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02.02. 모리야 후손 공동체 초청 법회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바라나시 가지푸르에서 모리야 후손 공동체(Maurya Community) 주관으로 열린 로티야 마호차브 축제(Lotiya Mahotsaw)에서 법문을 했습니다.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새벽 3시 30분에 바라나시로 출발했습니다. 며칠 전 축제 관계자가 스님을 모시기 위해 보드가야에 와 있었습니다. 스님은 바라나시로 가는 길에 보드가야에 들러 그 관계자를 만나 함께 이동했습니다.

바라나시 가지푸르에 도착하니, 황량한 둥게스와리와는 달리 강가강이 흐르고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밭에는 밀과 유채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오전 9시에 행사장에 도착하니, 관계자들이 스님을 정성스럽게 맞이했습니다. 이들은 자주색 옷을 입고, 아쇼카 석주에 새겨진 법륜 문양이 있는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관계자들은 스님을 대기실로 안내했습니다. 잠시 후 행사를 총괄하는 회장, 사무국장, 지역처장 등이 찾아와 스님에게 인사를 드렸습니다.

“스님, 저희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님을 모실 수 있어 정말 행복합니다. 먼 길 오시느라 힘드시진 않으셨나요?”

“마침 내일까지 인도 일정이었습니다.(웃음) 그런데 아쇼카 석주가 왜 이곳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대부분 아쇼카 석주는 부처님 유적지에 세워져 있고, 글자가 새겨져 있어 학자들이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푸르의 아쇼카 석주는 글자가 없는 몇 안 되는 석주 중 하나입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는데, 후대에 중국의 현장 법사가 남긴 기록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드시기 전 보드가야에서 사르나트나 쉬라바스티를 자주 오가셨고, 그 중간 지점인 가지푸르에 머물며 마을 사람들을 교화하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보드가야에서 쉬라바스티로 가실 때, 무갈사라이가 아니라 가지푸르에서 강가강을 건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네, 맞습니다. 실제로 가지푸르에서 멀지 않은 ‘소하이푸르 빗뜨리’라는 마을에도 아쇼카 석주가 하나 있습니다.”

행사 관계자는 자신들이 사무랏 아쇼카 클럽에서 활동하며, 아쇼카 대왕의 업적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스님이 질문했습니다.

“인도 사람인데도 아쇼카 대왕을 모르는 경우가 있나요?”

“네, 특히 시골에 계신 분들은 잘 모르십니다. 심지어 모리야 성(姓)을 가지고 있는 후손들도 아쇼카 대왕이 누구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군요. 석가족 성을 가진 사람들도 부처님을 모르는 경우가 있죠.”

행사 관계자들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스님, 저희는 불교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고 싶습니다. 혹시 한국과 관련된 인도 불교의 역사를 알고 계십니까?”

“한국 기록에 따르면, 인도와 교류는 약 2,000년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한 스님이 배를 타고 한국으로 건너가 불교를 전했고, 한 공주도 함께 가서 한국인과 결혼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공주는 아마도 크샤트리아(왕족) 출신인 것 같습니다. 불교가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 한국으로 전래되었는지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요다’라는 이름 때문에 아요디아에서 왔다는 설이고, 또 하나는 해상 교통로를 고려했을 때 타밀 지역에서 전래되었을 가능성입니다.

4-5세기에는 육로를 통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중국을 지나 한국으로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당시 한국은 네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는데, 각 나라에 불교가 전해졌고, 7세기 후반 한국이 통일된 후 불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8-9세기 경에는 인도 날란다로 유학을 떠난 한국 승려들이 있었으며, 그중 혜초스님의 여행 기록이 남아 세계적으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 이후로 한국과 인도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었습니다. 교류가 없었던 것인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별다른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근대에 접어들어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두 나라의 교류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한국은 미국과 소련의 군정 아래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당시 인도 정부는 남북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지키며, 전투 병력이 아닌 의료 부대를 한국에 파견해 주었습니다.

