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5.01.13 인도성지순례 3일째_전정각산
“똑같은 만원이 지구 저편에서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안녕하세요. 인도성지순례 3일째입니다. 오늘은 바라나시를 출발하여 가야산을 둘러보고 수자타 아카데미로 이동해 환영식을 했습니다. 이후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 고행하신 전정각산을 참배하고 저녁에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법회를 진행했습니다.

보통 바라나시에서 가야까지는 버스로 약 8시간이 걸립니다. 순례단은 낮 12시쯤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할 계획으로 새벽 4시 20분에 바라나시를 출발했습니다. 그런데 이동 중에 남은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 보니 예상보다 약 2시간 일찍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너무 일찍 도착하면 학교에서 환영식을 준비하고 있을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서둘러야 하기 때문에 순례단은 계획을 바꿔 먼저 가야산에 들르기로 했습니다.

오전 9시 40분, 가야산 인근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가니 가파른 계단이 나타났습니다. 스님은 얼마 전 부탄에서도 가파른 길을 오르며 숨이 차 여러 번 멈춰 서야 했습니다. 오늘도 쉽지 않은 높이였지만, 스님은 순례객들을 인솔하는 가운데 여러 번 쉬어가며 천천히 정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가야산 정상에 도착한 뒤,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순례객들을 기다리며 먼저 도착한 순례객들에게 준비된 도시락으로 아침 식사를 하도록 안내했습니다. 스님도 바위에 자리를 펴고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가 끝날 즈음 모든 순례객들이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남쪽을 보세요. 건너편 바위에 제가 앉아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 명이 앉아도 넉넉했던 자리였는데, 큰 불탑이 세워지며 자리가 좁아졌습니다. 제가 잘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리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먼저 명상을 하고 이어서 가야산 성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명상을 한 후 본격적으로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두 가지 이름으로 불립니다. 하나는 가야 시내에 위치해 가야산이라고 불리는 이름이고, 또 다른 이름은 상두산(象頭山)입니다. 상두산은 코끼리 머리 모양이라는 뜻으로, 경전에 상두산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정상에 올라가면 힌두교 신을 모시는 신전이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이 산을 ‘브람조니’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어서 스님은 가야산과 관련된 경전 기록 두 가지를 설명했습니다.

“첫 번째는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우루벨라 가섭, 나디가섭, 가야가섭 삼 형제와 그들의 제자 천 명에게 ‘탐·진·치 삼독의 불을 꺼라’는 설법을 하신 일화입니다. 이 설법이 이루어진 장소를 ‘가야 쉬르사’라고 부르는데, 이 장소가 현재 우리가 앉아 있는 곳이라는 설과 산 아래 강가라는 설로 나뉘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앉은 이 자리에는 과거에 천 명이 앉았고, 제가 앉은 이 자리에 부처님이 앉으셨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무거우셨는지 바위가 움푹 파였다고 하네요. (웃음) 이처럼 부처님은 이곳에서 천 명을 교화하신 후, 무리를 이끌고 라즈길로 이동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부처님께서 카필라성에서 출가해 수행하던 중 뜻대로 되지 않자 번민하시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스승을 찾아 길을 떠나 라즈길에서 ‘알라라까라마’와 ‘웃따까라마푸트라’라고 하는 위대한 스승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두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수행 정진하여 어느덧 스승의 경지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것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선정에 들 때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 것 같은데, 말하고 행동할 때는 흐트러졌기 때문이에요. 결국 깨달음은 스스로 증득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하시고 라즈길에서 80km 떨어진 이곳 가야 지역으로 오셔서 걸식을 하고 가야산 정상에 오르셨습니다. 정상에서 네이란자라 강 건너 둥게스와리 지역을 발견하셨고, 그곳이 수행 정진하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전정각산 아래로 이동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전정각산에서 용맹 정진했지만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자신의 수행을 돌아보고 반성하셨습니다. 그러다 욕망을 억제하거나 따르는 양극단 모두가 욕망에 반응하는 것임을 깨달으셨습니다. 이것이 중도의 발견입니다.

가야산은 부처님께서 수행처를 발견하신 곳이자, 가섭 삼 형제와 천 명을 교화하고 전법의 길을 시작하신 출발점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설명을 마치고 잠시 명상을 한 후 순례단은 오전 11시 40분에 수자타 아카데미로 출발했습니다.

오후 12시 10분, 둥게스와리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했습니다. 학생들이 순례단을 맞이하기 위해 예쁜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환영의 인사와 함께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습니다.


