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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죄의 흔적을 쫓아서’(Der Schuld auf der Spur)를 주제로 스위스에서 진행되는 심리학 심포지엄의 마지막 3일째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숙소를 나와 주변을 산책했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국제 조각 전시회인 트리엔날레 바드라가츠(Triennale Bad RagARTz)가 열리고 있어서 골목마다 다양한 조각 작품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몇몇 재미있는 조각품들을 보고 스님도 웃음을 머금었습니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오늘 심포지엄에서 스님과 대담을 나누게 될 자네트 피셔(Jeannette Fischer) 박사님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습니다. 오늘 오전에 진행할 대담에 대해 의논하면서 스님은 무엇보다 청중에게 질문할 시간을 충분히 주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짐을 다 싸서 숙소를 나온 후 9시 30분부터 심포지엄의 마지막 세션을 시작했습니다. 창밖으로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렸습니다.
먼저 사라 엘 불베이시(Sarah El Bulbeisi) 박사가 독일과 스위스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경험을 연구한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녀는 이들이 어떻게 차별과 억압을 경험하고, 이로 인해 겪는 고통과 트라우마가 어떻게 자녀 세대까지 전해졌는지를 설명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독일과 스위스에서 사회적, 경제적 어려움과 편견에 직면해 있습니다. 특히, 1980년대에 독일로 온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제한된 체류 허가 상태로 인해 항상 추방될 위협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그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자신의 정체성을 자유롭게 드러내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1세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강제로 떠나야 했던 아픔을 안고 있으며, 이 아픔은 자녀 세대에게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2세대인 자녀 세대는 부모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돕고자 했지만, 동시에 자신들도 사회에서 차별과 억압을 경험하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는 종종 복잡하고 힘들었으며, 감정적인 거리감이 생겼습니다. 그녀의 발표를 통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유럽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10시 50분부터는 스님이 자네트 피셔(Jeannette Fischer) 박사님과 대담했습니다. 스님의 통찰력과 지혜를 참석자들과 종합적으로 나누고 싶어서 일부러 심포지엄의 피날레에 스님과의 대담 시간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먼저 피셔 박사님이 “스님은 언제 출가했나요?”, “왜 출가했나요?”, “출가할 때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등 스님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이어서 2박 3일 동안 심포지엄을 지켜본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저희가 발표하고 토론한 내용을 지켜보시면서 소감이 어떠셨나요? 스님께서 저희에게 짚어주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이야기해 주세요.”
스님은 가볍게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죄와 죄책감에 대해서 윤리적으로 심리학적으로 법률적으로 경제적으로 이렇게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살펴본 것이 참 좋았습니다. 특히 성 노동자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까지 발표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여러분들의 질문이 많았던 것도 좋았습니다.
토론 중에 누군가 신이 있는지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신이 있느냐?’, ‘윤회하느냐?’ 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한 사람은 신이 있다고 주장하고, 한 사람은 신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어느 것이 맞느냐?’ 하고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의 믿음이 다르구나’ 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개인이 갖는 자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고해성사에 대해 발표하면서 고해성사란 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불교에도 고해성사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불교에는 ‘신에 의한 원죄’와 같은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자로서 누구나 지켜야 하는 계율이 있습니다. 그 계율을 어겼을 때 참회와 포살을 하게 됩니다. 첫째, 스스로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자각하고 다시는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반성하는 것을 참회(懺悔)라고 합니다. 둘째, 우리가 같이 어울려 살 때, 내가 내 잘못을 참회했다 해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내가 참회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저 도반은 왜 계율을 어겨놓고 뻔뻔스럽게 있냐?’ 하고 주변에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공동체 구성원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드러내어 참회합니다. ‘제가 이러이러한 잘못을 했는데, 그것을 자각하고 있고 앞으로 개선하겠습니다’ 하고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내어 참회합니다. 그때 대중이 받아들이면 그것은 없었던 일이 됩니다. 이것을 ‘포살(布薩)’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 사함’이라고 할 수 있겠죠. 다른 점이 있다면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 사함을 준다면, 불교는 대중이 죄 사함을 준다는 것입니다.”
“전체가 동의를 하면 죄 사함을 받게 되는 건가요?”
“네.”
“그럼, 누구 하나가 반대를 하면 어떻게 되죠?”
“반대를 하면 다시 그 문제에 대해 대화를 더 나누게 됩니다. 셋째, 이것보다 조금 더 나아가서 내가 잘못했는데도 내가 잘못한 줄을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본인 스스로 드러내어 참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 년에 한 차례씩은 대중에게 이렇게 요청합니다.
