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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명상 수련과 안거를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스님의 하루 연재도 오늘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안거 기간 동안 스님은 문경 정토수련원에서 900여 명의 대중과 함께하는 온라인 명상 수련을 진행한 후, 봉화 정토수련원으로 이동하여 50여 명의 공동체 대중과 안거 수련을 하고, 비행기를 타고 중국 심양에 도착했습니다.
오늘부터 스님은 전국에서 모인 160여 명의 대중과 함께 민족의 뿌리를 찾아 떠나는 '동북아역사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첫날인 오늘은 현재 가장 웅장한 규모로 남아 있는 고구려의 백암산성을 둘러본 후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 환인에 도착해 '우리 민족이 가져야 할 역사관'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새벽 6시 인천공항에 모인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설렘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8시 20분에 인천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현지 시간으로 9시에 중국 심양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입국 심사가 까다로워 계획보다 1시간 늦은 10시 50분에 공항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사전 준비를 위해 하루 먼저 도착해 있었습니다. 입국 심사를 마치고 나온 참가자들을 마중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버스가 있는 곳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공항을 나오자 6박 7일 동안 기행단과 동고동락할 버스 3대와 운전기사, 현지 스태프들이 반갑게 기행단을 맞이해 주었습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버스에 탑승하자 스님이 송수신기를 통해 인사말을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법륜입니다. 중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모두 큰 박수로 스님을 반겼습니다. 드디어 역사 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버스로 40분을 이동하여 요령성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박물관 입구까지 걸어갔는데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는 중국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대기 시간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서 더 늦어지면 오후에 가야 할 홀본산성을 못 보기 때문에 마지막 날에 박물관을 오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고 다시 돌아서 나왔습니다.
요령성 박물관 건물 앞에 서서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박물관 건물 잘 봤죠?”
“예.”
“박물관 안에 무엇이 전시되어 있는지는 인터넷에 들어가서 보면 돼요. 아쉽지만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산성으로 가겠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할 겁니다. 그럼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다녀 주시기 바랍니다. 성질 내봐야 나만 괴로워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쉽지만 발길을 돌려 홀본산성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버스에 오르니 점심 식사로 옥수수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옥수수 크기가 무지 커서 하나만 먹어도 배가 불렀습니다.
옥수수를 먹으며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12시 20분에 휴게소에 도착했습니다. 스태프가 확인을 해본 결과 홀본산성에 오늘 비가 많이 내려서 갑자기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급히 스태프들을 소집하여 일정을 변경하기 위해 회의를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 백암산성으로 갑시다. 홀본산성은 내일 아침 일찍 가는 걸로 조정하고요.”
휴게소에서 버스가 가는 방향을 돌려 백암산성으로 향했습니다. 왔던 길을 돌아간 후 심양에서 다시 남쪽으로 더 내려갔습니다. 스님은 참가자들에게 일정 변경에 대해 공지를 했습니다.
“일정이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요령성 박물관을 갔다가 홀본산성으로 가는 일정이었는데, 박물관에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포기하고 홀본산성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홀본산성이 문을 닫았답니다. 비가 오면 그곳이 아주 가파르고 미끄럽거든요. 옛날에는 비가 장대같이 쏟아져도 우산 쓰고 비 맞으며 올라갔는데, 요즘은 안전을 중요시해서 조금만 위험해도 무조건 문을 닫아 버리는 모양입니다. 안전이 중요하지만 아쉽네요.
지금 방향을 바꿔서 마지막 날 가기로 했던 백암산성으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버스가 고속도로에서 나왔다가, 다시 반대 방향으로 돌아 들어가고 있어요. 오늘 공을 좀 치네요. 여행사에서 왔으면 벌써 입이 나왔을 거예요. (웃음)
오늘은 백암산성에 갔다가 환인으로 가서 하룻밤을 자고, 내일 새벽에 홀본산성에 올라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못 본 요령성 박물관은 마지막 날에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일정을 바꿨기 때문에 내일 집안(集安)에서의 일정이 좀 빡빡해질 겁니다. 여러분이 걸음을 좀 빨리 걷든지, 버스가 빨리 가든지, 밥을 안 먹든지, 뭔 수가 나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내일은 아침 먹고 출발하기에는 늦고, 점심 먹는 시간도 어중간해서 아점 정도로 먹고, 한 끼는 건너뛰겠습니다. 여기 올 때 이런 거 각오하고 오셨죠?”
“네!”
