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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의 백일법문 95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경전 강의와 불교사회대학 강의가 열리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경전 강의를 하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3층 설법전에는 11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생방송으로 56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대중이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하자 스님이 법상에 올랐습니다.
오늘은 그동안 배운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총정리하면서 궁금했던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전에 서면으로 신청한 질문에 차례대로 답변한 후, 현장에서 손을 들어 질문한 분들에게도 답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반야심경에서 깨달음의 실체가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와의 관계가 힘들 때 영적인 관점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법을 배웠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도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는 ‘깨달음도 없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는 것은 무엇인가요?”
“반야심경은 깨달음이라는 개념에 집착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려고 설해진 법문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는 것을 그냥 ‘깨달음’이라고 이름 붙여 부를 뿐입니다. 그렇게 부를 뿐이지 ‘깨달음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정해진 바는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꿈을 꾸다가 눈을 뜨면 ‘내가 꿈에서 깼다.’라고 말하죠. 꿈속에서는 강도도 나오고 도와주는 사람도 나와요. 그러나 눈을 뜨고 나면 다 사라집니다. 그냥 꿈속에서 있었던 이야기일 뿐이에요. 이처럼 깨달음이라는 것도 어떤 실체가 있어서 ‘이것이 깨달음이다.’ 하고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자꾸 무언가를 지칭합니다. ‘내가 간다.’, ‘내가 믿는다.’ 이렇게 말은 하지만 그런 ‘나’가 실제로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때를 이름하여 ‘깨달음’이라고 부를 뿐이지, 실제로 ‘깨달음’이라는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몸뚱이는 분명히 있잖아요. 몸도 있고 생각도 있으면, ‘나’라는 것도 있는 게 아닌가요?”
“그러면 ‘나’라는 것이 있다고 할 때 그 ‘나’가 정확히 무엇인가요? 몸뚱이가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저도 몸뚱이가 없다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느낌도 있고, 생각도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나’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말하냐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단지 지칭하는 말일 뿐이지 구체적인 실체가 없다는 거예요.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를 질문자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만 질문자가 영혼이 있다고 믿는 것뿐이에요. 영혼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은 어느 한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죽은 뒤에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결국 모르는 거예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면 되는데, 아는 척을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으면 영혼이 사후 세계에 간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죽으면 천당에 간다.’, ‘죽으면 지옥에 간다.’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옥과 천당이 과연 있는지 아무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요. 다만 그렇게 믿고 그렇게 생각할 뿐이에요. 있는지 없는지 분명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단정하는 것도 맞지 않아요. 다만 그런 믿음과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나’라고 하는 것을 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놓기 어려우면 그대로 들고 계세요. 그런데 ‘나’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들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웃음) ‘나’가 안 놓아진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안 놓아지는 ‘나’라는 게 뭡니까? 잘 모르겠죠? 잘 모르면서 어떻게 들고 있나요? 제가 이렇게 질문하면 ‘모르지만 아무튼 뭔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사실은 잘 모르면서 그냥 ‘있다’고 단정하는 겁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그런 느낌이 들 수는 있습니다. 느낌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에요.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있다’ 혹은 ‘없다’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하니까 그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 거예요. 그런데 대개는 근거가 없어요. 근거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면, 이번에는 생각이 탁 바뀌어서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사실 ‘없다’고 말할 것도 없어요. 문제는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라고 생각할 때 괴로움이 생긴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내가 괴롭다.'라고 할 때, 과연 그 ‘나’란 무엇인가? 하고 묻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은 ‘모르겠다.’ 하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세 번만 물어보면 다 그렇게 되죠. 그런데도 사람들은 ‘모르긴 하지만 아무튼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문제입니다. 왜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질문자는 왜 ‘나’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니 제가 나아졌습니다.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고 제 행동이 많이 변했습니다. 그런데 ‘나’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앞으로 어떻게 공부해 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따로 더 공부할 게 없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믿는구나.’, ‘이 사람은 이렇게 믿는구나.’, ‘저 사람은 빨리 가네’, ‘이 사람은 늦게 가네.’ 이렇게 바라만 보면 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오셨네요.’ 하고,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술 많이 드셨네요.’ 하고, 성질을 내면 ‘화나셨네요.’ 하고, 이렇게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온갖 시비가 다 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실제로는 아무 일이 없는데 내가 상상해서 시비하고 문제를 만들어낼 뿐입니다. 불교가 말하는 핵심은 바로 ‘아무런 괴로울 일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꿈에서는 열심히 도망가야 할 것 같지만, 눈을 탁 뜨면 애초에 도망갈 일 자체가 없어지는 법입니다.”
