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10.16. 농사일, 정토대전 회의, 금요 정기법회
“상대방이 화를 낼 때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아침에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정토대전 편찬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정기법회를 생방송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고 밭으로 나갔습니다. 파란 가을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이불처럼 펼쳐져 있었습니다.

스님은 산윗밭으로 올라갔습니다.

들깨, 고구마, 가지가 빼곡히 들어서 있던 밭은 다시 허허벌판이 되었습니다.

다음 농사를 위해 거름을 섞어주었습니다. 먼저 소똥 포대를 밭 군데군데 놓았습니다.

포대를 다 놓고 거름을 부리려고 하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인도 물라상가 법인 대표인 붓다팔라 스님이 갑자기 찾아와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은 작업복과 장화를 입은 상태로 수련원으로 내려가서 붓다팔라 스님과 차담을 나누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곧 울력을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스님, 다시 밭으로 가실 거예요?”

“그래도 일을 좀 하고 와야지요.”

다시 윗밭으로 올라가 보니 행자들이 거름을 잘 섞어놓았습니다.

“지난번에 태풍으로 무너진 곳을 정비해야겠어요.”

태풍이 지나가면서 윗밭 윗단 산 쪽에 흙이 밭까지 쓸려 내려온 곳이 있었습니다. 묘당 법사님이 포클레인으로 흙을 파서 밭에 부리고, 스님은 옆에서 돌과 큰 나뭇가지를 치웠습니다.



아랫단에서 윗단으로 오르내리는 길에 푹푹 파인 곳도 메워주었습니다.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밤을 주웠습니다. 스님은 오전 10시 30분 직전에 수련원에 도착해 공동체 법사단과 정토대전 편찬에 대해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현안을 나중에 논의하고, 정토대전부터 논의하겠습니다.”

불교 사회사상 편찬팀에서는 그동안 ‘오계’에 대해 내용을 정리하고 토론을 해왔습니다. 그동안 토론 과정에서 나온 의문점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에 대해 차례대로 질문을 했습니다. 그중 불살생 계율에 대해서는 환경오염을 시키는 것도 불살생 계율을 어기는 것이 되는 것인지 묻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도 불살생 계율을 어기는 것인가요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도 불살생 계율을 어기는 것인가요? 현대인들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이산화탄소를 배출할 수밖에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나라에 사는 것 자체가 환경오염을 시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우리는 항상 참회를 해야 하는 걸까요?”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른 생명의 희생 위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중생의 삶이 갖는 필연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생의 몸을 갖고 살아가는 한은 업을 짓는 것을 피할 수가 없어요. 다만 업을 짓는 것을 최소화하려면 소비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적어도 수행자라면 수행하고 정진하는 것에 필요한 에너지를 확보하는 것 이상으로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먹는 것도 최소화하고, 입는 것도 최소화하는 등 생활 자체를 최소화해서 자연 생태계의 수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자연 생태계는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 존재의 개념이거든요.

그러나 소수의 수행자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살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는 가능한 검소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불살생 계율과 불투도 계율을 지키는 삶에 해당하는 거예요.

반면에 탐욕의 삶은 불투도의 계율도 어기고, 불살생의 계율도 어기는 삶입니다. 남이 쓸 것 까지 내가 써서 남의 생존을 위협하고, 다른 생명을 헤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 생태계를 파괴하면 기후변화를 가져오게 되고, 기후변화는 많은 생물종의 소멸을 가져오기 때문에 환경오염도 불살생 계율을 어기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계율을 삼가는 것에도 단계가 있다는 겁니다. 계율의 기본 정신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지만,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는 단계적으로 접근해 갈 수밖에 없어요.

첫째, 수행자라면 최소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니멈입니다. 우선 사람이라도 때리거나 죽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둘째,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짐승을 해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과 짐승의 생명에 경중이 있다는 뜻이 아니에요. 선택의 상황에서는 사람을 우선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에 육식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을 때도 부처님께서 탁발하는 수행자들에게 물고기까지는 먹는 것을 허용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탁발을 하니까 무엇이든지 주는 대로 먹어야 하지만, 남방 불교에서는 물고기까지 허용을 했습니다. 그럼 물고기는 육식이 아니냐, 이런 논쟁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그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도 물고기까지는 먹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허용을 했던 것 같아요. 탁발을 하다 보면 물고기가 안 들어있는 음식을 얻기는 어려웠던 거죠. 서민들의 집에 탁발을 하러 가서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얻어먹을 확률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물고기는 가난한 사람들도 냇가에서 쉽게 잡아먹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스님들을 보면 모기도 안 죽이고, 파리도 안 죽이고, 개미도 안 밟기 위해 기왓장을 놓고 다니면서, 정작 자신의 제자에게는 야단을 치고 뺨을 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거예요. 개미를 안 죽일 정도의 마음이라면 사람을 때리지는 않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을 때 그 사람을 마땅히 죽여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개미는 죽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불살생의 기본 정신이에요.