“이런 게 불편하면 지금 바로 버스에서 내리세요. (웃음) 동북아역사기행을 하기 위해 제가 1992년에 처음 이곳에 와 보았습니다. 다음 해인 1993년에 답사를 자세히 했고,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대중이 참가하는 역사 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이 32년째인데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최근 5년 동안 역사 기행을 못 했어요. 이번 역사 기행은 5년 만에 재개되는 기행이라 여러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고, 좀 서투른 점도 있을 거예요. 여러분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첫 번째 답사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모두 다 ‘우리는 답사팀이다.’라고 생각하고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이번 동북아 역사 기행을 준비한 스태프들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스님이 먼저 간단히 소개를 했습니다.
“제가 동북아역사기행을 다섯 번쯤 진행하고 나서 조춘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그분이 지난 25년 동안 역사 기행 실무를 헌신적으로 맡아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전에 몸이 편찮아지셔서 그분 따님이 아버지가 해 오던 일을 이어서 역사 기행의 실무를 맡아 오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보조해 오다가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겠다고 마음을 낸 거죠. 먼저 실무를 맡은 조신 님을 소개해 드립니다.”
먼저 조신 님이 송수신기로 인사를 했습니다.
“오늘이 기행의 첫날인데 순조롭게 일이 풀리지 않고 있어요. 그러나 제 경험에 의하면 처음에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을 때는 꼭 백두산 천지를 보게 되더라고요. 처음에 일이 잘 풀리면 백두산 천지를 못 보고 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초반에 고생 좀 하고 백두산 천지를 보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해요. 실망하지 말고 즐겁게 첫날 일정을 보내시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좋은벗들 이승용 사무국장이 인사를 했습니다.
“첫날 요령성 박물관이 너무 붐벼서 관람을 못하게 되었는데, 그만큼 요즘 중국 사람들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방금 몇몇 분들이 이제 버스에서 자면 되는 거냐고 물으셨어요. 실망하지 말고 더 분발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7일 동안 즐거운 기행이 될 수 있게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참가자들은 큰 박수로 6박 7일 동안 고생할 스태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백암산성까지 가는 길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도로가 막혀서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스님은 버스 안에서 중국 역사의 큰 줄기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우리 민족과 국경을 맞대고 살아온 중국 역사를 알아야 우리 역사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버스로 2시간을 이동하자 저 멀리 백암산성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스님이 백암산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가 곧 도착하는 곳은 정식 이름이 백암산성이고, 현지에서는 연주성이라 불리는 곳입니다. 중국 사람들이 연나라 시대에 쌓은 성이라 하여 연주성이라 이름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고구려 시대의 백암산성입니다.
지금의 요령성 대련에서 안산, 요양, 심양을 거쳐 장춘까지 이어진 고구려의 방어 성곽을 ‘천리장성’이라 부릅니다. 고구려 말기, 연개소문이 당의 침입에 대비해 성곽을 보수하고 확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 요동성은 서쪽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성이었습니다. 이 성은 평지에 있습니다. 지금의 요양 지역에 있는데, 이곳에서 약 3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백암산성은 바로 그 요동성을 방어하기 위한 산성입니다. 현재까지 가장 잘 남아 있는 고구려 산성 중의 하나입니다.
산성을 쌓은 산은 그리 높지 않지만 평지에서 산맥이 시작되는 경계 지점에 자리하고 있어서 정상에 올라가 내려다보면 앞쪽 평야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그래서 적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방어하기에 유리해 이곳에 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암산성을 정확히 언제 쌓았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습니다. 다만 6세기인 547년, 양원왕 때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549년에는 돌궐 군대 만 명이 침입해 왔지만 막아 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수나라와 고구려가 전쟁을 벌일 때, 수양제(隋煬帝)가 10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요동성을 88일간 공략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의 실패로 인해 수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되었죠. 그 뒤 645년 당 태종이 군대를 끌고 와서 요동성이 함락됐습니다.
그런데 안시성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을 들어 보셨죠? 끝까지 싸워 안시성을 지켜냈습니다.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로 꼽히지만, 끝내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주성인 요동성이 함락되자, 백암산성의 성주는 끝까지 저항하지 않고 그대로 항복해 버렸어요. 절대 함락될 수 없는 곳인데, 사람이 신통치 않으면 결국 무너지는 법입니다.”
