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2.12.17 정토불교대학 즉문즉설
“나를 버리는 수행과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은 모순이 아닐까요?”

안녕하세요. 두북 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은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이 한 달에 한 번 수업 내용 중 궁금한 점에 대해 스님과 대화를 나누는 날입니다.

스님은 새벽 기도와 명상을 마친 후 오전 10시에 방송실 카메라 앞에 자리했습니다.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은 지금까지 ‘인간 붓다의 삶과 사상’에 대한 4주째 수업을 마친 시점입니다.

먼저 불교대학 학생들이 지난 한 달 동안 반별로 실천 활동을 했던 모습을 영상으로 함께 보았습니다. 영상을 보고 나서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활동한 내용들을 모두 잘 봤습니다. 길거리에서 춤추면서 어려운 사람을 위한 모금도 하고, 여러 역사 유적지도 답사하고, 봉사활동도 하고, 지난 한 달 동안 실천 활동을 잘하신 것 같습니다.

소감을 들어보니까 찡그리는 얼굴보다 웃는 얼굴이 조금 늘었다고 하고, 또 예전에 비해 행복감이 늘었다고 하니까 ‘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토불교대학이 원래 목표한 대로 진행이 잘 되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학교는 배우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운영이 되어야 합니다. 배우는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에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니 가르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아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배우는 사람들이 몰랐던 내용을 얼마나 잘 배울 수 있도록 해주느냐가 중요합니다. 즉, 배우러 온 사람들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맞춰서 가르침이 있어야 합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이 무엇을 잘 모르겠는지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사전에 많은 학생들이 질문을 신청했지만 오늘은 최종적으로 다섯 명이 선정되어 스님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중 한 명은 나를 버려야 하는 수행과 내가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 서로 모순이 되는 것 같다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나를 버리는 수행과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은 모순이 아닐까요?

“수행문에는 무아, 무소유, 무아집이 수행의 목표라고 하면서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라는 법문도 하셨습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려면 내가 주체적이어야 하는데 나를 버리는 것과 모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공부하면서 충분히 궁금증이 들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돈에 집착하면, 우선 원하는 만큼 돈을 얻지 못할 때 껄덕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 앞에 서면 비굴해집니다. 반대로 나보다 돈이 적은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괜히 목에 힘을 주고 교만을 부리게 됩니다. 또, 무언가 돈이 된다 싶으면 거기에 마음을 확 빼앗겨 버립니다. 그에 따른 위험도 눈에 잘 안 들어옵니다. 돈을 빨리 손에 쥐려고 하니까 그만큼 윤리나 도덕도 잘 안 보이게 됩니다.

반면, 돈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면 우선 돈에 덜 껄덕거리게 되고, 누가 돈이 많다고 해도 비굴해지지 않고, 누가 돈이 적다고 해도 그 앞에서 거만해지지 않고, 어디 돈이 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혹해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일도 적어집니다. 그 일이 어떤지 살펴보고 필요하면 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게 됩니다. 그러니 돈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내가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돈에 집착하게 되면 그만큼 내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게 되면,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과 마주했을 때 기분이 나빠지고 갈등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내가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그냥 들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네, 그것도 한 방법이겠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우선 화가 나지 않고, 그 사람과의 관계도 나빠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지만 나는 이렇게 가겠습니다’ 하고 내 길을 가도 됩니다. 그때도 그 사람과는 갈등 없이 그냥 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의 방법이 괜찮겠다 싶으면 기존의 생각을 내려놓고 같이 가도 괜찮습니다. 그만큼 내 의견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나에게 자유가 많아집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할수록 자유가 없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내 것이다’ 하고 고집할수록 자유가 없어집니다. ‘이건 그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가 써도 좋다’ 이런 관점을 가질수록 자유의 영역이 훨씬 더 넓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중심을 잘 잡고 자기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신체의 감촉과 생각에 끄달리기가 쉽습니다. 이리 끌면 이리 가고, 저리 끌면 저리 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즉, 누군가 나의 이런 카르마를 알면 나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뭐라고 하면 화낸다’, ‘저 사람은 뭐라고 하면 웃는다’, ‘저 사람을 유혹하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 ‘저 사람은 돈을 주면 유혹이 된다’, ‘저 사람은 잘생긴 사람에게 쉽게 유혹된다’ 이렇게 내 카르마에 끄달리면 자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도 자기가 중심이 돼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그렇지 않습니다. 늘 카르마에 끄달려 살아갑니다. 그 모습은 마치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습니다. 자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바람이 멈추면 어느 골짜기에 떨어질지 모르죠.

그런데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내 것을 고집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말에 덜 끄달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하고 판단이 되면 그 방법으로 하면 되고, 듣고 나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내 길을 가고 싶다’ 하면 내가 생각한 대로 하면 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버릴수록 자기중심이 잡히게 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세상에 끌려 다닙니다. 여러분이 웃고, 여러분이 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분위기에 따라 웃고, 분위기에 따라 우는 거예요. 자신의 감정 조절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죠.