스님은 순례단의 선두에 서서 학교를 향해 한 걸음씩 걸었습니다. 그 순간 학생들이 연주하는 신나는 나팔 소리와 북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곧 수자타 아카데미의 한 학생이 먼저 다가와 스님에게 꽃 목걸이를 걸어주었습니다. 스님은 학생과 함께 노란 문을 지나 교문 입구까지 걸었습니다. 이어서 나머지 학생들도 순례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꽃 목걸이를 걸어주며 환영했습니다.




순례단 앞에는 코끼리 등에 올라탄 1학년 학생이 꽃비를 뿌려주었습니다. 흩날리는 꽃잎 아래 순례단의 발걸음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순례단은 수자타 아카데미로 들어가 먼저 법당을 참배하고, 20년 전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봉사하다 괴한의 습격으로 세상을 떠난 故설성봉 님의 탑을 참배했습니다.




이어서 지바카 병원을 둘러보고 운동장으로 향했습니다. 운동장에는 따뜻한 차와 과자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장시간 이동으로 지친 순례단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피로를 풀었습니다.


4백여 명의 순례단이 모두 운동장에 자리를 잡자 환영식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수자타 아카데미 전교생이 함께 춤을 추며 환영식의 막을 열었습니다. 아이들의 몸짓이 무척 순수하고 예뻤습니다. 순례단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들과 마주 보고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다음으로 각 학년별 축하 공연이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은 화려한 공연 의상을 입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능숙하게 춤을 췄습니다. 자유롭고 아름답게 피어나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축하 공연을 네 개나 보았지만, 환영식을 마치려니 무척 아쉬웠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내일모레 개교 기념식에 더 많은 공연이 준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웃음) 개교 기념식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지금은 전정각산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오후 1시 30분이 되어 전정각산으로 출발했습니다.

전정각산에 도착한 후 모두 가사를 수하고 자리에 앉자 스님은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저기 앞에 보이는 하얀 건물이 보이죠? 부처님께서 6년 고행하시던 시절, 밤에는 추위를 피하려고 동굴에서 수행하며 주무셨다고 합니다. 여름에는 더위를 피해 동굴에 들어가기도 하셨죠. 저 위에 있는 동굴은 부처님의 그림자를 남겨두었다 해서 ‘유영굴’이라고 부릅니다. 그림자라고 하지만, 사실 부처님께서 오래 머물며 수행한 흔적과 체취가 남아 있다는 뜻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아요.

부처님께서 머무신 곳은 유영굴뿐만이 아닙니다. 이 일대 모든 곳에서 부처님은 수행하셨습니다. 이 주변에는 부처님이 수행하실 때의 많은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후대에 아쇼카왕이 이곳을 방문하며 부처님과 관련된 모든 장소에 기념탑을 세웠습니다. 산 위에는 7개의 탑터가 남아 있습니다.”

이어 스님은 부처님의 깨달음 과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성취함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주로 죽을 만큼 고생만 했을 뿐 큰 성취를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후대 사람들도 이곳을 크게 기념하거나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공만 주목하고 실패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6년 간 정진하며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셨습니다. 이곳에서 머문 6년에 비하면 깨달음을 얻으신 보드가야에서는 100일 밖에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부처님이 6년 동안 정진하신 이곳은 매우 중요한 장소지만, 사람들에게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성공만 기억하고, 실패는 하찮게 여기거나 숨기려 합니다. 부처님이 이곳에서 6년 동안 수행한 것은 깨달음의 기초가 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죠. 마치 우리가 실패를 외면하고 성공만을 기억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실패에도 배움이 있습니다. 오히려 실패는 성공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설명이 끝난 후 순례단은 명상과 경전 독송을 하고 전정각산을 바라보며 예불을 올렸습니다.


오후 3시 20분, 전정각산 순례를 마치고 다시 수자타 아카데미로 돌아왔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저녁 7시부터 컬처홀에서 법회를 진행했습니다.

