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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에 이모님도 무당이었고, 친척 중에도 무당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혹시 신들이 내릴까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나는 절대 이거 안 받아. 난 싫어.’라고 마음속으로 거절을 했지만,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루는 남편이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꿈에서 광채 나는 동자부처가 대문을 열고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남편과 저는 복권 사려 했지만 꿈 얘길 들은 친정엄마가 “너희는 절로 가라.” 했습니다.
집 뒤 암자를 다녔는데 막상 절에 가면 절만 세 번 하고, 왔습니다. 아침에 세 번 절하고, 또 절에 가면 다시 절만 세 번 하고 왔습니다. 저는 궁금했습니다. “스님, 교회는 책을 들고 다니며 공부하는데 절에는 공부 없이 절만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이 웃으면서 “무슨 소리! 팔만대장경이 있는데 왜 공부가 없어. 교회 몇 곱으로 공부가 많지!” 했습니다. 스님이 석가모니 부처님 일대기 책 12권을 주어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색(色)이 멸(滅)하고 애(愛)가 멸(滅)하고 식(識)이 멸(滅)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이 있고...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스님이 읽으라 하니까 읽었습니다. 책 사이 사이에 주리반특이 깨친 스토리, 똥장군 니다이가 부처님 만나 깨달은 이야기는 너무 재밌었습니다. 부처님은 빈부 차이도, 지위 차이도 없이, 이렇게 다 포용하고 사셨다는 걸 알았습니다.
절에서는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어려운 중생들을 구하려 천수 천안이 돼서 중생을 하나하나 다 살핀다고 했습니다. ‘그럼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어야겠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지장보살은 지옥 중생까지 구원하려고 원을 세웠다고 배웠습니다. ‘내가 지장보살이 또 돼야겠네.’ 이런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부처님같이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큰 스님들 책을 보면서 공부했지만 어떻게 해야 깨달음을 찾는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손자가 고3 때 우울증으로 너무 힘들어했습니다. 손자가 아프니 제가 대신 아팠으면 싶고 어찌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불교 TV에서 어느 스님이 도통해서 사람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바로 방송국에 전화해서 그 스님이 있는 절의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 마산에서 경산까지 기차를 타고 물어물어 절을 찾아갔습니다. 몇 달 그 절을 다니며 스님이 우리 손자를 낫게 해 줄 거라고 믿었습니다. 어느 날 “스님, 우리 손자가 아픈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스님은 저를 보면서 “내가 어떻게 압니까!” 딱 그 말만 했습니다. 그동안 저는 스님이 손자를 고쳐 줄 거라 믿고 먼 거리를 다녔는데 스님이 못한다니!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저는 그동안 복을 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스님이 해 줄 거라고 믿었지만 스님이 못한다면 내가 해야 하는구나.’ 그래서 여기도 딱 끊어버리고 돌아섰습니다. 집에 와서 혼자서 고민했습니다. 방석을 깔아 놓고 옳은 길을 가르쳐 줄 수 있는 도반과 스승을 보내 달라며 눈물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한 달쯤 지나서 딸이 보내준 카톡 내용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불교에 관심이 없는 딸이지만 가끔 법륜스님의 말씀을 보내주곤 했습니다. 딸이 보낸 내용은 정토회에서 ‘깨달음의 장’ 참가자를 모집한다는 글이었습니다. 깨달음의 장? 깨닫고 싶은 저에게 깨달음의 장이라니요. 여기 가면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아 전화했습니다. “거기 어디입니까? ‘깨달음의 장’에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때는 오프라인 시절이라 진해법당으로 바로 찾아갔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가려면 불교대학에 입학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장 불교대학 입학신청서를 냈습니다. 처음 본 법당은 일반 가게 같았습니다. 탱화도 없고 스님도 안 계시고 일반인들이 목탁 치고 있었습니다. 절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저는 부처님 일대기 책을 읽었고 여기서 바른길만 배우면 되니까 일단은 해보자고 용기를 냈습니다. 수요 법회에서 법륜스님의 법문 듣는 순간 ‘내가 찾던 곳이 바로 여기다!’ 싶었습니다.
법륜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엄마의 까르마가 자식한테 내려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산골에서 어렵게 살다가 고아로 자란 남편과 결혼해서 첫 딸을 낳았는데 10개월 만에 병으로 죽었습니다. 고생하면서 살다 보니 ‘내 자식’이라는 데에 엄청난 집착을 했었습니다. 그 아이가 죽어버리니까 정신이 나갔습니다. 남편 밥을 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멍청하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아기를 가졌습니다. 아이를 가졌는지도 몰랐습니다. 몇 개월 됐는지도 모르고는 딸을 낳았습니다. 내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딸을 가져서 손자 때까지 내려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아들 하나를 더 낳아서 자식 둘을 키웠습니다. 집안 형편상 대학을 다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둘을 앉혀 놓고 설명을 하니 딸이 자신은 시집만 가면 된다며 대학을 포기한다고 했습니다. 딸은 취직을 위해 일반 고등학교가 아닌 상업고등학교를 갔고 졸업 후 집 앞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회사에서 직장상사가 딸을 괴롭혔습니다. 장부를 던지기도 하고 내용이 하나라도 틀리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쓰게 했습니다. 딸은 밤새도록 잠을 안 자면서 혼자 끙끙대며 버텼습니다. 엄마가 걱정한다며 회사와 관련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딸은 정말 적은 용돈을 받아서 생활했는데 그 용돈마저 모아서 집수리하라고 200만 원을 내놓고 시집갔습니다. 대학교를 못 보낸 것도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엄마 걱정해서 집수리까지 해 주는 게 고마웠습니다. 딸이 결혼하고 우리 집 가까이 살게 되자 딸이 해 달라고 하기도 전에 딸 집에 가서 뭐든지 먼저 해줬습니다. 딸이 필요한 걸 말하기도 전에 알아서 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썼는데도 언제부터인가 딸은 우리 집 앞까지 와서 차에서 내리지도 않고 입도 닫아버렸습니다.