질문에 답변을 마치고, 다음 시간에도 현장에서 손을 들고 질문을 받기로 하고 강의를 마쳤습니다.
참가자들은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를 하고, 스님은 지하 공양간으로 이동하여 대중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후에는 사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저녁에 있을 불교사회대학 강의 준비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불교사회대학 21강 강의를 했습니다. 현장에는 170여 명이 자리하고, 온라인 수업에는 1900여 명이 접속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아시아의 종교 간 갈등과 대화’를 주제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불교의 역할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실천 불교 수행론’을 주제로 강의를 이어 갔습니다.
“오늘은 수행자가 사회 변화를 위해 실천 활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좋은 곡식을 풍성하게 수확하려면, 우선 씨앗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동시에 씨앗이 자라날 밭의 상태도 중요합니다. 씨앗만 좋아서는 안 되고 밭만 좋아서도 안 됩니다. 결국 수확은 씨앗과 밭이 함께 어우러져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적용해 보면, 각 개인은 씨앗에 해당하고, 그 개인이 태어나 성장하고 활동하는 가정이나 지역 사회는 밭에 해당합니다. 만약 씨앗인 개인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밭인 환경이 양호하다면 그 사람은 비교적 괜찮은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반면 아무리 좋은 자질을 지닌 개인이라 하더라도, 자란 환경이 나쁘다면 삶은 고단해지고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더 나아가 개인도 형편없고 환경도 나쁘다면 결과는 더욱 좋지 않겠죠. 반대로 개인의 자질이 뛰어나고 집안 환경까지 뒷받침이 된다면 결과는 그만큼 더 좋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 입장에서는 사회를 마음대로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개인이 자기를 변화시키는 일은 비교적 쉬운 편입니다. 스스로 결정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종종 자기 변화를 사회 변화보다 더 어렵게 여깁니다.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자기 변화는 본인에게 결정권이 있지만, 사회 변화는 많은 사람의 뜻이 모여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변화시키고 주어진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 곧 ‘수행’입니다. 나아가 그 환경까지 정의롭고 평화롭게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바로 ‘사회 실천’이고 ‘정토 구현’입니다. 수행자는 이 두 가지를 함께 실천해야 하며, 이것을 행하는 사람이 곧 ‘대승 수행자’입니다. 좁은 의미의 수행은 한 개인이 자신의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의 수행은 개인과 사회 변화를 위한 실천을 동시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승적 관점은 개인 수행이 먼저이고 그 결과를 가지고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방식입니다. 반면 대승적 관점에서는 개인의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동시에 행하는 것을 보살행으로 여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남녀 차별이든 계급 차별이든 인종 차별이든 어떤 차별이 있더라도 자신이 태어난 현실 속에서 먼저 적응하고 살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주어진 조건이 불리하다고 해서 불행에 머무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어떤 환경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누리면서 동시에 성차별, 계급 차별, 인종 차별을 개선하는 사회 활동에 함께 나선다면, 그것이 곧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사회를 원망하거나 불평만 하기보다는, 수행을 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에 동참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재능과 능력도 사회 속에서 의미 있게 쓰이게 됩니다.
