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경주지회
모두 내가 지은 인연이었다

“늘 분별하는 저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깨어 있음을 유지하는 것이 저의 수행과제입니다.”라고 말하는 베테랑 수행자를 만났습니다. 1995년 네 살짜리 막내를 업고 경주 정토법당 법회를 찾기 시작해 지금까지 경주법당과 함께해 온 경주법당 역사의 산증인이자 지킴이인 김성순 님을 만나봅니다.

인터뷰 중에 활짝 웃고 있는 김성순 님
▲ 인터뷰 중에 활짝 웃고 있는 김성순 님

일찍 어른이 된 소녀

어린 시절 아버지는 집안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 돌았습니다. 7남매 중 둘째 딸인 저는 살림을 혼자 꾸리는 엄마가 안쓰럽고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동생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열심히 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 입학은 했지만 결석하는 날이 더 많아 글자를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친구를 사귈 기회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부산 친척 집에 갔는데, 또래 사촌들이 학교 다니고,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대로 살다가는 바보가 되겠구나.’ 그래서 14살에 아버지 몰래 가출하였습니다. 그 후 이불 집에 취직하여 재봉 기술을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항상 장사해서 돈을 많이 버는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힘든 엄마를 보면서 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남편도 이불 집에서 일할 때 지인의 소개로 만났습니다. 남편은 여유 있는 집안의 막내였습니다. 결혼 후 시댁의 도움으로 경주 성동시장에서 이불 가게를 열었습니다. 가게는 종업원을 여러 명 둘 정도로 장사가 잘됐습니다. 그 덕분에 친정 남동생 4명이 결혼할 때 전세방을 얻어 주기도 했습니다. 남편의 불만이 있었지만, 동생들을 업어 키우다 보니 자식처럼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누리지 못하고 애 어른이 되어 동생들에게 부모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있었고, 한글을 모른다는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제 맘 깊숙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법륜스님을 만나다

95년도쯤 지인 소개로 경주 정토법당을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 참석했을 때 20명 정도 둘러앉아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는데, 그중 한 남자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스님은 그 사람의 눈높이에 딱 맞춰서 법문을 해주시며 그 질문자가 깨우치게 하는 과정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분이다’ 하는 느낌이 왔습니다. 그동안 불교를 여러 가지 형태로 접했지만, 법륜스님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설명하고, 괴로움에서 바로 벗어날 수 있도록 관점을 잡아주는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러나 2년 후 경주 정토법당이 없어졌습니다. 경주 도반 20여 명과 저는 길을 잃고 이 절 저 절,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울산에 정토회 법당이 생긴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울산에 법당이 생긴다면 경주에도 정토회 법당을 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천일결사1 5-6차 입재식2이 열리는 문경으로 버스 한 대를 빌려서 도반들과 함께 무작정 갔습니다. 입재식이 끝난 후 법륜 스님께, “스님, 경주에도 정토회 법당을 열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나 당장 법당이 생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시장 안 저의 점포에서 가정법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여 명의 도반이 뜻을 모아 불국사 다보회 사무실에 모여 경주법당 개원을 위한 500배 정진을 시작했습니다.

경주법당 개원일 법륜스님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줄 두 번째
▲ 경주법당 개원일 법륜스님과 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줄 두 번째

총무 소임은 할 수 없어요!.

그렇게 바라던 법당을 개원 하였지만 총무 소임을 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한글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총무는 정토회에서 내려오는 서류나 안내문들을 읽고 처리하는 등 글을 읽고 써야 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법륜스님께 “스님, 저는 글을 몰라서 총무 소임은 못 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총무 소임은 학벌로 하는 게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된다. 총무는 사람 잘 찾아서 쓰면 되니 하나도 걱정할 것 없다. 글을 모르면 글 잘 아는 사람을 쓰면 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에 용기를 내어 5차 천일 결사, 6차 천일 결사 때 총무 소임을 맡았고, 7차 천일 결사 시기에는 경주 대표를 맡았습니다. 그러나 하겠다는 용기는 냈지만, 글을 모르는 저에게는 엄청난 부담이었습니다. 총무 회의 때 들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모두 암기해서 팀장들에게 전달해야 했습니다.

아도모레원에서 통일기도 도반들과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 아도모레원에서 통일기도 도반들과함께, 왼쪽에서 두 번째

소임에 미치다

법당 개원과 총무 소임에 푹 빠져 남편과 갈등이 심해졌습니다. 남편은 가정 법회를 할 때 장소를 빌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경주법당 개원과 많은 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법당 총무는 잦은 회의와 각종 수련으로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이 많았고, 가게는 종업원 손에 맡겨놓았습니다. 남편은 제가 소임을 그만두게 하려고 술에 취해서 법회 중에 법당에 찾아와 일부러 난동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총무 소임을 그만둘 수 없어 이혼하자고 했습니다. 법당 개원에 함께 한 도반들에게 제가 보답하는 길은 총무 소임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의 불평과 짜증은 심해져 욕설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무변심 법사에게 상담을 청했습니다.

