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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스님은 심야버스로 밤새 매솟(maesot)에서 방콕으로 이동했습니다. 새벽에 방콕에 도착해서 숙소에서 잠시 휴식하고 상콤 스님과의 만남을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상콤 스님이 운영하는 매브엉 친환경 농장(Mab Ueang Agri-Nature Center)은 방콕에서 동쪽으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스님은 지난 INEB 투어에서 인연을 맺은 상콤 스님(pha sangcom)을 만나기 위해 이곳 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센터는 마치 숲 속에 자리한 듯 했습니다. 센터에 도착하자 상콤 스님이 스님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상콤 스님은 센터를 소개하기 위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해서 설명해주었습니다.
“저희 센터의 가장 큰 철학은 대안 교육입니다. 왜 우리가 여기에 있고,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 니르바나에 이르기 위한 길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그래서 모든 교육이 붓다의 지혜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 센터는 정토회의 사상과 매우 비슷합니다.”
상콤 스님의 프레젠테이션 설명을 들은 후 스님은 상콤 스님과 함께 센터를 둘러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법당으로 이동했습니다. 법당 안에 큰 불상이 있었는데 다른 태국의 불상은 금빛을 띄고 있는 반면 센터의 불상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불상이 흙으로 만들어져 있네요.”
“네, 우리의 사상을 담아서 불상을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불상 앞에서 삼배를 하고, 상콤 스님이 스님께 기념사진 촬영을 요청했습니다. 흙으로 만든 불상 앞에서 스님과 상콤 스님 두 분이 나란히 앉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시 센터의 이곳저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센터 전체가 숲 속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건물도 나무나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센터 곳곳을 다니면서 상콤 스님은 센터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38도를 넘어 40도 가까이 되는 매우 더운 날씨였습니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게 2시간 가량 센터를 둘러보니 어느덧 교민들과의 점심식사 약속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큰일을 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가 다음에도 방문이 가능하다면, 그때는 충분하게 시간을 내어 오겠습니다. 오늘은 제가 정토회 회원들과 점심식사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도 잠깐 시간을 내어 친환경 주거 단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상콤 스님은 ‘숲 속의 마을’이라는 주택 개발 단지를 하나 보여주었습니다. 멤버 중 하나인 부동산개발회사가 개발하고 있는 친환경 주택단지였습니다.
주택단지를 둘러보고 서둘러 정토회원들과의 약속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점심은 방콕 회원들과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회원 중 한 분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어서 스님은 방콕 시내로 이동했습니다. 10여 명의 회원들이 스님을 맞이했습니다. 스님도 회원들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코로나 이후에 얼마 만에 타이에 방문한 건지 모르겠네요. 다들 잘 있었어요?”
“네.”
대부분 아주 오래된 활동가들이고 교민 강연을 할 때 스태프로 활동했던 회원들이어서 낯선 얼굴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님은 지난 6일 간의 태국 방문 일정 동안 있었던 일들을 회원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비구니 스님들, 산티아속 불교 공동체, 매솟에 방문해서 국경을 둘러본 것, 난민촌 지원 사업을 점검했던 사항들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중 담마누락 재단의 주피터 스님이 있는 곳은 시설 보완을 지원하기로 했다는 것, 매솟의 난민촌을 추가 지원하기로 한 점에 대해서는 더욱 상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어느덧 3시간이 훌쩍 지났습니다. 스님은 방콕 정토회 회원들이 JTS가 태국에서 하는 사업에 대해서 잘 지원해 주기를 당부하면서 식사 자리를 마무리했습니다.
원래 일정이라면 오늘 밤에 파키스탄으로 이동하려고 했는데 파키스탄 비자 발급이 늦어져서 스님은 부득이하게 일정을 변경했습니다. 내일은 방콕에서 오전에 수행법회 생방송을 하고, 오후 2시에 공항으로 이동한 후 공항에서 업무를 보다가 저녁 6시 45분 비행기로 방콕 공항을 출발하여 터키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오늘은 법문이 없었기 때문에 지난 수행법회에서 있었던 내용을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 어떤 원리를 탐구하는 것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지식도 필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원리도 필요하고, 모두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이다’ 하고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독교를 공부해도 되고, 불교를 공부해도 되고, 노자를 공부해도 되는데, ‘이것이 제일이다’, ‘이것만이 옳다’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 분은 세상을 이렇게 보는구나’, ‘저 분은 세상을 저렇게 보는구나’, ‘사람의 생각이 각양각색이구나’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다’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사람의 생각이 각양각색이구나’ 하고 아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런 믿음이 진리이다’ 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믿음은 사람마다 다르구나’ 하고 아는 것이 진리입니다.
