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검색
원하시는 검색어를 입력해 주세요
안녕하세요. 서울 정토회관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8시부터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260여 명의 외국인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스님은 북한의 압록강 홍수 피해 상황과 이스라엘군의 가자 지역 폭격 소식을 전하며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한반도 남쪽은 폭염으로 고생하는데, 한반도 북쪽에는 지난주에 엄청난 비가 쏟아져서 북한에서는 홍수 피해를 많이 입었습니다. 옛날 같으면 홍수 피해 주민들에게 우리가 인도적 지원을 할 수가 있었는데 남북 관계가 나빠지다 보니 현재는 큰 피해를 당한 것을 알고도 인도적 지원을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또한 어제 가자 지역에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으로 백 명 이상의 주민들이 죽었다는 슬픈 소식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이 나만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화가 나게 되면,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각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복수라는 감정은 굉장히 위험합니다. 복수는 과잉 복수를 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한 대 맞고 화가 나게 되면 열 대 스무 대를 때려주고 싶은 게 복수심입니다. 이런 인간의 복수심을 규제해야 한다는 내용은 3,800년 전 고대 바빌로니아 왕국의 함무라비 법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내용으로 이미 나와 있습니다. 상대가 내 눈을 빼게 되면 나도 상대의 눈만 빼야지 상대를 죽이지는 말아야 하고, 상대가 내 이를 빼면 나도 상대의 이만 빼야지 상대를 죽이지는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내용을 철저하게 복수를 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법률이 제정된 취지는 상대에게 피해를 본 만큼만 복수를 하지 그 이상의 과잉 복수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명시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마스로부터 공격과 납치를 당하는 큰 피해를 보았지만, 이것에 대한 복수심으로 열 배, 스무 배가 넘는 인명피해를 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3,800년 전에 인류가 과잉 복수를 방지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법규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어서 지난 한 달 동안 스님이 동남아 10개국을 다녀온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특히 부탄에서 지속가능한 개발 사업을 시작한 취지와 경과를 소개하고, 그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을 마치고 나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누구든지 궁금한 점이 있으면 즉석에서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1시간 30분 동안 세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중 한 명은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할수록 때로는 화와 분노가 더 많이 일어난다며 감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어떻게 해나가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사람마다 다 자기 생각이 있고, 그것을 고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다 보면 ‘이것은 내 것이다.’ 하는 고집이라든지, ‘내가 옳다’ 하는 고집이라든지, 이런 고집을 다시 살펴볼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집중적인 수련을 하더라도 내가 얼마나 고집하고 있는지 다시 살펴보는 데에 하루 이상이 걸립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항상 내 관점, 내 생각, 내 가치관이 옳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내비게이션에 어떤 위치를 설정해 놓고 그대로 가지 않으면, 설령 내가 다른 사정이 생겨서 여기저기를 들렀다가 가려고 해도 내비게이션은 계속 ‘돌아가라’, 또 다음 코스에서도 ‘돌아가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처럼 우리는 자기 생각이 옳다는 것에 딱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을 보거나 어떤 말을 듣고 그것이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거기에 대해서 무의식적으로 거부반응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거부반응이 확대되지 않도록 하려면 화나 짜증이 일어날 징조, 즉 약간 호흡이 가쁘거나 몸에 열기가 나거나 할 때 그런 감각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내 까르마가 이렇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구나!’ 하고 감지가 되면 약간 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아주 미세한 징후를 알아차리는 것을 ‘깨어있다.’ 또는 ‘알아차린다.’ 하고 표현합니다. 알아차림을 유지해야 감정이 바깥으로 드러나기 전에 제어할 수 있습니다.
