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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에서 직접 시민들과 만나 즉문즉설을 하는 날입니다. 오전에는 온라인으로, 저녁에는 오프라인으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에 서울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저녁에 즉문즉설을 못 듣는 분들을 위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오전에 즉문즉설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오전에 시청이 가능한 분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도 하고, 시차가 다른 해외 분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이기도 합니다.
2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1시간 30분 동안 네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회사에서 5년째 혼자서 점심을 먹고 있다며, 어떻게 하면 하대를 받는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혼자 먹으면 밥이 목구멍으로 안 넘어갑니까?”
“저는 주로 회사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마주치면 되게 불편한 마음이 느껴져요. 다른 사람들은 다 두세 명씩 와서 자기 부서 사람들이랑 먹는데, 저는 혼자 와서 먹다 보니 '저 사람은 문제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서에서 친하지 않은 사람이 저를 빼고 다른 사람들과 밥 먹으러 나가자고 할 때 그 순간이 좀 힘들어요. 저는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 입장인데, 부서에서 친하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다른 직원들과 밥을 같이 못 먹게 되고, 구내식당에서 다른 부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 불편한 마음을 느낍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갖지 않고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옛날에는 밥을 혼자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항상 밥은 같이 가서 먹었죠. '같이 밥 먹자'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질문자는 아직 젊어 보이시는데 나이 칠십이 넘은 노인들이 하는 소리를 하시네요. 요즘은 혼밥 시대입니다. 요즘 편의점에 가보시면 사람들이 창문 쪽으로 앉아서 길 가는 사람에게 다 보이게 혼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어요. 식당도 어쩌다 사람들과 같이 갈 수도 있지만 혼자 가서 먹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저는 이 집단에서 5년 동안 일하고 있는데, 이곳이 보수적인 집단이다 보니 눈치가 보여서 불편한 마음이 있어요.”
“첫째, 지금은 사회 전체가 혼밥 시대니까 ‘나는 시대를 앞서간다’ 이렇게 생각하고 혼자 먹으면 됩니다. 제가 밥이 목구멍에 안 넘어갔냐고 물어봤잖아요? 혼자 먹어도 밥이 넘어가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밥이 안 넘어가고 자꾸 체한다면 문제입니다. 그러나 밥이 잘 넘어가고 체하지도 않으면 혼자 먹는 건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다 혼자 먹는 시대로 갈 거니까 ‘나는 앞서가는 사람이다’ 하고 생각하면 됩니다.
옛날에는 여자가 혼자 사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나이가 서른이 넘어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 사람들이 '저 여자는 무슨 문제가 있나?' 하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서 혼자 사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까, 결혼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질문자는 지금 옛날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혼자 밥을 먹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기 밥 먹기 바빠요. ‘저 여자는 왜 맨날 혼자 밥을 먹을까’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별로 큰 문제가 아닙니다.
둘째, 남하고 같이 먹고 싶으면 본인이 밥을 사면 돼요. 직원들한테 '오늘 제가 저녁 한 끼 사겠습니다' 하고 제안하면, 사람들이 '네가 사는 건 안 먹는다' 이럴 수도 있고, '그래. 그럼 같이 가서 밥 먹자' 이럴 수도 있어요.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리려면 돈을 좀 써야 돼요. 사람들이 다 '법륜스님, 법륜스님' 하는 이유가 뭘까요? 상담을 무료로 해주기 때문입니다. 한 번 상담할 때마다 돈을 100만 원씩 받으면 많은 사람들이 법륜 스님을 찾겠어요? 여러분들이 의사에게 돈 주고 치료를 받으면 고맙기는 하지만 그걸로 끝이잖아요. 도움을 주든지, 돈을 주든지, 내가 뭔가 베풀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베푼 것 없이 다른 사람이 나한테 다가와서 '밥 먹자'라고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 안 돼요. 그냥 혼자 먹든지, 질문자가 밥을 사든지 해야 합니다.”