버스는 산성의 서문 입구 가까이에서 멈춰섰습니다. 서문 입구에는 백암산성이 아닌 '연주산성'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표지판 앞에서 스님이 잠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백암산성은 규모가 크지 않습니다. 남북 길이 약 480미터, 동서 길이 약 440미터로, 다소 둥근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문 앞에 버스를 주차한 후 산성으로 올라가 보려고 합니다. 남문은 강가에 있어 출입이 어렵기 때문에 그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동쪽은 완전히 절벽이에요. 깎아지른 절벽이라 성벽을 따로 쌓을 필요가 없었고, 서쪽은 성벽이 가장 두껍게 쌓여 있습니다. 북쪽은 성벽이 얇고, 위에 망대가 있어요. 안에 작은 내성이 있고, 그 바깥으로 외성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입니다. 바닥은 흙길이라 길이 미끄럽습니다. 올라갈 때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성을 올라가려는데 미개방 상태라 안으로 들어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쉽지만 스님은 성벽 바깥 입구에서 참가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백암산성을 내려왔습니다.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오후 3시 30분에 백암산성을 출발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멀리 백암산성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백암산성이 멀어지고 너른 옥수수밭과 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기행단은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였던 환인(桓仁)으로 향했습니다. 4시간 30분 동안 먼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휴게소에 들른 후 버스 안에서 스님이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과 내일 둘러볼 곳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해가 저물자 버스 안에서 불을 켜고 공부를 했습니다.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하고 나니 졸음이 몰려왔습니다. 스님은 차량별로 돌아가며 송수신기를 이용하여 노래 부르는 시간을 갖자고 제안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이야기도 나누고, 졸기도 하는 가운데 저녁 8시가 되어 환인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버스 안에서 많이 주무셨죠? 혹시 잠이 부족한 사람은 내일도 버스 타고 가면서 자면 됩니다.” (웃음)
버스에서 내려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도중 스님은 이번 역사 기행의 스태프들과 내빈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짐만 숙소에 가져다 놓고 모두 강의실에 모였습니다. 저녁 9시 20분부터 저녁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우리가 왜 동북아역사기행을 왔는지 그 이유에 대해 한 시간 동안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는 왜 이처럼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역사 기행에 나설까요? 그 이유는, 인간이 단지 개인적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시공간 속에 위치한 존재입니다.
먼저 공간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우주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대우주에는 수많은 소우주가 있고, 우리는 그중 하나인 은하계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은하계 가운데 태양계가 있고, 그 태양계 가운데 지구가 있습니다. 지구 안에는 아시아 대륙이 있고, 그중 동북아에 대한민국이 자리하며, 그 안에 서울이 있습니다. 서울은 다시 구와 동으로 나뉘지요. 이것이 공간적 관계입니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가족을 이루고,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며,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간에도 관계가 성립합니다. 그에 따라 관계의 결도 달라집니다. 더 넓게 보면 남한과 북한, 한국과 일본처럼 다양한 국제 관계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즉, 내가 어떤 공간적 관계 안에 있는가에 따라 나의 존재가 다르게 규정됩니다.
물질적 예를 들자면, 산소(O2)는 같은 산소끼리 결합하면 우리가 숨쉬는 공기가 되고, 수소(H2)와 결합하면 물(H2O)이 됩니다. 어떤 원소든 무엇과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성질을 갖게 되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이 공간적 관계성을 우리는 사회성이라고 부릅니다. 어떤 사람에게 ‘당신은 사회성이 부족합니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거나 남을 배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시간적 관계성입니다. 지금 내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1년 전 혹은 10년 전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현재의 나를 규정짓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 어떤 습관을 지니게 되었는지, 부모는 어떤 분이셨고, 조부모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등이 모두 현재의 나에게 깊은 영향을 끼칩니다. 민족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단순히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민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동학 혁명의 상처를 딛고, 3.1 운동의 희망을 품었으며, 식민 지배의 아픔과 해방의 기쁨, 분단과 전쟁의 상흔을 모두 품은 존재들입니다. 이와 같은 시간 속 관계성을 우리는 역사성이라 부릅니다. 불교의 개념으로 말하자면 까르마 또는 업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역사성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깊이 규정짓는 요소입니다.