수자타 아카데미 30년의 역사를 소개하는 영상을 함께 본 후 순례단은 스님에게 삼배를 하며 법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인도 JTS와 수자타 아카데미의 역사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제가 이 지역을 처음 방문했던 시기는 1993년이었습니다. 지금은 전정각산으로 올라가는 오르막길을 포장해서 가지런히 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지그재그로 난 길이었습니다. 그렇게 지그재그로 난 길을 걸어 올라가는데, 정말 수백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제가 옆사람에게 ‘오늘 일요일인가요?’ 하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아니라고 했어요. 일요일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아이들이 길거리에 있나 싶어서 학교는 안 가냐고 물어보니까 학교가 없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수백 명인데 학교가 없는 게 말이 됩니까

요즘처럼 구걸하는 아이들이 50명 정도 보였다면 학교에 간 아이들도 있고, 구걸하는 아이들도 있나 보다 했을 텐데, 수백 명의 아이들이 구걸을 하고 앉아 있으니까 그 모습이 너무 의아했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주변에 학교가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싶어서 다시 물어보니 정말로 없다고 했어요. 그 일을 계기로 마을 주민들과 학교를 짓자고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가 한국입니까? 인도입니까?’

‘인도입니다.’

‘저 아이들은 누구의 아이들입니까?’

‘저희 아이들입니다.’

‘나는 인도 사람도 아닌 한국 사람이고, 더욱이 아이도 없고 결혼도 안 한 스님인데, 그러면 당신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건 누가 해야 합니까?’

‘저희가 해야 하지만 저희에게는 돈이 없습니다. 저희는 가난합니다.’

‘가난해도 자식을 낳았으면 무언가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희가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왜 할 수 있는 게 없습니까? 땅도 없습니까?’

‘땅은 있습니다.’

‘그러면 학교를 지을 수 있게 땅이라도 내놔야 하지 않겠어요?’

이렇게 해서 동네 사람 10명이 땅을 1 가타씩 내기로 했습니다. 1 가타는 42평 정도 되는 땅입니다. 그렇게 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의 황무지를 모아서 그 위에 학교를 처음 지었습니다. 그런데 땅만 내놓는다고 학교를 세울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마을 사람들에게 ‘당신들 자식이니까 뭐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 하고 설득하여 마을 사람들도 다 같이 일하기로 약속하고 학교 건립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게 꼭 학교 건물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우선 간이 시설을 만들어 놓고서도 수업을 시작하는 게 중요하죠. 그래서 동네에서 글자를 아는 청년이 있냐고 물었더니 두 명이 있다고 했어요. 한 아이는 5학년을 졸업했고, 다른 아이는 8학년을 졸업했습니다. 그렇게 5학년과 8학년을 졸업한 두 명이 선생님 노릇을 하도록 한 다음 가르칠 아이들을 모으니까 150명가량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두 반으로 편성하고 나무 밑에서 가르치도록 한 다음, 본격적으로 학교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맨땅에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은 사실 공부하러 학교에 온 게 아니라 사탕 먹으러 학교에 나왔습니다. 주말마다 학교에 나온 일수만큼 사탕을 나눠줬거든요. 어쨌든 그렇게라도 학교에 다니도록 했는데, 아무리 해도 초기에는 아이들을 전부 취학시키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을에 가서 아이들을 학교로 데려오려고 해도 가족 중에 학교에 다녀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 보니까 학교에 왜 가야 하는지, 학교에 가서 뭘 배우는지, 학교에 가서 배운다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원래 아버지가 학교에 다녔으면 자식들도 학교에 보내고, 형이 학교에 다니면 동생도 따라다니는데, 동네 전체에 학교를 다닌 사람이 없으니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초기에는 아무리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라고 해도 취학률이 50%를 넘기기가 어려웠고, 그나마 학교에 나온 아이들도 대부분 2학년까지 다니다가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3학년 정도가 되면 집안일을 도울 수 있으니까 자꾸 아이들을 학교에 안 보내고 집안일을 시키는 거예요.