“제가 밥을 혼자 먹게 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있는 부서가 연구소인데, 연구원들은 상사가 우쭈쭈 해주어서 우대를 받고, 저는 행정직원이어서 하대를 받았습니다. 한 연구원이 저한테 되게 싸가지 없게 말을 해서 사이가 틀어졌는데, 연구원이 대다수이고 저는 소수에 속하다 보니 그 연구원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자기들끼리 밥 먹으러 우르르 몰려 나가고, 저만 소외가 되는 상황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럼 질문자도 지금 박사학위 따서 연구원으로 들어가세요.”
“저는 그 일을 하기가 싫어요.”
“그 일을 하기가 싫으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요. 연구원은 연구원들끼리 밥 먹으러 가는데 행정직원이 왜 따라오나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 일은 하기 싫은데 그 사이에는 끼고 싶다는 건 질문자가 너무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연구원이 우대받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하세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하겠다는데 어떡해요? 예를 들어, 직업 군인이 되었는데 내가 장교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요. 그런데 젊은 장교들이 자기들끼리 밥 먹으러 가는 걸 내가 어떡해요?”
“그런 상황이에요. 지들끼리 잘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박사 따서 연구원으로 들어왔으니까 잘났잖아요. 질문자는 그런 일을 하기 싫어서 안 했다면서요? 잘난 것을 잘났다고 하는데 뭐가 문제예요?”
“저는 단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 안 하는 것뿐인데, 자기들끼리 잘났다고 자기들끼리 밥 먹고 싸가지 없게 하니까 제가 힘들죠. 점심을 5년 동안 혼자 먹고 있는 상황이에요.”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데, 혼자서 밥 먹을 수 있으니 좋잖아요.”
“그 인간들이랑 밥을 안 먹는 건 괜찮은데, 매번 밥을 혼자 먹는 저를 쳐다보는 다른 부서 사람들의 눈빛이 따가워요.”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해요. 질문자 혼자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리고 다른 부서 직원들이랑 밥을 같이 먹으면 되잖아요.”
“제가 시도해 봤는데 본인 스케줄이 바쁘니까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아요. 가끔 같이 먹을 수 있지만 자주는 안 돼요.”
“그러면 가끔 같이 밥을 먹으면 되잖아요. 가끔이라도 같이 먹으면 '쟤한테도 친구가 있네' 이럴 거 아니에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30분 늦게 밥을 먹어야 하면 질문자가 30분 기다렸다가 같이 먹으면 되죠. 일찍 먹어야 하면 질문자가 일찍 나와서 같이 먹으면 되고요. 내가 남하고 같이 밥 먹고 싶을 때는 내가 을이 됩니다. 을이 되면 갑의 의사에 따르고 기다려야 됩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한테 내가 전화를 먼저 해야 되고, 좋아한다는 표현도 내가 먼저 해야 되고, 밥을 같이 먹으려면 내가 먼저 밥을 사야 됩니다. 내가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이렇게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대가 너무 바쁘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고 그냥 혼자 먹으면 됩니다. 요즘은 혼밥 시대라니까요. 누가 밥을 같이 먹자고 해도 '요즘은 혼자 먹는 게 새로운 트렌드란다' 이렇게 말해주면서 혼자 먹는 것에 대해서 자신감을 가지세요. 만약 남과 같이 밥을 먹고 싶다면 그 사람한테 시간을 맞추든지, 돈을 내가 내든지, 비위를 맞추어야 됩니다. 비위는 맞추기 싫고, 혼자도 먹기 싫으면, 길이 없어요.”
“연구소에서 일하다 보니 연구원들과의 마찰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제가 객관적으로 잘못한 것이 없어도, 연구원들은 자신들이 더 우월하다는 의식 때문에 저를 하대합니다. ‘이 정도는 네가 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말해서 사이가 많이 악화되었는데, 이런 상황이 5년 동안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행위가 법적으로 차별이라고 판단이 된다면 회사에 진정서를 내면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말한 정도의 갈등은 어느 직장에서든 흔히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요? 군대에서도 아무리 오래 복무했다 하더라도 직급이 하사관이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오늘 장교로 부임해 온 사람을 상사로 대해야 합니다. 그것처럼 질문자는 행정직원이니까 연구원들은 질문자보다 직급이 높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학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대를 나와서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교사가 된 사람이 있고, 서무과에서 일하는 행정직원이 있어요. 교사들은 서무과 직원들과 자신들을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어떡해요? 만약 질문자가 어떤 절에 30년을 다녔어요. 그런데 스님이 된 지 3년밖에 안 된 젊은 스님이 새로 들어왔어요. 이 사람은 머리 깎고 승복을 입고 스님이라 하더라도 질문자보다 불교에 대해 잘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절에 30년을 다녔지만 내 직급은 신도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한테 절을 해야 돼요? 불교도 잘 모르고 나이도 어리고 절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도 스님이니까 절을 해야 하잖아요.
