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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경기도 도지사가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아와 스님과 차담을 나누고, 행복한 대화 즉문즉설 열세 번째 강연이 경기도 고양시에서 열렸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오전에는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업무들을 처리한 후 점심시간이 되어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조계종 원로의원이자 서울 전등사 회주 동명스님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방문하여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봉사자들이 차린 정갈한 음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평화재단 접견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두 분은 수행자의 삶과 한국 불교에 대해 솔직하고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먼저 동명 스님이 겸손하게 말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어릴 때 출가를 했습니다. 출가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서 법륜 스님한테 좀 배우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큰스님께서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스님은 여러 사회실천을 하면서 배운 점들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들은 제가 일을 꼼꼼하게 계획해서 활동을 해왔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그저 인연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왔을 뿐입니다. 그저 길을 걸어가다 만난 인연으로 일들이 시작되곤 했습니다. 인도에서는 한 청년을 우연히 만나 학교를 운영하게 되었고, 부탄에서도 우연히 만난 인연으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북한 지원 사업 역시 압록강에서 우연히 시신이 떠내려오는 광경을 목격한 뒤 결심하게 된 것이지, 처음부터 큰 계획을 세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동명스님은 감사의 마음을 전하셨습니다.
“스님의 말씀과 삶의 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스님께서 이렇게 시간을 내어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동명 스님을 배웅해 드렸습니다.
잠시 후 오후 3시에는 김동연 경기도 도지사가 찾아왔습니다. 스님을 찾아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해서 오래전에 잡은 약속인데, 오늘 만나게 되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지난번에는 제가 혼자서 배낭 메고 찾아왔었는데요. 기억하시죠?”
“그럼요. 벌써 몇 년이 흘렀네요.”
악수를 나눈 후 자리에 앉아 그동안의 안부를 주고받았습니다. 시국이 어수선한 만큼 자연스럽게 정치 상황과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도정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김 지사는 인구 1,440만 명을 넘긴 경기도의 현실과 과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경기도는 인구가 늘고 있는 곳입니다. 전국 인구의 약 27%가 거주하고 있으며, 지방자치의 역할이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스님은 지방자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지방정부가 가진 권한의 한계를 지적했습니다.
“지방자치가 강화되어야 합니다. 지금처럼 예산과 권한이 제한적이라면 지역 간 경쟁과 발전이 어렵습니다. 중앙정부가 아닌 지방에서 성공적인 정책을 실험하고, 이를 국가 정책으로 확장하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정치인들이 가져야 할 자세와 역사적 책임감을 언급했습니다.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의식과 공공성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헌신이 없다면, 정치의 본질을 잃게 됩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혼란 속에서는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해야 합니다. 정국이 혼란스러울수록 중심을 잡고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는 것이 필요해요. 지금은 민심을 살피면서 도정에 힘을 쏟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김 지사도 이에 공감하며, 현재 정치권에서 느끼는 한계를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스님은 정치가 국가 발전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 지사는 스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하며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경기도에서 할 수 있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화를 나눈 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스님은 간단히 저녁식사를 한 후 5시 30분에 경기도 고양시로 출발했습니다.
오늘은 경기도 고양시에서 행복한 대화 열세 번째 강연이 열리는 날입니다. 강연이 열리는 장소는 동국대학교 일산병원 5층 대강당입니다.
40분이면 갈 거리였지만 차가 막혀 2시간이 걸렸습니다. 강연을 시작하기 직전인 7시 20분에 강연장에 도착했습니다. 봉사자들이 연말 분위기에 맞춰 산타 복장을 하고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일산병원 큰법당 주지를 맡고 계신 능지 스님과 강연 전에 차담을 할 예정이었지만 강연 시간이 임박해서 간단히 인사만 나누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퇴근길이라 차가 많이 막혔습니다.”
