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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동북아역사기행 3일째입니다. 오늘 스님은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 북한 땅을 보며 '북한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기행단은 새벽 4시 40분에 모두 숙소를 나와 집안(集安) 시내에 있는 새벽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각자 시장에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점심때 먹을 음식도 샀습니다.
스님도 죽을 사 와서 길거리에 서서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시장에서 간단히 요기한 후 새벽 5시 30분에 집안을 출발하여 국동대혈(國東大穴)로 향했습니다.
버스가 출발하자 스님이 송수신기로 오늘 일정과 국동대혈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집안을 출발해서 국내성 동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죠. 그 동쪽으로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국동대혈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이름 그대로 고구려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대형 동굴인데, 고구려 왕이 매년 한 번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이 동굴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가 최근에 발견되면서 우리가 역사 기행을 할 때마다 참배해 오고 있어요.
이제 우리는 압록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창밖을 보시면 북한의 만포시가 강 건너 멀리 보입니다. 저기에 철길이 하나 보이죠? 이 철도는 만포로 이어지는 북한 철도입니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산들은 모두 북한의 산들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지역이 바로 만포시입니다.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이 길은 불과 10년 전만 해도 비포장도로였고, 도로가 좁고 상태가 나빠서 이동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강이 범람해 자주 통제가 되기도 했어요.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의 사회 간접 자본 투자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바뀐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저기 강 건너편에 빌딩들이 보이시나요? 북한도 최근 들어 건설이 많이 이루어지네요. 예전에는 저런 빌딩이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꽤 눈에 띕니다.
중국은 북한과 맞닿은 거의 모든 지역에 다리를 놓고 세관과 도시, 공장 등을 건설해 왔습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북한의 개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해 온 것이죠.
오른쪽에 보이는 건 북한의 시멘트 공장입니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공장이 최근 10여 년 사이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어요. 공장 가동으로 인한 분진이 심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그 모습을 보고, ‘와, 공장이 돌아간다!’ 하며 반갑게 느끼죠.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강이 바로 압록강입니다. 강 양쪽 모두 철조망이 설치돼 있죠. 예전에는 중국 쪽에도, 북한 쪽에도 이런 철조망이 없었습니다. 지금 보시면 알겠지만, 양쪽 다 철조망이 완전히 설치돼 있고 초소도 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휴전선처럼 해 놨잖아요.”
국동대혈로 가는 길에 보이는 압록강변의 북한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웠습니다.
“여름에는 이 강가에 사람들이 많이 나오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아무도 안 보이네요. 강변의 중국 쪽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도로도 내고, 여러 시설들을 정비하고 있습니다. 강변은 일종의 공유 면적인데 이렇게 중국이 강변을 정비하니까, 홍수가 나면 물이 어느 쪽으로 쏠릴까요? 북한 쪽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겠죠. 왜냐하면 북한 쪽은 제방 시설이 거의 없거든요. 큰비가 오면 예전보다 북한 쪽 피해가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제방 시설이 제대로 안 돼 있으니까, 홍수가 나면 피해가 옛날보다 더 커지는 거예요.
여기 유람선도 있습니다. 통일이 되거나 개방되면 여러분이 배를 타고 여기에서 혜산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 지금 이곳에는 북한과 중국 양쪽 모두 서로 넘나들 수 없도록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는데, 예전에는 주민들이 이웃 동네처럼 오가던 지역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강아지 한 마리를 안고 타이어 튜브로 건너와 팔고 돌아갔다는 말도 있어요. 상류 쪽으로 가면 강이 좁아져 개울처럼 되어 있어서 쉽게 건널 수도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어느덧 국동대혈에 도착했습니다.
오전 6시, 주차장에 내려 산 길을 따라 국동대혈을 향해 줄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스태프 한 명이 달려와 중국 공안의 지시라며, 더 이상 올라가지 말고 되돌아가야 한다고 전해 왔습니다.