‘여러분들이 보시기에 제 말과 행동을 보고 혹시 계율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을, 저를 위해서 지적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그것을 듣고 알아서 개선하겠습니다.’
이것을 ‘자자(自恣)’라고 합니다. 자자는 반드시 같이 사는 사람들끼리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섯 명이든 열 명이든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자를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같이 살지 않는 사람은 상대의 잘잘못을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적하는 사람이 오해했을 수도 있으므로 꼭 반성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가 있으면 그 시간을 이용해서 오해를 풀 수도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는 그 문제에 대해 누군가가 선입관을 가지고 다시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드러내어 참회한 것은 없었던 일이 됩니다. 만약에 참회했는데도 지나간 것을 두고 누군가가 또 문제로 삼는다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이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리고 자살에 관한 질문이 있었는데요. 자살은 내가 내 생명을 죽이는 것이니까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자살은 살인과 똑같습니다. 살인은 타인을 죽이는 것이고, 자살은 자기를 죽이는 것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타인을 죽이면 살인자를 처벌할 수 있지만, 자살은 자기를 죽인 것이기 때문에 처벌할 대상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처벌을 못할 뿐 자살이 아무런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자살은 주변에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했을 때도 주위에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지만, 자살했을 때도 살인하는 것 이상으로 주위 가족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피해를 줍니다. 본인은 죽는 순간 그걸로 끝이지만, 부모에게는 자식을 잃은 것이 되고, 남편이나 아내에게는 배우자를 잃은 것이 되고, 자식에게는 부모를 잃은 것이 되기 때문에 굉장한 정신적인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맞습니다. 누가 자살을 하면 가족들은 엄청난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마치 가족이 죄를 지어서 그 사람을 살인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존엄사’는 자살과 성격이 다릅니다. 존엄사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벼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삶을 중단하는 행위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 생명을 죽이는 자살도 반생명적이지만,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살리려고 하는 연명치료도 반생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은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첫째,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 많이 발병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를 도외시하는 편입니다. 정신질환을 치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다수입니다. 이것이 첫째 원인입니다. 둘째, 남을 의식하며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실패하거나 경쟁에서 뒤처졌을 때 자살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피셔 박사님과의 대담을 마치고 청중들로부터 자유롭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심포지엄 주제인 ‘죄’와 ‘죄책감’에 대해 많은 질문이 나올 것을 기대했는데, 오히려 불교에 관한 질문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에는 죄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스님이 분쟁 지역에 학교를 짓는다는 사실에 감동하였습니다. 분쟁 지역의 어린이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었나요?
한국은 불교의 영향을 얼마나 크게 받고 있습니까?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관계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나요?
존엄사처럼 어떤 경우에는 자살이 죄로 간주하지 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연명치료와 존엄사를 어떻게 다루고 있나요?
티베트와 부탄 사람들은 매우 평화로워 보입니다. 불교가 어떤 면에서 이들을 평화스럽게 만듭니까?
불교 안에서도 인생의 강렬한 즐거움이나 예술혼을 만끽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합니까?
강연이 끝나갈 무렵에는 불교와 죄의식, 에고에 관한 질문들도 나왔습니다.
“특별한 절차는 없습니다. 전통적인 사찰은 대부분 복을 빌어주는 기능을 하며 운영이 됩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은 죽어서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해 주거나 복을 받게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이 없는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저는 불교 신자든지 아니든지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의 고뇌를 얘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서 대화를 통해 죄책감과 괴로움을 해소하게 해주는 역할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금요일마다 담마 토크를 하는데, 그날은 누구든지 와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자리는 다른 사람도 지켜볼 수 있게 오픈되어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에고가 작용하지만 에고의 실체는 없다, 이것이 불교의 관점입니다.”
스님은 다양한 질문에 대해 짧게 대답을 이어갔습니다.
“함께라는 것을 자꾸 강조하게 되면 타인을 나와 동일시하는 부작용이 또 생깁니다. 손가락을 보면 다섯 개가 각각 다르지만, 한 손에 있듯이 ‘다른 가운데 하나이다’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함께’만 강조하게 되면 단일화로 자꾸 나아가게 되어서 서로 다른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분쟁이 일어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가족 간의 분쟁은 주로 같아야 한다고 강조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즉문즉설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마지막으로 INEB(국제참여불교연대)를 통해 정토회를 방문한 적이 있는 묘하이 스님이 손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이 대답했습니다.