그전에 의식적으로는 이치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각이든 가치관이든 뭐든지 서로 다르다는 것이 먼저 인지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의식적으로는 이해해도 나의 까르마는 무의식적으로 먼저 반응하게 됩니다.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치게 되는 것을 ‘무지’라고 합니다. 알아차림을 놓치게 되면 반응은 자동으로 일어납니다. ‘알아차림’이란 나의 반응을 의식적으로 알게 되는 거예요. 알아차리면 ‘아, 이것은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반응하는 것이다.’ 하고 자각하게 되기 때문에 반응이 일어나다가 가라앉게 됩니다. 이렇게 꾸준히 연습을 해나가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알기는 해도 꾸준히 자기를 살피는 연습을 하지 않고 그냥 일상적으로 살아갑니다.
물론 경험적으로 어떤 큰 충격을 받아서 변화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잘못해서 내가 엄청나게 화를 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잘못 안 거예요.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무의식 세계가 자극을 받기 때문에 다음에는 자기도 모르게 조심하게 됩니다. 잠깐의 고집으로 많은 사람이나 가족이 죽게 되었다든지, 본인이 죽을 뻔했다든지, 이런 큰 경험을 하게 되면 급격한 변화가 오기도 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알아차리는 수행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Thank you, Sunim. As you said, my experience with Jungto over the past few years has helped me to be more mindful of my own emotions, and that's why I'm getting less and less negative emotions in my daily life. However, there are times when I get these frustrations, irritations, and these negative emotions, and I notice them and I don't really want to do anything about it.
And I go back to my own reasoning and on a fundamental level, I have to believe that this is the right way to go. If I see the world as it really is, if I really get the ultimate enlightenment and see everything as it really is, then I will actually know that there is nothing to be angry about. And I feel like that is a leap of faith for me. Maybe it's just taking time, maybe I'm just being greedy in my practice, but as I stand right now I'm questioning the role of faith in 2024 like my own experience that I had during meditation when I went on a retreat program at Jungto.
I guess I just have a lot of questions. I always doubt a lot of things in life and I find it kind of difficult to commit because I doubt it too. I doubt if this is the right way. I understand that it's just going to take time for me and I probably just need to stick with it. That's most of the answer I'm getting here.”
(감사합니다, 스님. 말씀하신 것처럼 지난 몇 년 동안 수행하면서 제 감정을 더 잘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고, 그 덕분에 일상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끔 좌절감, 짜증, 부정적인 감정이 드는 것을 알아차리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의 논리로 근본적인 관점에서 이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궁극적인 깨달음을 얻고 세상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면 실제로 화낼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그것이 저에게는 믿음의 도약적인 발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것일 수도 있고, 제가 수행에 욕심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지금 2024년 이 순간에도 과거 정토회 수행 프로그램에 갔을 때 명상 중에 그랬던 것처럼 믿음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고 있네요.
전 그냥 의문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항상 인생에서 많은 것을 의심하기 때문에 확신을 갖기가 어렵습니다. 이게 옳은 길인지도 의심하게 됩니다.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알지만 그냥 꾸준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가 여기서 얻은 해답입니다.)
“본인에 대해서 실망했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크거나 욕심을 많이 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가 한 것보다 결과에 대해서 욕심을 많이 내고 있을 때 실망이 따르게 됩니다. 알아차린 뒤에 어떻게 하느냐는 없습니다. 알아차린 뒤에 어떻게 한다는 것은 참는 겁니다. 물론 참는 것은 감정을 터트리는 것보다는 일시적인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또 감정을 터트리게 되면 결국 자기 스스로에 대해 다시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참는 것은 일시적인 방법이지 수행은 아닙니다.
