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사하지회
호수가 아닌 바다를 선택한 수행자

경쾌하고, 솔직하고, 명쾌합니다. 깨달은 것을 실천하고, 그다음 단계로 내딛는 노력에도 치열함이 있습니다. 가족 모두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살고 있고, 인도 대신 정토회를 출가처로 삼았다는 부산 사하지회장 김정숙 님!
깊은 아픔을 양분 삼아, 큰 바다가 되어가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깨달음의 장에서 얻은 삶의 등불

96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친구의 권유로 7개월밖에 안 된 큰아들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깨달음의 장>에 갔습니다. 그만큼 삶이 힘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반대한 결혼을 했기에 힘들다는 말도 못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제 삶에 커다란 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어두운 밤에 등불이 환히 밝혀졌습니다. 그때 수련 안내자가 법륜스님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습니다.

<깨달음의 장>을 마치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적인 자유와 행복을 반드시 얻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아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세상에 잘 쓰이고 그 이후는 저 자신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후 삶은 힘들기는 했지만 살만했습니다. 딱 20년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남편과 가정에 충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남편은 그런 저를 만난 것이 인생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할 정도로 가정도 편안했고 시집과의 관계도 좋아졌습니다.

2023년 5월 천룡사에서(가운데 김정숙 님)
▲ 2023년 5월 천룡사에서(가운데 김정숙 님)

내가 왜 태어났을까?

제가 6살 때 아버지가 간경화로 돌아가셨습니다. 1928년생 어머니는 그 당시 영화를 보거나 제과점도 가던 부잣집 귀한 딸로 태어난 분입니다. 그래서 가장 역할은 잘하지 못했습니다. 자연스럽게 15살 위인 큰오빠가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큰오빠는 가족들이 반대하는 동네 아가씨와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올케는 보통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엄마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드센 기질로 엄마 머리채를 뜯으면서 싸우기도 했습니다. 고부 갈등 속에 결국 큰오빠는 제가 열여섯 살 때 음독 자살했습니다. 올케와는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었습니다. 올케와 조카 셋에게 고향 집을 주고, 저와 작은언니는 혼자 살던 고모와 진주로, 엄마와 작은오빠는 시집간 큰언니가 사는 부산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형제들이나 엄마가 저한테는 자그마한 일도 안 시켰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고모가 정이 많아 잘 챙겨주어서, 엄마랑 떨어져 사는 것이 상처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상처가 되었던 것은 술을 많이 드셔서 간경화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니까 내가 이렇게 됐다. 어떻게 어린 자식을 두고 저렇게 돌아가실까?’ 이런 마음으로 아버지를 늘 원망했습니다. 큰오빠의 자살도 작은오빠의 방황도 모든 문제의 원인이 아버지께로 향했습니다. 아버지가 늦둥이 막내인 저를 밥상을 같이하면서 예뻐해주셨던 사실보다 제 마음 속 원망이 사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붕괴된 가정 환경 속에서 ‘내가 왜 태어났나’라는 생각으로 방황하며 사춘기를 보냈습니다.

죽음 명상을 통한 아버지와 화해

저는 삶의 의미를 못 찾아 언제 죽어도 된다고 생각했기에 위험한 취미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휴일에는 언제나 산에 있었고, 암벽등반, 빙벽등반 같은 것을 하면서 남자들과 별 차이 없이 활동했습니다. 그때 산악회에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20대의 김정숙 님(설악산 울산암리지 등반)
▲ 20대의 김정숙 님(설악산 울산암리지 등반)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고 나서 둘째를 낳고 일 년 뒤 1999년에 동래 법당 불교대학에 갔습니다. 당시 2년 과정의 불교대학을 1년만 다녔는데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삶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내 공부를 더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원에 진학했습니다. 상담심리를 공부하면서 다양한 명상 체험을 하다가 죽음 명상을 해보았습니다.

