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수성지회
나를 이해하니 남도 이해가 됩니다

"신혼 초 남편과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해, 남편이 집에 일찍 들어올까, 걱정했습니다. 4박 5일 온라인 명상 때는 아이들 밥을 챙겨주지 않는다고,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정토회에 전화하겠다며 화내던 남편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에게 드디어 결혼을 잘한 것 같다는 소리까지 들었습니다" 하며 웃는 수성지회 박순희 님의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무기를 잃어버리고 힘들었던 날들

불교대학 홍보 중인 박순희 님 (오른쪽 끝)
▲ 불교대학 홍보 중인 박순희 님 (오른쪽 끝)

2016년 남편이 듣던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통해 정토회를 알았습니다. 관심은 있었지만, 아이들이 어리고 저도 몸이 좋지 않아 일 년 정도 즉문즉설만 들었습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우울함이 심했는데 책도 읽고 7년간 성당도 다니면서 많이 나아졌습니다. 그 무렵 같은 동네에 사는 큰아이 학교 학부모들과 친하게 어울리다 힘든 상황이 생겼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탈이 난 것이지요. 사람을 무 자르듯이 잘라보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하고, 당기기도 하다가 결국 지인들한테 상처 주고 일이 커졌습니다.

저는 제가 아주 착한 줄 알고 살았습니다. 아이들끼리 갈등이 생겼을 때 내 이익 앞에서는 팔 걷어붙이고, 내 아이만 생각하는 모습을 조목조목 짚어 주는 지인을 통해 제가 착하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착하다는 게 제 삶의 기둥이고 큰 무기였는데 무기가 없어지니 허탈했습니다. 고고한 척, 착한 척하던 저는 온데간데없어졌습니다. 죽을 것 같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부끄러웠습니다. 사람들의 관계가 끊어지니 불안하고, 잘못 살았구나 싶은 생각에 한 달간 천배도 했습니다.

힘들어 하소연하는 제게 언니는 객관적인 말만 했고, 지친 남편은 일터가 있는 안동으로 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어느 날 대구 신천을 산책하다 불교대학 홍보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비빌 언덕이 없던 차에, 여기라도 가야겠다 싶어 찾아간 남산 법당에서 2017년 가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정토회에서 하라는 건 다 했습니다. 천일 결사에 입재 했고, 절실하니 108배도 잘 되었습니다. 이해되지 않던 성경 구절도, 스님의 법문도 다 이해가 되고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큰 깨달음은 없었지만 여러 소임을 하면서 저를 알게 되고 도반들과 불교대학 학생들을 만나면서 사람을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나를 볼 수 있었던 봉사 

불교대학 졸업 무렵부터 회계 소임을 맡아 봉사했고, 중증 장애인 시설에서도 봉사했습니다. 처음 전화한 시설에서 장애인 목욕 봉사를 할 수 있는지 묻는데 감당이 안 될 것 같아 ‘그거는 못 해요’라고 했더니 웃더라고요. 그 때 ‘아! 내가 누군가를 위해 봉사한다고 해놓고도 고르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결국 집에서 멀지 않은 다른 중증장애인 생활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 식사 보조와 책 읽기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아도모례원에서 모둠 봉사 중인 박순희 님(가운데)
▲ 아도모례원에서 모둠 봉사 중인 박순희 님(가운데)

처음엔 거리감도 느껴지고, 쉽지가 않았습니다. 주로 누워 있는 사람이 많았고, 몸이 많이 틀려 있어 보조기구를 차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지능은 있는데 말을 할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어 33년을 누워 사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다 싶었고, ‘움직일 수 있고, 말하고 들을 수 있는 것도 참 큰 복이구나!’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를 미워하고 원망했던 마음이 컸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낳아 준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구나. 늘 괴로웠던 이유가 '잘난 사람들만 쳐다봐서 그랬구나' 하고 크게 깨달았습니다.
 