인도는 남한과 북한 모두와 외교 관계를 맺었으며, 1973년 한국과 공식적으로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올해로 52년째 외교 관계를 이어오고 있으며, 현재 경제·문화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불교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인도에 대해 부처님의 나라라는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가 다시 인도에서 부흥할 가능성도 있을까요?”

“불교가 형식적으로는 인도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상과 가르침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2500년 전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도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로 퍼졌고, 전설에 따르면 2500년이 지난 후 다시 인도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 시작입니다.”(웃음)

지금 인도 경제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에는 인도가 경제 규모 면에서 세계 3대 경제대국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장에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째, 환경 파괴가 심각해질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인도 전역에서 환경 보호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야 합니다. 둘째, 경제가 발전하면 사람들의 물질적 욕망이 커지고, 정신적으로 빈곤해질 가능성이 큽니다. 이에 따라 정신적 평화를 가져오는 수행법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신앙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이해하고,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단순히 믿는 것만 따지면 불교나 힌두교 사이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연기법, 중도, 사성제, 팔정도와 같은 가르침은 불교에만 있으며, 이는 과학적으로도 증명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따라서 불교는 신앙이 아니라 실천하는 가르침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불교는 다시 부흥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희망을 갖고 활동한다면, 불교는 반드시 인도에서 새롭게 시작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이제 공양을 하시고 행사장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공양 장소로 이동하려던 중, 스님을 친견하고 싶다며 몇몇 분이 대기실로 찾아왔습니다. 스님은 한 분 한 분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며 말을 꺼냈습니다.

“안녕하세요, 법륜스님을 직접 뵙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저는 인도에서 치과의사로 활동하는 불자입니다. 평소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런 분이 인도에 필요하다. 이 분이 전법을 하신다면, 인도에 다시 불교가 부흥하지 않을 수 없겠다.’

스님의 법문은 불교를 종교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불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인도에서 탄생하셨고,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외국의 스님들께서 인도에 와서 다시 불법을 전해 주고 계십니다. 이 현실을 저희 인도 사람들이 깊이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함께 좋은 일을 만들어 가봅시다.”

이후 스님은 행사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식사 장소로 이동하여 공양을 마친 후, 법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법회 장소에는 약 1만 명이 모여 있었고, 무대 밖까지 포함하면 5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해 있었습니다. 가지푸르의 작은 마을이 사람들로 가득 차 행사장까지 가는 길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스태프들의 안내를 받아 행사장으로 이동했습니다. 행사장에는 570년 전 가지푸르에서 발견된 아쇼카 석주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석주의 발견이 계기가 되어 아쇼카 대왕의 후손인 모리야 계급의 사람들이 사무랏 아쇼카 클럽을 결성하고, 이들은 자신들의 뿌리인 아쇼카 대왕을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초청 법사로 참석하여 의식을 주관한 후, 아쇼카 대왕 석주에 참배하고 국기 게양대 앞으로 이동했습니다.


국기 게양대에는 인도 국기, 그리고 자주색의 아쇼카 클럽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스님은 내빈들과 국제불교 기를 게양했습니다.


이어서 사무랏 아쇼카 클럽의 활동이 담긴 사진 전시물을 관람했습니다.


무대로 가서 부처님께 초와 꽃을 올리고, 아쇼카 클럽에서 스님에게 선물을 올렸습니다.



이어서 법회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아쇼카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대법회에 많은 분이 참석해서 성대하게 열린 점에 대해 주최 측인 사무랏 아쇼카클럽 관계자들께 축하드리고,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따르고, 아쇼카 대왕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오늘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부처님의 법과 아쇼카 대왕의 전법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부처님의 법이 있었기에 아쇼카 대왕이 부처님의 법을 널리 전할 수 있었습니다. 또 부처님의 법이 있었음에도 아쇼카 대왕이 불법을 널리 전하지 않았더라면 오늘날 불교가 전 세계에 퍼져나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과 아쇼카 대왕의 전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입니다. 오늘의 대법회는 모리야(Maurya) 커뮤니티가 주관하여 종교를 초월해서 아쇼카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이면서 동시에 부처님의 법을 인도에 새롭게 전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만약 아쇼카 대왕이 전 세계로 법을 전하지 않았다면