산길을 오른 지 20분 만에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스님도 아쉬운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국동대혈에 도착하면 하늘과 통한다고 해서 ‘통천문’이라 불리는 동굴이 있습니다. 하늘과 통하는 듯한, 자연적으로 뚫린 바위 동굴입니다. 인공적인 손길이 닿지 않은 완전한 자연 동굴이기 때문에 법적으로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는 곳인데 못 가게 하네요. 아쉽지만 되돌아가겠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버스에 올라타 압록강을 따라 계속 이동했습니다. 압록강의 상류로 올라갈수록 강 건너편 북한의 모습이 더욱 뚜렷이 보였습니다.
오전 7시에 운봉 검사소에 도착하여 검문을 받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모든 검사를 마치고 출발하려는데 여행사 측에서 조금 더 가면 산사태가 나서 도로가 막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산사태가 나서 압록강 쪽으로는 접근이 어려워져 운봉댐을 우회해서 가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강 건너편은 북한의 자강도 만포시입니다.
압록강은 전체 길이가 약 790km입니다. 직선거리로는 신의주에서 백두산까지 약 400km지만, 물줄기를 따라가면 약 800km에 달합니다. 그만큼 강의 모양이 뱀처럼 구불구불하다는 거예요. 특히 만포에서 해산진까지 가는 상류 지역은 사행천(蛇行川)이라 불릴 정도로 굽이굽이 돌아요. 강이 한 바퀴 돌면 어느 순간 북한 땅이 중국 쪽으로, 중국 땅이 북한 쪽으로 보일 만큼 복잡합니다.
이 강에서는 과거 일제 강점기부터 백두산에서 나무를 잘라 뗏목을 만들어 띄웠습니다. 수풍댐이 생기면서 서해로 가지 못하고 여기서 막히게 되었는데, 수풍댐 위에 운봉댐을 건설하면서 대부분의 뗏목을 운봉댐이 있는 자성 지역에서 건지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뗏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강을 따라 오징어 모양처럼 뗏목을 엮어 두세 명이 타고 내려오곤 했어요. 앞으로 개방되면 일주일 정도 뗏목을 타고 내려오는 체험을 해 보는 것도 좋겠네요.
나무를 베어 엮어서 만든 것이 뗏목입니다. 사람이 타는 뗏목은 비교적 작지만, 목재 운반용 뗏목은 훨씬 큽니다. 수백 그루의 나무를 베어 엮어서 물에 띄운 뒤 강을 따라 떠내려 보내는데, 강기슭에 부딪혀 멈출 수도 있어서 사람이 직접 타고 조정합니다. 이 뗏목은 앞이 좁고 뒤가 넓어서 오징어처럼 생겼다고도 하는데, 좁은 앞부분에 조정하는 사람이 타게 되어 있습니다. 길이가 상당히 길기 때문에 운전하기 쉽지 않습니다.
압록강은 우리나라 강 중에서 배를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가장 긴 강입니다. 전체 길이가 약 800km인데, 그중 700km 구간까지 배로 이동할 수 있어요. 즉, 혜산까지 배가 올라갈 수 있는 거죠. 혜산진, 만포진, 중강진 등에 붙는 ‘진(津)’은 부두를 뜻합니다.”
운봉댐을 우회하여 다시 8시 30분에 3도구 검사소에 도착했습니다. 검문을 받는 과정에서 확인을 해보니 압록강을 따라 3도구에서 림강까지 올라가는 도로에도 산사태가 많이 나서 이동 경로를 변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스태프들과 의논한 후 스님이 변경된 일정에 대해 공지를 해주었습니다.
“이틀 동안 내린 비로 산사태가 발생해 목적지인 장백현까지 가는 압록강변 도로 중 두세 곳이 막혔다고 합니다. 림강까지 가는 길도 끊겨 동네 길로 우회하려 했지만, 그곳도 산사태로 무너져 통행이 어렵다고 하네요. 그래서 계획을 바꿔 백산시로 나간 뒤 고속도로를 타고 백두산 쪽으로 올라가다가 장백현으로 이동해 보려 합니다. 이렇게 가면 압록강을 따라 올라가면서 북한 땅의 모습을 보는 기행은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영광탑이 있는 장백현에 가면 북한의 혜산시를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가다가 또 변수가 생길 수도 있지만, 여행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 일단 가 봅시다.