화요일 불교대학 수업을 받고 수요일에 봉사하니 제 모습이 너무 잘 보여 좋았습니다. 봉사하러 가서는 가끔 봉사자들과 놀고 싶고, 그분들이 시설에서 주는 빵을 간식으로 먹는데 저를 챙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불편한 사람을 돌보려고 온 건데, 다른 곳에 마음이 팔려 있었구나!'하고 볼 수 있어 공부한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 무렵이 제일 마음에 번뇌도 없이 오롯이 소임에 전념했던 때였습니다. 

불안한 마음

저는 늘 불안했습니다. 경제적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이 있었는데 아이를 낳으니 더 심해졌습니다. 인공수정으로 어렵게 임신한 탓인지 어릴 땐 '아프면 어떻게 하지?' 커서는 애들이 조금만 이상하면 '잘하고 있나' 또 점검 들어가고, '애들이 잘 돼야 할 텐데'라는 불안이 있었습니다. 선을 봐서 결혼했는데 신혼 초에는 남편이 집에 일찍 들어올까 봐 걱정했습니다. 같이 있으면 불편했습니다. 남편에게도 솔직하게 마음을 확 드러내지는 못하고 70%쯤만 드러내고 30%는 늘 가리고 있었습니다.

두북에서 울력 중인 박순희 님
▲ 두북에서 울력 중인 박순희 님

남편뿐 아니라 다른 인간관계도 그랬습니다. 어떤 두 사람이 친해 보이면 부러운데, 막상 그 상태가 되면 갑갑해서 못 살겠고, 두루두루 친한데 마음을 열 타이밍이 되면 못 견디고 거리를 둡니다. 그래서 친구가 없습니다. 낯설고 정확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불안이 있었습니다. 법당에서 회계 업무를 볼 때였습니다. 옆방에서 사람들이 까르륵 웃는 소리가 들리면 '저 사람들끼리는 참 친한데 나는 왜 그러지 못할까' 하는 생각에 시무룩해지고, 나만 모르는 끈끈함이 있는 것 같아서 질투도 났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사람들은 그냥 거기 앉아 있는 게 다였는데 뭔가 또 다른 게 있을 거라는 환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깨달음의 장〉에 가서는 상대방을 통해 저를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동안 항상 긴장하고 있어서 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들 저렇게 말을 잘하는데 나는 왜 못할까' 하고 고민했는데, 모두 자기 순서가 돌아오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을 보며 ‘다 똑같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하는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선유동 연수원에 봉사하러 갔을 때 시비분별하고 있는 저를 보았습니다. 스무 명 넘는 봉사자들의 자기소개와 나누기를 들으며 '저 사람은 남잔데 여자처럼 얘기하네, 저 사람 말하는 데 힘이 없네'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평가하고 있는 저를 보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못 받아들이고 시비분별을 하며 제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회계, 경전반 담당, 불교대학, 행복학교 진행, 지원팀장, 모둠장 소임까지 여러 소임을 해왔습니다. 이렇게 봉사, 수행하면서 저를 알아갔습니다. 또, 다양한 도반들과 불교대학생을 만나면서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아이들이 독특한 행동을 해도 인정하니 마음이 편안합니다.

두북 봉사 중 박순희 님(오른쪽 끝)
▲ 두북 봉사 중 박순희 님(오른쪽 끝)

엄마라는 무거움을 내려놓고

애들한테도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서 항상 좋은 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내려놓으니 오히려 엄마를 편안해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것 같은데도 무시한다는 느낌은 안 들었습니다. 어릴 때 언니의 새 목걸이를 몰래 학교에 가져갔다가 화장실에 빠뜨려 씻어 갖다 둔 에피소드를 들려주며 "너희들한테 최초로 얘기한다"라고 했더니 둘째가 신나 했습니다. "엄마 흑역사를 내가 알고 있다. 이걸 가지고 있다가 이모한테 터뜨리겠다."라고 협박합니다. 그러면서 더 친밀해졌습니다. '부모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었는데 별거 아닌 걸 제가 꽁꽁 싸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엄마는 그렇구나

부모님이 자녀 학업에 열의가 있어 고등학교 때 시골에서 경산으로 유학을 왔고 4남매가 다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두 분 다 부지런해서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자주 싸웠습니다, 언니는 싸움을 말리다 지쳐서 힘들어했고, 저는 눈에 안 띄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탓인지 불안과 걱정이 많았고, 인간관계가 불편하고 어려웠습니다. 