불가촉천민 마을에 문맹 퇴치가 가능했던 이유

그러던 이곳에서 문맹 퇴치가 거의 100%에 가까울 정도로 이뤄진 것은 사실 동네마다 유치원을 세우면서 가능해졌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초등학교를 통해서 문맹 퇴치를 하려고 구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초등학생 정도가 되면 아이가 벌써 일을 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까 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일을 시키려고 해요. 그런데 동네마다 유치원을 지으니까 부모가 어린아이들은 유치원에 잘 보냈어요. 코흘리개 아이들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가 아이들을 전부 돌보기가 어려우니까 유치원에는 잘 보내는 거예요. 유치원이라고 해도 아이들이 모여서 같이 과자 먹고 놀다가 집에 가는 건데, 부모들이 유치원에 안 보내는 경우가 거의 없었어요. 왜냐하면 아이가 유치원에 가야 부모도 일을 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코흘리개 때부터 친구랑 같이 유치원에 다니고, 또 친구가 있다 보니까 유치원을 졸업하면 같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 겁니다. 원래 아이들은 주변 친구들을 따라가게 되잖아요. 그래서 문맹 퇴치는 초등학교로 인해 가능했다기보다는 결과적으로 유치원으로 인해 가능했습니다. 유치원을 세운 뒤로는 매일 아이들을 부르러 다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현재는 15개 동네에 있는 유치원 학생들이 1천 명 정도 됩니다. 그런데 유치원을 졸업하는 학생들이 전부 수자타 아카데미로 오면 JTS가 감당을 하지 못합니다. 만약 JTS가 그 학생들을 다 받았다면 초등학생이 1천 명이 훨씬 넘게 되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여기도 정부 학교가 부실하긴 하지만 곳곳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정부 학교가 있는 동네에 사는 학생은 강제로 정부 학교에 보냈습니다. 우선 아이들이 전부 수자타 아카데미로 오게 되면 일단 수자타 아카데미도 과부하가 걸리지만, 정부 학교도 운영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치원은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다니지만, 사는 동네에 따라서 초등학교는 정부 학교에 가도록 했는데, 초기에는 학부모들의 반발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이곳 사람들은 대부분 천민인데, 정부 학교는 양민들이 있는 마을에 생겼기 때문에 천민 아이들은 학교에서 차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차별을 받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학교에 안 가버립니다. 그리고 양민들은 다들 학교에 선배가 있는데 천민들은 학교에 처음 가니까 선배가 없어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양민들이 다니는 정부 학교에서는 학용품을 모두 부모가 부담해야 하니까 그것도 천민들의 어려움 중에 하나였어요. 초기에는 반발도 좀 있고 부작용도 있었지만, 학부모들을 설득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정부 학교에 정착해서 다니게 되었습니다. 대신 도저히 정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이나,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로 심하게 차별을 받는 경우에는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수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아이는 제때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오늘의 수자타 아카데미에 이르렀습니다.

현재 초등학생의 수는 분교까지 모두 합하여 500명 정도가 되고, 중학생이 약 200명, 유치원생은 약 1천 명 됩니다. 총 1700여 명의 아이들이 현재 수자타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 옆에 지바카 병원이 있는데,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병원이라기 보다는 보건소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는 일 외에도 마을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거나 핸드 펌프를 통한 식수 문제 해결 등 마을 개발도 해왔는데, 요즘은 인도 경제가 많이 좋아져서 정부의 지원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도로 사정도 나아지고 있고, 초가집도 대부분 벽돌집으로 바꾸는 등 점차 개선되어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던 마을 개발

저희가 지금까지 진행한 사업 중 교육은 나름대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병원을 통해 결핵 퇴치를 해낸 것과 유아 사망과 산모 사망을 많이 낮춘 것도 성공적이었습니다. 반면 마을 개발은 생각보다 효과적이지 못했습니다. 마을 개발을 해서 주택을 건설하거나, 도로를 닦거나, 농업 생산량을 늘리거나, 생산 협동조합과 소비 협동조합을 만들거나, 마을 은행을 만드는 일을 해보고 싶었는데, 첫째, 저희들의 역량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둘째, 이곳 사람들은 그냥 가난한 게 문제가 아니라 불가촉천민이다 보니 어디 가서 품팔이를 해서만 살지 자기 땅을 가지고 경작하고 살아가는 경우가 극히 드뭅니다. 그러다 보니까 주민들이 참여하는 생산 협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형성할 만한 토대를 마련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민들이 글자를 전혀 모르는 문제가 있기도 하고, 물론 이 부분은 앞으로 글자를 아는 젊은이들이 많이 생겨나니까 조금 나아질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방식이 일반 농촌과는 많이 다릅니다. 조금이라도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면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이어야 협동조합을 만드는 게 가능한데, 이곳은 도시의 빈민처럼 양민 마을 주위에 천민들이 있고 주인집에 가서 품을 팔아 먹고사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보니 마을 개발을 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마을 개발은 누군가 정교하게 설계를 하고 투자를 하지 않으면 성공하기가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에 와서 봉사하는 JTS 활동가들이 대부분 젊은 사람들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학교를 관리하는 일까지는 할 수 있는데, 마을 개발은 경험이 없어서 어려워하는 편입니다. 반면 연세가 드신 거사님들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마을 개발을 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장기간 봉사하는 것을 어려워합니다. 장기 봉사를 해야 마을 개발을 진행할 수 있는데, 나이 드신 분들은 음식에 적응하는 것도 어렵고, 말도 잘 안 통하고, 기후를 견디는 것도 어렵습니다. 여름에 50도까지 올라가는 것도 견디기 어려워하고, 겨울에 으슬으슬 추운 것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모습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거쳐간 수많은 봉사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30년 동안 1년 이상 머물며 봉사한 사람들을 세어 보니 150명이 넘었어요. 아직 마을 개발까지는 확장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수많은 봉사자들이 거쳐가면서 그 덕분에 현재의 모습이 이루어졌습니다.

