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4.2.23 금요 즉문즉설, 부탄 개발 회의
"고함치고 화내는 어머니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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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오프라인에서 직접 시민들과 만나 즉문즉설을 하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8시부터 JTS, 에코붓다, 좋은벗들, 3개 사단법인 단체의 총회에 온라인으로 참석했습니다. 먼저 JTS 총회를 시작하며 스님이 여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JTS는 지난 한 해 동안 세계 여러 곳에서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터키 지진 구호 활동, 시리아 지진 구호 및 복구 활동, 파키스탄 홍수 재해 지원, 캄보디아 대학교 여학생 기숙사 건축, 태국 보육원 지원, 스리랑카 어려운 지역의 학교와 가정 지원, 아쌈 지역의 소수민족 지원, 필리핀 학교 건축 사업, 인도 수자타아카데미 학교 및 병원 운영 사업, 그 외에도 많은 긴급구호 활동을 했습니다.

수고해 주신 활동가 여러분들께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꾸준히 후원해 주시는 후원자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새해에는 기존 사업을 지속할 뿐 아니라 많은 새로운 일들이 진행될 것 같습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JTS 총회를 먼저 하고, 다음은 좋은벗들 총회를 하고, 마지막으로 에코붓다 총회를 했습니다. 총회 회원들 모두가 2023년 사업보고와 결산을 승인하고, 2024년 사업계획과 예산을 승인했습니다.

오전 10시부터는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했습니다.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해외에 거주하는 분들과 주간반 시청자들을 위해 오전에 생방송을 하는 날입니다. 27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두 시간 동안 네 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옛날부터 고함을 치고 화를 내는 어머니를 상대하기가 힘들었다며 어떻게 어머니를 대해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고함치고 화내는 어머니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요?

“30년 전에는 어머니께 다녀올 때마다 제정신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어머니는 트집 하나를 잡으시면 다른 일이 생길 때까지 계속 큰소리를 치셨습니다. 그때는 누나도 함께 달려들어서 저는 죽다 살아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울증 때문에 죽을 지경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6년 정도 어머니께 안 갔습니다. 저부터 살려고요. 그런데 이런 행동이 무슨 좋은 것이라고 대물림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화내는 습관의 대물림을 끊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병원에 안 가시려고 합니다. 약 한 시간 동안 실랑이를 하고 나서야 억지로 병원에 모시고 갑니다. 그리고 약을 받아오면 한동안 드시다가 절반 정도 남으면 더 이상 드시지 않습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머니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질문자의 문제예요. 어머니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몸이 아프더라도 어머니께서 병원에 가기 싫다면 안 가도 됩니다. 또 약을 받아왔다가 먹기 싫으시다면 안 드셔도 됩니다. 그건 어머니의 자유예요. 그런데 그걸 질문자가 지나치게 간섭해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아프실 때는 제가 병원에 데리고 가주지 않는다고 험담을 하십니다.”

“어머니께서 불평을 하시면 병원에 모시면 되고, 또 가자고 하셨다가 마음을 바꾸시면 ‘안 가시려고요?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리고 안 가면 됩니다. 질문자가 어머니를 병원에 억지로 끌고 가려다가 잘 안되니까 ‘다음부터는 어머니 병원 진료에 동행하지 않겠다’ 하고 자기식 대로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그래서 질문자의 문제라고 말하는 겁니다.

어머니가 병원에 가자고 연락을 하면 병원으로 모시고 가면 되고, 가지 않겠다고 하시면 그냥 두면 됩니다. 아무리 아프다고 하시더라도 어머니께서 가시지 않겠다고 하시면 그냥 두면 됩니다. 질문자가 간섭만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어머니를 질문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니까 생긴 문제입니다. 왜 아무 죄 없는 어머니 탓을 합니까?

질문자부터 정신과 진료를 먼저 받아 보면 좋겠어요. 연세 드신 분들은 원래 오늘 이렇게 말했다가 내일은 저렇게 말합니다. 다른 집들은 어떤가 한 번 보세요. 그렇지 않은 분들이 거의 없어요. 농촌에서 고령의 부모님들을 모시고 한 번 지내보세요. 저녁만 되면 허리가 아파 죽겠다고 맨날 죽는소리를 하십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제가 일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내일부터 일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부모님은 ‘그럴께!’ 하시고는 다음 날 아침에 또 호미 들고 밭에 가서 일하십니다. 저녁이 되면 또 아프다고 하시고요. 그리고 농사철에 바빠지면 일손을 돕지 않는다고 섭섭해하십니다. 인생이 다 그렇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을 갖고 살면 됩니다. 어머니가 그런 건 어머니의 사정이고, 질문자는 질문자 나름대로 살면 됩니다. 그런 어머니에게 화나 짜증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저녁에 아프시다면 좀 주물러 드리면 됩니다. 다음 날 아침에 호미를 찾으시면 찾아 드리면 됩니다. 또 병원에 가자고 하시면 모셔다드리고, 가지 않으시겠다면 안 가면 됩니다.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화를 냅니까? 질문자가 어머니께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다면 그건 질문자의 성질이 더러워서 그런 겁니다.”