제가 30년 넘게 역사 기행을 다니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 내 인프라는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통제는 점점 심해지고 있어요. 오히려 못 가는 곳이 늘어나고 제약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이럴 바에야 역사 기행을 안 하는 게 낫겠다.’ 혹은 ‘이래도 가는 게 낫다.’ 하는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내년 기획에 참고하겠습니다.” (웃음)
아쉽지만 압록강을 따라 상류로 올라가며 4도구부터 18도구까지 이어지는 길에서 볼 수 있는 북한의 모습을 보기로 한 원래의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버스는 방향을 돌려 백두산 서편에 있는 백산시로 향했습니다. 스님은 지금까지 역사 기행을 진행하면서 가장 큰 공로가 있었던 방학봉 교수, 조춘호 선생을 소개한 후, 역사 기행을 계기로 북한 난민 지원 활동과 북한 인도적 지원 활동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동북아역사기행 초반에는 안내를 맡은 여행사가 해마다 바뀌었습니다. 비가 많이 왔던 1995년 여름에 역사 기행을 할 때였습니다. 안내를 맡은 사람이 북한에 다녀왔다는 거예요. 자신이 직접 가서 보니 아이들이 정말 작았고, 굶어 죽는 사람이 실제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오기 시작하던 때라 북한이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시대에 누가 굶어 죽겠느냐?’라고 물었더니 자기가 직접 봤다고 했습니다. 제가 인도에서 가난한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인도 아이들이 구걸하는 사진을 보여 줬더니 북한은 더 심각하다는 거예요. 제가 말이 안 된다고 믿지 않자, 배를 태워 압록강에 데려가 보여 줬습니다. 그때가 1996년 8월이었고,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해 9월에 미국에 갈 일이 있어 LA를 방문했는데, 북한과 관련된 정보를 전부 모았습니다. 북한 책을 파는 서점이 하나 있었고, 비디오테이프와 신문 같은 자료들을 수집했습니다. 그러다 1995년 북한의 대홍수가 엄청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압록강변이 거의 모래사장처럼 변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1996년 12월 12일, 좋은벗들이 중심이 되어 ‘우리 민족 서로 돕기 불교 본부’를 창립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돌아와 북한 돕기 운동을 시작하려던 무렵, 강릉 무장 공비 침투 사건이 터졌어요. 이 일로 인해 적십자를 비롯해 북한에 대한 지원이 전면 중단되었고, 북한을 조금씩 돕던 단체들마저도 모두 한국 정부가 지원을 중단시켰습니다. 이때 어느 목사님이 ‘지금은 북한 돕기 운동을 하지 말고, 조선족 사기 피해자 돕기에 집중하자.’라고 제안했습니다. 당시에 조선족 사기 피해자 사건의 피해 규모가 엄청 컸거든요. 그래서 중국에서 조선족 지도자들과 만나 한국 정부와의 교섭 방법을 논의하여 피해자들이 한국에 와서 돈을 벌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조선족 사기 피해자 문제도 풀어야 할 일이긴 했지만, 북한의 기아 상황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같이 하겠다고 나섰던 사람들마저 활동을 모두 중단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압록강변에서 본 굶주린 아이는 강릉 잠수함 사건이 났는지 안 났는지도 모를 거 아니에요.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하려는 이유는 그 아이가 굶기 때문인데, 그 아이와 아무 상관없는 강릉 잠수함 사건 때문에 이 일을 멈춘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하면 안 된다.’ 하며 저를 과격하다고 했습니다. 북한 주민을 돕는 모금 운동을 하면 잡아간다고 하던 때였어요. 저는 ‘잡아가도 좋다.’ 하는 마음으로 연말부터 서울역 앞에서 모금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잡혀가지는 않았어요. (웃음)
그때는 북한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었습니다. 정보를 가진 사람은 유진 벨 재단의 스티브 린턴 박사로, 북한에 오가며 얻은 정보가 있었고, 중국 연변 과학기술대학을 세운 김진경 박사도 북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7년에 두 분을 초청해서 북한의 상황을 직접 들었습니다. 같은 해 3월 강원도의 감자가 과잉 생산되어 창고에서 싹이 트기 직전이 되자, 한국 농민과 북한 주민을 함께 돕고자 약 1960톤을 구매해 100여 대의 트럭으로 육로를 통해 북한에 보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북한 내부로는 못 들어가니까 매달 압록강과 두만강을 답사하며 조금의 희망이라도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현장을 다녔습니다. 