어떤 원리를 공부하는 것은 좋습니다. 하지만 그 원리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곱다’ 하는 말을 기계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좋은 말을 했는데도 상대가 욕을 하면 이 말이 맞지 않게 됩니다. 어떤 원리를 상황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절대화시키는 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윤리나 도덕은 사람을 이익 되게 하려고 생긴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윤리나 도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했습니까? 그 이유는 윤리와 도덕을 절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상대에게 욕을 했을 때보다 상대에게 칭찬했을 때 상대로부터 칭찬받을 확률이 높다’ 이렇게 해석해야 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열 번 욕을 했음에도 칭찬이 한 번 돌아올 수 있어요. 또한 내가 상대에게 열 번 칭찬을 했음에도 욕이 한 번 돌아올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열 번 칭찬하면 아홉 번 칭찬으로 돌아오고, 열 번 욕하면 칭찬이 한 번밖에 안 돌아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칭찬을 하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욕을 하는 게 나을까요? 따져보면 ‘아, 칭찬하는 게 낫다’ 하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칭찬을 한 만큼 확률적으로 칭찬이 돌아올 경우가 높다고 말할 수 있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반드시 칭찬이 돌아오지는 않습니다.
윤리를 자꾸 절대화하기 때문에 배운 것과 안 맞는 일이 생기고 부작용이 계속 생기게 되는 겁니다. ‘나는 평생 남들에게 베풀며 살았는데, 왜 내가 어려울 때는 아무도 안 도와주나?’ 하고 억울해 하는 사람이 많거든요. 그런데 세상을 살아보면 내가 아무에게도 베풀지 않았는데 도움을 받는 경우가 있고, 늘 베풀며 살았는데 도움을 못 받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럴 확률이 매우 낮다는 거죠. 그런 일이 일어날 수는 있는데 확률이 매우 낮습니다. 즉, 내가 많이 베풀면 도움을 받을 확률이 그만큼 높아지고, 내가 베풀지 않으면 남들에게 도움을 받을 확률도 그만큼 낮아집니다. 남들에게 도움 받을 확률은 베풀수록 높아지기 때문에 ‘남들에게 베풀며 살아라’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나온 겁니다. 이것이 바로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불확정성의 원리이고 확률론입니다.
자꾸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도와주면 무조건 도움을 받는다’, ‘기도하면 무조건 복을 받는다’ 하고 기계적으로 받아들이면 늘 모순이 생기고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도 ‘확실한 믿음’ 이런 건 없어요. ‘믿어야지!’ 이 말은 사실 안 믿어진다는 얘기입니다. 믿어지면 믿으면 되고, 안 믿어지면 안 믿으면 됩니다. 그래서 ‘나는 확실한 믿음이 없다’ 이런 얘기도 할 필요가 없어요. 누가 어떤 얘기를 했을 때 ‘그럴 듯 하네요’ 하는 생각이 들면 믿어진다는 것이고, ‘글쎄, 별로인 것 같네’ 하는 생각이 들면 안 믿어진다는 겁니다. 안 믿어지면 안 믿어진다고 얘기하고, 믿어지면 믿어진다고 얘기하면 됩니다. 확실한 믿음이 생겨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어떤 것을 자꾸 절대화시키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확연히 깨닫는다’, ‘완전한 구원을 받는다’ 이런 말도 다 절대화시키는 과정에서 나온 용어예요. 부처님은 어떤 것도 절대화시키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친구들에게 내가 신의를 지키면 친구도 신의를 지킬 확률이 높아지는 겁니다. 내가 신의를 지키면 반드시 친구도 신의를 지킨다고 자꾸 생각하니까 친구가 신의를 안 지켰을 때 서로 원수가 되는 거예요. 때로는 친구 사이에 신의를 안 지킬 수도 있는 겁니다. 약속을 했다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것은 아니잖아요. 지킬 때도 있고, 안 지킬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러나 내가 약속을 많이 지키면 상대도 비교적 약속을 지킬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란 마음의 작용이지 이성의 작용이 아니에요. 그래서 철학을 많이 공부하면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말은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배가 부르다는 말과 비슷한 거예요. 음식을 먹어야 배가 부르지 생각을 많이 한다고 배가 부르는 것은 아닌 것처럼,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것은 생각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성격이 서로 다릅니다. 생각해서 괴로움이 없어진다는 말은 애초에 안 맞는 얘기예요. 사유를 깊이해서 이치를 탁 깨달으면 마음이 가벼워질 수가 있는데,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는 겁니다. 행복은 마음이 영향을 받았을 때 오는 거예요. 불교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알아도, 기독교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알아도, 과학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알아도, 행복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행복해 지는 것은 마음작용이기 때문에 마음의 집착을 내려놓아야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걸 가지고 문제를 풀려고 하니까 애초에 안 맞는 거예요. 자동차 기술을 많이 연구해서 자동차를 잘 고친다고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것처럼 지식을 많이 쌓아서 행복해지고 싶다는 것은 아예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경우에 해당합니다.
철학과 윤리를 연구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행복해지는 것과는 연관이 매우 적다고 볼 수 있어요. 자동차 운전을 배우니까 기분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운전 때문에 오는 게 아니라 원하는 것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오는 겁니다. 기술과 지식이 많아져서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행복해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심리의 문제이지 생각이나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점을 구분해서 접근하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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