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11.2 정토 경전대학 즉문즉설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만 희생했다는 생각에 억울합니다”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수행과 명상을 마친 후 10시부터 정토 경전대학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1200여 명의 학생들이 온라인에 접속한 가운데 서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며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지난 한 달 동안 경전대학 학생들이 실천 활동을 했던 모습을 영상으로 본 후 모두 스님에게 삼배의 예로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공부 잘하고 있죠? 입학하고 나서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먼저 여러분과 대화하기 전에 영상을 하나 보겠습니다. 작년 2월 초에 튀르키예-시리아 대지진이 난 것을 기억하시죠? 그때 4천 명이 다니는 학교가 무너졌는데, JTS에서는 현지 단체인 화이트헬멧과 협력하여 1년 만에 다시 학교를 짓고 준공식을 했습니다.”

이어서 스님이 지난달에 지진 피해를 입은 튀르키예-시리아 접경 지역에 학교를 새로 짓고 준공식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 영상 보기

영상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잘 보셨습니까? 4천 명이 다닐 수 있는 큰 학교인데도 많은 사람이 노력을 해서 1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입니다. JTS에서 많은 지원을 한 것도 있지만 시리아에 자기 나라를 위해서 헌신적으로 일한 활동가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학교는 4천여 명의 학생 밖에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이 지역에 아이들이 총 150만 명 정도 되는데 학교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절반도 되지 않는답니다. 이 지역에 원래 살던 사람이 200만 명 정도 되고, 난민이 350만 명 정도 되다 보니까, 난민캠프에 사는 아이들은 학교에 전혀 접근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 우리 아이입니다

또 기존에 있는 학교도 지진으로 인해서 대부분 파괴가 되었습니다. 완전히 파괴된 곳은 새로 지어야 되고, 부분 파괴된 곳은 수리를 해야 하고, 학교가 없는 곳은 텐트를 쳐서라도 문맹 퇴치를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전쟁으로 인해서 교육 시스템이 붕괴되어 대부분의 아이들이 교육의 기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습니다. 비록 우리나라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모두 우리 아이다’ 하는 관점을 갖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 나가야 합니다.

JTS는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하고, 병든 사람은 치료받아야 하며, 아이들은 제때에 배워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나 이념, 민족, 국가에 관계없이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누구나 다 그런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고, 우리는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경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즈음에 아난다 존자가 ‘우리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서 큰 공덕을 지었는데,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런 큰 공덕을 지을 기회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염려를 얘기했을 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염려하지 마라. 여래가 없는 세상에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과 똑같은 공덕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걸 줘서 배부르게 하는 것이다. 둘째, 아픈 사람에게 약을 주어서 치료하는 것이다. 셋째, 가난한 사람을 돕고 외로운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다. 넷째,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외호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중에 청정하게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잘 외호하라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세 가지가 바로 JTS의 설립 이념입니다. 자기가 낳은 아이를 자기가 돌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JTS에서는 이 표현을 현대에 맞게 ‘모든 아이는 제때에 배워야 합니다’ 하고 표현을 바꾼 겁니다. 이렇게 부처님의 최후의 유훈에 맞게끔 JTS 설립 원칙을 정한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공덕과 같은 것입니다.

실천이 중요한 이유

그러니 여러분도 ‘극락에 가고 싶다’, ‘천당에 가고 싶다’ 이런 생각만 하지 말고,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있는 실천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실천은 하지 않고 그저 좋은 데 가고 싶다고 바라기만 한다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잡고자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론이나 사상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일 하나라도 실천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음은 그동안 수업을 들으며 궁금한 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경전대학 학생들은 지난 9월에 입학한 후 2개월 동안 금강경을 공부했습니다. 수업을 들으며 의문이 생긴 점에 대해 자유롭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금강경에서 ‘무주상보시’가 무엇인지 배웠지만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만 희생되었다는 생각에 억울하다며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만 희생했다는 생각에 억울합니다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공덕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나만 희생했다는 생각이 들고 억울한 마음이 많이 들어서 무주상보시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주상보시를 남편에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실천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왜 또 굳이 실천을 하려고 해요? 실천하기 어려우면 그냥 안 하면 되죠. 스님한테 화를 참기가 어렵다고 질문하면 스님은 ‘화를 내라’ 이렇게 말합니다. ‘화를 내고 나니 괴롭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면 ‘그러면 화를 내지 마라’ 이렇게 말해요.

