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19.3.29 고구려 건안성, 안시성 답사
“제가 도착한 이곳은 고구려를 지켜낸 안시성입니다”

안녕하세요. 중국을 방문한 지 5일째 되는 날입니다. 오늘은 고구려 산성인 ‘건안성’과 안시성 전투로 널리 알려진 ‘안시성’을 답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습니다.

새벽 5시 30분에 스님은 숙소를 나와서 새벽시장에서 간단히 죽으로 아침식사를 해결한 후 건안성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원래는 어제 답사했어야 했지만,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새벽부터 서둘러서 이동하였습니다.

건안성(建安城)은 개주시(蓋州市)에서 동북방으로 7.5km 떨어진 청석령진(靑石嶺鎭) 고려성촌의 동쪽 석성산(石城山)에 있으며, ‘청석령산성(靑石嶺山城)’ 혹은 ‘고려성산산성(高麗城山山城)’으로도 불립니다.


성 전체의 둘레는 약 5km에 이르는데, 서쪽 골짜기 입구를 제외하면 사방이 산등성이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성벽은 석축(石築)과 토축(土築)을 적절히 혼합하여 축조하였고, 성안에는 금전산이란 작은 산이 장대 역할을 하고, 우물 5곳, 저수지가 남아 있을 정도로 상당히 넓은 편이었습니다. 요동반도 인근의 고구려 산성 가운데 가장 넓은 편에 속합니다. 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 지역을 차지하여 주요 거점성을 구축한 5세기경으로 추정됩니다.

건안성은 고구려 요동 지역의 중요한 방어 거점 중 하나로 당나라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성입니다. 이곳 건안성에서 일어난 전투는 신성 전투, 주필산 전투와 더불어 645년 1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당이 회고한 3대 전투 중 하나입니다.

645년 4월 5일 무렵 요동도행군총관 장검은 건안성을 공격하였습니다. 건안성은 천산산맥의 청석령 일대의 요충지에 위치한 대성으로 당군 입장에서 건안성을 함락한다면 청석령을 넘어 오골성으로 갈 수 있으며, 오골성을 함락한다면 바로 평양성으로 직공할 수 있게 되는 곳입니다.

당시 건안성은 평양성 직공에 있어 중요한 길목에 위치했기 때문에 당의 집중 공격 대상이었습니다. 645년 당태종은 요하를 건너 건안성을 공격하여 고구려병 수천 명을 죽였으나 함락하지는 못하고 결국 후퇴하고 맙니다. 건안성이 무너지면 안시성과 요동성이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연개소문의 철저한 방어로 결국 당나라는 건안성 공략에 실패하고 안시성에서도 패배하여 철수했습니다. 당시의 전투를 보면 남쪽의 건안성과 북쪽의 안시성은 고구려의 1차 방어선의 기능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려촌'이라 불리는 고요한 시골 마을을 이루고 있고, 커다란 채석장이 들어서 산의 돌을 캐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건안성에 도착해서는 산성의 형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전체를 봐야겠다고 하면서 동문이라고 알려진 곳으로 이동하는 중 중앙에 펼쳐진 장대에 올랐습니다. 금전산이라고 불리는 장대 위에는 곳곳에서 발굴의 흔적이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장대에서 주변 산세와 산성의 형태와 규모를 살펴본 후 다시 동문 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동문의 형태는 특이하였고, 동문과 연결된 성벽을 올라보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해 보였습니다.

동문을 나와서 다시 서문 쪽으로 이동해서 근처를 살펴보았습니다. 서문으로 가는 길에 성의 중앙부를 지나다가 흙으로 쌓은 성벽이 중앙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성의 중심부를 보호하기 위해 성 안의 낮은 지역에 흙벽을 쌓아서 차단성 역할을 하는 구조였는데 지금은 농로가 나서 흙으로 다졌던 판축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습니다.

성의 서편과 약간 남쪽 편에 2개의 출입문이 있어 서문과 서남문으로 조사된 보고서가 있었기에, 먼저 서남문으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성의 완만한 고개에 서남문을 만들었는데 역시 성문을 보호하는 옹성 구조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오르기 전의 민가 옆에는 역시 옛날 사람들이 쓴 흔적이 있는 우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역시 고구려 군사들이 썼던 흔적으로 보입니다.

서남문에 올라서니 맞은편 서문으로 넘어가는 성벽들도 잘 보였는데 발굴이 한창이었습니다. 빨리 발굴이 끝나고 제대로 복원되어 누구나 건안성을 둘러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습니다. 성을 나오면서 아쉬운 마음에 서문까지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서문 앞에는 산성의 표지석이 남아있었습니다. 역시 성의 절단면에는 판축 흔적이 역력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성작업에 동원되었다는 것과 고구려가 수, 당과 맞서 장기전을 하는 데는 고구려의 경제력도 뒷받침되었다는 사실을 답사해보면서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약 2시간 동안 둘러본 후 다음 답사지역인 해성시의 안시성으로 향하였습니다.