이런 갈등은 옛날부터 있었어요. 왕조시대에 대신들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왕이 죽자 그 아들이 왕이 됐어요. 왕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아이인데 존경이 되겠어요? 그래서 좀 뻣뻣하게 대하니까 왕이 나중에 아버지 신하들을 다 잘라버립니다. 그게 세상이에요.
연구소는 박사학위 따서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중심입니다. 그 일을 돕는 행정 직원이 중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앞으로 1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예요. 질문자가 정년퇴직할 때가 되면 질문자의 아들딸 뻘 되는 연구원들이 들어올 거예요. 그래도 직급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상황은 똑같습니다.”
“저도 배울 만큼 배웠고, 학위를 딸만큼 따고, 유학도 갔다 왔습니다. 그들이랑 학력은 비슷하거든요.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그래서 질문자가 문제라는 겁니다. 다른 행정직원들은 그런 학벌이 없으니까 직원으로서 잘 생활하잖아요. 그런데 질문자는 연구원 이상으로 학벌이 있는데도 다만 이 회사에 뽑힐 때 연구원이 아닌 직원으로 뽑혀서 생긴 문제입니다. 질문자가 많이 안 배웠으면 이런 갈등은 생기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잘나 보이지 않아요. 그게 문제인 것 같아요.”
“그럼 회사를 그만두는 수밖에 없어요. 연구소에 가지 말고 행정직원들이 많이 일하는 다른 회사로 가세요. 연구원들은 질문자와 직급이 다른데, 질문자가 동일하게 대우받으려니까 계속 갈등이 생기는 겁니다. 계속 그렇게 행동하면 연구원들끼리 모여서 질문자에 대해 '저 사람은 진짜 자기 분수를 모른다' 이렇게 수군댈 위험이 높아요.”
“그럼 제가 그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해주면 되는 건가요?”
“친절하게 대해주지 않아도 돼요. 그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 해주면 됩니다. 그 사람들을 거부하지 말고, 그냥 행정직 업무에 해당되는 일을 충실하게 해 주면 돼요. 행정업무가 아닌 것은 연구원들이 하도록 하고, 행정업무는 내가 충실히 해서 그 사람들이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면 됩니다. 행정직은 연구직을 지원하도록 되어 있잖아요. 그건 질문자의 직업이니까 열심히 해야죠.”
“제가 열심히 지원을 해줘도 인정을 안 해주니까 저는 열이 받습니다. 저는 제 일을 문제없이 다 하는 데도 저를 하대하니까요.”
“질문자가 행정직을 잘한다고 연구원으로 대우를 해주지는 않습니다. 질문자의 생각이 너무 편협해요. 편협한 생각의 뿌리는 질문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까지 하고 학벌이 높은데 연구원으로 취직하지 않고 행정직원으로 취직한 데에 있어요. 연구원이 싫어서 행정직원으로 들어가고 보니, 나도 그들과 학벌도 비슷하고 배울 만큼 배웠는데 연구원의 직책이 더 높은 겁니다. 군대에 갈 때 다른 사람은 장교 시험을 쳤는데, 질문자는 하사관 시험을 친 거예요. 질문자가 더 좋은 대학을 나왔다 하더라도 직급이 다릅니다. 내가 절에서 30년간 행정직을 했더라도, 절의 책임자로 직급이 주어진 사람은 스님인 것과 같습니다. 이 세상에 살려면 이런 정도는 질문자가 수용하는 게 필요합니다.”
“그럼 저는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20년 동안 밥을 혼자 먹어야 되겠네요.”