저는 한국에서 온 불교 승려입니다. 한국은 인도에서 동쪽으로 아주 먼 곳에 있습니다. 옛날에 한국 승려들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이곳까지 오려면 걸어서 1년이나 걸렸다고 합니다. 배를 타고 와도 족히 6개월이 걸렸다고 하니 한국과 인도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먼 한국에서 태어난 제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이 과연 어떤 인연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가 부처님의 법을 만나지 못하고 불교인이 되지 않았더라면 제가 이곳에 올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아쇼카 대왕이 인도를 넘어 전 세계로 부처님의 법을 전하지 않았다면 한국에 불교가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저 또한 부처님의 법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은 부처님과 아쇼카 대왕의 공덕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에 대해서는 저보다 여러분들이 더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은 인도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며 정치가였습니다. 인도 대륙의 수많은 나라와 다양한 민족을 하나로 통합한 첫 번째 왕입니다. 물론 아쇼카 대왕 혼자서 이루어낸 것은 아닙니다. 찬드라굽타 1대 왕과 2대 부왕인 빈두라사의 뒤를 이어서 인도 대륙을 통일한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이 처음부터 훌륭한 왕은 아니었습니다. 성질이 사나워서 많은 사람을 죽이는 잔혹한 면도 있었다고 합니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 자신의 이복동생을 99명이나 죽이고 왕이 되었고, 칼링가 왕국과의 전쟁에서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죽어서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아쇼카 대왕은 부처님의 법을 만난 이후에 자신의 잔혹한 면을 버리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쇼카 대왕은 자신의 과거를 깊이 참회하고 자신뿐만 아니라 마우리아 왕국 전체에 살생을 금지했다고 합니다. 나아가 살생을 금지하는 소극적인 행동을 넘어서 어려움에 처한 많은 사람을 도왔습니다. 길을 닦아서 사람이 다니기 쉽게 하고, 곳곳에 우물을 파서 식수를 제공하고, 나무를 심어서 나그네가 그늘에서 쉴 수 있게 했습니다. 아픈 사람을 치료하고, 부모가 없는 고아를 돌봐주고, 자식이 없는 노인들을 보살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양식이 부족할 때 곡식을 빌려주고, 이듬해에 농사를 지어서 갚도록 했습니다. 법을 제정해서 나라를 더 이상 힘으로 다스리지 않고 법으로 평등하게 세상을 다스렸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복지제도를 이미 2,300여 년 전에 처음으로 시행했던 왕입니다. 인도 전 역사를 통해서 최고의 성군입니다. 그래서 서양인들도 자기들보다 훨씬 더 앞서서 복지제도를 시행한 아쇼카 대왕의 혜안에 깊이 감동했다고 합니다.

본래 착한 사람이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착하게 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악한 사람이 부처님의 법을 만나서 선하게 사는 것은 부처님의 법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든 부처님의 법을 만나면 아쇼카 대왕처럼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은 자신을 변하게 해 준 부처님을 존경하고, 법에 귀의해서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순례했습니다. ‘여기서 부처님이 태어나셨다’, ‘여기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으셨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설법하셨다’, ‘여기서 부처님께서 원숭이에게 꿀을 공양받으셨다’ 하고 부처님의 발자취마다 찾아가서 확인하고 그 자리에 기념탑을 세우고 아쇼카 석주를 세웠습니다. 아쇼카 대왕이 세운 기념탑과 석주가 있었기 때문에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우리가 부처님의 행적을 다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을 발견한 영국의 커닝햄 등의 학자들의 노력도 있었고, 중국의 구법승들의 인도 기행문도 부처님의 행적을 복원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으로 큰 도움이 된 것은 아쇼카 석주와 석주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아쇼카 대왕은 살아생전에 부처님의 법을 널리 전파하고, 아쇼카 석주를 남겨서 지금 우리가 부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알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쇼카 대왕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1만여 명의 대중이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다시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부처님의 시신을 화장해서 나온 사리를 여덟 몫으로 나누어 여덟 개의 탑을 쌓았습니다. 카필라바스투의 석가족이 사리 일부를 가져가서 탑을 쌓고, 데바다하의 꼴리족도 사리 일부를 가져가서 탑을 쌓고, 바이샬리의 리차비 족도 사리탑을 쌓았습니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 왕도 사리탑을 쌓았습니다. 이렇게 총 여덟 개의 탑을 쌓았습니다. 아쇼카 대왕은 그중의 일곱 개의 탑을 헐어서 사리 일부를 꺼내 부처님의 발자취마다 탑을 쌓아 그곳에 사리를 넣었습니다. 즉, 부처님의 활동 지역이던 북인도에만 있던 부처님 사리를 전 인도 지역에 부처님 사리를 넣은 사리탑과 석주를 세워서 불교가 전 인도로 전파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처님의 법을 만날 수 있게 된 이유