강연장에서는 중년 남성의 애환을 노래하는 밴드 ‘애쉬 앤 부쉬(ASH&BUSH)’가 ‘남자는 불쌍해’라는 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노래가 끝나고 곧바로 큰 박수와 함께 스님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강연장에는 350여 명의 청중이 모였고,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지금 세상이 어수선하네요. 여러분들 모두 별일 없이 잘 지내고 계시죠? 계엄은 잘못된 일이지만, 그래도 큰 물리적 충돌이나 폭력 없이 잘 마무리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가운데도 무력 충돌이 일어나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의 질문이 많을 것 같습니다. 바로 대화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사전에 신청한 네 명의 질문을 받고, 현장에서도 손을 들고 세 명이 더 질문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에게 매너 없이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난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 질문자에게 바보라고 말을 해도 내가 왜 바보냐고 따져야지, 아무도 질문자를 바보라고 하지 않는데, 왜 스스로 바보라고 해요?”
“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어보면 무례한 상대방은 무시하라고 하는데...”
“저는 무시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러면 상대방에게 가서 잘못한 점을 알려주고, 왜 그러냐고 따지고 다툴까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진짜요?”
“제가 참으라는 말을 했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가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잘못을 지적하고 싶으면 지적해도 됩니다.”
“그러면 가서 싸운 후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법륜스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해도 되나요?”
“본인이 가서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데 제가 가서 싸우라고 했다면 그 말도 맞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본인이 지금 따지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따지고 싶으면 따지라고 말해준 겁니다. 그런데 왜 법륜스님이 시켜서 한 것처럼 말해요? 예를 들어 ‘이거 먹어도 되나요?’ 라고 물어서 제가 ‘그러세요’ 하고 대답하고, ‘이거 안 먹어도 되나요?’ 라고 물어서 또 제가 ‘그러세요’ 하고 대답하는 것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이에요.”
“저는 제가 화가 많은 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요.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알려주어도 되나요?”
“그럼요.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감사합니다. 생각해 보지 못한 새로운 방법이네요.”
“관계를 안 풀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따지고 싶으면 따지세요. 언성이 높아지면 어떻고, 머리채를 잡으면 어때요? 그렇게 한 후에 폭행죄로 감옥에 가면 되죠. 이걸 ‘과보’라고 해요.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과보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대신에 내가 착해서 싸우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사실은 나도 싸우고 싶지만, 그렇게 한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서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한번 성질대로 해보라는 거예요. 성질대로 해보고 난 다음에 다시 평가를 해보는 겁니다.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들어도 참는 게 나한테 좋은지, 아니면 윤리와 도덕을 떠나서 성질대로 하는 게 좋은지, 둘 중에 어느 게 좋은지 한번 비교해 보는 거예요.
가끔은 성질대로 해보는 게 좋을 때도 있어요. 손해가 나도 자기 성질대로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성질대로 하니까 후회가 된다면 다음부터는 성질대로 안 해야 되는 겁니다. 누가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해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안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하니 손해가 나서 안 하는 것일 뿐입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게 본래부터 없었어요.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경험을 해보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게 더 손해라는 걸 알고 나서 윤리와 도덕이 생겨난 겁니다. 예를 들어서 10명이 한 방에서 사는 공동체에서 누가 자꾸 물건을 훔친다고 합시다. 나만 훔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훔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나한테 이득이에요. 그런데 열린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훔치면 다른 사람도 훔치게 됩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 훔치면 혼란이 발생하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윤리가 생긴 거예요. 남을 때리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가 나서 상대방을 때리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지만 상대방도 나를 때리기 때문에 싸움이 됩니다. 복수를 할 때는 한 대 맞고 두 대 때려야 분이 풀리잖아요. 그러면 상대방도 복수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을 때리지 말라는 윤리가 생긴 거예요. 이렇게 윤리와 도덕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에요.
만약 질문자가 ‘어떤 여성을 안고 싶은데 안아도 됩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안고 싶으면 안으세요. 대신에 성추행범으로 잡혀가서 일 년 간 감옥에서 사세요’ 하고 대답합니다. 일 년간 감옥살이하면서 ‘그래도 안고 싶은 사람을 한 번 안아봤으니 감옥살이할 만하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감옥살이하면서 ‘그때 잠깐 참을 걸’ 하는 후회가 된다면, 안고 싶다고 해서 안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나한테 손해니까요.