“연구원들한테 서비스를 잘해주고, 자기 일이 아니더라도 연구원이 어려워하는 일까지 지원해 주고, 그런 노력들이 쌓이면 연구원들이 '언니, 밥 같이 먹자' 이렇게 할 때가 올 겁니다. 행정직 업무에 플러스 알파로 연구원들의 일을 도와주어야 해요. 신입 연구원들은 연구를 제대로 못 하잖아요. 질문자는 경험이 많으니까 신입 연구원들이 하기 어려운 일들, 예를 들어 자료를 찾아주거나 연구 결과를 정리해 주든지 이렇게 동생처럼 돌보면서 일을 거들어 주면 연구원들이 질문자를 고맙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언니, 같이 밥 먹으러 가자' 하고 말하는 일들이 생길 겁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오랫동안 간절히 준비해 온 승무원의 꿈이 생각지도 못한 이유로 두 번이나 좌절이 되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시기를 이겨내야 할까요?
신내림을 받은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불교에 대한 가치관과 신어머니가 강요하는 무속인으로서의 삶의 방향이 달라서 매우 혼란스럽고 괴롭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까지 이어진 부모님의 폭언과 구타의 상처로부터 어떻게 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 오후 2시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가졌습니다. 이어서 오후 4시에도 손님들이 찾아와서 미팅을 했습니다.
미팅을 마치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 지하 대강당에서 오프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장 접수를 하고 번호표를 한 장씩 추첨함에 넣은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유튜브에 4,900여 명이 접속하고 현장에서 400여 명이 자리한 가운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사전 공연이 있은 후 스님이 지난 한 달 동안 튀르키예-시리아 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하고 부탄에서 JTS 워크숍을 하고 온 모습을 영상으로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고 나서 스님이 무대 위로 올라왔습니다. 스님이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렇게 얼굴을 직접 보면서 대화할 수 있어서 저도 아주 편안하고, 여러분도 좋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금요 즉문즉설을 할 때 제가 항상 서서 대화를 했습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무릎이 아픕니다. 온라인으로도 보기에 불편했다는 댓글도 많이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앉아서 하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이어서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현장에서도 두 명이 추가로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남편이 계속 살이 쪄서 헬스장을 끊어줘도 소용이 없는데 어떡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럴 때는 ‘예, 팔려고 그럽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소를 팔려면 무거워야 하잖아요.” (웃음)
“네, 그럴 때는 그냥 웃고 맙니다. 이제 저희 둘 다 오십이 다 되어서, 남편이 외모보다 건강을 위해 살을 뺐으면 좋겠습니다. 건강검진을 받으면 전부 위험 수준으로 나오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제가 운동을 하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저도 열심히 하는 건 아니지만, 남편은 너무 안 합니다. 제가 살림만 하다가 아이들이 커서 이제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남편을 헬스장에 보냈습니다. 너무 멀거나 목욕을 할 수 없는 곳에는 남편이 가지 않으려고 해서 집 근처에 비싼 헬스장을 등록해 주었습니다. 지난 삼 년 동안 헬스장에 쓴 돈이 300만 원을 넘었습니다. 저는 남편이 90kg대만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계속 살이 찌고 있습니다. 제가 잔소리하고, 또 그러면 남편이 화내는 것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가 남편을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계속 얘기해 주어야 할까요?”
“첫째, 건강을 생각해서 계속 얘기해 주는 게 좋습니다. 남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질문자가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여보, 헬스장에 다녀도 변화가 없으니 돈이 좀 아까운 것 같네. 그만 다닐래?’ 이렇게 한번 물어보셨어요?”
“네, 그러면 안 하겠다고 해요.”