“그런데 저는 어머니가 이해가 안 됩니다. 옛날부터 저에게 고함치신 적이 많지만, 최근에도 중학생인 손자에게도 째려본다고 고함을 치셨습니다.”

“어머니는 약간 정신적 질환을 갖고 있는 환자라고 보셔야 합니다. 환자에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은 무리한 요구예요. 약간 치매가 있거나 정신 질환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어머니는 치료가 필요한 분입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병원에 안 가려고 하십니다.”

“그건 그냥 내버려 두세요. 아이들이 그런 할머니를 힘들어하면 아이들을 할머니께 데리고 가지 않으면 되지 왜 자꾸 어머니를 고치려고 하세요? 어머니께 가지 않으면 됩니다.”

“지금 어머니와 한 집에서 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집을 분리하세요. 옆에 집을 따로 얻으세요.”

“그럴 형편이 안 됩니다. 어머니는 손주가 밥 먹는 걸 흐뭇하게 보십니다. 그러면 아이는 스트레스가 쌓였는지 할머니가 보는 게 싫다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 또 제가 ‘그건 네가 밥 먹는 게 좋아서 보시는 거다. 그냥 빨리 먹고 네 방에 들어가라’ 하고 말합니다. 제가 이러는 게 맞는 걸까요?”

“그냥 두세요. 할머니는 손주를 시비하고, 손주는 할머니를 시비한다면, 질문자는 그 둘을 시비하고 있는 겁니다. 셋이 다 똑같은 겁니다. 셋 중 누구 하나라도 시비를 멈춰야죠. 아이가 할머니를 그냥 두던지, 할머니가 아이를 그냥 두던지, 아니면 그 둘을 시비하는 질문자가 멈춰야죠. 누구 하나가 멈춰야 끝이 날 수 있는데, 셋이 모두 시비하고 있어요. 질문자도 ‘왜 서로 싸우냐?’ 하면서 시비하고 있는 겁니다. 질문자부터 시비를 안 할 수 있으면 아이에게도 시비하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는데, 질문자도 그들을 시비하면서 아이에게 시비하지 말라고 하니 어떻게 설득이 되겠어요? 그러니 둘의 문제에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머니가 병원에 데려달라고 하시면 모셔다 드리고, 가기 싫다고 하면 그냥 두세요. 또 이튿날 가자고 하시면 가고, 가지 않으시겠다면 그냥 두면 됩니다. 아이가 밥 먹다가 할머니가 쳐다본다고 숟가락 놓고 방에 들어가면 그냥 두세요. 그런다고 아이의 건강이 나빠지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다. 질문자라도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있으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질문자부터 한 번 그들을 그냥 두어 보세요. 이것을 ‘경계에 끌려다니지 않는다’ 하고 말합니다.”

“30년 전에 어머니께 고기를 사가면 썩은 고기 사 왔다고 3일 동안 뭐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완전히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고기를 사가지 않으면 고기 사 오지 않았다고 또 3일 동안 뭐라고 하십니다.”

“그건 어머니의 병입니다. 어머니는 환자라고 생각하세요. 어머니께 고기를 사드렸는데 썩었다고 하시면 ‘죄송합니다’ 하고 버리면 됩니다. 또 고기를 안 사 왔다고 뭐라고 하시면 ‘제가 깜박 잊었습니다. 금방 사 오겠습니다’ 하고 바로 사드리면 됩니다. 그러면 잔소리가 3일까지 안 갑니다. 하루 만에 끝납니다. 질문자가 대응을 좀 잘해보세요.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사 오니까 썩었다고 하고, 안 사 오니까 불평하네!’