그때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경으로 난민이 엄청나게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연길을 비롯해 두만강변 동네마다 조선족 사기 피해자를 돕는 과정에서 알게 된 조선족 지도자들과 함께 그들을 돕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중국 정부가 이런 활동을 금지하자, 다들 겁을 먹고 못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당신들이 어려울 때 내가 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이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겠다면, 그건 이기주의 아닙니까? 나도 당신들을 못 돕겠습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설득한 끝에 조선족 사기 피해자 협회가 나섰고, 그들과 함께 조직적으로 북한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돕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좋은벗들’은 북한 난민들을 인터뷰하면서, 난민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북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식량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런 소식을 수없이 전했습니다. 조선족 사기 피해자들을 도왔던 인연으로, 조선족 지도자들이 훈춘, 왕청, 도문, 화룡, 용정, 돈화 등 지역 전체를 연결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했습니다. 북한 난민을 돕고 구호한 활동은 기록에 남은 것만 해도 수만 건이 넘습니다.
제가 미국에 가서 북한의 기아 상황의 심각성을 호소했는데요. 남한 사람들은 ‘북한 놈들 나쁜 놈들이다. 굶어 죽어도 된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모금에는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은 ‘증거가 뭐냐?’ 이렇게 나왔습니다. 그래서 증거를 수집하기 위해 다시 현장에 파견단을 보내 난민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너희 집에서 지난 3년 동안 몇 명이 죽었니?’, ‘너희 반에서는 몇 명이 죽었니?’ 이런 질문들을 통해 약 270명의 인터뷰 자료를 확보하여 다시 미국에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터뷰한 모집단이 적어서 통계적으로 유효하지 않다는 거예요. 다시 한 달 반 동안 추가 조사를 하여 470명의 자료를 가져갔더니, 그제야 일정 부분 인정을 했습니다.
당시에 제가 만난 앤드류 나초스(Andrew S. Natsios) 씨는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대표였고, 이후 월드비전(World Vision) 부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기아 전문가로서 전체 자료를 검토한 뒤 ‘기아 상황이 맞다.’고 판단했고, 본인의 주선으로 유엔(UN)에 난민 문제와 인도적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이 절차가 미국 내에서 본격화되기까지는 약 2년이 걸렸습니다. 한국에서도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여 국제적 차원의 인도적 지원이 재개되면서 북한의 기아 상황을 완화하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많은 젊은 대학생들이 학업을 중단하고 난민 구호와 조사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역사 기행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이승용 님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지원 활동을 하는 도중에 중국 공안에 발각되어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 기간에 저는 미국 의회 지도자들을 연길까지 데리고 와서 난민들을 직접 만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사실 여부를 확인하자 미국 의회 지도자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앤드류 나초스 씨는 백두산까지 가서 옷이 해지고 신발도 낡은 난민들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북한의 기아 상황이 과장이 아님을 증명하고 인도적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남북통일이 되면 1995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북한 대량 아사 사태에 대해 북한 정부뿐만 아니라 이를 방치한 남한 정부 지도자들이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국으로 넘어온 난민 대부분은 두만강을 건넌 사람들이었습니다. 강폭이 좁고, 강 건너 조선족이 많이 살아서 보호받기도 쉬웠고, 밖으로 나갈 통로도 있었죠. 그런데 가장 불행했던 사람들은 혜산에서 장백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혜산에서 장백으로 넘어오는 건 쉽지만, 장백에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어요. 당시에는 압록강변으로 도로도 없었고, 림강에서 장백까지 이어진 도로는 워낙 열악해 하루 만에 도착하기 어려운 먼 거리였습니다.
