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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두북수련원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늘 오전에는 밤숲에 가서 밤을 주웠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밤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밤이 작년보다 더 굵어진 것 같아요.”
한참 줍다 보니 가져간 바구니가 가득 찼습니다. 햇밤이라 알이 꽉 찼는지 바구니가 무척 무거워서 혼자 들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바구니 손잡이에 지팡이를 끼우고 행자와 나누어 들었습니다.
“스님, 이렇게 드니까 훨씬 가볍네요.”
“수평이 맞으니까 무게가 분산이 되어서 가벼워진 거예요. 바구니에서 멀수록 가벼워지니까 지팡이 끝을 들면 더 가벼워요.”
가져온 밤을 깨끗이 씻고 분류해두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난 후에는 지난번에 삽목 하고 분갈이해두었던 국화를 크기별로 모아서 화분에 옮겨 심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두면 나중에 풍성한 꽃을 볼 수 있을 거예요.”
내일은 경주 국립공원 남산분소 개소식이 있습니다. 내일 스님은 제주에서 강연이 있어서 참석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 난 화분을 들고 미리 찾아갔습니다.
남산분소에 도착하자 국립공원관리공단 탐방 이사님과 경주사무소 소장님 등이 환대해주셨습니다. 남산분소를 다녀온 후 저녁 8시부터는 정토경전대학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2강에 걸쳐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에 대해 설명한 후 오늘부터는 금강경에 대해 첫 수업을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대승불교가 어떻게 일어났고 대승경전이 어떻게 출현했는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앞으로 공부할 금강경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금강경의 원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인데 축약해서 금강경(金剛經)이라 부릅니다. 금강경은 대승경전에 속하며 대승경전 가운데 초기인 반야부에 속하는 경전입니다. 이 금강경은 대승경전 중에서도 가장 초기에 형성된 경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금강반야바라밀경에서 ‘금강’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금강석을 뜻합니다. 그 강도가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해서 무엇이든 잘라 버릴 수가 있는 단단한 돌을 금강석이라고 합니다. 경도가 10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돌은 다이아몬드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을 영어로는 ‘다이아몬드 수트라’로 번역하는데 여기서 금강석은 값비싼 보석이라는 개념이 아니라 강도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지칭합니다. 둘째, 금강저(金剛杵)라는 의미입니다. 금강저는 인드라 신이 가지고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로 어떤 사람도, 어떤 무기도 모두 파괴할 수가 있는 도구를 뜻합니다.
이 ‘금강’이라는 말은 반야를 수식하는 말입니다. 반야(般若)는 빨리어(पाळि)로는 빤야(panna)인데 우리식으로 발음해서 반야예요. 범어(산스크리트어)로는 ‘프라즈나’라고 부릅니다. ‘반야’라는 것은 ‘사물이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실상’ 혹은 ‘그것을 내가 여실히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번역하면 반야는 ‘지혜(智慧)’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가 통상적으로 ‘저 사람은 지혜가 있다.’ 할 때 사용하는 ‘지혜’와는 차이가 큽니다. 반야를 의미하는 지혜는 세상의 모든 진실을 다 아는 지혜로 부처님의 지혜, 보살의 지혜 정도 될 때 빤야(panna)라고 합니다.
반야를 더 강조하기 위해 앞에 반야를 수식하는 마하라는 말을 붙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마하반야(摩訶般若)가 됩니다. 마하라는 것은 무한히 큰 것을 말해요. 반야만 해도 완전한 지혜인데 반야 앞에 마하를 붙여서 반야를 더욱더 강조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비교할 수 없는 한량없이 큰 지혜를 마하반야(摩訶般若)라고 합니다. 또 어떤 번뇌, 어떤 욕망, 어떤 무지도 깨뜨려버리고 타파해서 모든 번뇌를 다 부숴버리는 그런 지혜를 금강반야(金剛般若)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완전한 지혜를 증득함으로써 모든 번뇌를 타파하고 괴로움이 없는 열반의 세계, 행복과 자유의 세계에 이른 것을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 이라고 합니다. 여기에 관계되는 부처님의 말씀이 ‘경’이에요. 그래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은 ‘완전한 지혜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서 괴로움이 없는 열반에 이르는 부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금강경은 현재 32분으로 분류해서 정리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이 32분으로 분류해서 말씀하신 게 아니라 후대 사람들이 내용을 32분으로 분류해 놓은 거예요. 제일 첫 번째 제1분은 법회인유분입니다. 이 법회가 열리게 된 정황을 설명한 것으로 서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는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적기가 쉬운데 그렇게 말했는지 안 했는지 100% 알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가 아니라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거예요.
