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가장 안전하게 성장하는 시간

대학 졸업 후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 어려웠던 정지원 님은 인생의 새로운 계기를 만들고자 백일출가를 선택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늘 주변의 눈치를 보며 살아왔고, 다른 사람의 평가에 맞추려 애쓰느라 인생이 재미없게 느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해야 할 일 앞에서 물러서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문경에서 지내는 동안 세상을 보는 시야가 넓어졌고 부모의 그늘에서도 한 걸음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무엇이든 일단 해보자'라는 용기가 생겼다는 정지원 님에게 백일출가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어른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지원 님
▲ 정지원 님

슬럼프 끝에 백일출가를 결심하다

대학 졸업 후 반년 동안 취업에 매달렸으나 마음처럼 되질 않자 자존감이 바닥나면서 잠시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저에게 보람을 안겨 주었던 것은 정토회에서 ‘경전대 돕는이’를 시작으로 하게 된 봉사활동이었습니다. 게다가 청년지부 소속 모둠장의 추천으로 다녀온 ‘동북아역사기행’은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따라 청년지부 도반들과 함께 여행하며 고구려·발해 역사를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정토회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관심을 두다 보니 동기부여가 될 만한 일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래서 하던 일을 일단 멈춘 뒤 출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출가가 ‘나의 리셋’을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말이죠. 처음에는 ‘청년붓다’를 생각했지만, “이왕 할 거면 문경에 가서 제대로 하고 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에 힘을 얻어 백일출가를 결심하였습니다.

사회 경험 없이 백일출가를 시작하고, 정해진 프로그램에 따라 일해 보니 제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백일출가 와서 생활해 보니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게, 센스 있게)’으로 해야 한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일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할 때도 있고, 저에게 맞는 일을 스스로 찾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백일출가 오기 전 과정도 비슷했습니다. 사회복지를 전공했지만, 이 분야가 저에게 맞는지 확신이 없었고 막막한 마음에 섣불리 사회를 향해 발을 내딛기가 두려웠습니다. 일단 뭐라도 해봐야 무엇이 나에게 맞는지 알 텐데, 아무거나 해볼 그런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문경수련원에서(가운데가 정지원 님)
▲ 문경수련원에서(가운데가 정지원 님)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내 인생의 주인으로 홀로서기

저는 늘 주변의 눈치를 보며 살았습니다. 어떤 도반은 저를 ‘정눈치’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도 부모의 눈치를 보며 선택했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 같으면 ‘사귀기’가 두려웠습니다. 지금까지 제 인생의 주체는 부모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부모님의 말씀에 덜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참고는 하되, 제 마음과 생각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백일출가를 마친 후 부모님과 통화를 하는데 평소처럼 반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통화가 길어지고 걱정과 안부가 계속되면 전화를 끊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예전 같으면 어리광을 부렸을 텐데, 달라진 제 모습이 스스로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동안 부모님은 저에게 허물이 없고 친밀한 존재였습니다. 그랬기에 뭐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부모님의 의견을 따르기만 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도반들이 성인인 저를 중학생처럼 보는 이유도 이런 것이겠다 싶습니다. 이제는 부모님의 걱정 어린 눈빛과 말 한마디가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제 생각대로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간 인생이 재미없게 느껴진 이유가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맞춰 살려고 애썼기 때문입니다. 문경에서 머물며 세상을 보는 시각이 넓어졌고, 집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습니다. 참으로 소중하고 고마운 시간입니다.

여래원에서
▲ 여래원에서

타인의 인정에서 나를 귀하게 여기는 시간으로

백일출가 재입재 후 청소년 선재수련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백일출가를 마치고 어떤 일을 할지 파악이 안 된 상태에서 사전 준비를 하려니 막막했습니다. 누가 먼저 일을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자니 행자원 도반들 눈치가 보였습니다. 결국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보완이 필요한 PPT 작업을 하거나 새로운 발표 자료를 만들며 준비 기간을 보냈습니다. 내내 ‘이게 맞나? 잘하고 있나?’ 검증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습니다. 돌이켜보면 같이 준비하는 도반들도 선재수련은 처음이고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도반들은 크게 동요하지 않고 방황하는 저를 이끌어 주었습니다.

