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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오랜 시간에 걸친 권유로 마지못해 2009년 7월 <깨달음의 장>을 다녀왔습니다. '내 옳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고, 제가 세워둔 기준에 맞지 않으면 한없이 분별해 저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이들을 괴롭게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감사할 줄 몰라 주변과 비교하며 열등감에 힘들었습니다. 제가 문제인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외골수처럼 제가 보는 방향만 옳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관점을 바꿔 보니 마치 새로 태어난 듯 가슴 가득 환희심이 났습니다. 고작 4박 5일을 보내며 이렇게 생각이 바뀔 수 있다는 것에 자신도 놀랐습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다음 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대구에 하나밖에 없었던 대구법당은 집과 1시간이나 떨어져 있어 직장을 마치고 법당을 다녀오면 밤 11시가 훨씬 넘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들에게 제 이야기를 한다는 것, 마음나누기가 무척 어색했습니다. 저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법복을 입고, 목탁을 치고, 안내하는 것에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알던 절에 대한 관념에 관찰을 많이 했지만 1년은 해보자는 생각으로 다녔습니다. 불교대학 프로그램 중 라이프 스토리를 할 때 도반들의 진솔한 나누기에 놀랐고,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불교대학 입학하던 해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나누기를 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버지는 술주정이 심했고, 어머니와 자주 다투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마음이 아팠고 어머니가 안쓰러웠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은 컸습니다. 제가 직장 다니느라 애들을 맡기기 위해 친정 부근에서 살다가 아파트 분양을 받았습니다. 거리가 멀어져 어머니는 저와 같이 살고, 주말에만 아버지가 있는 집으로 갔습니다. 혼자 있는 아버지가 마음에 걸렸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경제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 대한 마음을 외면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그제야 가족들의 외면 속에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외로움을 견디며 살았던 가장으로서의 아버지, 고단함 속에 순탄하지 않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의 삶이 보였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해 너무 죄송했고, 죽음 앞에서는 더 기회가 없다는 사실에 오열했습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자식들에게 따뜻하고, 자상하며, 헌신하고 의지처가 되어야 한다는 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도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기 싫어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불교대학을 다니며 아버지에 대해 가진 상을 내려놓으니 원망과 미움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졌던 상은 남편에게도 있었습니다. 결혼 초 남편과는 생활 습관이나 자라온 환경이 참 달라 부딪히는 일이 많았습니다. 함께 가정을 꾸려나가는 조력자로 저에게 맞춰주지 않는 남편에게 불만이 가득 차 늘 힘들었습니다. 제 기준을 가지고 고집하니 서로 감정이 격해졌습니다. 그 모든 상처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깨달음의 장>과 불교대학을 다니며 조금씩 제 문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법당에 다니면서 많이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진 저의 변화를 보고 남편도 2년 전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하고 <깨달음의 장>을 다녀오면서 우리 부부는 서로 이해하는 부분이 예전보다 많이 늘어났습니다. 물론 아직도 가끔 불만이 올라오고, 남편이 싫어하는 가르치듯 잔소리를 합니다. ‘내가 이러고 있구나’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 다행입니다.
집 근처에 법당이 생긴다고 하여 달서법당(현 송현법당) 불사에 참여하며 지금까지 봉사의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신생 법당이다 보니 도반들이 적어 경전반 학생이면서 저녁담당을 맡았습니다. 시행착오도 많았는데 퇴근 후 법당으로 다시 출근하는 기분이 들어 힘들었습니다.
2012년에 대구 공업대학교에서 열린 법륜스님의 희망강연 총괄자가 되었습니다. 몇 번이나 강연장을 답사하고 리허설도 했지만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지 않는 봉사자들에게 분별심이 났습니다. 실수라도 하면 어떻게 하나,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많이 긴장했습니다. 주변에 도와줄 도반들이 많은데도 같이 하고 있다는 생각을 못 하고, 책임감에 눌리고 잘하려는 생각에 맘 졸이는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봉사 중에는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앱을 시민들 핸드폰에 설치해주는 일이었습니다. 매일 저녁, 매주 주말에도 테이블과 현수막을 들고 나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법륜스님의 희망편지를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흔쾌히 호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면 너무나도 기뻤지만, 간혹 시비를 거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를 보는 연습도 했습니다. 주황색 단체 티가 흠뻑 젖을 정도로 힘들기도 했지만 보람도 있었습니다.
2014년 직장에서 명예퇴직하고 대구 경북지부 사무국에서 주간반 봉사를 했습니다. 직장과 저녁반 활동에만 익숙해져 있던 때에 주간반 봉사자들의 회의 모습이 아줌마들이 모여 수다만 떠는 듯이 생각되어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활동을 하면서 어떻게 정토회가 운영되는지 회의까지 들었지만, 곧 주간반 도반들의 봉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불사, 강연회, 전법팀을 맡아 봉사하면서 원칙에 맞게 처리되지 않으면 따지고 반드시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업식이 강함을 알았습니다.
달서정토회 총무 소임을 하면서는 주변을 조금 더 넓게 보는 안목이 길러졌고 사람들의 얘기를 잘 듣는 연습을 많이 했습니다. 일 처리를 깔끔하게 해야 하는 성격 탓에 함께 하는 도반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습니다. 도반들의 마음을 알아주고 받아주는 것이 부족한 저를 대신 채워주는 선배 도반들이 있어 큰 무리 없이 해나갈 수 있었습니다. 총무 소임을 3년간 하면서 수행자로서 봉사자로서 큰 산을 넘은 시간이었고 이런 경험이 제 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또 10차년에는 대의원과 특위소임을 하면서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총무 시절 대표의 역할에 대해 회의적이고 불편했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귀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행복학교, 행복시민 모임을 통해 또 다른 전법의 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행복학교를 경험한 분이 예전보다 더 행복해지고, 이 사회가 좀 더 행복한 사회가 되는 길에, 제가 조금이나마 힘을 보탠다는 생각에 뿌듯합니다.
부처님 법 만나게 된 인연에 기쁘고, 스승님, 법사님의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같은 방향을 보며 함께 가는 도반을 거울삼아 인생의 폭이 넓어지고 있음을 알겠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꾸준히 수행정진 하며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문성해 님은 8년 전 저의 불교대학 담당자였습니다. 허술한 제가 그나마 졸업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 저를 강하게(?) 이끌어 준 주인공 덕분이었습니다. 멀고 먼 수행의 여정에 꾸준히 정진하는 선배 도반과 함께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글_문성해 (대구경북지부 달서지회)
정리_윤정인 희망리포터(대구경북지부 달서지회)
편집_강현아 (대구경북지부 수성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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