이렇게 불평만 하니까 질문자가 피곤한 겁니다. 30년 전 이야기를 지금 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질문자도 계속 옛날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감사합니다. ‘내 탓이요’ 하고 살겠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니 12시가 다 되었습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정토회관을 나와 평화재단으로 향했습니다. 11시 30분에는 문화재청에서 관계자들이 찾아와서 스님과 함께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오후 1시 30분에는 부탄 전문가인 박진도 충남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님과 회의를 했습니다. 교수님은 국민총행복전환포럼 이사장이자 ‘부탄 행복의 비밀’의 저자입니다. 지난 2월에 스님이 부탄을 답사하기 전에 많은 조언을 해주시기도 했습니다. JTS 활동가들도 함께 자리해서 교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먼저 스님이 일주일간 부탄을 답사하며 보고 느낀 것과 앞으로의 계획을 상세히 설명하고 교수님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교수님 보시기에 저희가 지금 하려고 하는 활동이 기본 취지에 맞겠습니까?”

“좋습니다. 시범 사업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곳에서 따라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시범 사업은 돈을 많이 투입하여 멋진 모델을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멋져 보일지 몰라도 다른 곳에서는 따라갈 수 없죠. 왜냐하면 그만큼의 자금을 지원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시범 사업이 아니라 말하자면 쇼에 가깝습니다.”

“저는 그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시범 사업 이후에 더 많은 투자를 할 생각입니다.”

“네, 이제 현지 사람들과 차근차근 소통하며 진행해 나가시면 되겠네요. 그렇게 해서 결국 정부가 움직이도록 하는 것까지 기대해 볼 수 있겠습니다.”

“비용이 많이 들지 않는 것을 보면 부탄 정부에서도 할 수 있다고 나설 거예요. 최저 경비로 부탄 사람들이 지속 가능하도록 프로젝트를 만들고 그걸 확대 재생산해야 합니다.”

“예, 맞습니다. 절대로 돈으로 사람들을 흔들면 안 됩니다.”

스님은 교수님의 말에 동의하며 외부의 과도한 지원이 장기적으로 지역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경험을 공유했습니다. 9.11 테러 이후 2002년에 미국의 탈레반 소탕 작전으로 아프가니스탄 곳곳에서 난민이 발생했었습니다. 그때 JTS에서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가서 난민 캠프에 구호물품을 전하고, 카불 북부 지역에 학교와 다리 건축을 지원했습니다.

“저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그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제가 마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건물을 짓냐고 물어보니 미루나무와 돌과 흙을 사용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제가 돌과 시멘트를 섞어서 집을 짓는 방법을 알려주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짓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유엔이 들어와 학교 건물 규격을 정하고 철근 콘크리트를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철근, 시멘트 등 모든 자재를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어요. 결과적으로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의 건물을 짓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게 되었고, 이익도 얻지 못했습니다. 건물에 문제가 생겨도, 그 누구도 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학교 건물은 지어졌지만, 마을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식이다 보니 결국 카불 시내만 화려해지고 정치지도자의 부패만이 만연하게 되었죠.

이는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많은 개발도상국에서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 개발을 할 때는 지역 사회가 참여하도록 하고 그 지역 사람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개발이라는 명목 하에, 실제로는 지역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면 안 되니까요.”

회의는 1시간 40분 동안 열띠게 진행되었습니다. 다음번 부탄 방문을 기약하고 회의를 마쳤습니다.

교수님을 배웅하고 곧바로 오후 3시에는 찾아온 손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오후 4시 30분부터는 국제연대팀과 JTS 활동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스님의 상반기 해외 일정에 대해 의논했습니다. 먼저 이번 부탄 답사 결과를 토대로 다음 부탄 답사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하나씩 정리했습니다. 이어서 파키스탄과 베트남 방문 일정 등 스님의 상반기 스케줄을 어떻게 할지 의논한 후 회의를 마쳤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서울 정토사회문화회관에서 오프라인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 지난 10월에 시작한 이후 다섯 번째 오프라인 만남입니다.


추운 날씨에도 많은 시민들이 즉문즉설을 듣기 위해 정토사회문화회관을 찾았습니다. 시민들은 현장 접수를 한 후 번호표를 한 장씩 추첨함에 넣은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하 대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대강당은 금방 400석이 청중들로 가득 메워졌습니다. 온라인에서도 5300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


다섯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현장에서도 세 명이 추가로 손을 들고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좋아하는 여성이 생겼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서운한 마음도 커진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상대를 좋아할수록 서운한 마음이 커집니다

“제가 지금 친하게 지내는 여성이 한 명 있는데 친하게 지낼수록 좋아하는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커질수록 물론 기쁜 마음도 커지지만 한편으로는 서운함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이 들 때는 그대로 누리고, 서운한 마음이 들 때는 최대한 잠재우려고 합니다. 기쁜 마음을 누리는 것과 서운한 마음을 잠재우는 것 중에 하나만 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저는 서운한 마음을 잠재우는 것에 최대한 힘쓰고자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서운한 마음도 커질 텐데, 어떻게 하면 서운한 마음을 제가 다스릴 수 있을까요? 애초에 좋아하는 마음을 통제해야 할까요, 아니면 이 마음을 계속 키워나가도 괜찮을까요?”