앞으로 빅데이터 기술과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점점 발달하면 여러분들을 거의 로봇처럼 조종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습관을 관찰하면 여러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평소 생각을 읽어서 거기에 딱 맞는 광고를 하면, 여러분들이 선거에서 누구를 투표할지 선택도 유도할 수 있고, 물건을 팔 때도 여러분들이 끌릴 만한 맞춤형 광고를 탁 보여줘서 구매하도록 할 수도 있죠.

그런데 내 생각을 놓아버리면 내 눈에 보이는 것에 끄달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 의견이 옳다는 고집을 내려놓아야 하고, 내 것이라는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고집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은 한 번에 이해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공부를 조금 더 하셔야 해요. 여러분들은 자유를 생각할 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니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만큼 속박을 받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건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뜻하죠? 그런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게 되면 곧바로 불행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는 걸 행복으로 삼으면 늘 행복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윤회에 빠지게 됩니다. 그건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놓아버리면 속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기 때문에 속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졌을 때의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기 때문에 불행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설령 한 순간 놓쳐서 그런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알아차리면 욕망이 사라져 버립니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용어를 자유와 행복으로 번역할 때가 많은데,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이 평소 생각하는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져서 느끼는 행복’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하는 자유는 투쟁에서 필요했지만, 수행적 관점에서는 결국 자기 성질대로 안 되면 죽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부여한 천부적 인권이라는 생각도 인권 신장 면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결국 하늘의 생각이 바뀌면 인권은 침해해도 된다는 뜻으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신의 이름으로는 인간을 차별하고 탄압해도 된다는 뜻이 받아들여질 수 있어요.

불교에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권리는 하늘도, 신도, 인간도,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하늘의 이름으로도, 신의 이름으로도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자유나 인권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물질적 풍요가 일어나고 많은 민주주의적 발전을 해왔는데도 삶의 고뇌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학교 교육을 통해서 서양식 사고에 젖어 있고, 또 자본주의적 사회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거예요. 만약 우리 사회가 아직도 배가 고프고, 독재 체제 하에서 많은 억압을 받고 있다면, 지금까지 배운 서양적 가치가 여전히 중요했을 겁니다. 우선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고, 독재 탄압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때는 서양적 자유와 인권이 중요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는데도 여전히 삶의 고뇌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앞으로 불교적 가치가 더욱 중요해질 거예요.

부처님은 왕이 될 수 있었는데도 삶의 고뇌가 있었기 때문에 ‘왜 그런가’ 하고 탐구를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600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갖는 문제의식에 가장 근접해 있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못 먹어서 헐떡거리고, 못 입어서 헐떡거리고, 하고 싶은 걸 못 해봐서 헐떡거린다면, 일단 누군가 먹게 해 주고 입게 해 주면 해결됩니다. 이런 방식의 문제 해결이 통할 때 누군가에게 비는 종교가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삶의 고뇌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간 고뇌의 근본이 뭘까?’ 하고 탐구를 하신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은 먹고, 입고, 자는 것이 해결되었는데도 여전히 고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문제의식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아직 저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생각이 너무 앞서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 생각을 더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가족이나 친한 친구처럼 소중한 사람들에게 비싸고 좋은 물건을 선물하고 싶습니다. 값비싼 물건이 아닌 것으로도 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 부처님이 부인과 자식을 두고 출가를 했다는 얘기를 듣고, 하나가 행복하기 위해 하나는 불행해진다는 모순에서 부처님 또한 자유롭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 화물연대 파업을 보며 강자보다는 약자를 응원하게 됩니다. 이는 무의식 속의 경험에서 제가 약자였던 상황들이 많아서 그런가요?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후 천민들을 위해 어떻게 법을 설하셨는지 궁금하고, 그 시대 그들에게는 해탈과 열반이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대화를 마치고 스님이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다시 한번 격려해 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공부하다가 의문이 있으면 언제든지 질문을 하시고, 따지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언제든지 따지세요. 불법(佛法)에서는 무조건 믿으라는 게 없어요.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으면 묻고, 대신에 한 번에 다 이해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이해가 안 되면 잠시 덮어놓고 다음 시간까지 생각해보고, 그때까지 의문이 남으면 그때 가서 또 질문을 하는 거예요. 다른 강의나 법문을 듣다가 저절로 풀릴 때도 있고, 또 그렇게 풀리면 다음 과제로 넘어가고, 이렇게 하나씩 공부를 해나가시길 바랍니다.

불법(佛法)을 공부하라고 해서 다른 종교나 다른 공부를 그만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법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기독교 신자는 성경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을 만나도 ‘서로 믿음이 다를 뿐이구나’ 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대화를 나누고 내년 1월에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오후에는 두북 수련원에 손님들이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냈습니다.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해가 저물었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외국인을 위한 영어 즉문즉설을 하고, 오후에는 상추 씨앗을 심고 텃밭 정리를 한 후, 저녁에는 일요 명상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전체댓글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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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성

나를 버리고 내것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릴 때 참 자유를 맛볼 수 있음을ㅇ다시 상기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2-12-29 06:02:48

연아킴

제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이해하며 넓은 자유를 누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2-12-28 17:01:33

이임숙

자유롭고 가볍게 살수 있도록 꾸준히 정진 합니다
감사합니다

2022-12-28 14:4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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