작년, 딸과의 관계가 힘든 상태에서 어렵게 경전반을 재수강했습니다. 스님 법문을 듣던 중 ‘내가 딸에 대해 걱정하는 마음이 어둠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준 것이 어둠이라니! 그동안 딸에 대한 걱정이 딸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걱정은 어둠이었습니다.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집착이었습니다. 딸에게 잔소리를 너무 하니 딸은 제가 보기 싫은 거였습니다. 제가 딸에 대해 걱정을 하면 할수록 딸에게는 어둠을 주었습니다.
법사님이 “딸 집에 가지도 말고 음식도 해 주지 말고 차라리 남한테 주세요.” 하기에 딸 집에 가던 것을 딱 끊어버리고 안 갔습니다. 그렇지만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고 궁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호흡에 집중하며 명상했습니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진하게 그림으로 나왔지만, 그 생각에 끌려가지 않도록 호흡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차츰 그림들이 엷어졌습니다. 지금도 간혹 궁금합니다. 무슨 일이 있나, 하지만 끊기로 했습니다. 어둠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내가 지금 여기 깨어 있는 게 밝음이라는 거를 알았으니까요.
지금은 딸과 손자의 말투가 달라졌습니다. ‘내가 이렇게 편안해지니까 애들이 저절로 편안하구나!’ 딸과의 관계를 딱 끊고 안 해 주니까 사이가 좋아지는구나! 엄마가 뿌리니까 가지와 줄기는 저절로 편안해지는 거구나.’ 알았습니다.
힘들어하는 도반들에게 제가 경험했던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돈 벌어 남들에게만 척척 쓰고 술만 마셨던 아버지와 억척스럽게 험한 일을 하던 어머니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던 삶. 어린 나이에 공부보다는 집안일을 해야 했고 동생을 키웠으며 무서운 부모 밑에서 도망가서 결혼한 사연까지 있으니 할 이야기는 참 많았습니다. 그게 인연이 돼서 도반들이 우리 집으로 찾아왔습니다. “보살님 우리 밖에 가서 밥 먹어요.” 밖에서 밥을 먹으면 한 사람당 만 원씩 해도 다섯 명이면 5만 원이 나옵니다. 너무 아까웠습니다. 스님은 10원이라도 아껴서 배고픈 아이 밥 주려고 싼 비행기, 싼 숙소로 찾아다니는데 우리는 입 하나 즐기자고 몇만 원을 들이는 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밥을 할 테니 우리 집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이 많은 제가 밥을 해 주니 도반들이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서로 부담 없을까를 고민하다가 밥값을 받기로 했습니다. 보시 통을 만들어서 밥값을 모으고 모인 밥값을 JTS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집이 법당이 되었습니다. 요즘도 도반들은 전화를 걸어 밥을 먹으러 오겠다고 합니다.
우리 집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이는 사람은 언젠가는 부처가 될 것이라는 원을 세웠습니다. 음식을 하면서도 ‘우리 부처님들 오늘 우리 집에 오시네.’ 하며 즐겁게 음식을 합니다. 지리산 깨달음의 장 바라지를 할 때도 ‘사람들이 이 음식을 먹고 깨달음을 얻으면 참 좋겠다.’라는 마음으로 음식을 했습니다. 모두 다 같이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인터뷰를 하는 이 순간도 사람들이 행복해지기를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매일매일 꾸준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큰 스님들도 깨달았다가 꾸준히 수행하지 않으면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하루라도 수행하지 않으면 저는 다시 예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애들이 괴로워지고 가정도 괴로워질 수 있으니 꾸준히 수행해야 합니다. 이 모든 건 ‘내가’ 뿌리니까요.
만일 결사할 때 몸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올해까지만 어찌어찌하면 세상이 끝인가 보다 싶었습니다. 입재식에서 스님이 “지금 가려는 사람은 3년을 더 기도하세요. 천일은 해야 할 거 아닙니까?” 그 소리에 ‘아직은 내가 쓰임새가 있구나’ 싶었습니다. 힘들면 쉬어가면서 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기도하고 명상합니다.
인터뷰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내’가 한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내가 부처가 되고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고 내가 지장보살이 된다는 그 마음. 몸이 조금 아프면 아예 병원에 갈 비용을 아픈 아이를 위해 보시하고 정성 가득한 밥으로 도반들의 외식비를 보시하며 공양간 바라지를 계속하며 수행을 놓지 않는 그 마음이 저에겐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인터뷰한 거, 잘 쓰지 않아도 돼요.” 하던 따뜻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아마 누구라도 곽덕순 님의 밥상을 받았다면 계속 찾아가고 싶을 겁니다. 저처럼요.
글_강지윤 희망리포터(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편집_권영숙(서울제주지부 서초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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