 둘러보면서 제가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전쟁 피해의 참혹함이었습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삶의 터전이 사라진 것도 비극이지만, 전쟁이 남긴 후유증과 복구의 어려움은 그보다 훨씬 큽니다. 우리나라도 6·25 전쟁 후 그와 같은 고통을 겪었지요. 시리아의 경우, 집이 없어서 돌아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학교와 병원이 모두 파괴되어 삶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시리아 국민들은 우리나라처럼 교육열이 높다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가 운영되지 않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올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학교와 병원을 가장 시급히 복구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직접 보면 누구나 ‘어떤 이유로든 전쟁만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이 듭니다. 전쟁이 없는 사회에서 오래 살다 보면 갈등이 커질 때 ‘차라리 전쟁이라도 하자’는 식의 폭력적 사고가 싹트기도 합니다. 또 전쟁을 피하려는 노력을 비겁하다고 폄하하거나, 타협하는 것은 약한 자의 모습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폭력에 의존하지 않는 방식으로 합의와 협력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국제 정세는 점점 ‘강 대 강’의 대결로 치닫고 있습니다. 국가 간의 갈등뿐 아니라, 각 나라 내부에서도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어 내전을 방불케 할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남편이 이래서 어쩔 수 없다’, ‘아내가 저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다’며 자신의 괴로움을 합리화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혼란하다고, 과거의 상처가 있다고 해서 내 괴로움을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스스로 간직할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괴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도말로 이런 사람을 ‘보디사트바(Bodhisattva)’, 즉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불교를 믿든, 기독교를 믿든, 혹은 종교가 없든, 각자 믿음은 다를 수 있지만, 우리는 모두 자기 마음의 평화를 스스로 찾아가며 세상의 평화를 위해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켜나갈 수 있습니다.”
이어서 아홉 명이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부터 질문을 하고, 현장에서 즉석 질문도 받았습니다. 그중 한 명은 메인 작가로서의 책임과 수많은 관계 속에서 지쳐가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일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풀어갈 수 있을지 스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저는 방송작가입니다. 올해 초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게 되었고, 제가 메인 작가 역할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제 것만 잘하면 되다가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까지 하게 되다 보니 심적으로 많이 지칩니다. 특히 저는 관계들 속에서 많이 힘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협찬처에서는 A를 요구하고, 채널부에서는 B를 요구합니다. 그 와중에 매력과 사연이 있고, 말도 잘하고 볼거리도 많은 그런 사람과 장소를 섭외해야 합니다. 그래서 방송도 재밌게 나와야 하고 시청률도 잘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같이 일하는 후배가 갑자기 ‘언니, 저 못 하겠어요.’ 하고 얘기합니다. 얽혀있는 각각의 입장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다 충족시키지도 못할뿐더러 애초부터 그것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책임과 화살은 다 작가인 저에게 가장 먼저 돌아오는 상황이 힘듭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보니 잘 쓰이고 있다는 감사함은 옅어지고 불평불만을 하게 됩니다. 사실 어느 프로그램을 가나 이런 비슷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 깜냥이 부족해서 그런 건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그리고 제가 후배로 있었을 때는 메인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서 그 일은 힘들어도 으쌰으쌰 하는 분위기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일이 할만해도 정말 탈출하고 싶은 지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족해서 다들 이렇게 힘든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정신적으로 지치지 않고 계속 일을 지속할 수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수많은 관계들을 잘 풀어갈 수 있을까요?”
“첫째, 힘들면 안 하면 됩니다.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 일을 내가 안 해도 내일 TV 방송은 그대로 나옵니다. 내가 남자친구를 안 만나줘도 그 남자는 며칠 있으면 다른 여자친구가 생기고, 내가 글을 안 써도 얼마 지나지 않으면 다른 작가가 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내가 메인 작가를 안 해도 또 며칠 지나면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와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을 안 해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밥 먹고 사느냐?’라고 할 수 있지만 밥이 먹어집니다. 얻어먹든지, 내가 먹든지, 아무튼 먹어집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밥을 먹고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힘들면 안 하면 됩니다. 이것이 첫 번째 방법입니다.