똑같은 만원이 지구 저편에서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여러분이 낸 보시금이 잘 쓰이면 이렇게 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치료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맑은 물로 주어질 수도 있고, 배고픈 이에게는 음식으로 주어질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만 원이라도 한국에서의 만 원은 밥 한 그릇에 불과하지만, 여기에서의 만 원은 밥이 열 그릇이 되고 백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五餠二魚)가 그저 책 속 이야기가 아니라, 그 돈이 어디에서 쓰이느냐에 따라 실제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낭비하고 있는 부분을 줄여서 그 돈을 지구 저편에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내 귀에 들리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달한다면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물론 여러분도 보셨듯이 돈만 있다고 되는 일은 아닙니다. 이곳에 쓰인 돈만 갖고 이런 일이 형성될 수는 없습니다. 돈보다 더한 정성, 아이디어, 지속적인 노력들이 모여서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모든 게 다 잘 되었느냐?’ 하고 묻는다면 잘 되지도 않았고, ‘잘 되고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지금도 잘 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많은 과제들이 남아 있습니다.”

설명을 듣고 나서 순례단은 손을 들고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두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도 성지순례를 다니는 동안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구걸하는 모습을 보면서 불편한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그들을 불편하게 여기는 마음이 부처님이 사문유관에서 느꼈던 마음과 비슷한 건가요?”

“제가 보기에는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는데, 인도 사람들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마지막 질문에 대해 스님이 답변을 하며 즉문즉설 시간을 마쳤습니다.

인도의 가난한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는데, 이 마음을 어떻게 봐야하죠?

“인도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관점을 가지는 이유는, 첫째, 그들이 이런 사회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런 체제에 이미 적응이 되어 있습니다. 둘째, 인도에서 카스트는 직업으로 나눠져 있습니다. 원래 카스트는 신분 제도였는데, 신분에 따른 직업이 고정화 되었어요. 이발사의 아들은 이발사를 하고, 운전사의 아들은 운전사를 하고, 청소부의 아들은 청소부가 됩니다. 그렇게 3천여 개의 직업이 분류되어 있어요. 카스트를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이렇게 네 개로 크게 나눈 것은 ‘바르나(Varna)’라고 하고요. 그 안에 세부적인 카스트는 3천여 개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도의 전통문화이고, 인도인들은 자신의 인생을 카르마, 즉 숙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가축을 부릴 때 소는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것이 소의 할 일이고, 말은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것이 말의 할 일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자신의 카스트에 맞는 일을 최선을 다해 함으로써 다음 생에 좋은 곳에 가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마 질문자가 만난 인도인은 인도의 사유 체계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라고 보입니다.