보다 적극적인 대승 수행은 사회 변화를 추구하는 그 자체를 수행의 과제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훨씬 더 적극적인 보살행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소승 불교에서는 먼저 자신을 수행으로 정비한 뒤, 그 결과로 타인의 고통을 덜어 주며 세상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이것을 ‘베푼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대승 불교는 세상 사람들의 고통을 해결하는 일을 자신이 성불하기 위한 수행 과제로 삼습니다. 즉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는 활동이 곧 수행이며, 이것이 수행자의 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소승 불교 수행자는 더러운 세상에 물들지 않기 위해 세상을 떠나 있습니다. 세상에 있으면 자꾸 물들기 때문에 세상을 떠나서 자기 정비를 먼저 한 다음에 다시 세상에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준비한 후에야 세상과 마주하는 것이죠. 그러나 대승 불교는 다릅니다. 대승 수행자는 세상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을 정화하는 일을 수행 과제로 삼습니다. 사회 문제를 자신의 수행 과제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이것이 소승 수행과 대승 수행의 차이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개인이 겪는 문제를 온전히 그 사람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사회 제도나 구조 같은 더 근본적인 문제들은 자꾸 외면하게 됩니다. 반대로 모든 문제를 사회 탓으로만 돌리게 되면, 개인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하려는 노력에는 소홀해지기 쉽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많은 NGO 단체가 사회 변화를 강조하면서 정작 자기 변화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습니다. 반대로 종교인이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변화만 중요시하고 사회 문제에는 무관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들이 정반대로 보이지만 사실 한쪽에만 치우쳐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합니다.
모든 문제를 자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결국 세상을 외면하게 되고, 또 모든 책임을 사회로 돌린다면 자기 변화에는 소홀해집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이 두 가지를 분리해서 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은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진 실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자유롭고 행복한 방향으로 적응해 나가야 하며, 동시에 누구나 차별 없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도 힘써야 합니다. 정토회는 개인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함께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만약 개인 수행만 하고 사회 활동에는 관심이 없다면, 일반 절이나 명상 센터를 찾아가는 것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사회 문제 해결에만 관심을 두고 수행을 소홀히 여긴다면 NGO 단체에서 활동하는 편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정토회가 애초에 이 두 과제를 함께 실천하겠다는 목적 아래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스님이 사회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면 가끔, ‘스님, 수행에 관한 법문만 해 주세요. 자꾸 그런 이야기하시면 정토회 그만둘래요.’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제가 ‘그럼 나가세요.’라고 하지는 않지만, 정토회의 방향과 맞지 않는다면 떠나는 것이 오히려 옳은 선택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정토회는 창립할 때부터 ‘일과 수행의 통일’을 중요한 원칙으로 삼고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를 접하다 보면 마음속에 분노가 일기도 합니다. 그런 분노가 생기면 우리는 사회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분노는 강력한 사회 변화의 원동력이 됩니다. 분노하면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혁명의 동력은 대부분 분노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았을 때의 문제는 그 혁명이 대개 ‘폭동’으로 끝난다는 점입니다. 분노가 깊을수록 폭력적으로 대응하기 쉽고, 문제를 지혜롭고 지속적으로 해결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원동력으로 삼으면 분풀이에는 성공할 수 있어도, 분노의 근원인 본질적인 사회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분노로 시작한 사회 변화 운동은 대부분 폭동으로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실제로 사회 문제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면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야 합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폭력적인 대응은 지양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문제 제기를 해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만약 내가 화가 나서 어떤 문제에 대응했는데 그게 성공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내 기분은 좋겠죠. 하지만 의견 대립이 첨예한 문제에서 한쪽이 성공하면 다른 쪽을 반드시 응징하게 됩니다. 이것은 피의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복수를 상당히 정당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에도 한국 사회를 이끌어 가는 정치인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척결’, ‘청산’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이런 말들은 모두 어느 정도 복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물론 혁명을 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주변 정리가 필요합니다만, 보복의 악순환을 초래하지 않으려면 분노나 복수심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어떤 문제에 대응했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요? 엄청난 패배감과 함께 역으로 복수를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외면하는 것도 부작용이 있습니다. 분노하는 마음은 크지만 힘이 부족해서 질 것 같아 문제를 외면해 버리면 스스로 비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괴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그럴 수도 있다.’ 하고 이해하여 화를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되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심지어 외면하는 상황에서도 발전적으로 바꿔 나갈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분노가 없다면 혁명에 성공했을 때도 상대를 포용할 수 있습니다. 실패하더라도 패배감에 빠지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다음에 성공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며 다시 도전하게 됩니다.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면 외면하기보다는 지켜보는 힘이 생깁니다. 지금은 적절한 때가 아니거나 자신의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되면,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비겁함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화가 나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곧 수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어떤 현상에 모순이 있다면 분노 없이 차분하고 지속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방식으로 변화를 도모할 수 있고, 성공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화가 나서 눈에 뵈는 거 없이 덤벼드는 게 아니라 지혜롭게 대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공한 뒤에도 상대방을 응징하지 않고 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마음속에 분노가 없다면 자폭하지 않고 그 원인을 연구해서 다음에 다시 도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때 ‘내 선택만 옳다.’ 하고 일방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나와 다른 선택을 한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판단과 이유가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곧 상대방이 틀렸다는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선택을 옳고 그름의 문제로만 본다면 갈등이 생기기 쉽습니다. ‘나는 이렇게 선택했고, 저 사람은 저렇게 선택했구나.’ 하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남한이라면 북한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북한에 동조하자는 말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을 이해해야 대응도 가능하다는 말이에요. 손자병법에도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한다.’ 하는 말이 있잖아요. 상대의 입장을 알아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면 반대하는 입장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위에서 찬성 입장을 관철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대응이며 분노 없이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길입니다.