저도 따지고 보면 매우 힘들어요.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나야지, 108배 절하면 다리 아프지, 염불 하려면 목 아프지, 참선하려면 허리 아프지, 다른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데 나는 고기도 못 먹지, 연애도 못하지, 힘든 일이 끝도 없습니다. 이렇게 질문자에게 제가 하소연하면 질문자는 저한테 뭐라고 얘기해 줄래요? ‘그렇게 힘들면 스님을 그만두면 되잖아요.’ 이렇게 얘기할 거 아니겠어요. 그럼 저는 또 할 말이 있죠. ‘50년간 스님 생활만 했는데 다른 일을 어떻게 해요?’ 그런데 제가 속퇴를 하고 밖에 나가도 밥 먹고 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이제 일흔이 넘었으니 노인연금이 나와서, 라면이라도 먹고살 수 있어요. 그리고 재산이 전혀 없어도 요즘에는 취약계층으로 분류되어 조금만 기다리면 정부에서 월세 내는 임대 아파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저도 굶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자도 그 일을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람쥐가 제게 와서 ‘스님, 요즘 살기가 너무 힘들어요. 나무가 자라서 열매가 너무 높이 달려 있으니 열매 따기가 힘들어요.’, ‘요새 사람들이 자꾸 도토리와 알밤을 주워가서 먹을 것이 없어 힘들어요.’ 하고 얘기하면 제가 뭐라고 하겠어요? 그러나 어떤 다람쥐도 그런 말을 하는 다람쥐가 없고, 어떤 토끼도 그런 말을 하는 토끼가 없습니다. 그래서 첫째, 그 일을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둘째, 질문자가 메인 작가가 된 것은 잘된 일입니다. 그런데도 힘들다면 원래대로 돌아가면 됩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가 저에게 와서 힘들다고 하소연한다고 해봅시다. 하지만 관점을 달리 보면,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 인생에서 성공한 것이잖아요. 후보로 선출된 것만으로도 성공이에요. 마지막에 당선되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실패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거죠. 그런 것처럼 작가가 된 것만 해도 성공이고, 메인 작가가 된 것은 더더욱 성공입니다. 그렇게 성공했는데도 힘들다면 메인 작가 자리를 반납해 버리면 돼요. 복권에 당첨되었는데 돈 쓰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면 돈을 다시 갖다 줘 버리면 됩니다. 그런 것처럼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별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셋째, 질문자가 방금 힘든 점을 열 가지도 넘게 얘기했는데, 그게 정말 힘든 일일까요? 만약 어떤 여성이 결혼해서 애를 키운다고 합시다. 애를 안고 있는데, 남편과 시어머니가 옆에 있어서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 여성이 아기와 관계를 맺을 때는 엄마가 되고, 남편과 얘기할 때는 아내가 되고, 시어머니와 얘기할 때는 며느리가 됩니다. 그럼 1인 3역을 하게 되죠. 그것이 힘든가요?”
“네, 힘듭니다.”
“그렇다면 질문자는 세상을 빨리 하직하는 것이 낫죠. 차를 타면 승객이 되고, 가게에 가면 손님이 되고, 학교에 가면 학부모가 되는 게 우리의 인생 아닌가요. 따지고 보면 우리는 1인 3역만 하는 게 아닙니다. 1인 100역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걸 하나하나 다 얘기해서 학부모도 해야지, 손님도 해야지,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반찬을 열 가지 해놓고 ‘이걸 골고루 다 먹어야 하나’ 하고 불평하나요? 질문자는 지금 ‘김치도 먹어야지, 국도 먹어야지, 두부도 먹어야지, 생선찌개도 먹어야지,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이렇게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다 안 먹어도 되고, 그냥 이것저것 먹어도 되는 거예요.
산다는 것 자체가 여러 역할을 하는 겁니다. 작가가 되면 글을 써야 하고, 메인 작가가 되면 후배 작가들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리고 작품을 제작사에 넘겨주면 수정 요청을 받겠죠. 여기서는 이런 작품을 쓰라고 요구할 것이고, 저기서는 저런 작품을 쓰라고 요구하겠죠. 당연히 다양한 요구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시청률을 올리려면 재미도 있고 유익해야 하니 이런저런 요구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요구들을 받아서 요리를 하는 것이 메인 작가의 역할입니다. 요리하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요구를 받습니다. 냄새도 좋아야 하고, 맛도 있어야 하고, 보기도 좋아야 하고요. 음식을 요리해서 내놓으면 어떤 사람은 ‘맛은 있는데 모양이 별로다.’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모양과 향기는 좋은데 맛이 없다.’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게 됩니다. 맛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맛으로 평가할 것이고, 향기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향기로 평가할 것이고, 각각 다 자기 나름대로 평가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질문자가 모든 사람의 취향을 다 만족시키려 한다는 점입니다.”
“네, 그런데 방송이란 것 자체가 그 요구를 다 받아들여서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여서요.”