또 다른 경로는 백두산을 넘어 만강을 거쳐 이도백하로 오는 길이었는데, 이곳에는 만강 검문소가 있습니다. 백두산은 숲이 우거진 정글이라 도로가 아니면 넘어오기 어려워요. 그래서 난민들이 백두산을 간신히 넘어왔는데 결국 만강 검문소에서 다 잡혔습니다. 그래서 북한 난민들은 당시에 만강 검문소를 ‘피눈물의 만강’이라고 불렀습니다. 잡히면 구금되거나 되돌려 보내졌습니다. 그때 조선족 지역의 지도자가 저에게 ‘우리가 하는 일이 누구보다 좋은 일인데, 왜 죄지은 사람보다 더 조마조마하게 숨어서 이 일을 해야 합니까?’하고 호소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제 나름대로는 많은 준비를 했지만, 현재는 남북 관계가 좋지 않아서 아무런 대응을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세계적으로 보면, 가자 지구 등에서 벌어지는 참사들이 이보다 더한 비극일 수 있음에도 여전히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다 보니 백산시에 도착했습니다.
“백두산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은 양강도, 북쪽은 조선족 자치주, 남서쪽은 백산입니다. 지금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백산시입니다. 여기서 고속도로를 타고 무송으로 가겠습니다. 무송에서 바로 백두산을 오르면 서쪽 봉우리로 오르게 됩니다. 애초에는 압록강을 따라 올라가려 했지만, 산사태로 인해 무산되어 지금은 백두산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에 고원 지대에 다다르면 백두산의 고개를 넘어 동쪽으로 진입할 예정입니다. 원래 계획대로 압록강을 따라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압록강 상류에 있는 혜산시는 가보려 합니다. 혜산시를 돌아보고, 건너편 장백에 있는 영광탑이 있는 탑산에 오르겠습니다. 이후에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나와 백두산 서편으로 이동한 뒤, 다시 북편으로 올라 이도백하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옛날 사람들이 백두산으로 오르던 길이에요. 그러니 오늘의 일정은 ‘백두산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 길을 달리는 동안, 기행단은 백두산을 향해 가고 있음을 실감하며, ‘백두산’ 노래를 힘차게 불렀습니다. 스님과 참가자들은 백두산 속으로 스며드는 듯 하염없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버스 안에서 새벽 시장에서 사 온 도시락을 먹은 후 창밖 풍경을 구경하는 동안 오후 1시 30분에 장백 검사소에 도착했습니다. 공안이 버스에 올라 1명씩 영상을 찍으며 이름과 직업을 물었습니다. 검문이 길어져서 대기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습니다. 결국 2시간 동안 검문을 받아야 했습니다.
스님은 기다리는 동안 대중들에게 책을 펼치라고 한 후 저녁 시간에 숙소에 도착해서 강연할 내용을, 송수신기를 이용하여 버스 안에서 했습니다.
국동대혈, 림강, 8도구, 김형직군, 김정숙군, 혜산, 장백, 연변조선족자치주, 이도백하 등 각각의 지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후 내일 오를 백두산 천지의 지형과 봉우리, 천지를 두고 북한과 중국의 국경이 어떻게 나눠졌는지 역사적 배경에 관해서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시 후 오를 발해 시대의 영광 탑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잠시 후에 우리가 도착하는 곳은 장백현에 있는 탑산입니다. 탑산 꼭대기에는 영광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영광탑은 발해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까지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건 이 탑이 유일합니다. 영광탑은 불교 사찰의 탑이 아니에요. 보통 절에는 대웅전이 있고 그 앞에 탑이 세워져 있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절이 없어요. 이 탑은 무덤 위에 세운 탑, 즉 무덤 탑입니다. 발해인들은 대부분 불교인이었지만, 고구려로부터 계승한 무덤 양식에 따라 무덤실은 지하에 만들고, 그 위에 탑을 세우는 양식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무덤 위에 세운 탑을 ‘능지탑’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인이었지만 무덤은 조상의 풍속대로 하고, 그 위에 불교식 탑을 세운 거죠. 이 일대 어디에도 절터는 없습니다. 지하에 무덤이 있고, 그 위에 탑이 세워져서 탑이 약간 기울어져 있습니다.