저는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다 두고 죽어도 아까울 게 없다. 하지만 아버지가 없어서 불행했던 내가, 아직 어린 우리 아이들을 놔두고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도저히 나는 못 죽는다.' 하며 고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아버지도 어린 나를 두고 가실 때 그랬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 마음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원망만 했다는 걸 크게 참회했습니다. 아버지 산소에 가서 펑펑 울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아이들이 잘 큰다는 것은 저의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출가 결심이 명확했기에 아이들을 독립적으로 키웠습니다. 제 욕심 많은 성격이 아이들에게 간섭을 많이 했을텐데, 많은 것을 아이들 스스로 결정하게 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위하는 마음이지만 주변에서 ‘아이를 그렇게 키우면 나중에 잘못된다’는 말을 할 때마다 혹시 너무 방임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갈등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도법사님의 가르침으로 마음 중심을 잘 잡았습니다. 이제 아이들이 다 크고 나니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은 스무 살 이후 학비 외에는 어떤 경제적 지원 없이도 자신의 삶을 자립적으로 잘살고 있습니다.

2022년 작은아들과 지리산 종주
▲ 2022년 작은아들과 지리산 종주

남은 마음의 굴레를 풀다

출가할 곳과 스승을 찾아 헤매고 1년의 정토불교대학과 대학원도 다녔지만, 마음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인도에 출가할 곳을 정해 놓고, 아들이 크면 인도로 가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상담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나눔의 장>에 큰 기대 없이 참여했습니다. 그 <나눔의 장>이 또 한번 제 인생을 바꾸었습니다. 어렸을 때 저를 성폭행한 작은오빠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오빠는 어릴 적 실수 때문에 평생 큰 짐을 지고 살았겠구나. 근데 나는 오빠를 나한테 한 짓보다 더 크게 저주하며 살았구나'라고 참회했습니다. 눈물이 그치지 않아 밖으로 나가 몇 시간 소리내어 펑펑 울었습니다. 이후에 오빠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때의 일을 이해하고 용서한다고, 이제 오빠도 편안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마음에 쌓였던 것들이 그렇게 다 풀려갔습니다.

모든 것이 풀려 행복해졌고, 박사 학위도 받고 대학 강의도 시작하였습니다. 인생에 햇볕 짱짱한 날이라 생각하고 있을 즈음 사하구청에서 하는 희망강연에 참석했습니다. 그곳에서 <나눔의 장> 돕는이로 펑펑 울던 저를 격려해 준 불국화 님( 현 보광법사)이 핼쑥한 얼굴로 봉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저분들은 나 같은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저렇게 애쓰는데, 나는 살만해졌다고 나 잘났다고 다니고 있구나’. 이때 인생 문제를 다 풀어준 지도법사님께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3년은 정토회에서 봉사하고 떠나기로 했습니다.

3년간 봉사하고 출가하자

3년 봉사를 실천하기 위해 2014년 사하 법당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총무 도반에게 3년은 어떤 봉사나 할 테니 뭐든지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3년 후에는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전에는 천일결사1 백일마다 입재식2에 참여했어도 아는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입재식에 가는 버스를 타면 담요 덮고 눈 감고 말 한마디 안 하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입학한 해 4월부터 천일결사 모둠장 소임을 받았습니다. 다음 해 경전대학 학생이면서 불교대학 담당자 소임을, 그리고 6개월 후에는 저녁 책임팀장 소임을 맡았습니다. 그렇게 빨리 큰 소임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도반의 정성에 감동해서였습니다.