경전은 항상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라고 시작하고 신문기사처럼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가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경을 처음 결집할 당시에 글로 쓴 게 아니라 암송을 했기 때문입니다. 암송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서두를 정확하되 간략하게 정하는 게 원칙이었어요. 그래서 경전도 신문기사처럼 언제, 어디서,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 육하원칙에 준해서 기록했습니다.
‘발우(鉢盂)’에서 발(鉢)은 ‘발다나’라는 인도말에서 온 말인데 적당한 양이라는 뜻입니다. 우(盂)는 중국말 ‘밥그릇 우’자에요. 이 두 개가 합해진 단어가 발우예요. 그러면 적당한 양의 음식을 담는 그릇인데 적당한 양의 기준이 뭘까요? 이 몸이 굶어 죽지 않고, 이 몸이 수행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이 적당한 양이예요. 적당한 양을 담는 그릇, 이게 발우입니다. 수행자가 밥을 먹는 목적은 배부르게 먹는 것도 아니고 맛있게 먹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발우를 들고 슈라바스티 사위성에 들어가서 걸식을 했습니다. 성에 들어갈 때 수행자들은 혼자면 혼자 가면 되지만 여러 명이 있을 때는 한 줄로 쭉 서서 들어갔습니다. 기러기 떼처럼 한 줄로 성 안의 골목들을 지나가면서 차례대로 그 골목에 있는 집에서 음식을 빌었습니다.
차례로 밥 비는 것을 마쳤다는 것으로 ‘차제걸이’를 말합니다. 차례로 밥을 빈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걸식을 할 때는 어느 집을 일부러 빼거나 넣으면 안 됩니다. 이 집은 부자니까 피해 가고, 이 집은 가난하니까 피해 가고, 이 집은 안 주니까 피해 가고, 이 집은 주니까 기다리고, 이렇게 하면 안 돼요. 그냥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순서대로 밥을 빌어야 해요.
이렇게 해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옵니다. 수행자는 밥을 빌고 나면 반드시 자기 수행 도량에 와서 먹습니다. 배고프다고 도중에 먹으면 안 돼요. ‘환지본처 반사흘’은 본래 자리로 돌아와 공양을 드셨다는 뜻입니다.
공양을 먹었으니까 이제 발우를 씻어야겠죠. 발우를 거두었다, 즉 발우를 씻어서 엎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윗옷을, 즉 가사도 벗어서 잘 접어두었죠. 외출을 하고 돌아왔으니까 가사는 벗어두고, 발우는 씻어서 엎어두었어요. 그리고 ‘세족이’라고 했습니다. 발을 씻었다는 거예요. 당시 수행자들은 맨발로 다녔기에 외출하고 들어오면 반드시 발을 씻습니다. 발을 씻은 뒤 ‘부좌이좌’, 즉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여기서는 자리에 앉았다고 간단하게 표현했지만 선정에 드셨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 이것이 부처님의 일상 모습이에요. 매일 이렇게 걸식을 하고, 대중들이 자리에 쭉 앉아 있으면 질문 있는 사람이 그때 질문을 해서 법담을 나눕니다. 식사 초대를 받아서 갔을 때는 반드시 초대한 사람이 질문을 합니다. 이처럼 공양을 올리고 질문을 하기 때문에 법문을 청할 때는 반드시 재보시(財布施)를 하고 법보시(法布施)를 받아요. 혹은 거꾸로 법문을 먼저 듣고 보시를 하기도 하죠. 그래서 반드시 법문을 들으면 다만 얼마라도 보시를 하는 관례가 생긴 거예요.
특별히 식사 초대를 받은 경우가 아닐 때는 비구 스님들끼리 수행처로 돌아와서 밥을 먹습니다. 초대를 받으면 그 초대한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초대한 사람의 질문에 따라서 법담을 나눈 뒤에 돌아오고요. 이처럼 법회 시간이라는 게 엄격히 정해진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차담으로 나누는 대화였다고 이해하시면 돼요. 그리고 제자들과 대화할 때는 본래 자리로 돌아와서 밥을 먹고 가사와 발우를 정리해놓은 뒤 자리에 편안하게 앉으면 자연스럽게 누군가가 질문을 하고 법담이 시작되는 거예요.