또한 아쇼카 대왕은 동쪽으로는 미얀마, 남쪽으로는 스리랑카, 서쪽으로는 유럽까지 세계 곳곳으로 전법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불교가 전 세계로 전파되게 된 것입니다. 아쇼카 대왕과 전법사들의 노력 덕분에 멀리 한국에 있던 저도 불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3세기 이후 인도에서는 오히려 불교가 쇠락했습니다. 석가족은 자신들의 조상이 부처님인 줄을 모르고, 모리아족은 자신들의 조상이 아쇼카왕인 줄도 모를 정도로 쇠락했습니다. 지금은 학교 교육을 통해서 부처님과 아쇼카 대왕에 대해 알게 되어, 모리아족은 ‘우리 조상이 아쇼카왕이구나’, 석가족은 ‘우리 조상이 부처님이구나’ 하는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출발해서 전 세계로 전파되었다가, 500년이 다섯 번 지난 후에 다시 인도로 돌아와 인도의 불교가 부흥하게 된다.’

지금이 바로 부처님이 열반하신 지 2500년이 조금 지난 때입니다. 이제 서서히 인도의 불교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아쇼카 대왕의 뜻을 기리는 모리아족, 부처님의 친족인 석가족, 꼴리족 등이 불교를 새롭게 불러일으키는데 좀 더 앞장섰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오늘 아쇼카 석주 아래에서 이 행사를 하는 목적입니다. 그러니 이 일을 시작한 모리야(Maurya) 커뮤니티 지도자들에게 큰 감사와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아쇼카 대왕의 평화 정신과 복지 정신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최근 들어 인도의 경제가 점점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안정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어 이미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의 경제력을 넘어섰습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면 세계 3대 경제대국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인도는 이제 옛날 식민 지배를 받던 약하고 가난한 나라가 아닙니다. 머지않아 인도는 강국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인도가 경제력이나 군사력과 같은 힘만으로 강국이 된다면, 세계는 더 시끄러워질 것입니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지속된다면 세계는 다시 세계대전으로 치닫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런 시대에 인도는 아쇼카 대왕에 의해 전해진 부처님의 법으로써 평화를 지키는 나라가 되기를 바랍니다. 인도는 경제력을 성장시켜 나가는 것도 좋지만, 아쇼카 대왕의 평화 정신과 복지 정신을 어떻게 인류사회에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해야 합니다.

경제가 성장하면 먹고 입고 생활하는데 편리한 점이 있지만, 지구 전체를 생각하면 기후위기라는 큰 우려가 따릅니다. 최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산불이 나서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이처럼 세계는 기후변화로 인해서 큰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기후 위기는 많이 생산해서 많이 소비하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잘못된 가치관에 의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경제가 좋아질수록 각별히 지구환경을 보존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에너지를 지나치게 많이 써서도 안 되고,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도 안 됩니다. 앞으로 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지 말고, 자기 쓰레기는 집으로 가져가서 분리수거해야 합니다. 돈만 많다고 훌륭한 것이 아니라, 질서를 지키고 지구환경을 아끼는 행위를 해야 세계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환경문제만큼이나 커다란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사람들이 먹고살 만하다 싶으면 목에 힘이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인간성이 나빠지면서 이웃끼리 싸우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형제간이든 부부간이든 싸우는 일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부모의 유산 문제로 형제간에 다툼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성은 점점 나빠지고 괴로움은 커집니다. 이런 우리의 괴로운 마음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요? 부부, 형제, 이웃 간의 갈등을 단지 신을 믿고 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욕심을 버려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성질대로 하려는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주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우리의 괴로움은 탐진치(貪瞋癡) 삼독(三毒)으로부터 생겨납니다. 탐진치 삼독을 버릴 때 우리는 마음에 평화를 얻고, 사람과의 관계도 평화로워집니다.