여기 음식이 놓여 있다고 합시다. 이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할 때 ‘그 안에 독 들었다’ 하고 알려주면 더 이상 질문을 안 하고 거기서 끝이 나야 합니다. 독이 들었다는 걸 알았으면 먹고 싶은 마음이 탁 끊어져야 하는데, 독이 들었다고 알려줘도 ‘그래도 먹고 싶어요’ 그러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어요? ‘그래도 먹고 싶어요’ 하고 말하면 저는 ‘그러면 먹고 죽어라’ 이렇게 대답해 줍니다. 독이 들었다고 알려주면 거기서 끝이 나야 하는데, 굳이 그걸 먹고 싶다고 하니까 ‘그러면 먹고 죽어라’ 하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독이 든 줄 모를 때는 ‘먹고 싶어요’라고 하면 ‘거기에 독이 들었다’ 이렇게 말을 해줄 수 있지만, 독이 들었다는 걸 알려줬는데도 먹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먹고 싶으면 먹고 죽어라’ 하고 말하는 수밖에 없죠. 그래서 여러분이 스님한테 처음 물어볼 때는 자세히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 얘기를 듣고서도 ‘그래도 하면 안 될까요’ 하고 다시 물으면 ‘그러면 그렇게 해라’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것처럼 화가 올라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도 ‘다만 알아차려라’ 이렇게 말해줍니다. ‘화를 내는 것은 독이 든 음식을 먹는 것과 같다’ 하고 알려줄 뿐입니다. 그러면 독이 든 줄 알고 알아차려야 하는데, ‘그래도 화가 나는데 어떡합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그래도 먹고 싶은데요’ 하는 말과 똑같습니다. 제가 여러분과 나누는 대화를 잘 들어 보세요.

‘이 음식을 먹고 싶어요.’
‘거기에 독 들었다.’
‘그래도 먹고 싶어요.’
‘그럼 먹어라.’
‘죽기 싫어요.’
‘그러면 먹지 마라.’
‘그래도 먹고 싶어요.’
‘그럼 먹어라.’
‘죽기는 싫어요.’
‘그럼 먹지 마라.’

이렇게 스님이 대화를 하니까 여러분은 스님이 남의 심정을 모르고 말한다고 하는데, 먹고 싶어도 독이 들었으면 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도 먹고 싶으면 죽는 걸 감수해야 합니다. 이게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른 이야기가 더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먹으면 죽는다고 알려주는 것이고, 또 죽기 싫다고 하니까 먹지 말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게 알려줄 뿐입니다. 스님이 지금 자기 인생도 살기 바쁜데 무엇 때문에 남의 인생에 간섭까지 하겠어요?

지금 질문자가 괴롭다는 건 남편에게 뭔가를 해주고 나서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를 보고 싶어 했는데 너는 나 안 보고 싶니?’, ‘나는 널 사랑하는데 왜 너는 나를 사랑해 주지 않니?’, ‘나는 밥을 해줬는데 너는 왜 고맙다는 말을 안 하니?’ 이렇게 늘 바라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길 가는 사람한테는 해주는 것도 없고 바라는 마음도 없는데, 가족한테는 해주는 것도 많고 바라는 마음도 많습니다. 가족 관계에서 갈등이 심한 이유는 뭔가 해주고 나서 그것에 대한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이에요. 이것은 투자를 하고 나서 이익을 바라는 마음과 같습니다. 그것이 물질적으로 투자를 하고 나서 칭찬으로 보상을 받든, 칭찬으로 투자를 하고 물질적으로 보상을 받든, 뭐가 되든 보상을 받아야 마음이 풀리는 거죠. 또한 받을 때는 항상 이익을 조금 더 붙여서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막상 현실에서는 보상이 아예 오지 않거나, 오긴 오는데 충분하게 오지 않아서 손해 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어떤 사람이 장사를 하는데 거래처 사이에서 계속 손해가 나면 ‘거래를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거래를 끊으려고 해도 막상 다른 거래처가 마땅한 곳이 없으면 고민이 됩니다. 다른 거래처가 있으면 아예 그쪽으로 가면 되는데 마땅한 거래처도 없고, 이 거래처와 계속 거래를 하자니 적자가 나고, 그렇게 되면 계속 거래를 하면서도 불만이 쌓이게 됩니다.

지금 질문자가 남편한테 불만을 가지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나한테 이익이 되는 다른 남자가 있으면 벌써 정리를 하고 갔을 텐데 다른 남자가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 지금의 남편보다 이익이 남는다는 보장이 없는 거죠. 지금 거래하고 있는 남편이 이익을 보장해 주면 가장 좋은데 현재의 남편은 이익 보장을 안 해주고, 그렇다고 다른 거래처는 없고, 그래서 지금 고민이 되는 거예요. 여기서 고민의 핵심은 내가 이익을 보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익을 보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차피 이 사람과 거래를 이어나가면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데 계속 이익을 볼 생각을 하고 있으면 괴로움이 쌓여서 결국 거래를 끊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손실이 나는 것처럼 느껴져도 종합적으로 따져보면 꼭 손실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너무 이익을 따지지 말라는 거예요.