“그러면 헬스장 가는 건 그만두게 하세요. 헬스장에 다니지 않고 한 1년 지내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습니다. 몸무게를 줄이려고 다니는 게 아니라 불어나는 속도를 줄이기 위해 다니는 것도 방법이에요. 우리는 보통 병을 치료할 때 자꾸 완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치료에는 원래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는 치료도 있지만, 어느 정도만 회복하게 하는 치료도 있고, 더 이상 나빠지지 않도록 하는 치료도 있습니다. 나빠지더라도 그 속도를 늦추는 치료도 있습니다. 치료를 받을 때 우리는 완전히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치료가 별로 효과가 없다 싶으면 ‘치료 받아도 소용없네’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건강을 완전히 되찾는 치료, 어느 정도만 회복되는 치료, 심해지는 것을 멈추는 치료, 악화되는 속도를 늦추는 치료, 이 네 가지 모두를 치료로 보셔야 합니다. 남편 문제도 이렇게 보시면 좋겠습니다. 남편의 몸무게를 줄이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헬스장에 삼 년을 보내도 효과가 없다’ 하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그 정도라도 다녔기 때문에 몸무게가 느는 속도가 느려졌는지 모릅니다. 물론 아무 효과가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남편이 당분간 헬스장에 가지 않으면서 몸무게 변화를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사회는 누구도 내 의견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점을 아셔야 합니다.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상대가 가족이어도 그렇고, 부모가 자식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선생님도 학생에게 강요할 수 없습니다. 요즘에는 이걸 학대나 폭력으로 봅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사회가 인권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사가 학생에게 강요하면 학교 폭력이 됩니다.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강요하면 가정폭력이 됩니다. 예전과 많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남편이 자기 부인을 때리거나 자기 자식을 때리는 것을 당연하게 보았습니다.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도 당연하게 보았습니다. 지금은 모두 폭력에 해당합니다. 무엇이 좋고 나쁘다는 관점에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시대가 변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거예요. 가족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어서 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더라도, 본인이 거부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강제로 입원시키려면 다른 사람을 해쳤다거나, 누가 보더라도 이상한 행동을 했을 때 가능합니다. 방에서 나오지 않는다거나 화를 좀 많이 낸다고 강제로 입원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이성이 마음에 들어서 사귀자고 한두 번 말했는데 상대는 내키지 않습니다. 이럴 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하면서 계속 따라다니면 스토킹이 됩니다. 예전에는 사랑이 참 간절하다는 시선으로도 봤지만, 이제는 법적으로 접근 금지 명령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가치관이 이렇게 변했어요. 그래서 부부끼리도 상대에게 자기 의견을 말할 수는 있지만 잔소리를 하시면 안 됩니다.
질문자가 아무리 얘기해도 남편 스스로 건강을 챙기지 못해서 일찍 죽는 것은 질문자에게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질문자가 남편을 죽인 게 아니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저는 당신께 알려드렸어요, 선택은 당신이 하세요. 당신이 일찍 가시면 저는 한 번 더 결혼할 수 있으니 좋습니다’
이런 마음을 내며 스스로 위로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잖아요? 질문자가 걱정해서 남편이 좋아진다면 계속 걱정을 해야겠지만, 그런다고 개선되지 않잖아요. 걱정하면 질문자만 손해입니다. 손해 나는 짓을 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질문자가 마음을 바꾸셔야 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죽고 싶으시면 제가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어요. 일찍 가시면 저는 결혼을 한 번 더 해볼 수도 있고, 혼자 살아도 되니 좋습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사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내 말을 안 듣네. 그럼 그냥 죽어라’ 이렇게 하는 건 아니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조건에 놓이더라도 그것 때문에 괴롭다고 생각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집니다. 그게 운명이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자세로 산다면,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나는 이혼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남편이 바람을 피웠네.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이렇게 자기가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의 굴림을 당하지 않으려면 ‘이런 세상에서 나는 이렇게 선택하고 살겠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나에게는 장애 아이가 있어서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 이럴 게 아니라 ‘나에게는 장애 아이가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어떤 조건에 있더라도 스스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한문으로는 ‘수처작주(隨處作主)’라고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주인이 되는 사람이 바로 ‘붓다’입니다. 우리는 모두 붓다가 될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대강당에 모인 청중이 모두 빠져나가고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서 스님의 사인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 강연 듣고 제가 정말 행복해졌습니다!”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봉사자들이 모두 무대 위에 올라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강연을 준비한 분들은 정토회 인천경기서부 지부 회원들입니다. 봉사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두 번에 걸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인천경기서부, 파이팅!”
스님은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정토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정토담마스쿨 학생들과 온라인 즉문즉설을 하고, 생방송으로 정토불교대학 입학식을 한 후, 오후에는 김홍신문학관 개관 5주년 기념식 초청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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