“명상이란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명상을 해보시면 알겠지만, 생각을 멈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각을 멈추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멈추기가 쉽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겁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씀을 드리면, 내가 만약 붉은 색깔의 안경을 끼고 있다면 이 흰 벽이 붉게 보입니다. 파란 색깔의 안경을 낀 사람은 이 흰 벽이 파랗게 보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붉다.’, ‘파랗다.’ 하고 논쟁합니다. 만약 각자가 안경을 벗어버린다면 논쟁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경을 벗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안경을 벗지 못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저 벽이 푸르다고 할 때 ‘내 눈에는 붉게 보이지만 저 사람의 눈에는 푸르게 보이는구나!’ 이렇게 다름을 인정하기만 해도 분쟁은 안 일어납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벌써 마쳐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죄, 죄의식, 죄책감에 관한 질문이 충분하게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지만 시간이 다 되어 큰 박수와 함께 강연을 마쳤습니다.
참가자들도 아쉬움이 남았는지 강연이 끝났는데도 몇몇 사람들이 스님을 찾아와서 개인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받아들여야죠.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그의 자살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죄책감을 느낀다고 도움 될 것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죄책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 능력에 대한 과신 때문입니다. 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잖아요. 내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도 마치 덜 노력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죄책감을 느끼게 되는 겁니다.
만약 누가 나에게 1,000달러를 빌려달라고 했는데 안 빌려줄 때는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러나 1억 달러를 빌려달라고 할 때는 전혀 미안해하지 않고 ‘없다.’ 하고 가볍게 대답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데 안 한 일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들지만, 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죄책감이 들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도움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심포지엄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눈 후 행사장을 나온 스님은 묘하이 스님과 함께 점심 식사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묘하이 스님은 참여 불교에 많은 관심이 있는 분이고, 스위스에서는 명상센터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함께 식사하며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오후 2시 40분에 바드라가즈(Bad Ragaz)를 출발하여 한국 교민들을 위한 강연을 하기 위해 취리히로 향했습니다.
차로 1시간 20분을 달려 오후 4시에 취리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취리히 도심으로부터 남서쪽 외곽에 위치한 성모리스 성당(Katholische Kirche Sankt Mauritius)입니다.
스님은 강연장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봉사를 하기 위해 스위스뿐만 아니라 런던, 파리, 이탈리아, 독일 등 유럽 전역에서 먼 길을 달려왔다고 합니다. 봉사자들은 직접 만든 김밥과 떡을 함께 먹은 후 강연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대기실에서 잠깐 휴식을 한 후 저녁 6시가 되어서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80여 명이 성당 안을 가득 메운 가운데 큰 박수와 함께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밝고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스님은 지난 3일 동안 심리학 심포지엄에 참석한 소감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저는 지난 3일 동안 심리학회에서 주최하는 죄와 죄책감, 죄의식에 대한 심포지엄에 참석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세션을 맡았는데. 청중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하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아마도 제가 외국인이고 스님이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참회를 한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고해성사를 한다고 죄가 없어집니까?’ 이렇게 주제에 맞는 질문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왜 스님이 되었나요?’, ‘한국 불교는 어떻습니까?’ 이런 피상적인 질문이 많아서 조금 아쉬웠어요. 그러니 오늘 여러분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어떤 죄의식이든, 무거운 짐이든, 고뇌든, 의문이든, 편안하게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누구든지 손을 들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두 시간 동안 다섯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한국에 있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혼자 살고 있는데 옆에서 보살펴 드리지 못하는 사실에 죄책감이 든다며 어떡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나는 나쁜 딸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울면서 살면 되죠. 본인이 보기에도 내가 나쁜 사람이라면 벌을 당연히 받아야 할 것 아니에요? 지옥에 갈 행동을 하고 나서 하느님께 천당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건 이치에 안 맞잖아요. 본인 스스로 ‘나는 부모님께 해야 할 도리를 다 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하고 생각한다면 벌을 기꺼이 받아야지요. 반대로 자기 스스로 이기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요. 어떤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이기적이지 않으니, 너의 삶을 살라는 말을 스님께 듣고 싶습니다.”
“자기 스스로 이기적이라고 이미 규정을 해놓고 왜 이기적이지 않다는 말을 또 듣고 싶어 해요? 모순이잖아요? 질문자가 운다고 어머니에게 무슨 도움이 됩니까? 어머니에게 도움이 되려면 여기서 울고 있지 말고 한국으로 가든지요. 울면서 여기서 힘들게 생활하는 걸 엄마가 좋아할까요? 엄마가 보기에는 내 딸이 스위스에 살면서 엄마 걱정하고 울면서 사는 게 좋겠어요? 웃으며 잘 사는 게 좋겠어요?”