“왜 다 충족시켜야 해요? 아무리 노력해도 몇 개는 충족되는 것이 있고, 또 몇 개는 충족이 안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백 퍼센트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저도 여러분들이 볼 때는 다 충족시켜 주며 사는 것 같죠. 그런데 어떤 여자가 제게 와서 ‘스님, 너무너무 사랑해요. 저와 결혼해요.’ 하면 제가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나요? 그러면 그분이 제게 ‘한 사람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무슨 일체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인가.’라고 말할 거 아니겠어요. 그럼 제가 큰 문제라도 있는 사람이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런 고뇌가 생기는 이유는 모두 욕심 때문입니다.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질문자는 요구받는 역할을 열 가지 정도만 나열했는데, 저는 요구받는 역할이 100개도 넘어요. 그런 요구를 모두 받아들여서 내가 요리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다 얘기해라’ 하고 받아들여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요리해서 내놓는 거예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잘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못했다고 할 겁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평가일 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요구를 잘 받아들이고 싶은데 실제로는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같아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자기 문제죠.”
“네, 저의 문제입니다.”
“그럴 때 ‘내가 욕심이 많구나.’ 하고 자각해야 합니다. 첫째, 내가 원하는 것이 세상에서 다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예요. 둘째, 사람들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을 다 해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마치 내가 다 해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다 해줄 수 있다면 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다 못 해주시잖아요. 그러니 질문자가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다 들어줄 수 있겠어요? 그것은 어마어마한 교만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착각도 유분수죠. 능력도 별로 없으면서요. (웃음)
그러니 자신을 직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요구를 하면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나의 능력을 높게 평가해서 이것저것 요구하는 것은 고마워. 그래, 내가 한번 해볼게.’
그리고 나서 ‘내 작품은 이런 거야.’하고 내놓으면 끝이에요. 그걸 나쁘게 평가해도 ‘그래, 알았어.’ 하고, 그걸 좋게 평가해도 ‘그래, 알았어’ 하면 됩니다. 그러다가 메인 작가에서 잘리면 다시 질문자가 좋아하는 새끼 작가가 되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걱정이에요? 걱정의 원인은 질문자가 교만한 거예요. 첫째, 욕심이라 말할 수 있고, 둘째, 교만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스님, 그렇다면 회사에서 ‘이렇게 만들라고 했는데 왜 이 정도밖에 안 되냐?’라고 할 때 이것이 최선이라고 말하면 될까요?”
“그렇게 대답하면 상대가 기분 나쁘죠. 질문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이런 상황에서는 ‘죄송합니다. 노력한다고 했는데 이렇게밖에 못했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지나친 요구를 하는 건 기분 나빠할 일이 아닙니다. 나를 좋게 봐준 거예요. 그 이유는 질문자가 자신을 너무 과대 선전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과대 선전하니 그 사람은 거기에 맞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질문자가 실제로 그런 수준이 안 된다면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자신을 스스로 너무 과대 선전하면 선택받는 데는 유리하지만, 평생 살아가는 것이 힘에 부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남자한테 잘해서 결혼에 성공했다면, 평생 살면서 고생하게 됩니다. 남자는 자신에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고 결혼했으니 내가 평생 잘해주길 기대하잖아요. 잠시 잘해주는 건 가능하지만, 어떻게 평생을 잘해주겠어요. 그렇게 되면 상대는 사람을 잘못 봤다고 불평하게 됩니다. 선택되는데 필요한 것과 사는데 필요한 건 다릅니다. 그래서 사실 평생 편하게 살려면 사람들한테 별로 친절하지 않은 게 좋아요. 재능도 잘 드러내지 않는 게 좋고요. 그러면 처음 선택되는 데는 좀 어려움이 있지만, 선택한 뒤에는 관계가 좋아집니다. ‘별 기대 안 했는데 같이 일해보니 괜찮네.’ 이렇게 평가를 받기 때문입니다.
한방에 떠서 인기를 끄는 사람을 보면 여러분은 부럽죠? 그런데 당사자는 죽을 지경이에요. 남 보기에 좋지, 본인은 그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요행히 서울대에 들어갔다면 4년 내내 그 학과에서 꼴찌를 하게 됩니다. 입학하는 날만 기분 좋고, 4년 내내 열등의식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서울대에 갈 실력이 있는데 그보다 낮은 대학에 가면 어떨까요? 입학하는 날은 기분이 나쁘지만 4년 내내 편하게 놀아도 일등을 하겠죠.
이것이 인생입니다. 남이 보기에 좋아 보이는 인생이 있을 수가 있지만 사실은 평등한 거예요. 실제로 따져보면 지금 한꺼번에 많이 먹고 나중에 굶느냐, 조금 먹고 나중에 저축해서 계속 먹느냐, 이런 차이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질문자한테 요구가 많다는 건 질문자한테 기대가 크다는 뜻입니다. 기대가 크다는 건 고마운 일이 아닐까요?”