공간적 관계성인 사회성과 시간적 관계성인 역사성, 이 두 가지가 바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근거입니다. 학자들이 모여 국제 관계나 남북 관계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사회성을 다루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역사 기행을 하는 이유는 역사성을 알아 가기 위함입니다. 즉 시간적 관계성을 알아 가는 것이 역사 기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필리핀 사람과 한국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같이 밥 먹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생활한다고 해서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건 아닙니다. 부모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존재라는 거예요. 개인적으로는 어떤 씨족이고, 조상이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개인적인 역량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족적으로는 우리가 어떤 민족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나의 존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우리 민족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도 역사적 관계성, 즉 민족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역사관이 정립되었느냐.’, ‘그 사람은 역사관이 제대로 정립되어 있느냐.’ 하는 말을 하는 거예요. 역사관이 자기 정체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역사성과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기 위해서 우리가 역사 기행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의 역사를 말할 때, 단군 이래 반만 년 역사라고 하기도 하고, 개천 이래 6천 년 역사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한나라 이래 9천 년 역사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수치가 정확한지 아닌지가 핵심이 아니에요. 우리가 어떤 역사관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우리는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세 가지 큰 왜곡이 있습니다. 왜곡이란 역사를 잘 모르거나 아예 잘못 알고 있는 경우를 말합니다.
첫째, 상고사, 즉 민족의 시원에 대한 무지입니다. 민족의 뿌리에 해당하는 시기에 대해 잘 모르거나 왜곡된 정보를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고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에, 우리는 중국 문명을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게 되었고, 그 결과 중국에 대한 일종의 열등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중국 문명의 변방 또는 아류로 규정하게 된 것이죠. 겉으로는 큰소리치지만, 내면 깊숙이 자리한 이 열등의식이 민족 정체성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둘째, 독립운동사에 대해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많은 갈등과 감정의 뿌리를 이해하려면 독립운동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일본을 미워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그 감정의 밑바닥에는 식민 지배에서 비롯된 민족적 열등감이 깔려 있습니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억지를 부리면, 우리는 분노에 휩싸여 혈서까지 쓰는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격렬한 감정을 좋게 보면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은 민족적 자존감의 결핍에서 나온 열등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민족적 열등의식이 있으면, 차분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흥분해서 민감하게 대응하게 된다는 거예요.
셋째, 현대에 들어와서 모든 것이 서구식으로 바뀌면서 서구 문명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겉으로는 표출되지 않지만 학문, 사상, 기술 등 여러 측면에서 우리는 서구에 대한 열등의식을 안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한류와 기술 발전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되어 가고 있지만, 그 뿌리에는 열등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이처럼 왜곡된 역사 인식을 바로잡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없는 역사를 만들어서 치유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모르는 역사는 배우고, 잘못 아는 역사는 바로잡고, 부족한 부분은 연구해서 보충하고 회복해 나가야 합니다. 동북아역사기행은 그런 의미에서 기획된 여정입니다. 특히 상고사와 독립운동사라는 두 축을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상고사에 더 큰 비중이 실려 있어요. 전체 구성으로 보자면 약 70퍼센트는 상고사, 나머지 30퍼센트는 독립운동사에 집중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서양 문명에 대한 열등의식은 단순한 역사 기행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기술적 발전이나 한류와 같은 문화적 성취를 통해 점차 치유되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목표로 동북아역사기행을 하는 것입니다.