정의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고 헌신적인 태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장점과 함께 자신만이 옳다는 확신도 매우 강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의 이중적인 시각을 갖기 쉽습니다. 사법부의 판결이 내려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이면 ‘사법부가 살아 있다!’라고 외치고, 불리한 판결이면 곧바로 ‘사법부는 죽었다!’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근거를 찾기 위해 판결을 내린 법관의 성향을 문제 삼고, 상대편에 동조하는 세력으로 몰아붙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항상 ‘내가 옳다!’ 하는 생각에서 모든 갈등이 발생합니다. 내 생각만 옳다고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공동체는 점점 분열의 길로 빠지게 됩니다.
공정한 시합에는 모두가 따라야 할 공통의 규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로남불’의 태도가 만연하면 기본 전제 자체가 무너지기 쉽습니다. 자신이 규칙을 어기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합리화하면서, 정작 타인이 같은 행동을 하면 곧바로 비난부터 합니다. 마치 경기 규칙을 어긴 선수가 자신은 벌점을 받지 않겠다고 우기면서 상대방에게만 규칙을 지키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아요.
우리 사회에는 환경 파괴를 막는 운동에 열심히 참여하면서 일상에서는 환경 실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환경에 해가 될 만한 사안에는 거세게 반대하면서도, 정작 자기 집에서 사용하는 전기나 생활용품 소비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겁니다. 예전에 정부가 한 지역에 댐 건설을 추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환경 단체들의 반대로 무산되었어요. 그때 저는 환경 운동가들에게 ‘이겼다고 축배 들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댐 건설을 추진한 공무원들도 지역 발전과 물 부족 문제를 고려해서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지, 그들의 의도가 나쁘다고만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댐 건설이 철회되었을 때는 ‘중단해 주어서 고맙습니다. 대신 우리가 물과 전기를 아끼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태도여야 비로소 지속적인 상호 협력이 가능해집니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물과 전기를 절약함으로써 댐 없이도 충분히 물과 전기 수요를 감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천으로 보여 주는 것이야말로 상호 공존하는 운동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은 분명 개발을 통해 이루어진 부분이 있습니다. 만약 환경론자 입장에서 ‘나는 원시적으로 자연인처럼 살겠다.’라고 한다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그런 입장이라면 개발 자체를 모두 부정해도 무방해요. 그러나 개발이 가져다 주는 편리를 누리면서 동시에 모든 개발을 반대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경부 고속 도로를 타고 다니면서 ‘이 고속 도로는 잘못 만들었다.’라고 비판하는 건 모순입니다. 물론 이용하면서도 ‘이게 없었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라고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느낀다면 그 역시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죠.
마찬가지로 원자력 발전소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습니다. 방사능 위험이라는 폐해는 분명 존재하지만, 기후 위기 시대에는 이산화탄소 배출이 없다는 점에서 화석 연료보다 나은 면도 있습니다. 이런 두 가지 면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무조건 나쁘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 시각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을 지적하려면 전기를 절약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내가 전기를 쓰지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한다면 설득력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전기를 많이 소비하면서 발전에 반대하는 건 이율배반적입니다.
