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송파지회
봉사로 나를 알고, 봉사로 내가 변하는

2022년 12월에 송파지회 지회장을 마친 김인순 님은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정토회 상근활동가로 봉사했습니다. 상근활동가로 봉사할 때의 별명은 ‘성질 제일 김인순’이었다고 합니다. 인터뷰 내내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는 잘 짐작이 되지 않습니다. 그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김인순 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서른 넘어 불교에 관심이 생기고 궁금했지만, 딱히 주변에 불교 신자도 없고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1999년 친구와 하던 일이 잘 안되어 마음이 힘들 때였습니다. 평소 연락이 없던 후배가 어느 날 밥 사달라며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 후배는 전단지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서초법당 개원 기념인 ‘법륜스님의 100일 법문’ 홍보 전단지였습니다. 마침 하던 일을 정리해서 시간도 많고, 궁금했던 불교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아 서초동에 있는 정토회관을 찾아갔습니다. 우연인 듯, 필연인 듯 정토회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김인순 님
▲ 김인순 님

법륜스님의 100일 법문을 들으러 매일 서초법당을 다녔습니다. 스님 법문이 너무 좋아 법당에서 듣고, 라디오로 듣고, 재방송도 들었습니다. 그 후로도〈깨달음의장〉, 〈동북아 역사기행〉, 〈인도성지순례〉등 정토회에서 하는 프로그램에는 빠짐없이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몰랐기에 저를 바꾸겠다는 절박감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정토회 고문 역할을 하시던 각해보살님과 상담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를 보더니 ‘바보 되어 살겠습니다.’라는 기도문을 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내가 옳다. 내가 잘났다.’라는 생각이 가득 차서 뭐든지 다 계산하고, 따져보고, 재단해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간혹 기도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는 ‘1,000% 맞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질 제일’

스님의 100일 법문 이후 상근활동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정토회 상근활동가가 되려면 3일 동안 만 배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기 살기로 만 배를 했습니다. 만 배를 끝낸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음이 고요했습니다. 다음날 지인과 얘기하면서 화가 났는데, 화를 내는 제 모습이 옆 사람을 보듯 뚜렷이 보였습니다. 제 안에 화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순간이었습니다.

2003년부터 출퇴근하는 정토회 상근활동가가 되었습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사)에코붓다에서 홍보물을 만들었습니다. 사회에서 편집디자인을 했기에 일은 비교적 쉬웠습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제 스타일대로 계획하고 제 생각대로 하려 해서 사사건건 부딪쳤고 그때마다 화가 치솟았습니다. ‘상대가 잘못했기에 화가 나는 것이고, 화를 내야 상대는 자기 잘못을 알 수 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제 별명이 ‘성질 제일’이었습니다. 성질내는 것은 저를 따라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회에서도 화내면 싫어하는데, 수행처에 와서 화를 내니 저를 피해 다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화를 참기도 어려웠지만, 화를 감추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야 저 자신에게 솔직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봉사

화를 다스리기는 힘들었지만 일은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사)에코붓다에서 음식물 남기지 않는 ‘빈그릇 운동’을 10만 명 서명운동으로 시작해 다음 해에는 100만 명으로 이어갔습니다. 저는 포스터, 팸플릿, 전단지를 만들어 전국에 배포하는 일과 빈그릇 운동 강사들에게 필요한 포트폴리오를 만들었습니다. 후에 저도 빈그릇 운동 강사로 대중 앞에 서게 되었는데, 사람들 앞에서 식은땀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2004.11.8.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빈그릇운동 서약캠페인(왼쪽 세 번째 김인순 님)
▲ 2004.11.8. <현대불교신문>에 실린 빈그릇운동 서약캠페인(왼쪽 세 번째 김인순 님)

홍보 전단지를 밤낮으로 포장해서 전국에 택배로 부쳤습니다. 매일 무거운 상자를 들고 정토회관을 오르내리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택배 일을 그만두셨다는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팠던 일도 떠오릅니다. 그때 정토회 모든 회원이 빈그릇 운동에 참여했고, 언론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마침내 100만 명 서명을 달성했습니다. 빈그릇 운동이 끝나고 저는 (사)에코붓다에서 정토회 환경사업부로 소속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정토회 환경운동이 음식을 남기지 않는 ‘빈그릇 운동’에서 음식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도심 속 생태순환적 삶’을 지향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습니다.