경주에도 양식은 다르지만 이와 같은 탑이 있습니다. 문무대왕은 자신이 죽은 뒤 동해의 용이 되겠다고 하며 화장한 유골을 바다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유골을 안치한 곳이 바로 대왕암입니다. 그리고 화장한 자리에는 탑을 세웠어요. 부처님의 사리탑이 아니라 왕의 유골을 기리는 탑입니다. 이것도 능지탑이라 불립니다. 능이 바다에 있어서 육지에 무덤이 없으니, 탑으로 무덤을 대신한 거예요. 발해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이런 전통을 자기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후 3시 40분이 되어서야 검문을 마치고 버스가 다시 출발했습니다. 약 50분을 이동하자 다시 압록강이 나타났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얼마 가지 않자 강 너머로 북한의 혜산시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였습니다. 강폭이 마치 개울처럼 좁아 몇 걸음 만에 건널 수 있을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혜산시의 변화된 모습을 보며 천지가 개벽했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앞에 보이는 땅이 바로 북한의 혜산입니다. 창밖을 한번 보세요. 이 강은 강폭이 무척 좁습니다. 저 건너편에 보이는 논밭들이 전부 북한 땅이에요. 앞에 보이는 마을도 북한 마을입니다. 날씨가 더우면 강가에 많은 사람이 모이곤 하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그런지 아무도 안 보이네요.
산을 보면 나무가 하나도 없습니다. 혜산에서는 사람들이 불을 때기 위해 직접 나무를 구해야 하는데, 이 일대에는 나무가 없다 보니 무려 40리 밖까지 걸어가서 나무를 해 오는 일도 있습니다.
저쪽에는 아파트가 새로 들어섰네요. 30년 동안 변화가 없던 곳인데, 최근 5년 사이 토목 공사와 건축이 꽤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평양 뿐 아니라 이런 지방 도시들까지도 말이죠. 누군가 강가를 따라 걷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제가 1998년쯤 이곳을 처음 답사했을 때는 저기 자갈과 흙으로 된 강변에 사람들이 많이 나와 있었어요. 강 건너를 보고 있는데, 어린아이를 안고 있던 한 여성이 뒤로 쓰러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기아 상태에 있다가 쓰러진 겁니다.
우리가 묵던 집 창고에서 아침에 여자 두 명이 물에 젖은 채 나오기도 했는데, 지난밤에 강을 건너와서 그 창고에 숨어 있었던 거예요. 먹을 것을 주고 돈도 건네며 다시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두세 번 마주쳤던 한 여성을 나중에 대전에서 만났습니다. ‘웬일이냐?’ 하고 물으니 결국 탈북을 해서 남한에 들어왔다는 거예요. 당시에 서른 중반쯤 된 여성분인데, 저를 껴안고 우니까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았겠어요? (웃음)
뒤편에 보이는 저 빌딩도 새로 지은 겁니다. 5년 만에 다시 와 보니 정말 천지가 개벽했네요.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올 만해요?”
“예.”
“예전에는 여름이면 이 강가에 사람들이 모여 빨래도 하고 물도 떠 가곤 했습니다. 상수도 시설이 전부 망가진 상태였거든요. 수십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이 나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없다는 건 상수도 시설이 복원되었다는 의미겠죠.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절만 해도 이 산골짜기 안쪽의 옥수수밭이나 숲속에는 북한 아이들이나 난민들이 많았습니다. 이곳은 넘어오기는 쉬운데 도망갈 데가 없어요. 우리가 방금 넘어온 백두산을 넘는 길과 압록강 쪽으로 빠지는 두 길밖에 없습니다. 그 두 길에는 각각 검문소가 있어서 피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결국 산으로 도망치다가 수없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지역은 고개 하나 넘는다고 길이 나오는 곳이 아니에요. 수백 리 안에 연결되는 다른 길이 전혀 없는 곳입니다.”