요즘처럼 인공 지능 산업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많은 수의 데이터 센터 건설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 분야는 막대한 전력을 소모할 수밖에 없습니다. 용인이나 평택에 이런 공장을 세우려면, 화력 발전소를 짓든 원자력 발전을 도입하든 해야 합니다. 하지만 화력은 이산화탄소 배출로, 원자력은 방사능 위험으로 각각 또 반대에 부딪힙니다. 또, 경제가 발전해야 한다고 하면서 결국 우리 집 근처에는 짓지 말고 멀리 지으라고 요구하는 식입니다. 이런 태도는 균형 잡힌 자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대승 불교에서는 수행자를 ‘보디사트바’라고 합니다. 여기서 ‘보디(Bodhi)’는 ‘깨달음’을, ‘사트바(sattva)’는 ‘어리석음’을 말합니다. 즉, 보디사트바는 깨달음과 어리석음이 결합된 존재입니다. 보디는 깨달음이므로 곧 부처를 뜻하고, 사트바는 어리석음이므로 중생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보디사트바는 부처와 중생의 중간 지점에 자리한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보디사트바란 부처가 있는 한 그 빛이 중생에게 비추어진다는 것이고, 중생이 있는 한 그 어리석음의 그림자가 부처에게도 드리워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부처가 있는 한 우리 모두 부처가 될 성품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중생이 있는 한 우리 안에는 여전히 어리석음도 함께 존재합니다.
우리는 중생에서 출발해 부처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중생에서 출발하여 왼편에 있는 부처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대승 불교의 보살 사상에 따르면 아무리 깨달음의 방향으로 나아가더라도 완전히 부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이 있는 한 그 어리석음의 그림자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표는 보디, 즉 부처입니다. 하지만 보디를 실현하기 위한 수행의 방향은 역설적으로 사트바, 곧 중생을 향해야 합니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오히려 중생이 있는 곳으로, 즉 어리석음이 있는 자리로 가서 어리석음을 없애야 한다는 말이에요. 그 어리석음이 사라질 때 우리는 곧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최종 목적지는 부처이고, 그 길을 실천해 나가는 행위는 중생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 불교의 보살 사상입니다.
대승 불교의 보살 사상에 근거해서 지장보살이 지옥으로 수행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지옥에 중생이 있는 한 나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 하는 것이 지장보살의 서원입니다. 하지만 대승 불교 사상의 입장에서 이 말은 ‘지옥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고통받는 중생이 있는 한은 누구도 부처가 될 수가 없다.’ 하는 말과 같습니다. 즉, 지옥을 없애야 내가 부처가 된다는 원리입니다. 법장비구(法藏比丘) 또한 고통 없는 세계를 만들기 위해 원을 세우고 그 세계가 이루어질 때까지 정진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가 극락세계이고, 법장비구는 결국 아미타 부처가 되었습니다.
대승 불교의 보살 사상은 성불을 향한 수행과 정토 구현을 위한 사회적 실천을 반반씩 나누거나, 하나를 먼저 하고 다른 하나는 나중에 하자는 식의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내가 다 짊어지겠다는 마음을 낼 때, 그 순간 내가 바로 부처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선남자 선녀인은 마땅히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라는 수보리의 질문에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마음을 내라.’ 하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렇다면 보살에게 있어서 정토란 무엇일까요? 수행자인 보살에게 정토란 이미 완성된 세계가 아닙니다. 완성을 향해 보살이 활동하는 세계입니다. 그러면 저에게 있어서 통일 조국은 통일된 조국을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통일 조국을 향해 활동하고 있는 상태일까요? 저는 이미 통일 조국에 살고 있습니다. 옆에 있는 구경꾼이 볼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통일이 안 되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는 이미 통일 조국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심정토(唯心淨土)’입니다. 정토 세계를 이루기 위해 보살이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유심정토를 이루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무언가를 하다가 잘 안되면 실패라고 규정합니다. 그러나 수행자에게는 실패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수행자는 늘 다만 할 뿐입니다.”
이어서 수업 시간 중 궁금했던 내용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두 사람의 질문을 받은 후 다음 시간에는 ‘사회적 트라우마에 대처하는 불교의 지혜’를 주제로 강의하기로 하고 밤 9시가 넘어서 수업을 마쳤습니다.
내일은 백일법문 96일째 날입니다. 오전에는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주간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오후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과 미팅을 한 후, 저녁에는 저녁반 금요 즉문즉설 강연을 하고 두북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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