그것처럼 우리가 과소비를 해서 환경을 파괴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생명들을 죽인 것은 우리가 직접 죽인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수많은 생명을 죽인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것 역시 불살생 계율을 어긴 것이 됩니다.

그러나 환경오염 중에도 직접적인 살생 행위가 있다는 거예요.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해 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홍수가 지는 날에 폐수를 몰래 강에 내다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번 돈을 가지고 방생하는 일에 쓰는 사람도 있는데, 이거야말로 엄청난 모순이라는 거죠. 이런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 모릅니다.

생일날과 제삿날에 육식하는 것이 갖는 모순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하는 또 하나의 모순이 생일날과 제삿날에 고기를 먹는 겁니다. 담마를 기준으로 보면 생일날이나 제삿날이야말로 고기를 안 먹어야 하는 날이거든요. 부모님이 죽었다고 슬퍼하면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고, 자식이 태어났다고 기뻐하면서 살아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생일날이나 제삿날일수록 오히려 그날 하루만큼은 육식을 하지 않는 자세를 가져야 하루라도 자신을 경건하게 하는 자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물론 우리의 제사 문화는 돌아가신 분이 좋아하는 음식을 올린다는 개념이지 살생의 개념은 아닙니다.”

점심식사를 하고 이어서 불살생에 대해 더 토론을 하고 불투도, 불사음, 불음주 계율에 대해 질문하고 토론한 후 다음 주제로 넘어갔습니다.

“정토성전 발표를 듣겠습니다. 고생한 것 다 한번 들어봅시다.”

오계에 대한 토론을 마치고 정토성전팀에서 ‘인간 붓다’ 중 경전 발췌 내용을 검토한 부분을 발표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탄생부터 성장, 결혼까지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담고 있는 원전 4-5권을 비교 분석하여 성전 초안을 작성했습니다.

저녁 6시가 되어 회의를 마쳤습니다. 원고 교정과 여러 업무들을 처리한 후 저녁 7시 30분에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았습니다.

오늘은 금요 정기법회가 열리는 날입니다. 1600여 명의 정토회 회원들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건넸습니다.

“오늘은 10월 들어 세 번째 정기법회일입니다. 정토회는 요즘 정일사 정진 기간입니다. 정일사는 ‘정토를 일구는 사람들’의 줄임말로 정토회의 모든 정회원들이 보름간 매일 300배 정진을 하는 수행 프로그램입니다.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집중 정진을 해서 자신의 수행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6명이 화상으로 연결되어 스님과 즉문즉설을 했습니다. 그중 한 명은 타인이 화를 내면 자동적으로 움츠러들게 된다며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지 질문했습니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나는 어떻게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요?

“타인이 언성을 높이거나 화를 내면, 제가 뚜렷하게 잘못한 게 없더라도 습관적으로 불안해하고 움츠러듭니다. 자동적으로 ‘내가 뭘 잘못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내 마음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안 그럴 수 있을까요?”

“좋은 태도인데, 왜 고치려고 해요?”

“자존심이 상하는 것 같아서요. 상대의 말에 내가 먼저 움츠러드니까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상대의 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상대가 화를 낼 때 ‘왜 저 사람이 화가 났을까?’ 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수행적 관점에서 보면 굉장히 높은 수준입니다. 불안해하는 건 중생의 마음이지만, 상대가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하는 건 좋은 마음이에요.

혹시 어렸을 때 약간의 트라우마가 있지 않나요? 아버님이나 어머님이 고함을 질러서 마음이 위축이 되거나 불안했던 경험이 있어요?”

“네, 있습니다.”

“누가 주로 질문자에게 고함을 질렀나요? 아버님이신가요? 어머님이신가요?”

“두 분 모두 그러셨던 것 같아요.” (웃음)

“그렇다면 어렸을 때 형성된 그 트라우마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게 되는 겁니다. 아버지가 주로 화를 내셨다면 남자의 큰소리에 위축이 되는 경향이 생기고, 반대로 어머님이 그러셨다면 여자들 중에 누가 큰소리를 치면 위축되는 경향이 생기고,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그러셨다면 누구든지 큰소리를 치면 자기도 모르게 불안해지고 위축이 될 수 있습니다. 어릴 때의 상처가 반응해서 그런 겁니다.