2007년 지구의날 빈그릇운동 홍보(오른쪽 첫 번째 김인순 님)
▲ 2007년 지구의날 빈그릇운동 홍보(오른쪽 첫 번째 김인순 님)

정토회관에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 원칙은 ‘단 1g의 음식물 쓰레기도 회관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도심 속 생태순환적인 삶을 지향하면서 제일 먼저 옥상에 쌓여있는 퇴비를 이용해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무엇을 심든 잘 자랐습니다. 가지를 심으면 가지가 주렁주렁 열렸고, 방울토마토는 줄기마다 포도송이처럼 달리고, 고추는 따기가 바쁠 정도였고, 가을이 되면 옥상 담장을 타고 어른 머리보다 큰 노란 맷돌 호박이 익었습니다. 커다란 고무통에 심은 수련은 한여름에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가을에는 커다란 연근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호박이 익으면 전을 부쳐 도반들과 함께하는 ‘가을걷이 잔치’를 열었습니다.

5년 정도 지나 옥상 텃밭의 작물을 세어보니 30여 종이 넘었습니다. 어떤 농사짓는 분이 제게 농사경력을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저는 도시 출신으로 농사의 ‘농’ 자도 몰랐습니다. 지렁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먹고 만든 퇴비의 힘이었습니다. 옥상 텃밭의 갖가지 채소들은 공양간으로 보내져 다시 우리들의 밥상으로 올라왔습니다. 정토회관 옥상 텃밭은 도심 한복판에서 생태순환적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장소가 되어 외부 환경단체나 언론에서도 찾아왔습니다. 이 시기가 저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기였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옥상 텃밭
▲ 옥상 텃밭

다시 세상 속으로!

정토회에서 자원봉사로 활동하며 경제활동을 못 하니 통장이 바닥이 났습니다. 그즈음 부서를 환경사업부에서 수도권사무국으로 이동했는데, 환경사업부 일과 다르게 재미가 없고 시간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수행은 늘 제자리인 것만 같았습니다. 경제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일상에 변화를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근활동가로 봉사한 지 10년 만인 2012년에 회향을 했습니다.

쉰이 다 된 나이에 사회에 발을 딛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단시간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는 잘 적응했습니다. 일터에서 상대가 제게 화를 내면 ‘나도 예전에 저랬지.’ 하며 상대를 이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정토회에서 봉사할 때 도반들과 부딪치며 ‘성질 제일 김인순’의 모난 점들이 둥글어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화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내면에서는 여전히 ‘내가 옳다.’라는 생각에 화가 차 있었습니다.

상근활동가로 있을 때는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봉사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사회에서는 이 자부심마저 없으니 바닥을 헤매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바닥을 칠 때 ‘아! 화를 내면 나만 괴롭구나, 이 세상 아무도 내가 화낸다고 괴롭지 않은데, 나만 이렇게 괴롭구나.’라는 자각이 되면서, 차츰 상대를 탓하기보다 제게로 돌이키는 힘이 생겼습니다.

상대가 원하는 봉사

경제적으로 자리가 잡혀가던 2019년부터 강동법당에 나가 정기적으로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온라인 정토회로 전환되면서 지회장을 선출하는데, 서원행자인 제가 지회장 후보가 되었습니다. 상근활동가 후 오랜 공백이 있었고 그동안 정토회 체계가 많이 바뀌어 제가 지회장 후보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공포심으로 다가왔습니다. 지회장 후보는 저 이외 결사행자도 한 분이 있어서 다행히 그분이 지회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바로 지부장이 되면서 유일한 서원행자인 제가 송파지회 지회장이 되었습니다. 도망가고 싶었습니다. 지회장 소임을 안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고민했습니다. 함께 상근활동했던 송파지회 담당법사님께 그 방법을 물었더니 법사님은 덤덤하게 “없어!”라고 했습니다. 부담감에 죽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하도 죽는소리를 하니 지부장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라고 말하며 저의 부담감을 덜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래!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못 하면 욕먹자.’라는 마음으로 지회장 소임을 받았습니다.