무변심법사와 함께
▲ 무변심법사와 함께

남편의 불평이 새소리로 들리다

무변심 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이 하는 말을 새소리처럼 들어보세요” 그러나 저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딱 이랬습니다. ‘아니 내가 나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일 하며 잘살고 있는데, 그런 나에게 화내고 욕하는 남편이 잘못된 거지 어떻게 그 소리를 새소리로 듣는단 말인가?’

당시 저는 수행이 뭔지도 제대로 몰랐고, 부처님 법은 기도해서 복 받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수행자였지만 새벽 정진은 빠지지 않고 꾸준히 했습니다. 그리고 경주법당 개원 후에도 도반들과 매일 500배 정진을 이어갔는데, 이때 제 개인 기도문은 이랬습니다. “부처님, 관세음보살님, 제 생각이 모자랐습니다. 남편을 미워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제 등을 탁! 치는 듯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 남편을 마음속으로 미워하는 것도 엄청난 잘못이구나! 나는 그동안 감사할 줄 몰랐구나!’ 그리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에 대해서도 미워하고 원망했던 마음을 참회하였습니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와 술에 취해 잠든 남편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제가 당신을 너무 몰랐습니다. 당신은 제게 소중한 사람입니다” 남편에게 가슴 저리도록 미안했고, 그런 남편이 한없이 소중하게 느껴져 눈물로 참회했습니다. 이후 남편의 불평이 새소리로 들리고, 불평하는 남편이 귀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니 남편의 불평도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모든 깨달음의 과제가 수행문 한 장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늘 습관적으로 숙제하듯이 기도하니, 그 깊은 뜻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남편이 제 깨달음을 위한 부처임도 알았습니다. 이렇게 한 생각 돌이켜서 사로잡힘에서 벗어나니 남편을 비롯한 모든 인연에 다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깨달음이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또다시 제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분별하는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경주 천룡사지에서 평화 통일발원 기도, 목탁 든 사람이 김성순님
▲ 경주 천룡사지에서 평화 통일발원 기도, 목탁 든 사람이 김성순님

내가 짓지 않은 인연은 없었다

저는 지금도 때때로 넘어집니다. 그러나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이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분별하는 저 자신에게 속지 않도록 깨어 있어 알아차림을 유지하는 것이 저의 수행과제입니다. 그리고 살아보니 제가 짓지 않은 인연이 제게 오는 법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제가 짓고 제가 받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실천활동가로서 매주 천룡사에서 하는 통일 발원 정진 300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소임은 제가 걸어서 산에 오를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 원이 있다면 2차 만일결사 때는 전 세계는 물론이고, 북한에도 정토회가 생겨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삶의 무게도 다 내가 지은 인연이라 생각하니 사는 것이 힘들지 않습니다.” 라는 주인공의 말이 마음속에 남습니다. 김성순 님 인터뷰를 마치고 다음 날부터 저도 제 업식을 벗는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토행자 초보인 제가 베테랑 수행자의 깊은 말뜻을 제대로 알아듣고 표현해내지 못해 그저 미안한 마음입니다. 선배 도반들의 발걸음 위에 오늘의 제가 있듯이, 오늘 저의 한걸음이 미래 도반의 디딤돌이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글_신정순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경주지회)
편집_이정선(경남지부 진주지회)


  1. 천일결사 정토회는 개인의 행복과 정토세상 실현을 위해 1993년 3월 만일결사를 시작. 3년을 정진하면 개인의 의식 흐름이 바뀌고, 30년(만일)을 정진하면 한 사회가 바뀔 수 있다는 믿음으로 3년(천일) 단위로 천일결사 정진을 이어오고 있음.  

  2. 입재식정토행자 천일결사를 백일 단위로 나누어 매 백일 마다 함께 모여 수행을 점검하고, 새롭게 백일기도를 시작하는 의식. 

전체댓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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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주

내가 지은 인연의 결과라는 말씀에 시비분별 할 일이 없어짐을 알게 됩니다.
감동적인 수행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

2022-10-28 09:13:22

홍예지

눈물이 나고 가슴이 뜨겁습니다...수행담..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2-10-27 10:04:55

토함

관셈보살 고맙습니다(0)(0)(0)

2022-10-19 13: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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