2015년 상반기 정일사3 회향 후 부산울산지부에서 주최하는 7주간의 새물정진4 프로그램에 저랑 선배 도반이 참여했습니다. 함께 했던 선배 도반은 동래 법당에서 새벽 정진을 하고, 이후 프로그램 참석도 못 하고 바로 출근했습니다. 그 도반을 보며 내가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났습니다. 당시 저녁부가 없던 사하 법당에 그 도반과 다른 소수의 도반을 모아 저녁부를 만들고 책임팀장을 맡았습니다. 총무 도반에게 저녁부가 사하 법당 한쪽 날개가 되도록 정성껏 해 보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졸업 삼천 배 정진(앞줄 왼쪽 네 번째 김정숙 님)
▲ 불교대학과 경전대학 졸업 삼천 배 정진(앞줄 왼쪽 네 번째 김정숙 님)

1차 만일결사 9차 천일결사의 목표 중의 하나가 ‘주1일 봉사제’였습니다. 1박 2일 밤새 함께 연구하고 계획하며 기초방안을 만들었습니다. 매주 일요일 법당에서 새벽기도를 함께한 후 천일결사 모둠장들과 주례회의하며 주1일 봉사제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렇게 저녁부가 당직하고 법당, 공양간5 청소를 도맡으면서 굉장히 단합이 잘 되었습니다.

매일 새벽 법당에서 예불을 한 뒤 출근하고, 퇴근과 동시에 거의 매일 법당 가서 밤11시가 넘어야 집에 들어오곤 했습니다. 또 주말에는 행사들이 있어 집에 없으니 당연한 결과로 남편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남편에게 “3년만 기다려 달라”라고 사정사정하며 버텼습니다. 상하반기 2회 있는 정일사 회향수련은 그런 갈등을 극복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3년이 지나 10차 천일결사에는 정토회 총무로 선출되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라며 기쁘게 받았는데 남편은 “이제 더 이상 못 참는다”며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가정에서는 을이 되어 숙이며 살았습니다.

2017년 5월 저녁팀장들과 1박2일 주1일봉사제 워크숍(책상 좁은 면에 있는 분이 김정숙 님)
▲ 2017년 5월 저녁팀장들과 1박2일 주1일봉사제 워크숍(책상 좁은 면에 있는 분이 김정숙 님)

도반이 좋다, 사람이 좋다

9차년까지 활동하면서 깨달은 것은 '여기보다 더 좋은 수행처는 세상에 없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스승님께 진 빚은 스승님께 갚을 수 있는 게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소임을 할수록 제가 투자하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것을 더 많이 얻었습니다. 오히려 빚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니 오로지 끊임없는 수행과 봉사를 통해 뭇 중생에 공덕을 되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사람을 좋아하는 성향이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 없는 관계는 갖지 않고, 직장에서도 딱 필요한 관계만 합니다. 목적 없이 전화하는 일도 없고 전화를 오래 못하는 편이라 그냥 만나서 요점만 듣습니다. 그런 쌀쌀맞은 제가 도반이 좋고 사람이 좋아졌습니다.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나 봅니다.

한번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법당 연등을 교체해야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고, 그동안 작업했던 주간부 도반들도 거의 없었습니다. 너무 답답해서 한 도반에게 저도 모르게 울먹이며 말했던 것 같습니다. 제 간절함이 느껴졌는지, 그 도반이 맡아서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인터넷을 검색해서 연등 만드는 법을 공부하고 다른 도반들을 모아 함께 연등을 다 갈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정말 사람이 아름답고 좋다는 걸 알았습니다.

집사람이 있는 게 낫나, 없는 게 낫나

제가 총무가 된 10차년은 사하 정토회와 서면 정토회가 합쳐졌습니다. 양쪽 성향이 아주 달라 화합하는 데 정성을 들였습니다. 그때는 모르는 분들과 함께 화합해야 하니 좀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도반애를 더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되는 초기에는 정신없었습니다. 새벽에도 밤에도 회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집에 있으면서도 출퇴근하는 남편에게 인사는커녕 방해하지 말고 나가라고 눈짓 하며 정토회 일에만 빠져있었습니다. 오히려 집에 없는 때보다 못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니 남편은 폭발하여 이혼하자고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남편이 자신의 큰누나랑 고민 상담했다고 합니다.