알아차리지만 감정이 표출되었다는 것은 알아차림이 너무 늦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짜증을 낸 뒤에 알아차렸다면 ‘내가 또 알아차림을 놓쳤구나’ 이렇게 자각하고 다음에는 알아차리는 쪽으로 가야지 후회하는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화가 확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화가 계속 올라간다면 그것은 이미 늦게 알아차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한 게 아니라 알아차림이 조금 늦었을 뿐입니다. 조금 더 주의력을 집중하여 아주 미세하게 일어날 때 알아차리게 되면 그냥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걸 보거나 듣거나 하면서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주 미세하게 일어날 때 알아차리게 되면 대부분 사라집니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이미 전환했을 때는 아무리 알아차려도 화가 솟아오르는 힘이 더 강합니다. 이럴 때는 참는 쪽보다는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알아차리고, 알아차리고, 또 알아차려야 합니다. ‘감정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계속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론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감정이 바깥으로 나오려고 하면 임시방편으로 참는 것도 잠시 필요합니다. 나도 모르게 이미 감정이 나와버렸을 때는 감정이 나온 뒤에라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때는 ‘아, 내가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알아차림에는 잘하고 잘못하고 후회할 게 없습니다. ‘놓쳤구나’, ‘알아차림이 늦었구나’, ‘알아차렸구나’ 이렇게만 해야 알아차림을 놓쳐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알아차려도 잘난 체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다만 알아차릴 뿐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참는다든지, 후회한다든지, 자신에게 실망한다든지, 이런 것은 다 욕심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Thank you. I appreciate your teachings. And I think I picked the Crux of the message, which is that I just need to work a little bit more.”
(감사합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감사히 여깁니다. 그리고 조금 더 해봐야 한다는 오늘 말씀의 핵심을 잘 새기겠습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9시 30분이 넘었습니다. 질문한 분들의 소감을 듣고 나서 다음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잠시 휴식을 하고 곧바로 10시부터는 온라인으로 정토경전대학 졸업식을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5개월 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는 뜻깊은 날입니다. 대부분 졸업생은 교실별로 생방송을 함께 시청하고, 화상회의 방에는 개근상과 정근상 수상자들이 자리했습니다.
정토회 대표님의 축사를 들은 후 축하 공연과 지난 5개월 동안의 경전대학 수업 모습과 실천 활동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이어서 정토경전대학 학장인 스님이 국내외에 1,032명의 졸업생에게 졸업장을 수여했습니다.
“이번에 졸업하신 모든 분께 졸업장을 수여하겠습니다. ‘잘 받았습니다’ 하면서 받아주세요.”
“잘 받았습니다.”
화상회의 방에서 축하의 박수가 쏟아졌습니다. 이어서 136명이 개근상을 받고, 132명이 정근상을 받았습니다.
박수 소리를 뒤로 하고 졸업생 두 분의 소감문을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어서 현장에서 참여하고 있는 졸업생들이 즉석에서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누구든지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졸업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경전 대학에 다니면서 가장 큰 변화는 가정에 행복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내와의 관계가 살얼음판을 걷는 상황이었지만, 경전대학 수업을 통해 내가 아내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음을 발견했습니다. 아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니, 지금은 관계가 많이 편해졌습니다.”
“스님이 자주 하시는 ‘별일 아니에요’, ‘아무 이상 없어요’, ‘괜찮아요’ 하는 말씀을 듣고 관점을 바꾸니 정말로 모든 게 다 괜찮아지고 별일이 아닌 게 되었습니다. 경전대학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제 화가 나지 않습니다. 남편을 봐도 이제 답답하지 않습니다. 제가 가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행복합니다.”
“경전대학 공부가 매주 재미있었습니다. 일상에서 수행 연습하며 일기 쓰는 기분으로 했던 마음 나누기가 삶을 돌아보게 해 주었습니다. 부처님 법을 배울 수 있어 너무 감사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한 부류는 법륜스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법륜스님을 만나 정토회에서 함께 손잡고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꾸준히 정진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법륜 스님을 알게 되어 불법을 배워 수행하려고 이번 생에 한국인으로 태어난 게 아닌가 생각이 될 정도입니다.”