“네. 고마운 일입니다.”
“고마운 일이니 그걸 두고 기분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첫 번째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인사하고, 두 번째는 ‘죄송합니다’ 하고 얘기하면 됩니다. ‘감사합니다’와 ‘죄송합니다’ 이 두 마디만 입에 달고 살면 돼요.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대에 못 미쳐서 죄송합니다’ 하고 웃으면서 지내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것도 도저히 못할 것 같아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시리아 난민이랑 미얀마 지진 얘기를 하셔서 ‘이런 질문을 해도 되나, 호강에 겨운 소리 아닌가’ 싶어서 조금 망설여졌습니다. 그래도 스님 말씀을 듣고 나니 잊고 있었던 감사함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오늘은 배우, 매니저, 작가, 감독, 엔터 관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이 다양한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참석자들의 마음도 밝고 가벼워졌습니다. 스님은 참석한 방송, 드라마, 영화 관계자들을 위해 격려의 말을 해주었습니다.
“저는 대학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학벌을 위조할 일도 없고, 박사 학위가 없으니 논문 표절 시비에 휘말릴 일도 없습니다. 말썽이 생길 일이 별로 없지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편한 일인지 모릅니다. 학력이라는 간판은 잠시 좋을 수 있지만, 결국 그 간판이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밍크코트를 입었다면 길을 걷다 다리가 아파도 아무 데나 주저앉을 수 없습니다. 벤츠를 타고 다니면 포장마차 앞에 차를 세우고 떡볶이를 먹는 것도 꺼려집니다. ‘품위 유지비’가 드는 것이지요. 하지만 편한 옷을 입고 다니면 어떨까요? 다리가 아프면 아무 데나 앉을 수 있고, 먹고 싶을 때 어디서든 먹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로운데, 왜 스스로를 겉모습과 형식 속에 가두어 감옥살이를 하나요?
오늘 이 자리에 배우들이 많이 오셨는데, 유명할수록 마음 한켠에는 우월의식이 생기지만 동시에 세상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삽니다. 토끼도, 노루도, 산짐승도 다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사는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왜 그렇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까요? 그런 생각을 탁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찾아옵니다. 세상의 허명(虛名)과 지위에 자신을 팔아버리는 건 제가 보기엔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살면 늘 위축되어 눈치 보고 숨어 살아야 하잖아요. 물론 남에게 함부로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예의는 지켜야 하지만, 거기에 너무 묶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최선을 다할 뿐 인기를 얻으면 좋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이렇게 마음을 두면 훨씬 자유로워집니다.
특히 제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경우는 어릴 때부터 인기를 얻은 아이돌 가수나 배우들입니다. 어린 나이에 인기를 누리면 자신이 대단하다는 우월감에 빠져 남을 함부로 대하기 쉽습니다. 반면, 그 인기를 유지하려고 늘 조급하고 불안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기가 떨어지면 마약이나 각종 중독에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빠르게 인기를 얻는 것보다 완만하게 성장하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젊을 때의 인기는 연기 실력보다는 외모 덕분에 얻는 경우가 많지요.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라기보다 조상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사십 대·오십 대를 넘어갈수록, 그리고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까지도 사랑받는 배우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배우의 길입니다. 그렇게 되면 배우는 평생의 직업이 될 수 있습니다.
꾸준히 연기하고, 꾸준히 작품을 써나가는 삶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젊을 때 주목을 받으면 평생 그 기대를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유명한 작가나 배우처럼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늘 부담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러니 지금 인기가 없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성장의 여지가 있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저는 여러분을 지위나 인기로 평가하지 않습니다. 저는 ‘한 인간으로서의 여러분’을 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삶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길 바랍니다. 인기를 쫓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마음이 병들고 삶이 힘들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추첨을 통해 몇몇 분들에게는 스님의 친필 사인이 들어간 책을 선물했습니다. 한 분 한 분 호명이 될 때마다 모두 환호를 하며 앞으로 나와 선물을 받았습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했던 정은혜 님도 스님의 친필 사인 책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스님과 노희경 작가님은 무대 앞에 서서 강연장 밖으로 나가는 참가자 한 명 한 명과 악수를 나누며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참가자가 모두 나가고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만 모여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길벗, 화이팅!”
이것으로 서른다섯 번째 길벗 강연회를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평화재단을 찾아온 사회인사와 미팅을 하고, 오후에는 병원 정기 검진을 받을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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