북한의 혜산시를 가까이에서 본 후 오후 5시가 되어 영광탑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원래는 일정상 오후 1시면 영광탑에 도착했어야 했는데, 검문을 두 차례 받고, 길을 우회하여 돌아오다 보니까 4시간이 더 걸렸네요.”
버스에서 내려 영광탑을 향해 천천히 걸어 올라갔습니다. 항상 오르던 가파른 계단 대신 나무 데크로 만들어진 새 길을 따라 올라갔습니다. 걷기는 편했지만 빙 돌아가야 해서 오르는 데 시간이 제법 걸렸습니다.
스님은 가장 앞장서서 가다가 심장과 다리가 아파서 대중을 먼저 올려 보내고, 대중을 뒤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먼저 도착한 대중은 좋은벗들 이승용 님에게 이곳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양강도의 수도인 혜산을 내다보며 이곳에서 25년 전 좋은벗들이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춥고 배고픈 난민들을 도왔던 이야기에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스님은 늦게 도착하여 영광탑 앞에서 조용히 삼배를 한 후 기도를 했습니다.
이승용 님이 설명을 마치자 다 함께 영광탑 앞에 다시 모여 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했습니다.
스님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행단을 위해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거룩하신 부처님, 대자대비하신 관세음보살님, 대원본존 지장보살님! 오늘 우리 동북아역사기행 대중 일동은 발해의 옛 영광탑 앞에서 예불을 올립니다. 환인 하나님, 환웅 천황님, 단군왕검님을 비롯한 역대 우리 민족의 조상신들이시여! 한반도가 평화롭고 남북이 하나 되는 그날까지 저희를 굽어살펴 주옵소서. 발해 멸망 이후 1000년이 지나 이곳을 참배하는 대중에게 불보살님들의 가피가 가득하여, 여행하는 동안 문제없이 모두가 건강하게 마칠 수 있도록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들께서는 옹호하여 주옵소서.”
대중도 두 손을 모으고 만주 벌판을 누빈 발해인들의 기상을 이어받아 새로운 통일 코리아를 열어갈 것을 발원해 보았습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나서 오후 6시에 하산을 시작했습니다. 내려올 때는 가파른 계단으로 내려왔습니다.
이제 버스는 백두산으로 향했습니다.
“이도백하에 도착하려면 밤 11시는 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녁 강의는 취소하고, 가는 동안 충분히 주무시기 바랍니다.”
백두산의 깊은 산속을 달리기 시작하자 빠르게 해가 저물었습니다. 대중은 버스 안에서 단잠을 잤습니다.
버스로 5시간을 달려 밤 11시에 이도백하에 도착했습니다. 먼저 식당으로 가서 늦은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스님이 이야기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잘 주무셨어요?”
“네.”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차에서 푹 자 놓고 밤 12시에 도착해서 2시간밖에 못 잤다고 또 그럴 거예요. 미리 예약을 해서 식당을 취소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밥 한 숟가락 뜨고 주무세요. 오늘 밤늦게 도착했다고 해서 내일 늦게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계획대로 4시 20분 기상, 5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내일은 아침 식사가 없고, 오후 2시는 되어야 밥을 먹을 수 있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말해도 되는데, 저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만 하세요.” (웃음)
비록 밤 11시가 넘었지만, 대중은 다 함께 공양 게송을 하고 즐겁게 식사를 했습니다.
스님은 오늘 하루 종일 운전하느라 고생한 기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저희가 변방으로 다니다 보니 운전기사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오늘 누구보다 수고가 많았을 기사님들을 위해 큰 박수 부탁드립니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이동하니 밤 12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새벽 4시 20분에 기상해서 백두산을 가야 하기 때문에 대중은 잠깐 눈을 붙였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4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백두산 천지에 올라 비룡폭포와 소천지, 녹연담, 지하삼림을 차례대로 보고 하산한 후, 오후에는 청산리 전적지를 둘러보고 화룡으로 들어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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