유럽이나 미국에 가보면 교회에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한국에도 종교를 믿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를 믿는다고 해서 마음의 평화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가장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는 것이 바로 붓다 담마(Buddha Dhamma)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공부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명상하는 사람의 수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부처님의 법이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널리 퍼져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려면 불교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붓다 담마를 공부해야 합니다. 부처님의 법은 오늘날 과학적으로 살펴봐도 모순이 없고 아주 분명합니다. 여러분들도 앞으로 붓다 담마를 공부해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 가장 큰 나라였던 마가다국의 국왕인 빔비사라 왕은 부처님을 만나서 깨달음을 얻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왕자였을 때 다섯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왕이 되는 것이고, 둘째는 부처님이 이 나라에 출현하는 것이고, 셋째는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고, 넷째는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 다섯째는 법문을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이해했기 때문에 저의 이 다섯 가지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해한다고 해서 내가 다 실천할 수는 없기에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연습을 여러 번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덧없다. 부지런히 정진해라,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우리도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이 꾸준히 정진해야 합니다. 첫째, 부처님의 법을 이해하고, 둘째, 부처님의 법을 체험해서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법을 널리 전파해야 합니다. 제가 왜 멀리 이곳까지 왔겠습니까? 바로 부처님의 법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도에 와서 절 대신 학교와 병원을 지은 이유

제가 처음 인도에 왔을 때 일입니다. 보드가야에 있는 마하보디 스투파(Mahabodhi stūpa)를 참배했는데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염주를 파는 사람을 만났는데,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힌두교라고 해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곳에서 당신은 왜 불교를 믿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불교와 힌두교의 차이점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부처님의 가르침은 지혜와 자비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자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자비는 어려운 사람을 돕고 함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많은 불교인들이 보드가야에 오지만 저는 그들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식대로 탑에 절하고 갈 뿐, 인도의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을 돕지 않았어요. 그들도 그들의 종교를 믿듯이 저도 제 종교를 믿고, 그들이 필요해서 여기 오듯이 저도 필요해서 장사만 하면 되지, 제가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어야 합니까?’

제가 생각해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불교를 믿으라고 말하기보다는 이 사람들이 불교를 이해하고 경험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한국 절을 짓는 대신에 달리트(Dalit, 불가촉천민) 계층 마을에 가서 학교와 병원을 지었습니다. 또 마을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15개의 마을에 유치원생이 1000명, 초등학생이 500명, 중학생이 200명이 넘습니다. 모든 학생들에게 옷, 책,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요. 저는 그들에게 불교를 믿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종교는 그들이 선택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30년이 지나니 이제 사람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부처님이 이곳에서 6년간 고행하셨다는데 우리에게도 설명을 좀 해주세요.’

‘우리 학교에서도 불교를 배울 수 있게 해 주세요.’

‘우리에게도 명상을 좀 가르쳐주세요.’

그들 스스로 불교에 대해 궁금해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불교를 믿으면 도와준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과 똑같은 공덕이 있는 일이 네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주는 것, 둘째,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것, 셋째, 가난한 사람을 돕고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것,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사람을 외호(外護)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계시지 않을 때도 이와 같은 일을 한다면 바로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전법이란 붓다 담마를 이해하고 실천해서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돈이 생기면 절을 짓기 바쁜데 정토회는 절을 짓지 않습니다. 절을 짓는 대신에 가난한 사람들과 아이들을 돕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불사입니다. 붓다 담마를 이해하고 실천해서 자기가 변화해야 합니다. 아쇼카 대왕이 변했듯이, 앙굴리말라가 변했듯이, 여러분도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보고 감동을 합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담마를 전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부처님의 법을 쉽게 설명하니까 유튜브로 제 영상을 본 사람이 아주 많아졌습니다. 유튜브를 구독하는 사람들이 100만 명이 넘습니다. 한국에서 절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들이 많은데, 제가 하는 강의는 젊은 사람들도 많이 듣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붓다 담마야말로 사람들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붓다 담마를 배우고, 전파해서, 인도에 불교가 새롭게 일어나도록 한번 해봅시다. 아쇼카 대왕이 불법(佛法)을 널리 전했듯이, 모리야(Maurya) 커뮤니티가 중심이 되어 인도에 불교를 새롭게 일으키는 데 여기 있는 여러분들이 앞장서겠습니까?”