“좋았다가 서운했다가 하는 건 본인의 선택이니까 질문자 인생은 본인이 선택해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크게 하고, 서운한 마음은 없도록 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질문하는 내용을 보니 출가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네요. (웃음)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면 즐거움이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괴로움이라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늘 고(苦)와 락(樂)이 되풀이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것을 윤회라고 해요. 인도 전통 사상에서 윤회는 사람이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걸 말하지만, 그건 그냥 믿음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관찰해 보면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윤회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어서 즐거움은 갖고 싶고 괴로움은 없앴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될 수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종이의 이쪽 면은 '고', 반대쪽 면은 '락'이라고 하면 아무리 분리하려고 해도 분리될 수 없습니다. 즐거움의 높이가 크면 괴로움의 깊이도 깊어지고, 즐거움의 높이가 작으면 괴로움의 깊이도 얕아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즐거움만 구하고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는데, 이것을 쾌락주의라고 합니다. 질문자의 마음 상태는 철학적으로 굳이 말하자면 쾌락주의에 해당합니다. 쾌락주의란 쾌락만 구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이 뭐든지 충족되기를 바라는 것을 말해요. 대부분의 종교에서 '네가 바라면 다 이루어진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욕망이란 충족이 되어도 끝이 안 나는 성질을 갖고 있어요. 욕망은 충족이 될수록 더 커져 버립니다.

처음에는 내가 저 여자에게 말이라도 걸어봤으면 좋겠다 싶은데, 접근조차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다 어떻게 해서 인사를 하게 되고 접근을 해서 통성명도 하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 엄청나게 기쁩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좀 더 가까이 지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일어납니다. 어찌어찌해서 가까이 지내게 되면 기분이 엄청 좋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아요. 서로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욕망이 또 올라옵니다. 그래서 서로 좋아하게 되면 또 즐거움이 커지는데 그만큼 욕망이 또 올라옵니다. 만약 그 사람과의 관계가 거기서 더 이상 발전이 안 되면, 곧바로 괴로움에 빠집니다. 욕구가 계속 충족이 될 수는 없잖아요. 언젠가는 충족이 안 될 때가 생깁니다. 그러면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되풀이되는 겁니다.