엄마는 농사일이며 집안일, 초등학생인 우리들 공부까지 다 봐줄 만큼 뭐든 다 잘했지만,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 눈을 못 마주쳤습니다. 지금도 사위가 같이 있는 게 불편해 자꾸만 부엌으로 가서 음식을 만들어 내어옵니다.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 ‘아이고~ 더 아프고 싫다’라며 피하는 것도 섭섭했는데 누군가 옆에서 배려해 주는 것이 어색하고 혼자 있는 게 편해서 그런 걸 몰랐습니다. 이런 정도이니 어린 우리들에게도 그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언니와 두 남동생 사이에 있는 저를 좀 더 챙겨주었으면 이렇게 자존감이 낮지는 않았을 텐데, 대화도 안 되고 제 이야기를 잘 안 들어 준 엄마를 원망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랑 친해지려고 노력해도 안 됐던 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 맺기가 어려운 엄마의 성향을 닮아 그렇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 잘못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나눔의 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이 막 났습니다. 정토회 회계 소임을 하면서 한 번, 〈나눔의 장〉에 가서 또 한 번, 그렇게 엄마와 저를 이해했습니다.

수성지회 모둠장 회의 중 박순희 님(왼쪽에서 세 번째)
▲ 수성지회 모둠장 회의 중 박순희 님(왼쪽에서 세 번째)

힘들어도 꾸준히 하는 이유

회계, 회원 관리 같이 혼자 하는 소임은 다 좋았는데 남 앞에서 말해야 하는 소임은 힘들었습니다. 행복학교 첫 수업을 진행할 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수업 전 녹화까지 해가며 연습을 했지만, 실전은 너무 떨렸습니다. 익숙해지고 70% 정도 안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편해지는 데 그 전까지는 힘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모둠장을 하고 있는데 조금 더 편해졌습니다. 

사람 만나는 게 나한테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할 만하지 않나 싶고, 체력이 안되서 고민이긴 하지만 '나쁘지 않구나' 합니다. 꾸준히 기도하는데 가끔 몸이 아프면 늦게 일어나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런 번뇌가 있지만, 모둠장을 하니 시간이 조금 늦어도 어떻게든 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니 우울한 마음이 자주 들어서 '이 우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얘를 떨쳐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많았는데 어느 순간에 이건 떨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딱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미련이 없어졌습니다. 

자존감도 높아져 지금은 많이 밝아지고 쾌활해졌습니다. 기도는 그런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좋아지니 정토회 활동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혼자되는 건 없고 도반들이 있어 할 수 있고, 남을 위하는 일에 진심인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소임을 하면서 알았습니다. 소임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어느 정도 익히면 재미도 있고, 시간 맞춰서 딱딱하는 기도 덕에 번뇌도 없고 무엇보다 성장하는 제 모습이 좋습니다.

경전대학 문경수련 담당 봉사 중 박순희 님(오른쪽 끝)
▲ 경전대학 문경수련 담당 봉사 중 박순희 님(오른쪽 끝)


혼자 하는 일을 좋아하고, 함께할 때 맞닥뜨리는 어색함과 불편함을 극복하고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는 것이 수행 과제라는 박순희 님. 차분하고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이미 편안함이 느껴졌습니다. 예전의 불안과 갈등을 이겨낸 이야기를 들으며 꾸준한 수행과 봉사가 주는 힘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글_손해경(경남지부 창원지회)
편집_서지영(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전체댓글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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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꽃

박순희 수행담이 저에게도 큰 용기를 줍니다.멋지십니다._()_

2024-01-11 10:44:33

정주연

모둠장님 감동적인 수행담 잘읽었습니다~~~나누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24-01-10 20:21:59

드림하이

응원합니다!

2024-01-10 17: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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