2022년 송파지회 모둠장, 지원담당자들과 함께(왼쪽 세 번째 김인순 님)
▲ 2022년 송파지회 모둠장, 지원담당자들과 함께(왼쪽 세 번째 김인순 님)

지회장을 하면서 함께 하는 도반들에게 제가 명심한 두 가지는 ‘지금 이 사람은 자발적으로 봉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 이 사람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였습니다. 송파지회 도반들은 일 욕심도 많고 맡겨진 일을 열정으로 책임감 있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한 걸음 물러나다가도 역할이 맡겨지면 기대 이상으로 잘했습니다. 이렇게 함께하는 도반들에게 믿음이 생겼고 지회장 후보일 때 들었던 ‘공포심’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일에 차질이 생기면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지회장을 맡고 보니 자의든 타의든 모범을 보여야 했고 새벽 정진부터 뭐든지 적극적으로 했습니다. 사회에 나오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수행이 흐트러져 있었는데, 지회장 소임은 그런 저에게 뻣뻣하게 굳어있던 수행의 근육을 부드럽게 다시 풀어 주는 재활 훈련이 되었습니다. 새벽 정진은 일상이 되었고 ‘소임이 복이다.’라는 말이 너무나 생생한 진리로 다가왔습니다.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면서 ‘행복운동 특별본부’로 소임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귀찮아 병’이 있어서 소임이 바뀌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나, 이왕 가게 되었으니 행복 시민을 만드는 봉사에 정성을 들이고자 합니다. 이제 나이도 많아 잘하라고 닦달하는 사람도 없으니 편안하게, 천천히, 꾸준하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나에게 정토회는

‘내가 정토회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쉬고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화내고 짜증 많았던 상근활동가 시절도 돌이켜보면 모든 날이 좋았습니다. 상근활동가 시절 환경사업부의 선배 도반들이 까칠하고, 화 잘 내는 저를 잘 보듬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 ‘성질 제일 김인순’과 얼굴 붉히며 시비했던 도반들을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나니 그들도 각자의 터널을 통과한 듯 편안해 보였습니다.

2022년 정토사회문회관 개관식, 옛 환경부서원들과 함께(왼쪽 두 번째 김인순 님)
▲ 2022년 정토사회문회관 개관식, 옛 환경부서원들과 함께(왼쪽 두 번째 김인순 님)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이제 그 단풍 든 도반들과 함께 아름답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첫 기도문 ‘바보 되어 살겠습니다.’가 조금은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앞서서 경험한 것을 ‘나는 이랬어요.’라며 담담하게 내어주는 모습에 감동합니다. ‘나는 좀 늦나 봐요.’라고 말하는 겸손한 모습에 ‘성질 제일 김인순’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지렁이가 만들어준 퇴비로 농사짓던 ‘행복한 도시 농부 김인순’을 떠올리며 빈그릇 운동, 흙퇴비화를 이어갔으면 합니다. 응원합니다. 행복한 만남이었습니다.

글_김정림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경주지회)
편집_김윤희(강원경기동부지부 용인지회)

전체댓글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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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의

재미나게 감동하며 읽었던 기억에 다시 봐도 또 또 좋습니다
행복본부에서 잘 계시지요?
매주 전법활동가 교육을 해주셨던 시간이
그리운 시간이 되었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2024-03-26 15:19:57

김학연

요즘 뭔가 문제가 있다고 자신에대해 답답함이 있었는데 바닥을 치고 있었구나. 온갖 분별심이.올라오고 잘난것도 없는데도 잘난척하려는 못된 심보도 알게되어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정진은 하는데 눈가리고 아웅식인것만 같아서 답답했습니다.참회하는 마음이 글을 읽으며 떠오릅니다

2023-05-03 08:25:01

최영미

감동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2023-04-18 09: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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