이때 아무런 보상이나 이익을 따지지 않는 것이 바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입니다. 그렇게 되면 가장 좋아요. 그런데 무주상보시까지는 안 되더라도, 너무 이익을 따지지는 말아야 내가 덜 괴롭습니다. 부부 사이는 상거래를 하는 사이가 아닌데, 자꾸 부부 사이를 상거래처럼 따지니까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말하는 사랑은 가만히 보면 전부 상거래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해' 라고 요구하는 것은 ‘내가 얼마 해줬는데 너는 얼마 해줄래?’ 하고 상거래를 하는 것과 똑같은 관점이에요. 모든 갈등이 상거래를 하는 관점을 갖고 있어서 생깁니다. 상거래를 하는 관점을 가지면 같이 살면서도 계속 갈등이 생깁니다. 상거래를 하는 관점을 놓아버리면 갈등도 사라집니다.

꼭 무주상보시로 살라는 말이 아니에요. 남편과 상거래를 끊자고 입장을 정리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계속 거래를 하려면 이익을 보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겁니다. 남편과 안 살겠다면 모르지만 계속 살려고 하면서도 상거래적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 내가 괴로워지기 때문입니다. 지금 상황이 남편과 거래를 안 할 수도 없다면, 남편한테서 이익을 보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내 괴로움이 적어집니다.

우리가 성매매라고 하는 것도 결국 성을 가지고 상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부부가 되면 성을 가지고 상거래를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 사이에 상거래하던 걸 부부가 되면 더 이상 상거래하지 않는 것이 아주 많습니다. 동시에 부부가 되어도 여전히 많은 부분을 계속 상거래하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표현할 때 성을 가지고 상거래를 하면 성매매라고 하고, 상거래를 안 하면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합의 하에 이뤄지지 않거나 상거래를 하는 관계에서 지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걸 성추행이라고 합니다. 괴로움이 없으려면 성매매를 하는 수준에서 사랑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일을 시키고 돈을 안 주는 것은 주인과 노예의 관계입니다. 일을 시키고 돈을 주는 것은 사장과 노동자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노동은 여전히 거래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을 하되 돈 받을 생각이 없는 자원봉사는 사랑과 같습니다. 남녀 사이의 사랑처럼 인간관계에서 거래를 안 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저 상대가 필요해서 도와주고, 상대가 목마르다고 하니 물 한 바가지 떠 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내가 이거 해주면 너 얼마 줄래?’ 이러지 않잖아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거래를 안 하고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토회 안에서는 서로 사랑하는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상거래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고, 정토회는 자원봉사자로만 운영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운영 방침은 상거래가 일상인 자본주의 사회와는 많이 다릅니다.

부모가 어린아이를 키울 때도 상거래하는 관점을 갖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 은근히 상거래하는 관점이 생깁니다. ‘내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너는 내 심정도 모르고’ 이렇게 말하는 건 상거래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상거래하는 관계이긴 합니다. 그러나 해탈을 하려면 상거래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상거래를 하면 늘 손해와 이익이 생기니까 희로애락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손해가 날 때는 괴로웠다가 이익이 생기면 기뻤다가 하는 희로애락의 윤회가 반복되는데, 이러한 희로애락에서 벗어나려면 상거래를 그만둬야 합니다. 손해와 이익의 관점에 서지 않으면 윤회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무조건 상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로서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추구하는 사람은 상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이익을 보는 게 목적이 아니라 윤회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게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거래의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무주상보시’란 내가 뭔가를 할 때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를 하고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바라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 핵심이에요. 내가 내 손으로 얼굴을 씻고 나서 얼굴한테 뭔가를 바라지 않듯이,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을 나의 일로 삼아서 하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가 안 된다고 해서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일반 사람인 거예요. 모든 사람이 다 상거래를 하면서 살아가니까요. 그러니 질문자도 상거래를 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냥 보통 사람인 거예요. 그러나 해탈이 목표인 수행자라면 상거래를 멈춰야 합니다.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려면 상거래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론 태어나면서부터 상거래를 하는 세상에 익숙해져 살아가기 때문에 상거래를 안 하기가 어렵죠. 사실 정토회도 자원봉사로만 운영한다는 원칙을 지켜나가기 위해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우리들의 관계를 상거래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로 설정을 했기 때문에 전부 자원봉사로 정토회를 운영하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를 해주셨기 때문에 정토회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정토회의 규모가 커지면 전문가들을 필요로 하는 분야가 많아질 겁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상거래하는 의식이 매우 강합니다. 비전문가들은 봉사를 하기가 그나마 수월한데, 전문가는 상거래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자원봉사를 하기가 힘들어요.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거나 전문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뭘 하나를 발표해도 사회에서 고액으로 임금을 주기 때문에 자원봉사로 일을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조직이 작을 때는 전문적인 영역이 크게 필요가 없지만, 조직이 커지면 전문적인 영역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집니다. 방송도 전문적인 영역이고, 영상 편집도 전문적인 영역이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유튜브에서 수익을 많이 발생시켜서 전문가를 고용하는 비용을 감당하면 되지 않느냐고 제안을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정토회가 더 이상 수행 단체가 아니라 회사가 됩니다. 사람을 고용해서 운영하면 아주 효율적인 회사가 될 수 있겠지만, 정토회의 핵심 가치인 수행 단체라는 정체성을 잃게 됩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는 작은 가족 회사를 운영할 거예요? 아니면 사랑의 공동체를 운영할 거예요? 이미 부부로서 동업은 시작한 거예요. 동업자한테 ‘나는 일을 많이 했는데, 너는 일을 적게 했다’ 하면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아예 동업을 깨든지, 아니면 가족 회사를 사랑의 공동체로 바꾸든지, 이제 질문자가 결정을 하세요.”