괴로움은 꼭 나쁜 사람하고 만나야만 생기는 게 아니에요. 좋은 사람하고 만나도 괴로울 수 있습니다. 애인과 언제 만나기로 약속 시간을 잡으면 너무 즐겁습니다. 그런데 약속 시간에 애인이 안 나타나면 괴롭습니다. 나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 약속 시간에 안 나타나면 별로 안 괴로워요. '안 오면 다른 일 하지 뭐' 이렇게 되는데, 애인은 안 오면 가슴이 조마조마해지고 온갖 상상이 일어나고 번뇌가 커집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분리해서 한 개만 추구하려 하지만 사실은 분리가 안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철학이 또 하나 나왔어요. 욕망 자체가 모든 고의 근원이므로 욕망을 용납하지 말아야 된다는 새로운 수행법이 나오게 됩니다. 이걸 ‘금욕주의’라고 합니다. 금욕주의는 심지어 먹고 입고 자는 기본 생활의 욕구마저도 억압을 합니다. 그래서 극단적 고행주의자가 나오게 된 거예요. 부처님은 29살 이전에는 욕망을 따라가는 왕자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은 무슨 바람이 있겠는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고뇌가 많았어요. 그래서 혼자서 고뇌하다가 고행주의자를 만났는데 오히려 그가 더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동경했지만 부모가 허락을 안 해서 십몇 년을 고심하다가 부모 몰래 출가를 해서 수행을 했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고행을 하려면 이를 꽉 다물고 긴장과 각오를 해야 되잖아요. 이런 상태는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쾌락을 끝까지 누려봐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고, 고행을 끝까지 해봐도 진정한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인가?' 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의 뿌리가 욕망에 있구나. 욕망을 따라가면 즐거움이 되고, 욕망을 억제하면 괴로움이 되는구나.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욕망을 부정하지도 않고 긍정하지도 않고 욕망을 다만 욕망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깨닫고 부처님은 자유로움에 이릅니다. 이걸 알아차림이라고 해요. 욕구가 일어나면 ‘욕구가 일어나네’ 이렇게만 자각하는 겁니다. 욕구를 따라가려고도 하지 않고, 욕구를 억누르지도 않는 겁니다. 그냥 '담배를 피우고 싶네' 이렇게 알아차리기만 하지, 담배를 피우지도 않고, 안 피우려고 각오도 하지 않는 제3의 길을 따라 수행을 하면 우리도 부처님처럼 자유로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자는 조금만 고민을 더 발전시키면 출가를 할 수도 있겠다고 농담을 한 겁니다. 질문자는 깨달음의 길로 가는 초보 단계에 있어요. 즐거움과 괴로움이 되풀이되는 원리는 알았는데 ‘괴로움은 없애고 즐거움만 가질 수 없나?’ 하는 고민이 다시 생긴 겁니다. 그건 이미 2600년 전부터 사람들이 시도해 보았지만 안 됐습니다. 왜냐하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욕망이라는 같은 뿌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즐거움이 높은 것을 구할수록 괴로움이 깊은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누군가를 내가 열렬히 좋아하면 그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의 아픔을 이미 각오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설사를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럼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는 설사할 각오를 해야 됩니다. 입 안에 그 달콤함을 맛보려면 조금 있다가 설사할 것을 아예 각오해야 하고, 설사하는 것이 싫으면 달콤함을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달콤함을 선택하고 설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둘째, 설사가 싫으면 달콤함을 포기한다. 이 둘 중에 어떤 길을 갈 건지는 자기가 선택을 하면 됩니다. 둘 다 수행이에요. 달콤함만 받아들이고 설사는 안 받아들이겠다고 할 때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설사를 받아들이면 괴롭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사가 싫어서 달콤함을 포기할 때 그걸 아쉬워하면 안 돼요. 설사를 생각하면서 '그건 몸에 해로운 거야' 하고 딱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어요.

아이를 낳았다고 너무 좋아하면 그 아이가 나중에 병이 나거나 죽으면 엄청난 괴로움이 생깁니다. 즐거움만 갖고 싶고 그 어떤 불행도 안 일어나면 좋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인데, 현실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만한 고뇌를 감수해야 합니다. 고뇌를 피하려고 하면 안 돼요. 가슴 조이는 아픔을 감내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성숙해지는 겁니다.”

“스님, 사실 괴로움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저의 괴로운 기분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화내는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까요?”

“그거야 다른 사람들이 각자 알아서 받아들이겠죠.”

“스님께서도 안 좋은 기분이 드실 때는 상대에게 표출을 하시나요?”

“안 좋은 기분을 표출하면 저만 손해죠. 같이 사는 사람들이 저에 대한 존경심이 떨어질 것 아니겠어요? 화를 내면 존경심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해야 됩니다. 만약 존경심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싶으면 적절하게 자기를 살펴야죠.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스님을 특별히 존경하지 않는 이유는 스님도 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고 스님을 특별히 내치지 않는 이유는 그래도 괜찮은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헤어지지 않고 이렇게 사는 거예요.

스님이 완전할 것이라고 기대하면 흠결이 보이기 마련이고, 스님이 별로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괜찮은 점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아내나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못 헤어지는 것은 그래도 괜찮은 구석이 있어서이고, 불만이 있는 것은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불만이 있으면서도 헤어지지 않는 것은 아직 이익을 얻을 게 좀 있어서입니다. 그래서 구시렁구시렁 하면서도 헤어지지 않고 사는 겁니다. 이런 원리를 알면 약간 안 맞는 것이 있어도 불평을 덜 하게 되죠. 기분이 약간 나빠도 금방 돌이키게 됩니다. 그것은 카르마에 의해 반응하는 것일 뿐이니까요. 그래서 서로 맞춰가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혼 초에 상대에 대해 너무 기대가 크면 안 좋은 것들만 계속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자, 제일 좋은 여자를 골라서 결혼하면 행복할 것 같은데 곧바로 불행해집니다. 기대가 너무 커서 안 좋은 것만 계속 보이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길 가는 사람과 만나서 결혼하면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좋은 점이 많이 보여요. ‘저 남자는 참 쓸만하네’, ‘저 여자는 밥도 할 줄 아네’ 이렇게 좋은 점만 자꾸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친구가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왜냐하면 아무 기대도 안 했는데 괜찮은 점들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고향이 같네’, ‘종교가 같네’, ‘취미가 같네’ 이러면서 친구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몇 가지가 같다고 친구가 되면 다른 것도 다 같은 줄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밥을 같이 먹어보면 ‘음식 취향도 다르고, 뭐도 다르네’ 하면서 또 헤어지게 되는 거예요. 다르다고 전제하면 같은 것이 발견되고, 같다고 전제하면 다른 것이 발견됩니다. 낯선 사람은 보통 서로 다르다고 인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얘기를 해보면 같은 것이 발견되어서 서로 친해지죠. 친해지면 다른 것도 다 같을 것이라고 전제를 해 버려요. 그러면 이제 다른 것들이 계속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결혼하면 남편이 변기에 소변을 흘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수건 쓰고 나서 아무 데나 두는 것까지 하나하나 다 거슬리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심리적 갈등이 생겨서 티격태격할 때 아기를 낳으면 엄마의 마음이 불안해서 아기도 심리적으로 불안해지게 됩니다. 육체의 대물림처럼 정신적인 것도 다 대물림이 되거든요.