지금 제 옷을 보면 옷자락을 왼쪽에 걸치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냈습니다. 이런 옷차림도 다 이런 문화에서 온 거예요. 큰 옷을 몸에 걸치되 항상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도록 이렇게 걸칩니다.
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낼까요? 인도 문화에서는 항상 무기를 오른손으로 쥐어요. 그래서 무기를 숨길 때도 오른쪽에 숨기는데,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위협할 의사가 없습니다’라는 뜻을 표현할 때 인도에서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문화가 있다고 해요. 거기에서 유래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사를 입는 방식도 오른쪽을 다 드러냅니다. 원래는 맨살을 드러내고 입는데, 우리는 날씨가 춥다 보니 중국옷인 장삼을 입고 그 위에 가사를 입느라 지금 제 모습처럼 어깨가 가려져 있어요. 그러나 인도는 오른쪽을 완전히 드러냅니다. 남방 스님들을 보면 그렇게 돼 있죠. 이처럼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는 게 원래 가사 입는 법이에요. 이걸 ‘편단우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꿇어앉아 예를 갖춥니다. 두 무릎을 딱 꿇고 앉는 게 아니라 오른쪽 무릎만 땅에 대고 꿇어앉는 것을 ‘우슬착지’라고 해요. 야외에서 스님에게 절을 할 때는 신발을 벗고 땅바닥에 엎드리기가 어렵잖아요. 그럴 때 우슬착지, 즉 오른쪽 무릎만 땅에 대고 꿇어앉아 이마를 상대의 발에 댑니다.
그러고 나서 합장하고 공경하사, 즉 합장을 하고 부처님을 우러러보았다는 뜻입니다. 먼저 ‘편단우견 우슬착지’ 하고 ‘합장공경 이백불언’했어요. 절을 하고 일어나서 부처님을 우러러보며 여쭸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이처럼 질문을 하니까 부처님의 대답이 이어지겠죠. 그런데 여기에서 ‘희유하십니다’라고 했어요. ‘참으로 거룩하십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뜻이에요. 그리고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두호하십니다’라고도 했습니다. 모든 보살을 이렇게 잘 보살피신다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보살에게 법을 잘 부촉하신다고도 했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얘기일까요? 그냥 질문이 있어서 물어보는 건 이해가 되는데, 왜 갑자기 부처님을 찬탄할까요? 다들 조용히 명상을 하는 가운데 문득 수보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처님께 절을 하고 부처님을 우러러보면서 이렇게 찬탄하는 거예요.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시고 모든 보살에게 이 바른 법을 잘 부촉하고 계십니다.’
이는 늘 있는 일상사였지만 오늘따라 부처님의 그 일거수일투족이, 다시 말해 말씀이 있기 전에 그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법을 보여 주고 있음을 수보리가 알아차렸다는 뜻입니다. 수행자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미 보여주고 있고, 그들이 허투로 살지 않도록 잘 보호하고 있고, 미래에 이 법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도 잘 부촉하고 있다는 것이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잔잔한 부처님의 일상을 보고 수보리가 큰 깨달음을 얻고는 혼자 파동을 일으킨 거예요. 옛날 선인들은 맑은 호수에 돌을 던진 것과 같은 상황을 ‘평지풍파(平地風波)’라고 했습니다. 평온한 자리에 뜻밖에 풍파가 일어나듯이 진리의 파장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금강경이 전개됩니다. 여러분도 이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첫 부분을 잘 살펴보세요. 어떻게 보면 그냥 일어나서 밥을 얻고 돌아와서 밥 먹은 뒤 자리에 앉는 간단한 일상의 모습인데, 옛 선사들은 금강경의 대의가 이 속에 다 들어있다고 했습니다. ‘선사는 첫 장을 펼칠 때 이미 금강경의 모든 대의를 알아야 한다’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일상을 보고 오늘따라 수보리가 깨달음을 얻고 큰 감명을 받았기에 그것을 부처님께 고백하면서 자기의 질문으로 들어갑니다. 수보리가 얻은 깨달음이 무엇인지 여러분도 한번 돌아보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법문을 한 후 이번 주에 생활 속에서 실천해 볼 수행 연습 과제를 이야기해 준 후 수업을 마쳤습니다. 학생들은 교실별로 화상회의 방에 입장하여 마음 나누기를 이어나갔습니다.
내일은 제주도에서 열리는 '2022 중소기업 리더스포럼'에 참가에 특별 강연을 하고 저녁에는 수행법회 생방송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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