역사의 긴 흐름에서 보면, 남북한의 분단 80년은 찰나와도 같은 시간입니다. 현재만을 기준으로 보면 남한과 북한은 너무도 이질적인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긴 역사 속에서 보면 분단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있었던 해프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긴 역사 속에서 보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지금의 갈등 구조 속에서 북한은 가장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통일의 대상 또한 북한입니다. 미국이나 일본이 그 대상이 될 수는 없잖아요. 남한과 북한은 지금 이 두 가지 모순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적대적인 관계인 동시에 통일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마치 누군가를 가장 미워하지만, 그 사람과 결혼하지 않고서는 안 되는 관계처럼요. 이런 이중성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북한을 오로지 적대적으로만 보아도 안 되고, 오로지 통일의 대상으로만 보아도 현실을 제대로 진단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중적인 맥락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과거의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상고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현재로서는 접근이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환단고기’ 같은 자료를 토대로 접근하면, 일부에서는 종교처럼 맹신한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죠. 역사적 사실로 인정을 받으려면 두 가지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유물, 즉 물증이고, 또 하나는 기록입니다. 유물은 연대를 특정할 수 있지만, 기록과 일치하지 않으면 3천 년 전의 것이 맞더라도 어느 나라, 어떤 민족의 역사인지 증명할 수 없습니다. 기록이 있어도 제대로 기록되었는지, 누가 기록했는지 문제가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역사를 복원하려면 유물과 역사적 기록, 이 두 가지를 토대로 어느 정도 복원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면에서 환인의 한나라 시기, 환웅의 배달나라 시기, 단군의 고조선 시기는 설화만 전해졌을 뿐 유물이나 유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손으로 기록한 역사서들도 외세 침략을 겪으며 많이 사라졌습니다. 고구려 시대에 편찬된 ‘유기(留記)’ 같은 역사서는 고구려 멸망과 함께 유실되었고, 발해의 기록 역시 국가가 멸망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습니다. 신라는 역사적 정통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아 특별한 기록물이 없었고, 고려 시대에 일부 기록이 있었으나 조선이 사대의 예를 취하면서 자발적으로 금서로 만들었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기록들도 일제 침략 시기에 수거되어 현재는 소재를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 손으로 남긴 역사서가 거의 없다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유물도 별로 없고 기록물도 부족하니, 우리의 상고사는 없는 역사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근대 학문이 들어와서 우리 역사를 복원하는 일을 시작했는데, 첫 시도를 한 사람들이 조선 시대 실학자들입니다. 실학자들에 의해 발해사도 우리 역사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처음 제기되었습니다. 그런데 동학 혁명 이후 나라가 혼란스러워지고, 일제의 침략으로 인해 이런 논의가 진척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후 일본 제국주의 시기에 경성제국대학, 즉 서울대학교의 전신이 설립되면서 근대 학문이 형성됐습니다. 당시 유럽은 민족주의가 부활하던 시기로, 각 민족이 자기 나라 역사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실증주의 사학이 등장했는데, 주장을 하려면 반드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이 실증주의 사학은 일본에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이 서울대 역사학과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퍼졌습니다. 이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긍정적인 측면이 많은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식민사관이 보이지 않게 스며든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은 조선의 역사를 정상적으로 기록하는 것이 식민지 통치에 불리하니까 조선은 역사 발전이 늦었다거나 중국의 아류라는 식으로 몰고 가려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실증주의 사학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우리 손으로 쓴 역사책이 별로 남아 있지 않으니 학자들이 중국 역사서를 연구할 수밖에 없잖아요. 중국이 한나라 이전의 역사를 기록한 ‘사기(史記)’에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이 일부 남아 있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이나 ‘구당서’, ‘신당서’ 같은 사서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주변국의 역사로 일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국사책에도 임진왜란 이야기를 하면서 일본 이야기가 나오듯이 그런 식으로 중국의 주변 오랑캐의 풍속을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보고 우리가 ‘옛날에 이런 일이 있었구나.’ 하면서 우리의 역사를 재정립하기 시작한 겁니다. 문제는 우리의 역사가 우리 중심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 속에 조각조각 언급된 내용을 모아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국 문명의 변방 역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실증주의 사학으로 인해 나타난 부작용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국사 교과서나 학교 교육에서 배우는 역사가 중국의 변방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고의로 왜곡했다기보다는 실증주의 접근의 필연적 결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부분을 시정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우리의 역사가 중국보다 훨씬 더 앞섰다고 실증 없는 주장을 해도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실증주의 사학을 전면 부정하기보다는 우리 역사에 맞는 방식으로 보완해 나가야 합니다.
고구려 시대를 보면, 고구려 안에는 고구려 민족만 있었던 게 아니라 거란족도 있고 여진족도 있었습니다. 고조선 시기부터 내려오면서 이러한 몽골족, 거란족, 여진족 같은 민족들도 우리 민족의 일부였고, 발해 시대도 우리의 일부였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갈라져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를 세우기도 했지만, 그 뿌리는 공유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의 문명, 언어, 구전 자료, 유물 등을 다시 확인하고 수집해서 잃어버린 역사를 되찾는 방식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구전이라도 있고 유물이라도 있는 게 없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그런 구전이나 유물을 다른 연구로 보강해서 걸러낼 건 걸러내고, 실증이 가능한 건 취해서 재구성하는 게 필요합니다.