마찬가지로 ‘화를 내고 싶은데 왜 참아야 됩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화를 내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 결과를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손해이고, 저것도 손해지만, 저것이 더 손해인 걸 경험하게 되면 최악을 피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법륜스님이 하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불쾌하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따지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과 그 사람이 볼 때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볼 때는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볼 때는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화를 내면 상대방이 오히려 더 크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이게 미쳤나’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나는 ‘본인이 잘못을 해놓고 잘못한 줄도 모르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더 납니다. 지금 국민들이 화가 더 난 이유가 뭡니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해서 잠도 못 자게 해놓고 뻔뻔하게 나오니까 화가 더 나는 겁니다. 잘못했다고 고개라도 숙였으면 좀 진정됐을 텐데 ‘내가 뭘 잘못했냐’ 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국민들이 열 받아서 지금 거리로 뛰쳐나오는 거잖아요.
이렇게 갈등이 심할 때는 서로 관점이 다른 겁니다. 갈등을 제일 쉽게 푸는 방법은 ‘그 사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다’ 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 사람은 윤리와 도덕을 잘 모르거나, 윤리와 도덕을 알더라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면 내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런데 ‘이건 좀 따져봐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따져도 된다는 겁니다. 차를 운전해 보면 차선을 변경할 일이 생기잖아요. 가끔 골목에 불법주차를 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정말 급한 상황일 때는 고속도로에서 갓길로 달리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남이 그러면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왜 차선을 변경하느냐’, ‘여기에 주차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 ‘갓길로 가면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화를 냅니다. 내가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고, 남이 할 때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불법주차를 해서 딱지를 붙이면 ‘저 앞에 있는 차는 왜 안 붙이고 내 차만 붙이냐’ 하고 따집니다. 내가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으면 되는데, 남을 먼저 탓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에요. 어린아이들은 잘못에 대해 지적을 하면 꼭 변명을 합니다. 왜 늦게 들어왔느냐고 하면 ‘아빠는 왜 늦었어요?’ 하고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법이 없고 반드시 변명을 합니다. TV 보지 말라고 하면 ‘엄마는 왜 TV를 봐요?’ 하고 따지는 게 바로 어린아이들입니다.
진리란 특별한 게 아니에요. 나에게 견주어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에게 견주어 나를 이해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가능하면 내 감정에 치우쳐서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눈으로 봐도 보는 게 아니고, 귀로 들어도 들은 게 아니에요. 이것을 앎이 없는 상태라고 해서 ‘무지’라고 표현합니다. 이 무지로 인해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슬픔이 생기고 온갖 괴로움이 생길 때 나에게 견주어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에게 견주어 나를 보면 사로잡힘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면 눈이 보이고 귀가 들려서 바른 앎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가 생겨나면 괴로울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에요.
일상 속에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찰나마다 일어납니다. 금방 지혜로워서 밝아졌다가, 곧바로 어리석어져서 화를 냈다가, 이렇게 반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으라’ 하고 말하는 겁니다.
상대가 틀렸다는 생각이 강할 때 사로잡힘이 심해집니다. 상대를 이해하면 사로잡힘이 사라집니다. 사로잡힘이 강할 때는 옆에서 아무리 말해도 안 들리고, 아무리 봐도 눈에 안 들어와요. 여러분들이 가장 성질이 많이 났을 때 ‘내가 사로잡혔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으면 깨달음의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성질이 났을 때는 대부분 그렇게 안 됩니다. 평상시에는 스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들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 옆에서 쿡 찔렀을 때는 확 사로잡혀 버리기 때문에 안 돼요. 그래서 옛말에 옆에서 화를 돋워 주는 사람이 있으면 수행이 잘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옆에서 성질이 나도록 자꾸 건드려 주면 자주 사로잡히게 되고, 그 속에서 알아차리는 연습을 자꾸 하다 보면 점점 자유로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처한 환경이 나쁠수록 관점만 잘 잡으면 수행이 더 깊어집니다. 왜냐하면 연습할 기회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옆에서 잘해주면 사로잡힐 일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잘 알아차려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좋아서 화가 나지 않는 겁니다. 수행은 상황이 나쁜 가운데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기 힘을 키우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니 확 사로잡히거나 벌컥 화가 날 때 내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자꾸 하면 훨씬 빠르게 수행의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잘 안 됩니다. 깨달음을 얻기 직전일수록 더 어리석어집니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더 어둡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춥듯이, 깨닫기 직전에 가장 어리석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 하는 겁니다. 가장 어두울 때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밝은 세계를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늘 막다른 골목에서 괴로워하다가 똑같은 일을 수천수만 번 반복하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22살 아들이 말이 없어요. 아들과 대화를 좀 길게 하고 싶어요. 또 아들이 결혼 후에 아내와 알콩달콩 지내는 모습을 보고도 질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장모님과의 불화로 시작된 부부 갈등이 깊어졌습니다. 아내와 관계를 회복하고 아이를 위해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큰 사고를 겪고 엄마의 도움을 받고 있는 딸이 엄마에게 미안해하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습니다. 딸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자존감을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과거에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과의 일들이 떠올라 화가 나요. 이를 슬기롭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현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와 관련해 통일의병이 탄핵 운동에 적극 나서면 좋겠습니다. 통일의병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적합할까요?