인도 문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일곱 살짜리 양반 아이가 60살 된 영감한테도 ‘여봐라’ 하고 부르잖아요. 그러면 나이 많은 상놈이 ‘예’ 하고 달려옵니다. 미국에서 흑인 노예가 있던 시절에는 어린 백인 아이들이 다 큰 흑인 어른들을 동물 대하듯 막 부렸죠. 힘을 가지고 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노예 제도라는 사유 체계가 잡혀 있었기에 그렇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볼 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의 사유 체계에서는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했던 거죠.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여성은 남편의 말에 무조건 따라야 하고, 자식은 부모의 말을 무조건 들어야 하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여성을 차별하는 일이라고 보잖아요. 사유 방식이라고 할 수도 있고, 하나의 업식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일인데, 그에 따라 살았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시대는 무조건 옳고, 옛날 시대는 무조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시대에는 학교 공부를 잘해서 성적이 높으면, 법대를 가거나 의대를 가서 의사와 변호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공부를 못 하고 능력이 안 되니 그냥 농사짓고 노동자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능력주의라는 것도 옛날의 신분 제도와 똑같은 일종의 세뇌입니다. 옛날에는 ‘내가 태어나기를 상놈으로 태어났으니 방법이 없다’, ‘내가 여자로 태어났으니 다른 길이 없다’ 하고 생각 했듯이, 오늘날은 학교 교육을 통해 계급 질서를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내가 능력이 없는 걸 어떡해’, ‘저 사람이 잘난 걸 어쩌겠어’ 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옛날 사유 체계는 잘못되었다고 하면서 지금의 능력주의는 받아들이듯이 어쩌면 몇 세기가 지난 다음 시대에는 이렇게 능력주의로 차별하는 것을 부정하는 시스템이 자리 잡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날은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아들이 대통령이 되는 건 안 된다고 하면서 아버지가 재벌이면 아들이 이어서 재벌이 되는 건 또 된다고 하잖아요. 지위를 세습하는 것은 안 되지만, 재물을 세습하는 건 허용되는 것은 왜 일까요? 자본주의 때문입니다. 만약 미래에 재물을 세습하는 게 안 되는 사회가 되어 오늘날을 돌아보면 지금 사회는 진짜 불평등한 사회로 평가될 겁니다. ‘자기 아버지가 돈이 많으면 아들이 저절로 돈이 많아지는 게 말이 되는가?’ 하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자기 아버지가 대통령이라고 해서 아들이 대통령이 되는 게 말이 안 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옛날보다 좀 평등해진 것은 맞지만, 오늘날의 우리들도 똑같이 사유 체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 인도 사람들을 인도의 사유 체계 안에 갇혀 있다고 보는 것이죠. 우리가 볼 때는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문화 속에서 태어나 자라왔기 때문에 그런 사유 체계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은 바로 그러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났다는 데 있어요. 왕자로 태어나서 부와 지위를 누리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부가 타인의 고통 속에 있음을 자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나중에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이 타인의 불행 위에 존재함을 설파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인도에 와서 이곳 사람들이 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해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면 끝나잖아요. 부처님 당시와 비교하면 지금 한국이라는 나라는 왕궁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곳 인도에 온 것은 마치 부처님이 성문 밖으로 나가 중생의 고통을 본 것과 같은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내가 저런 꼬락서니가 안 되려면 인도 말고 한국에서 살아야겠다’, ‘나만 잘 살면 된다’ 하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왜 이런 불평등이 생길까’, ‘어떻게 하면 이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하고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같은 의문과 사유는 어른들이 보기에는 쓸데없이 보였을지 모르지만, 붓다는 그것을 통해 위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질문자가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것은 경계에 따라 일어난 마음입니다.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는 것이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마음인 것처럼요. 경계에 따라 기분이 좋아서 들뜨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좋은 기분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요. 자신의 카르마이니까요. 그러나 거기에 덩달아 들떠서 즐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중생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슬픔이 일어나는 것 또한 자신의 카르마이지만, 그 슬픔에 빠져들었다면 그것이 중생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슬픔이 일어나고 연민이 생기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작은 일이라도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관점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에 빠지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그 아이에게든 그 장애인에게든 그 아이 엄마에게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심입니다. 그저 슬펐다가 기뻤다가 불쌍했다가 귀찮았다가 하는 것은 중생심에 불과합니다. 중생심이 중생심인 줄 알아야 합니다. 중생심을 가지고 자비심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아픔과 슬픔, 연민은 자비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지만, 그 자체로는 자비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중생심일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질문자가 자신을 좀 더 관찰해 보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내 마음을 만족시키려고 하면 안 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살은 화현 한다고 말합니다. 화현이란 상대의 필요에 의해 응하는 것입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은 나의 필요에 의해서 나오는 중생심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아쉽지만 밤 9시가 넘자 내일 순례를 위해 법회를 마쳤습니다. 스님은 순례 중에 다리를 다친 분을 찾아가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보드가야를 벗어나면 공항이 없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시려면 준비를 서둘러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셨으니 보드가야 대탑과 성지는 둘러보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내일 차량을 하나 배정해 드릴 테니 성지를 둘러보세요.”

“스님, 감사합니다.”

수자타 아카데미에서의 첫 하루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신 보드가야 대탑을 순례할 예정입니다.


2025 3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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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훈

고맙습니다 ^^

2025-02-02 11:45:03

전은실

중생심... 자비심... 보살심..어렴풋 짐작해 봅니다.. 그 마음의 경계가 주는 의미는 참으로 큰 차이가 보입니다.

2025-01-22 20:32:59

임영현

마음 속에서 연민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나는 작은 일이라도 무엇을 할 것인가?" 라는 관점으로 돌아와 그 작은 실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 그리고 그 일을 할 때 내 만족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되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한다는 말씀을 마음 속에 새기겠습니다. 불쌍하다는 마음은 나의 중생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깨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2025-01-20 17:3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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