“경전대학 법문을 통해서 다시 한번 태어난 느낌입니다. 돈으로 살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기 쉽게 법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괴로움이 없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토경전대학의 목표라는 스님의 말씀이 한 명 한 명의 소감 속에서 그대로 현실로 드러나는 것 같아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졸업생 일동은 바른 법으로 인도해 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이어서 졸업생들이 삼배로 법을 청하자, 스님이 졸업 법문을 해주었습니다.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꾸준히 수행을 해나가야 합니다. 수행이란 모든 까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정진한다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한 시간은 나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자식, 부모, 형제, 가족, 나라 등 모든 것이 중요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 한 시간을 먼저 사용한 다음 나머지 시간을 갖고 돈도 벌고 가족도 돌보고 남을 위해서 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자신을 온전히 지켜나갈 수가 있습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계속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이런 길을 가는 것이 힘들다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길은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가족을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나라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어떻게 남을 소중하게 여길 수가 있습니까.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보고 나를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어불성설입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도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야 하고, 내가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기 위해서도 나부터 나를 사랑해 줘야 합니다. 나를 가장 소중히 여기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눕고 싶은 대로 눕고, 자고 싶은 대로 자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습관, 까르마, 업식으로부터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나를 가장 사랑하는 길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을 가장 아끼는 길입니다. 이런 수행을 꾸준히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방법이 바로 수행법회, 천일결사, 깨달음의 장, 나눔의 장, 명상 수련입니다.”
이어서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수행, 보시, 봉사의 삶을 계속 살려면 정토회에서 제공하는 어떤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되는지 자세하게 안내를 해주었습니다.
사홍서원을 끝으로 졸업식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수업사이트로 입장하여 교실별로 마음 나누기를 이어나가고, 스님은 방송실을 나왔습니다.
점심 식사를 한 후 스님은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2시부터는 지난 1년 동안 전법회원 교육을 수료한 분들을 위해 수계식을 했습니다.
정토사회문화회관 3층 설법전과 전국 으뜸절, 그리고 온라인에서 131명의 대중이 참석한 가운데 타종, 예불, 반야심경을 하며 수계식을 시작했습니다.
지부별 환영 영상과 경과보고 영상을 함께 본 후 수계자를 대표하여 정현숙 님이 수행담을 발표했습니다.
이어서 신규 발심행자들이 삼배의 예로 법을 청하자, 스님은 삼귀의와 오계 수계식이 생긴 연유와 앞으로 발심행자가 되면 어떤 실천 덕목을 지키고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졸업하고 전법행자 교육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통일의병 교육을 마치고 깨달음의 장도 다녀왔고, 천일결사에 입재해서 매일 수행정진을 하고 있습니다. 발심행자가 되기 위해서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다 갖추고 이제 발심행자가 되는 의식인 오계를 수계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지금처럼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었고, 무수한 철학 체계가 있었습니다. 부처님 또한 그 사회에 태어나 자라면서 그 사회에 있는 종교를 믿고 그 철학들을 배웠습니다. 기존 사회에도 논리와 이론, 교리, 계율, 윤리, 도덕 등 온갖 것이 있었습니다. 계급 차별과 성차별도 당시 사회에서는 하나의 윤리이자 가치관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주장이 달라서 혼란스러웠습니다. 이 사람이 주장하면 저 사람이 부정하고, 저 사람이 주장하면 이 사람이 부정해서 세상에는 무질서와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새로운 사상 체계와 가치관, 윤리를 정립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괴롭지 않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딘가에 속박받고 억압받으며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불교 수행의 목표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해탈과 모든 괴로움이 사라진 열반입니다. 죽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도 수행의 목표가 아니고, 다음 생에 부자로 태어나는 것도 수행의 목표가 아니며, 이생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도 수행의 목표가 아닙니다. 수행의 목표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든 괴로움 없이 자유롭게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의 목표를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이런 자유로운 삶,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사는데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시해서 새롭게 가치관을 정립하셨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부처님이 제시한 다섯 가지 가치관인 오계의 의미를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당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은 어떤 특정한 계급이나 지위에 있는 사람이나 부유층의 이익을 위하는 가치관이 많았습니다. 또는 신에게 복종하라든지, 제사를 어떻게 지내라든지, 제사를 안 지내면 벌을 받는다든지 하는 가치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기존의 가치를 다 접어놓고 인간의 삶과 행위를 중심으로 해서 오계로 가치관을 재정립하셨습니다.