이런 증상이 심하면 정신과에 가서 상담치료를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어릴 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해야 합니다. 병원 치료를 겸하면서 수행으로 치료할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상대가 고함을 질러서 내가 움츠러드는 게 아니라 내 어릴 적 상처 때문에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움츠러드는구나.’

이렇게 어릴 때의 무의식 세계로 돌아가 내가 불안해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불안해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 말고, 내가 불안해 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거예요. 이건 어릴 때의 상처 때문이지 상대방 때문도 아니고 내가 잘못해서도 아닙니다. 사실은 불안해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이렇게 인식함으로써 아주 천천히 치유가 되어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께 참회 기도를 해야 합니다. 질문자가 어렸을 때의 부모님 나이보다 지금 질문자가 나이가 더 많잖아요. 그런데 지금 질문자도 화가 나면 고함을 질러요, 안 질러요?”

“고함을 지르죠.” (웃음)

“그것처럼 부모님도 어린 나를 놀라게 하려고 고함을 지른 게 아니에요. 자기 성질이 나서 고함을 지른 겁니다. 사실 나와는 관계가 없어요. 그런데 어리니까 그걸 모르고 고함소리에 상처를 입은 겁니다. 그러니 부모님께 절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해보세요.

‘제가 부모님을 원망했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불안하게 하려고 고함을 지른 게 아닌데, 제가 어려서 그걸 몰랐습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부모님께 감사 기도를 하면 무의식 세계가 조금씩 치유되어 나갑니다.”

“잘 알았습니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 친정 엄마를 모시고 살고 있는데, 딸아이들과 친정 엄마가 서로 사이가 안 좋습니다. 저는 무조건 엄마 편을 들면서 '억울하면 너희가 독립해라'라고 하지만 속이 많이 상합니다.
  •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주위의 상황에 따라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습니다. 주위 상황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지은 행위의 결과는 절대 피할 수 없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 탱화를 잠시 배웠는데요. 탱화에 도움이 될 만한 불교 서적이나 꼭 알아야 될 지식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 공장식 축산에 대한 영상을 보고 나서 마음이 아파 신랑에게 영상을 공유해주면서 육식을 좀 줄이자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신랑이 그럼 식물도 감정이 있을 텐데 먹으면 안 되지 않냐고 합니다. 신랑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요?
  • 보왕삼매론 마지막 말씀에 억울함을 밝히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고 하셨는데, 억울함을 밝혀야 원망하는 마음이 없어지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오늘 질문한 분들에게 한 줄 소감을 들어보았습니다. 다들 스님의 대답이 잘 이해가 되었다며 얼굴이 밝아졌는데, 한 분은 아직도 헷갈린다며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아직도 인연 과보와 인과응보가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고 헷갈립니다.”

스님은 다시 한번 자상하게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인연 과보와 인과응보의 차이

“인연 과보는 법칙을 말하는 개념이고, 인과응보는 복수를 한다는 개념입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에는 내가 너를 해치면 언젠가 하늘이 나에게 반드시 복수를 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회에서 개인이 죄를 지어서 처벌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는 건 복수의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감옥에 가는 게 아니라, 잘못을 깨우쳐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해 격리 수용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화소 또는 교도소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교화가 지금 안 되고 있죠.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처벌을 하는 것은 복수를 한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처벌을 하는 목적은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도록 깨우치기 위함입니다. 나쁜 짓을 했기 때문에 매를 맞는 게 아니라 매를 맞음으로써 ‘아,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깨우치도록 해야 합니다. 물론 부처님은 매를 이용해서 가르치려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어떤 경우에도 폭력 사용을 금지하셨습니다.

불법에는 복수를 한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 과보란 물건에 힘을 가하면 움직이는 것처럼 하나의 자연법칙입니다. 이에 반해 인과응보는 권선징악의 개념입니다. 인과응보와 인연 과보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서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했습니다. 이것은 복수를 한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하늘이 벌을 줄 것이다’ 이런 말들은 다 복수심에서 나온 말입니다. 수행은 복수심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연 과보와 인과응보는 전혀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합장으로 인사를 한 후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가을밤이 깊어만 갑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 생방송을 한 후 하루 종일 농사일을 하고, 저녁에는 가을 불교대학 학생들을 위해 온라인 즉문즉설을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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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롱불

인과 응보가 복수의 개념이고, 인연과보는 자연 법칙이라는 차이에 대해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수행자는 겸손하고, 검소하고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 잘 새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0-27 06:53:31

문팀장

오늘도 감사합니다.

2020-10-20 12:38:00

지해행김정아

스님의 가르침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0-10-20 08: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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