안시성은 안시성 전투로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성입니다. 지금은 중국 요녕성 해성시 남동쪽의 영성자(營城子) 마을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구려가 요동반도를 따라 설치하였던 천리장성을 이루는 성입니다. 특히 개모성·요동성·백암성·비사성 등이 차례로 적의 수중에 함락됐을 당시 안시성의 사수는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절체절명의 과제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록강 북쪽의 오골성, 국내성을 비롯한 여러 성들의 수호에 매우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수나라에 이어 등장한 당나라의 태종은 연개소문이 왕과 대신들을 살해하고 집권했다는 구실로 고구려를 침공합니다. 고구려는 굳게 지키며 대항했으나, 당은 심양 개모성·대련 비사성·요양 요동성·등탑 백암성 등을 점령하고 안시성을 공격해 옵니다.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고연수 등이 이끄는 고구려·말갈 연합 군대는 성의 동남쪽 주필산 전투에서 패하고 맙니다. 안시성 구원군이 패배한 데다 남으로는 신라의 공격이 있었고, 다른 민족과 협력해 당을 견제하려는 외교적 노력마저 실패하게 됩니다. 결국 안시성은 완전히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당은 공성 무기를 동원하여 안시성을 공격해왔지만 고구려는 번번이 막아냈고, 장기전에 돌입하면서 하루에도 6~7회씩 성의 서쪽을 공격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산성에서 서쪽이 제일 낮은 지대였으며, 성문도 성에 출입하는 도로도 현재 서쪽에서 뚫려 있었습니다.

아무리 공격해도 안되자 당태종은 60일에 걸쳐 성의 동남쪽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성벽보다 높게 흙산을 쌓게 합니다. 흙산이 성벽보다 높아질 무렵 갑자기 흙산이 무너지면서 성벽을 덮치게 되었고, 고구려군은 필사적으로 공격을 막아내다가 무너진 흙산을 다시 점령해 버렸다고 합니다.

결국 당의 흙산 탈환 시도는 실패하고, 심대한 타격을 받았으며, 겨울이 되고 군량마저 떨어져, 88일간의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고 합니다. 당 태종은 안시성 전투 이후로 병에 시달리다가 죽을 때 ‘다시는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력했던 고구려의 요동 방어선도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분열하면서 결국 패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안을 둘러보니 우리에게 알려진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곳이라고 보기에는 성의 규모가 너무도 작았습니다. 성안에 마을이 있고 마을에서 보면 산이 한 바퀴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한가운데로 골짜기를 품은 포곡식(抱谷式) 산성이었습니다.

산성의 지세를 알 수 없어 마을에서 무작정 서북쪽 등성이로 올라갔더니 산세가 품은 성안의 마을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이 많아서 성벽을 따라 답사하긴 너무 어려워 포기하고 다시 서남쪽 등성이를 향했습니다. 서남쪽에 오르니 야트막해 보였던 산성 성벽이 꽤나 높아서 쉽사리 점령하기란 어려워 보였습니다. 주필산 전투가 벌어졌을 들판도 까마득히 멀리까지 보였습니다. 혹시나 무너진 흙산의 흔적이라도 보이나 싶어 둘러봤지만 흙산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둔덕만 군데군데 보였습니다. 나중에 다시 확인하니 흙산은 성의 동남쪽이었는데 성벽 전체를 둘러보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아쉬움을 남기고 하산했습니다. 답사하는 내내 혹시 안시성이 여기가 아닌 다른 지역일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습니다. 스님은 이곳이 정말 안시성 전투의 현장이라면 양만춘을 비롯한 성민들의 지혜와 용기가 대단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성을 나오며 서쪽으로 열려있는 서문을 지나다 보니 길 옆에 안시성의 표지석이 보였습니다.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마을 이름인 영성자(營城子)의 오기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역사 지우기의 일환일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다른 성은 예상보다 답사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안시성은 오히려 예상보다 답사 시간이 짧아서 계획했던 요양 박물관까지 바로 이동하였습니다. 요양에는 옛 요동성의 터에 도시가 들어서버려서 흔적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습니다. 전체 규모와 배치가 늘 궁금했는데 희미한 자료나마 요양 박물관에는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바쁜 와중에서도 요양 박물관을 들르게 만들었습니다. 요양은 고구려 당시 요동성으로 맹활약했다가 그 후엔 크게 주목받지 않았으나, 청나라가 잠시 수도를 삼으면서 다시 부흥을 했지만, 청나라가 수도를 심양으로 옮기면서 다시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는 도시였습니다. 4전시관까지 요동성의 흔적을 찾아 부지런히 다녔지만 만족할만한 성과는 얻지 못했습니다. 요동성의 모습을 조그만 모형으로 복원해놓았는데, 현재 도심이 차지한 도성만 한 넓이를 잘 표현하지 못하고 조그만 읍성 수준으로 복원해 놓아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또 고구려 이후 여러 민족이 차지하다 보니 고구려만의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도 많지 않았습니다.


박물관에서 약 40여분 동안 둘러본 다음 아쉬움을 뒤로하고 바로 공항으로 향하였습니다. 공항에서 배웅 나온 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난 후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8시경 공항에 도착한 스님은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9시 30분부터 미국무성에 근무한 분들이 가족과 같이 한국을 방문하여 오랜만에 만나 담소를 나눈 후 하루를 마무리하였습니다.

전체댓글 13

0/200

임규태

감사합니다!!!^_^

2019-04-05 20:30:27

김훈영

역사의 뒤안길을 찾아 헤매시는 스님의노력에
감복할 따름입니다. 스님강건하시고
우리선조들의 잊혀진 역사를밝혀주세요
감사합니다.

2019-04-03 21:49:39

최희정

우리가 살아있는게 역사라는 생각입니다. 사는게 버거워서 바르게 지켜낸다는게 큰 숙제입니다

2019-04-02 08:38:48

전체 댓글 보기

스님의하루 최신글

목록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