사회 경험이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감이 없고 해야 할 일 앞에서 물러서는 ‘퇴굴심’이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시 일에 집중하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당당하게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생겼습니다. 저는 뭘 해도 자신이 없고 의심하고 검열하며 자신을 괴롭혀 왔습니다. 소소한 부분에서 감정 소모가 많았으니 정작 중요한 일을 해내야 할 때는 집중할 힘이 부족했습니다. 백일출가 전에는 힘든 게 아니라 힘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지금은 에너지가 채워진 느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추앙하며, 지쳤던 삶에 활력을 되찾아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문경수련원에서 누가 저를 추앙해 준 적은 없었지만 저는 추앙받는다고 느꼈습니다. 예불 끝나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맑은 공기 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따뜻한 말을 나누면서 제가 바뀌고 성장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두북수련원 배추밭에서
▲ 두북수련원 배추밭에서

좋고 싫음의 업식을 넘어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 성지순례를 다녀와서 2026년 새로운 수행 목표가 생겼습니다. 저는 좋고 싫은 업식이 강한 편입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 좋고 싫은 마음이 커서 그 마음을 내려놓아 보려고 합니다. 저는 사람을 좋아할 때 그 사람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강합니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면 저를 싫어할까 두렵고, 언제나 잘 보이고 싶고, 사랑받지 못하면 살 가치가 없다고 느끼곤 합니다. 누구를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면 제 감정에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하곤 했습니다. 떠오르는 마음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다시 우정, 동경, 존경으로 나눕니다. 그리고 왜 이런 마음이 드는지 집요하게 고민합니다. 이렇게 감정을 놓고 강박적으로 고민하며 불안해지면 ‘나는 이런 사람은 아니야’하면서 자신을 몰아붙였습니다.

이제는 어떤 감정이 들면 그냥 ‘그랬구나’ 하고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떠오르는 마음을 붙잡기보다는 하나둘씩 내려놓아 보기로 했습니다. ‘할까 말까?’ 그럴 때는 그냥 해보기로 했습니다. 나의 감정을 옭아매지 않고 서서히 풀어주었습니다. 사람을 향해 과하게 들뜨는 마음이 들 때는 밑바닥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인도 성지순례 동안 ‘마음보기’를 제대로 해보기 전까지는 내 마음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는 층을 보지도 못했고, 누가 말해줘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백일출가를 하고 재입재를 하면서 행자들과 나누기를 꾸준히 한 것이 공덕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솔직하기만 한 저의 두서없는 나누기를 잘 들어준 13호차 1조 도반들께 이 자리를 빌려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일체의 장에서(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지원 님)
▲ 일체의 장에서(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정지원 님)

더 성숙해진 나를 마주하며

백일출가는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방법으로 어른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공동체 생활을 하며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부터 걷는 법까지, 진짜 어른들의 성숙한 삶을 곁에서 함께하며 몸과 마음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고 중구난방으로 튀어 오르던 망상들도 가라앉았습니다.

수련 중 소감문을 작성할 때 떠오른 문장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일확천금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작은 일을 꾸준히 해낼 힘은 나에게 생겼다’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행자원에서 다음 기수의 입방을 돕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청년지부에서 활동하며 어디에 있든, 수행 관점을 놓치지 않고 마음공부를 계속하며, 괴로움 없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만 배로 백일출가의 시작을 열었던 그 기운 덕분에 이제는 ‘무엇이든 일단 해보자’ 하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무엇이 나에게 맞을지, 무엇을 잘할지 아직은 다 알 수 없지만, 지금 여기 이 순간, 가볍게 한 발을 내디뎌 보겠습니다.


이 글은 <월간정토> 2026년 4월 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소감문입니다.

글_정지원(50기 백일출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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