좋은 마음이 생기면 기대가 생기게 되고, 기대가 생기면 실망이 따르게 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의 문제로 보지 말고 ‘내 마음이 이렇구나’ 이렇게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마음이 진정이 되어 갑니다.”

“네,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최대한 다스려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거움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자각하면 출가를 하게 되는 거예요.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구나’ 하고 둘 다를 쫓아내 버리는 것이 출가입니다. 그럼 해탈의 길로 갑니다. 질문자의 출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웃음)

“감사합니다. 마음속에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 가만히 알아차리기만 하면 저절로 천천히 사라진다는 것을 잘 새기겠습니다. 그래도 신경이 많이 쓰이면 그때 다시 마음을 다스릴 방법을 고안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아이스크림을 먹고 설사를 하겠다는 거네요.” (웃음)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 결혼한 지 5년이 됐는데 아이를 낳을지 말지 고민입니다. 아이를 낳으면 힘들 것 같고, 안 낳자니 손주 한번 못 보고 돌아가실 부모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 적게 벌고 적게 쓰자고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막상 직장을 그만두고 나니 씀씀이를 줄이기가 힘들고, 인생 자체가 초라해진 것 같아 한없이 위축됩니다.
  • 동생과 인연을 끊고 산 지 2년이 되어갑니다. 여러 차례 연락하고 사과를 했지만 사과를 받지 않습니다. 화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안하무인형의 사람들이 남 탓으로 돌리고 더 자신만만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더 현명한 건 그들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 지난주에 할머니께서 요양원에 들어가셨는데 마음이 안 좋습니다.
  • 친한 언니가 도박에 손을 대다 길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더 도와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안쓰러움으로 너무 괴로워요.
  • 20대 초반에는 우울감을 느꼈는데 20대 중반이 되니 억울함과 분노가 올라와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두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개인의 고민을 솔직하게 나누어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면서 마지막으로 스님이 정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원하는 대로 다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인은 남편의 말을 잘 들어주고, 남편도 부인의 말을 잘 들어주고요. 부모도 아이에게 잘해주고, 아이도 부모의 바람대로 학교에 잘 다니고요. 그런데 그건 독재입니다. 독재국가의 지도자나 그렇게 살지, 누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인생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자기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우리가 이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같이 사는 이유는 그래도 이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들의 인생이고, 나는 내 인생을 사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우리는 점점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 휩쓸려 살지 마시고 자기중심을 잡으시길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사는 걸 늘 시비하면 내가 그 혼탁한 세상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사는 것은 그들의 인생이고, 그런 가운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관점을 가져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봉사자들의 안내에 따라 대강당에 모인 청중이 모두 빠져나가고 1층 로비에서는 책 사인회가 열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서서 스님의 사인을 받으며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스님 정말 감사합니다. 스님 강연 듣고 제가 정말 행복해졌습니다!”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분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책 사인회를 마치고 봉사자들이 모두 무대 위에 올라와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스님은 수고한 봉사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정토회관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법사교육을 받고 있는 화엄반 행자님들을 위해 회향수련 법문을 하고, 오후에는 통일의병대회에 참석한 후 저녁에는 서울을 출발해 두북 수련원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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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하이

‘할 수 있는 일은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런 관점을 갖고 살면 됩니다"

2024-03-27 19:00:51

진달래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4-03-19 18:16:54

윤난이

감사합니다

2024-03-02 19: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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