“네, 저희가 앞장서겠습니다.”

“우리는 한국과 인도라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지만, 붓다 담마 속에서 우리는 법의 형제들입니다. 그러니 함께 손을 잡고 붓다 담마를 전 세계로 전하는 일에 힘을 합해봅시다.”

법문이 끝나자 사람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행사장 밖에는 더욱 많은 인파가 몰려 스님을 환송했습니다.


행사 관계자들은 스님께 도시락을 건네며 인사를 했습니다.

“스님,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리야 후손 공동체 모두가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다음에는 델리 대학에서 꼭 모시고 싶습니다.”

“오늘 큰 행사 준비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델리에서 또 만납시다.”

혼잡한 행사장을 빠져나와 오후 3시 30분에 가야로 출발했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인도에서는 하루가 금방 가요.”(웃음)

이동하는 동안 해가 지고 저녁 7시 20분이 되어서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저녁 공양을 마친 후, 잠시 숙소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오후 9시 10분, 스님은 인도 공동체 대중과 함께 오늘 행사에 참석한 소감을 나누었습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소감을 말했습니다.

“모리야족이 마우리아 왕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와 정체성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습니다. 또한, 인도 사회에서 이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우리가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행사에 모인 분들의 환희심과 스님을 향한 존경심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모리야 후손들이 단결력이 강해 보였고,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처음에는 외국 스님의 법문이라 집중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대중이 모였음에도 집중해서 듣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번 행사가 인도 전법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자리에 영어로 불교대학 홍보를 준비하지 못했네요.”(웃음)

대중의 소감을 듣고 스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해외 전법을 위해서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연기, 중도, 삼법인, 팔정도를 알기 쉽게 설명한 소책자가 필요합니다. 인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불교도 신앙적 성격이 강해서, 불법의 이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법을 정확히 모르면 일상과 사회생활에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일생과 근본 가르침을 영어로 정리한 책자를 만들어야 하고, 각 나라 언어로 번역해야 합니다.

모리야 후손 공동체의 장점은 강한 단결력입니다. 그런데 석가족은 여러 조직으로 나뉘어 통합되지 않은 문제가 있습니다. 석가족과 모리야족은 상위 계층은 아니지만, 중간 계층으로서 불교 전법의 중심이 된다면 인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행사에 참석해 보니 석가족보다 모리야족이 더 단결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앞으로 인도에서 활동 방향을 설정할 때, 구호 활동과 자비행은 달리트 계층을 대상으로 하고, 불법 전파와 불교에 대한 공부는 상카시아 담마센터에서 담당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님은 앞으로 인도정토회와 JTS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하며 대중공사를 마무리했습니다. 대중공사를 마치고 나니 밤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습니다. 스님은 숙소로 돌아가 원고를 교정한 후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내일은 다시 부탄으로 이동해 트롱사주의 치옥을 방문할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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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화

감사합니다 스님의 발자취따라 필요한 곳에 쓰이겠습니다

2025-02-11 14:25:15

신정화

어둠 속에 보물이 있다해도
등불없이는 보지 못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주는 등불 같은 사람이 없으면
슬기로워도 깨닫지 못한다.
ㅡ화엄경
등불 바로 법륜스님
5백년 대섯번 흐른 뒤
바로 오늘의 부처는 우리법륜스님!
법륜스님 보유국의 자부심! 대단합니다.

2025-02-07 21:56:32

여유

감사합니다.

2025-02-06 21:5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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