“제가 행복하게 사는 걸 좋아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 와서 어머니를 보살피지도 않고, 매일 울어서 엄마를 슬프게 만들고, 이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잖아요.
‘엄마, 내가 한국에 가서 엄마를 돌봐드리는 건 어려워요. 대신에 여기서 내가 용돈을 많이 보내드릴게요. 이걸로 제 역할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렇게 엄마에게 말하든지, 아니면 매일 전화를 하든지, 일 년에 한 번은 한국에 가든지, 질문자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하지 않겠어요?
질문자가 웃으면서 사는 게 부모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겁니다. 부모님으로서는 자식이 한국에 오면 제일 좋지만, 한국에 못 들어오더라도 자식이 웃으면서 사는 걸 가장 원할 겁니다. 자식이 울면서 사는 걸 원하는 부모는 없어요.
제가 볼 때는 질문자가 뭘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부모님께도 도움이 안 되고, 자기한테도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을 하는 건 그냥 어리석은 겁니다. 한국에 가려면 내일 당장 짐을 싸서 가세요. 한국에 못 가는 것이 이기적인 것은 아니에요. 본인이 선택하고 책임지면 될 뿐입니다. 못 가겠으면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사과해야 할 것 아니에요?
‘어머님이 혼자되셨으니, 제가 가서 돌봐드려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여기서 열심히 일해서 매달 생활비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최소한 열흘에 한 번은 전화를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구체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니에게 용돈을 보내드리고 있어요?”
“보내드립니다.”
“울고 있는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게 낫다는 겁니다. 울고 슬퍼하는 것은 어머니한테도 도움이 안 되고, 나한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걸 두고 ‘어리석다.’ 하고 표현합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괴롭힌다는 뜻이에요. 내가 남을 때렸다고 합시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면 나쁜 짓인데, 내 관점에서 보면 어리석은 짓입니다. 내가 상대를 때릴 때는 주먹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그에 따른 과보는 폭행죄로 감옥에 가는 겁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에게 손해를 입히고, 자기가 자기를 해치고, 자기가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어리석다고 해요.
타인에게 손해를 입히거나, 타인을 해치거나, 타인을 괴롭히는 것은 나쁜 짓이라고 합니다. 나쁜 짓은 자신을 기준으로 보면 손해를 끼치는 일이에요. 그래서 어리석은 짓이라고 표현하는 겁니다. 불교에서는 나쁜 짓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어리석은 짓이라고 표현 합니다.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면 나에게 손해 나는 짓을 하지 않게 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좋은 일을 해라’ 이렇게 말하지 않고 주로 ‘지혜롭게 행동해라’ 이렇게 말합니다. 즉 어리석은 짓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지금 질문자가 하는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에요. 아무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짓을 하고 있습니다.
자꾸 울면 남한테 동정은 받을 수 있겠죠. 그러나 질문자가 정말로 엄마를 생각한다면 울지 말고 용돈을 보내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연락을 드리거나 실제로 엄마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한국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기꺼이 가고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처럼 어리석은 상태에서 한국에 들어가게 되면, 자기 생각대로 일이 잘 안 풀리게 되면 그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지 않고 어머니한테 화살을 돌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어머니 때문에 내가 한국에 돌아왔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만 아니었으면 내 마음대로 스위스에서 살았을 텐데, 엄마 때문에 한국에 돌아와서 이렇게 됐다.’ 하고 모든 책임을 엄마한테 전가할 위험이 있어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더라도 내가 결정해서 들어가야 합니다. 스위스에 있더라도 내가 결정해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 내가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의 사고방식은 굉장히 무책임한 사고방식이에요. 그래서 지금과 같은 어리석은 행동이 나오는 겁니다.
어머니는 질문자가 없어도 잘 살고 계세요. 딸이 옆에 있어 주면 좋겠지만 세상일이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수가 없잖아요. 딸이 옆에 없더라도 보내주는 용돈 받아 가면서 잘 사실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어머니의 문제가 아니라 질문자 본인의 문제입니다. 계속 스위스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고, 엄마한테 효녀 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도 있고. 이렇게 두 가지를 다 하려는 것은 욕심입니다. 그러니 본인이 하나를 선택하세요.
내가 스위스에 계속 산다고 해서 그게 이기적인 행동은 아니에요. 인간은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해가 되지 않는다면, 본인 의지대로 살아도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금전적 지원을 해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연락을 드리는 방식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다 싶어요.”
“네, 잘 알았습니다.”