시민이 뽑아야 할 적합한 정치인은 어떤 사람인가요?
대화를 마칠 무렵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로 인해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의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에 대해 답변을 하면서 강연을 마무리했습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국격에 전혀 맞지 않고 창피한 일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런 큰일이 6시간 만에 끝나는 사례도 전 세계에 없어요. 피 한 방울 안 흘렸고, 잡혀간 사람도 한 명 없이 사태가 끝났습니다. 태국이나 미얀마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쿠데타가 일어나서 몇 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는 6시간 만에 사건을 종결시키고,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전부 국회로 불려가서 해명을 하게 합니다. 이번 계엄령 선포는 참 이해하기 어렵지만, 6시간 만에 해결되는 것도 세계인들이 보기에는 놀라운 일이에요. 군인보다 시민들이 방송이나 유튜브를 보고 국회에 먼저 달려온 것도 또한 굉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번 일이 꼭 나쁘고 창피하다고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양면을 갖고 있다는 걸 봐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굉장히 깨어있는 동시에 이런 일이 일어날 위험도 있는 나라입니다. 왜냐하면 남북이 대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북한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면서 계엄령을 선포하면 쿠데타가 성공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사실은 이게 제일 위험한 거예요.
그런데 계엄령을 선포하고 나서 왜 그렇게 서투르게 행동했을까요? 대한민국 국민들은 아무리 군인이라 하더라도 ‘이게 좀 부당하다’ 싶으면 정보를 밖으로 유출시킵니다. 원래는 군인이 계엄 발동 전에 국회의사당과 모든 언론 기관에 미리 다 포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엄을 발표하는 동시에 점령을 해야 통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핸드폰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이게 가능할까요? 군인들이 출동하면서 ‘나 지금 어디로 간다’ 하고 문자를 다 보냅니다. ‘나 지금 누구 잡으러 가는 중이다’ 이렇게 친구한테 문자를 보내서 그걸 듣고 군인이 오기도 전에 다 도망을 갔다고 하잖아요. 국회 청문회를 한번 보세요. 온갖 해프닝이 다 일어났습니다. 극비를 유지하려면 딱 둘이서만 알아야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정보를 모르고 다 바보가 되어버린 겁니다. 웃을 일만은 아닌데, 그런 게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계엄 해제가 안 되었다면, 그때는 탱크 앞에 맞서는 행동을 해야 했을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용기 있게 맞서야 합니다. 그런 위험이 발생해도 우리는 두려움 없이 국민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다행히 그런 위험한 고비는 넘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문제가 다 해결이 된 상태는 아니에요. 여전히 여진이 남아 있습니다. 이 정도의 여진은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해결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곧바로 무대 위에서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스님과 인사를 나누고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정말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일산 행복시민, 파이팅!”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강연장을 나와 곧바로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차로 1시간을 달려 밤 11시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청년들을 위한 즉문즉설, 청춘톡톡 생방송을 하고, 오후에는 방송·영화·연극·예술인들의 모임인 '길벗' 주관으로 구룡마을에서 연탄 배달 봉사를 함께 하고 대화의 시간을 가진 후, 저녁에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청춘캠프에 참가하여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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