사실 이런 일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이에요. 중국은 국가적으로 서북공정, 동북공정 같은 사업을 통해 중국 문명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민족 정체성에 대한 작업을 너무 안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관이 뚜렷한 지도자가 없다는 게 문제이고, 둘째는 너무 실용주의에 치우쳐서 ‘그냥 잘 먹고 잘 살면 되지, 옛날 거 따져서 뭐 하나.’ 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이 문제입니다. 민족주의가 배타적이면 인류사에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만, 민족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도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정체성을 갖되 다른 민족이나 다른 정체성도 존중하는 다양성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문제의식을 지닌 젊은이들이 앞으로 정치 지도자가 되든, 역사학자가 되든, 50년, 100년 후에는 반드시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복원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역사 기행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의 요하 지역에서 여신상, 피라미드형 무덤, 신전, 성벽 같은 것들이 대량으로 발굴이 되었습니다. 이 유적들은 4천 년 내지 5천 년 전의 것으로, 고구려의 피라미드 무덤의 원형이고, 성벽도 고구려의 성벽과 비슷합니다. 고구려가 새로 창조했다기보다는 이 문명을 계승했다는 걸 알 수 있는 거죠. 이런 유물들을 보면, 중간에 많은 유실이 있었지만 문명이 계승되어 왔다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발로 밟을 수 있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고구려·발해 유적지를 직접 답사하면서 문명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결국 요하 문명을 얘기할 수 있게 됩니다.
요하 문명은 중국에서 발굴한 유물이지만 중국의 역사 기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환단고기나 삼국유사 같은 문헌에 이에 대한 역사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록들이 유물의 연대와 시기적으로 거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배달나라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환웅이 천부인을 가지고 3천 명과 함께 이주해 신시를 건국하고 배달나라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렇다면 이주하기 전에 원 문명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학계에서는 텐산산맥 근처라든지, 바이칼호 인근이라든지, 소아시아 지역이라든지, 이런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외몽골 자치구인 적봉시에서는 9천 년 전의 신석기 문명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유적을 공부하는 이유는 우리의 문명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축적되어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대만의 국립박물관에 가면 제일 먼저 삼황오제부터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그 이야기들이 배달나라 이야기보다 더 허황될 수도 있지만, 그들은 그것을 중국의 역사 서사로 설정하고 있다는 거예요. 반면 우리는 독립기념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봐도 상고사 관련 전시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요하 문명은 중국의 황하 문명과는 완전히 다른 문명입니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만리장성 밖은 자기 나라가 아니라 오랑캐 땅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그 지역에서 황하 문명보다 1000년 내지 2000년 앞선 유물들이 대량으로 발굴되자, 중국은 고민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최근에는 중화 문명의 뿌리를 황하 문명과 요하 문명, 두 축으로 설정해서 중국 문명을 재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네 것이냐, 내 것이냐’를 따지기보다는, 중국 땅에 유물이 있고 우리에게는 이야기가 있다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면 되는 거예요. 5000년 전 여신상이 유물로 출토되었는데, 중국 역사에는 여신 문화가 없어요. 웅녀 같은 여신 설화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다. 고구려 벽화에도 곰이 등장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신단수가 있고 신단수 밑에 작은 동굴이 있고, 그 안에 곰이 들어 있습니다. 밖에는 호랑이가 있고, 무사가 활로 호랑이를 쏘고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림의 내용이 단군 신화와 똑같죠. 그런데 그 그림이 5세기경 고구려 무덤 벽화라는 겁니다. 이런 점을 보면, 단군 이야기가 고려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옛날에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상고사도 조금만 더 연구하면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요하 문명과 황하 문명은 시작부터 다릅니다. 서로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갈등도 있었고 교류도 있었지만,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서로 다른 것처럼 우리 문명도 독자적인 시원을 가진 문명입니다. 동북 문명에서 우리 민족은 그 주류였으며 그 중심에는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라는 건국 이념이 있습니다. 선진 문명이 이 지역의 토착민을 침략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이 홍익인간이고, 하늘나라의 문화를 이 땅에 재현하겠다는 것이 재세이화입니다. 이러한 건국 이념은 종교를 뛰어넘어 아주 고귀한 뜻을 지닌 이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건국 이념을 바탕으로 한 상고사는 고구려와 발해가 그 정신을 계승하였고, 고려에 와서 그 역사 의식과 신라의 땅이라는 현실을 융합하여 다시 정통성을 회복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고사를 복원하고 역사적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은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는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강연은 밤 10시 20분이 되어 끝났습니다. 큰 박수로 동북아역사기행 첫날 일정을 마쳤습니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습니다.
내일은 동북아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해 고구려의 유적들을 집중적으로 찾아갑니다. 아침 일찍 주몽이 처음으로 고구려를 세웠다고 하는 홀본산성에 다녀온 후 오후에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과 환도산성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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