“부모가 되면 자식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간절한 소원을 못 들어준다고 해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부모님의 바람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뭘 그런 걸 나한테 원하십니까?’ 이렇게 따져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부모님과 나는 생각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부모님으로서는 그럴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죄송합니다. 제가 그렇게는 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갈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부모가 원하는 대로만 자식이 살아야 한다면 그건 자유인이 아니고 노예입니다. 왕의 노예나 부모의 노예나 노예는 노예잖아요. 물론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한국에 가서 살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럴 때도 부모가 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가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질문자가 한국으로 가지도 못하고 스위스에 있으면서 계속 울고 있으면, 여러분은 ‘부모님 생각을 저렇게 많이 하니 참 효녀구나’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천만에요. 제가 보기에 질문자는 욕심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저는 결혼도 하고 싶고, 출가해서 스님도 되고 싶은데, 어느 것을 하면 좋겠습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여러분은 ‘저 사람은 출가를 고민할 만큼 좋은 생각하고 있네’ 이렇게 생각하죠? 이 사람은 스님이 되어서 갖게 되는 명예와 결혼을 해서 갖게 되는 세속적 욕망의 충족, 두 가지를 다 가지려고 해서 번뇌가 생기는 겁니다. 욕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를 가지려면 하나를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려놓은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기꺼이 지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가서 울고 슬퍼하면 안 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나의 잘못이 아니라 수명이 다해서 돌아가신 거니까요. 나의 선택에 대해서 기꺼이 책임을 지면 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다섯 명과 대화를 나눈 후 스님이 마무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것이 괴로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만나는 게 괴로운 일입니까? 헤어지는 게 괴로운 일입니까? 물론 밥을 못 먹거나, 남에게 두들겨 맞거나, 성폭행을 당한다면, 굉장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겪는 대다수의 경험은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안 되거나. 남이 원하는 걸 내가 해주지 못한다고 지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결국 내 마음대로 안 된다고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일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겠어요?
다섯 가지 계율(五戒)을 어기는 행위가 아니라면 자신의 길을 자기가 선택해서 가면 됩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도 오계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자식이라도 간섭을 안 해야 합니다. 부모가 너무 자식에 대한 기대가 크면 그것이 고스란히 자식에게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러면 자식의 인생이 왜곡됩니다. 성인이 되면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펼치며 살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늘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갖고 살면, 본인 스스로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자녀들에게 지나친 기대를 해서는 안 됩니다. 지나친 기대는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 자기 뜻을 펼치는 데에 장애로 작용합니다. 성인이 될 때까지 키웠으면 부모가 할 일은 다 한 겁니다. ‘앞으로 무엇이 되든 네가 알아서 마음껏 살아라.’ 하고 자식을 놓아주어야 합니다. 물어도 ‘네가 알아서 해라’ 이렇게 말해야 해요. 그래도 조언을 요청하면 ‘글쎄,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엄마 생각은 이렇다.’ 이런 정도로만 얘기해야 돼요. 자식에게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도리어 자식에게 장애가 된다는 점을 꼭 명심했으면 좋겠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곧바로 책 사인회가 이어졌습니다. 많은 참석자들이 스님의 책에 사인을 받으며 스님과 짧지만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청중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봉사자들과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자의 경험과 소감을 나누며 오늘 강연을 통해 느낀 점을 공유했습니다.
“온라인으로만 뵙던 스님을 직접 뵐 수 있어서 너무 기쁩니다. 그동안 정진을 꾸준히 못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스님을 뵙고 더 열심히 정진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제가 50년 동안 살아오면서 가장 감사드리고 싶은 분이 바로 스님입니다. 스님을 직접 뵙게 되어 너무 감사한 자리였습니다. 스위스까지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스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스님의 가르침 덕분에 마음이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앞으로도 정진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지난 3일 동안 스님과 동행하며 행사를 총괄한 권버미 님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스님과 함께한 3일 동안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치 만 배를 한 것처럼 마음의 번뇌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성공적으로 강연을 마친 후 스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기회까지 얻게 되어 봉사자들 모두 무척 기뻐했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어요. 감사합니다.”
스님은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숙소로 이동했습니다. 봉사자들은 사용한 성당 건물을 원래의 모습으로 돌려놓고 뒷정리를 했습니다.
밤 9시가 넘어서 취리히에 살고 있는 정토회 회원인 김응순 님 댁에 도착한 후 늦은 저녁을 먹고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취리히를 출발하여 여성 이민자들의 자립을 돕고 있는 바젤(Basel) 재단을 방문하여 세계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오후에는 독일 국경을 넘어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한 후, 저녁에는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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