“네, 잘 알겠습니다. 수행자의 자세가 무엇인지 다시 새기겠습니다.”

“누구나 질문자와 같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모두가 무주상보시를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괴로움이 없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면 상거래를 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스님의 금강경 강의에서 연기법을 배웠습니다. '묻지 마 살인'이나 차량 급발진 사고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에 의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인연이 모인 까닭입니까? 제 가족이 그런 일을 겪었기에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 내 짐을 덜기 위해 다른 모든 이의 짐을 다 덜어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 저는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삶이 흔들릴 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법상조차 짓지 말라고 하시니 삶에서 어떤 원칙이나 신념도 가지지 말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화를 알아차리고 난 뒤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요? ‘화가 나고 있구나’ 하고 느끼지만, 그 감정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 가족에게 아침 정진이 제 자신을 위한 수행이라고 설명했더니 이기적이라고 하더군요. 정진을 할 때 가족을 위한 바람을 더해도 될지 궁금합니다.

학생들의 질문에 모두 대답을 하고 나니 약속한 두 시간이 금방 지나갔습니다.

“혹시 오늘 대화를 하면서 깨달은 바나 느낀 바가 있으면 한마디 하세요.”

대화를 마치고 스님은 학생들에게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두 명의 학생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 중에 ‘법이 법이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며’ 하는 것이 있습니다. ‘비법 비비법(非法 非非法)’이란 문장이 나와서 이건 무슨 랩도 아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읽고 또 읽고 하다 보니 그 뜻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스님이 쉬운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시니 그 뜻이 명확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아주 유익하고 재미난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학교를 지어주신 영상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스님이 대단한 일을 하신다는 것을 크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보시금을 먼저 보내게 되었어요. 제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JTS에 보시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깨닫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소감을 듣고 나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금강경을 배운다는 것은 불경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고 습득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인생의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마음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경전이 한문으로 쓰여 있고 옛날 표현이 많이 나오다 보니 그 뜻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진리는 문자가 아닌 내 삶 속에 있습니다

옛날에는 말이 좀 어려워야 진리 같아 보였나 봐요. 그런데 스님이 그것을 생활 언어로 쉽게 설명하니까 이제는 또 너무 가치가 없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문자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삶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갖고 접근해야 합니다. 한 번 들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반복해 들으며 진행자와 함께 일상에서 금강경의 내용을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금강경의 가르침이 여러분의 삶을 좀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데에 좋은 재료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달에 다시 즉문즉설 시간을 갖기로 하고 12시가 다 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교실별로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갖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와 오후 내내 실내에서 업무를 보았습니다.

해외에 나가 있는 동안 처리하지 못했던 여러 업무들을 보고, 앞으로 시리아 국민들의 문맹 퇴치 운동, 부탄 지속가능한 개발, 동티모르의 물 부족 문제 해결 등 JTS의 여러 사업들을 어떻게 진행할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저녁에는 아버님의 기일이라 형제들과 제사를 지내고 대화를 나눈 후 밤늦게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스님과 경주에서 불교학생회 활동을 했던 동문들을 위해 즉문즉설 대화 모임을 하고, 여성 INEB 정토회 스터디 투어 참가자들과 대화의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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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후

감사합니다!!

2024-11-09 15:48:03

희장엄

감사합니다 🙏

2024-11-08 18:19:41

드림하이

남녀 사이의 사랑처럼 인간관계에서 거래를 안 하는 것이 곧 사랑입니다. 그저 상대가 필요해서 도와주고, 상대가 목마르다고 하니 물 한 바가지 떠 주는 것이 사랑이에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에서는 ‘내가 이거 해주면 너 얼마 줄래?’ 이러지 않잖아요."

2024-11-07 11:5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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