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소식

붓다의 땅, 인도순례기1

나는 붓다의 땅, 인도를 3번이나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지는 갈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줍니다.

불법을 만나고 이십대 초반에 갔던
첫번째 순례에서는
부처님의 땅에 대한 기억보다는
인도나, 인도사람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기억에 남는 성지는
열반의 길이었습니다.

'열반에 들겠다고 선언했던 바이샬리부터 열반당까지 먼길이었습니다.
경전에서 읽을때는 그렇게 먼길은 아닐거라고 전 상상했었는데 말이죠.
우리는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열반당에 도착했습니다.
 
피가 섞인 설사를 계속한 부처님은 탈수가 심했는지 목이 탓습니다.
그래서 중간에 캇쿠타강에서 물을 마시고 마지막으로 나무 그늘아래
자리를 펴고 쉬게 됩니다.

목을 축인 부처님은
병든노구를 이끌고 시골 쿠시나라에 도달하여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교화의 설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교화의 설법이라고 법좌에 앉아 주장자를 들고 법문을 하는 큰스님을 상상하면 곤란합니다.

죽어가는 늙은 노인이 길가에 자리를 펴고누워 자신보다 더 늙은 수바드라에게 팔정도를 이야기하고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 죽어가는 위대한 성자는 숲속에 누워 열반을 맞이합니다.



나는 그 열반의 길을 따라 열반당에 도착해
누워있는 와불을 보면서 목이 메어 예불도 제대로 올리지 못했습니다.

나의 몸은 떨렸고, 목은 메었습니다.
"지심귀명례~"
눈물이 범벅이 되었습니다.

부처님.
12살 농경제에서
힘들게 농부가 일을하고 그 농부에게 채찍을 맞으며 소가 쟁기를 끌고,
쟁기질에 의해 땅 속에서 벌레가 나오고 새가 그 벌레를 먹는 모습을보고
염부수 아래 명상에 잠긴 이래

"왜 모든 중생들은 다 함께 행복하지 못한가?
다 함께 행복한 길은 무엇인가?" 를 찾기 위해 6년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

깨달음을 얻은 후에도 늘 길에서 중생을 교화하며
걸식하고 발우 한 개와 죽은 시체를 감싸던 천으로 가사를 입고 다니셨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미래의 수행자를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부처님은 어떤 것에도 집착이 없어 좋은 옷에 좋은 음식을 드셔도 되지만 그렇게 하면 미래의 수행자들이 그게 공부인줄 알까봐...

나는 출가자는 아니지만 당당한 부처님의 제자이고 부처님께서 그렇게 염려하던 미래의 수행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를 위해 그렇게 평생을 사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성지순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후 정토회에서 실무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내가 인도에서 보았던 부처님의 자비에 대한 나의 보답이었습니다.

나는 나에게 법이 이어지기까지 
수없이 많은 이름이 있거나 이름이 없었던 수행자들의 대열에 합류하겠노라 생각했었죠.

그때 90년대 초반만해도
불교포교 사회활동을 하는 사무실이 따로 따로 있었기때문이죠.
정토회 실무자들이 있는지 보살님들은 알지도 못했습니다.
절에서 행자살이를 하고 법사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많았지만.
실무자로 살아가겠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도 존재도 모르고 돈도 받지 못하지만
정토회 실무자 활동은 내가 할 수 있는 보살의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월간정토에서 첫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회원제로 운영되는 월간정토에서 회원관리를 맡았었지요.
인도에서 친견했던 부처님이 주신 가르침 덕분이었습니다.

세월이 지나 정보통신국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나의 첫번째 인도성지순례는
나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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