첫째,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
둘째,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뺏지 말라.
셋째,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지 말라.
넷째, 남을 욕하거나 거짓말하지 말라.
다섯째, 술을 먹고 취하지 말라.
이것은 기독교인이나 불교도라도, 한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라도, 누구나 다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가치관입니다. 옛날에는 부모가 자식을 때리거나 남편이 아내를 때리거나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리거나 주인이 종을 때리거나 하는 것들이 허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죽이는 것까지 허용되기도 했습니다. 근래에 와서도 때리는 것까지 허용이 되었는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다 범죄행위에 들어갑니다. 윤리의 문제도 아니고 범죄행위로 규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붓다의 가르침은 2,600년 전에 이미 지금의 현실을 앞서서 보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부처님 당시 초기에는 출가수행자들에게 계율이 따로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거나 전 재산을 버리고 출가하거나 가족을 버리고 출가하는 사람들이 남을 때리거나 죽일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뺏겠어요? 다른 사람을 성추행하거나 성폭행하겠어요? 거짓말하거나 사기를 치겠어요? 술 마시고 행패를 피우겠어요? 다섯 가지 계율보다 훨씬 더 한 결단을 내리고 출가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계와 같은 계율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다섯 가지 계율은 재가 수행자를 위해 만든 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가 수행자는 사회와 가족과 모든 것을 떠나 숲 속에서 혼자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족을 거느리고 사업을 하며 살아갑니다. 세상 속에서 장사를 하면 이해관계를 논해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하고, 종도 거느려야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 사니까 관습대로 하기가 쉽습니다. 사람을 때리거나 죽이기도 하고, 사기를 치기도 하고, 물건을 뺏기도 하고, 성추행이나 성폭행을 하기도 쉽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당시에도 술집이나 기생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세상 속에서 살 때 적어도 이 다섯 가지를 지켜야 재가 수행자라고 말할 수 있지, 이 다섯 가지를 지키지 못한다면 그냥 세속 사람입니다. 그러나 비록 재가에 있다 하더라도 이 다섯 가지 원칙을 분명히 알고 지키면 수행자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어서 참회, 연비, 수계 약속이 이어졌습니다.
“저희 수계 제자들은,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옵니다. 한량없는 옛적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부처님 법을 알기 전에 이미 지었던 살생과 투도와 사음 등 몸의 세 가지 죄업이 한량없을 것이 온대, 이제 저희는 몸과 말과 생각을 가다듬어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겠나이다.”
오계를 지킬 것을 약속한 수계자들은 불단 앞으로 나가 헌화를 했습니다.
스님은 전법 활동가로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발심 행자들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다음은 불명을 받는 의미가 무엇인지 설명한 후 수계증을 수여했습니다. 대표로 한 분에게 수계증을 전했습니다. 이어서 온라인으로 참석한 분들에게도 랜선으로 수계증을 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수계 받은 대중들을 위해 격려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사홍서원으로 수계식을 마친 후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수계를 받은 발심행자들은 이어지는 2부 프로그램에서 소감 나누기를 이어나갔습니다. 스님은 곧바로 서울을 출발하여 두북 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후 5시에 서울 정토회관을 출발하여 차로 4시간을 달려 저녁 9시에 두북 수련원에 도착한 후 하루 일과를 마무리했습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농사일을 한 후 오전과 저녁에는 전법 회원들을 위해 생방송 법회를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34
전체 댓글 보기스님의하루 최신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