“애 엄마랑 못 살겠다.”
“뭐가 힘든데? 느그 집 사람이 나쁜 짓 하나”
“아니 나쁜 짓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너 집사람이 있는 게 낫나? 아예 없는 게 낫나?”
“.......”
“그러면 니만 좀 봐주면 아무 문제가 없잖아. 너희 집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 네가 못 봐주는 게 문제지. 느그 집사람이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할 사람도 아니잖아.”

누나 덕분에 이혼 안 당했습니다. 사실 그 누나는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졸업했고 저랑 인도성지순례도 함께 다녀온 친언니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2016년 시누들과 함께 간 인도성지순례(가운데 김정숙 님, 우측이 이혼 당하지 않게 도와준 시누)
▲ 2016년 시누들과 함께 간 인도성지순례(가운데 김정숙 님, 우측이 이혼 당하지 않게 도와준 시누)

정토회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

올해 2월 말에 명예퇴직을 했습니다. 코로나에 걸린 후 몸이 많이 아팠고, 정토회 활동과 직장 활동을 양립하기가 힘들어져서 퇴직을 결심했습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다른 수행처 가면 마음이 고요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제가 수행처로 정토회를 선택한 이유는 여기에는 저와 조율되지 않은 많은 사람이 오고 가기 때문입니다. 그럼 제 업식이 팍팍 건드려집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 꼬라지를 선명하게 보게 되고 수행하게 됩니다. 소임도 익숙해지면 또 바꿔서 새로운 사람들과 하게 되고요.

제가 절대적인 자유를 얻겠다고 밖을 헤매며 열심히 공부하다가 알게 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머리와 가슴의 거리는 멀어지고 오히려 가슴은 더 차가워진다는 것입니다. 집을 떠나 수행처를 찾아 살고자 했던 것은 불편한 환경은 피하고 호수처럼 잔잔한 곳을 원했던 것을 알았습니다. 물결 따라서 저도 같이 출렁출렁하는 바다에 뛰어들었습니다. 지도법사님 말씀처럼 빠져서 죽지 않게 수영 실력을 늘리기도 하고 빠지면 진주조개를 줍는 방법도 익혀갑니다. 늘 깨어있게 하는 바다같은 곳인 정토회가 그 어떤 수행처보다 좋아 선택했습니다. 정토회의 투명하고 민주적 운영체제가 좋습니다. 무엇보다 지도법사님 같은 스승을 세상 또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최고의 스승님이 계시고, 같은 길 가는 도반들이 있으니, 제게 정토회는 최고의 수행터이고 놀이터입니다.


글_임현주희망리포터(인천경기서부지부 일산지회)
편집_윤정환(인천경기서부지부 안양지회)


  1.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각주22]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2. 입재식정토행자 천일결사를 백일 단위로 나누어 매 백일 마다 함께 모여 수행을 점검하고, 새롭게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의식. 

  3. 정일사정토회를 일구는 사람들의 준말로 정토회 활동가들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 

  4. 새물정진정일사 프로그램을 마친 정토회 신규 활동가를 대상으로 하는 수련프로그램. 

  5. 공양간수행과 생명공경 정신이 깃든 공간으로 정토법당 대중들의 안정적인 식생활을 보장하는 곳. 공양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수행으로, 정토회 공양간은 생태적이고 소박한 밥상을 지향함. 공양간 봉사자들은 "이 음식은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입니다"라는 마음으로, 몸과 마음과 환경을 살릴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식사를 준비.  

전체댓글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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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여기

시누 말에 빵 터졌습니다~~ㅎ

이렇게 뒤에서 도와 주시는 분들~~
참으로 고맙습니다~~

2023-07-06 19:02:58

이윤정

좋은인연으로 좋은말씀 고맙고 감사합니다

2023-06-21 13:35:20

전현숙

최고의 스승과 같은 길을 가는 도반이 있는 정토회가
저도 참~~ 좋습니다.
잘 들었습니다~

2023-06-16 13:5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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