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포항지회
머뭇거리지 말고, 인연 닿는 대로

세 아이의 엄마 박소항 님. 직장 생활로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면서도 주말마다 아산과 포항을 오가는 고단함을 기꺼이 감내하며, 엄마로서 책임을 다하고 수행자로서 원력을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습니다. 치열하게 살았고, 그만큼 괴로워했지만 수행을 통해 잃어버린 삶의 의지를 되찾았습니다. 정토회 안에서 잘 쓰이겠다는 박소항 님의 수행담 시작합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어릴 적 저는 사랑받고 싶은 아이였습니다. 아버지가 직장에 다녔어도,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고자 엄마도 일하러 나갔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놀고 싶었지만, 집에 돌아와 청소하고 남동생을 돌보며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엄마가 조금이라도 덜 힘들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늘 “아프다, 힘들다” 했고,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오는 날이면 싸움이 잦았습니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아들 못지않은 딸로, 엄마가 원하는 모습에 맞춰 살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해도 “이 정도 지원받았으면 더 잘했어야지”라는 말을 들었고, 엄마에게 인정받기는 좀처럼 힘들었습니다. 나는 언제나 ‘더 열심히 해야 해’라며 스스로를 채찍질했습니다.

'25년 부처님오신날 아도모례원 나비장터 봉사 중에(맨 오른쪽 박소항 님)
▲ '25년 부처님오신날 아도모례원 나비장터 봉사 중에(맨 오른쪽 박소항 님)

어느덧 경찰이 되어 과학수사관(CSI)으로 현장을 누빈 지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거친 현장에서 여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남자 못지않게 해내야 한다”며 버텼습니다. 여경이 없던 부서에 처음 발령받았을 때는 “네가 못하면 다시는 여경 안 뽑아”라는 말을 들었기에 더욱 악착같이 일했습니다.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업식은 더욱 강해졌습니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석·박사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현장은 늘 참혹했습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부패한 고독사 현장에서 홀로 떠난 이의 마지막을 수습하는 일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세상의 가장 어둡고 처참한 바닥을 마주하며 내 안에는 ‘열심히 잘 살다 죽고 싶다’는 열망이 싹텄습니다. 죽음을 가까이서 접할수록 지금을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또다시 자신을 채찍질했습니다.

'26년 부처님오신날에 경전대학생인 엄마와 함께
▲ '26년 부처님오신날에 경전대학생인 엄마와 함께

임신해 배가 불러 있을 때, 엄마가 딸을 살해하고 스스로 투신한 비극적인 현장을 마주했습니다. 제 아이들에게만큼은 엄마와 다른 엄마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교대 근무를 하며 세 아들을 키우는 일은 아득하기만 했습니다. 친정엄마와 남편, 셋이서 육아를 맡았습니다. 가부장적인 남편은 제가 직장 일은 적당히 하고 엄마 역할에 충실하길 바랐습니다. 친정엄마는 집에 오면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하소연을 쏟아냈습니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마음 쉴 곳이 없었습니다. 그 스트레스를 술과 운동으로 해소하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텼습니다.

무너져 내린 몸과 마음

제 몸은 정직했습니다. 2015년 척추 디스크 수술을 시작으로 뇌동맥류 수술, 자궁근종 수술, 지난해에는 직장암 수술까지 받았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기 피해까지 당하면서 남편과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사춘기 세 아들에 친정엄마의 하소연까지 겹치며 제 삶은 사면초가였습니다.

두호모둠 두북실천지에서 컨테이너 페인트칠 봉사 중에(가운데 박소항 님)
▲ 두호모둠 두북실천지에서 컨테이너 페인트칠 봉사 중에(가운데 박소항 님)

특히 2020년 뇌동맥류 수술 후 복직했을 때, 동료들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사람”이라며 함께 일하기를 피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일해도 시기와 질투를 받았습니다. 결국 우울증과 극심한 불안증, 공황장애가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아 잠을 이룰 수 없었고, 그토록 좋아하던 책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자살 현장을 수습하던 제가 이제는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가겠구나. 더 살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바로 그때 유튜브로 즉문즉설을 듣다가 행복학교 광고를 보았습니다. ‘나도 행복한 사람으로 살고 싶었는데…’ 하는 마음에 홀린 듯 신청했습니다.

'25년 부처님오신날 아도모례원에서 두호모둠장 강정미 님과 함께(왼쪽 박소항 님)
▲ '25년 부처님오신날 아도모례원에서 두호모둠장 강정미 님과 함께(왼쪽 박소항 님)

행복학교를 다니며 진정한 행복의 기준을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동안 타인의 기준에 맞춰 살아왔지만, 이제는 제 마음이 중심에 서야 함을 알았습니다. 조금씩 삶의 의지가 생겨날 즈음, 연고도 없는 아산의 경찰수사연수원 교수 요원으로 자원해 내려왔습니다. 더 잘 쓰이는 삶을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남을 가르치고 평가받는 일은 고됐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예민한 성격 탓에, 저를 향한 평가 한마디 한마디가 모두 상처로 돌아왔습니다. 또다시 불안감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그때 불교대학을 신청했습니다.

"이대로 괜찮습니다?" 기도를 통해 떠진 마음의 눈

살기 위해 불교대학에 입학하고 아침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저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밧줄을 잡은 기분이었습니다. 2차 만일결사가 시작될 무렵이었는데, ‘만일결사 기도만 마치고 죽자’는 심정으로 임했습니다.

매일 아침 기도 시간은 온전히 저만을 위한 1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자존감이 낮았고, 늘 ‘더 열심히, 더 빠르게’를 외치며 조급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기도문으로 저를 다독였습니다. “그냥 이대로 괜찮습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이 기도를 계속하다 보니, 어릴 적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어 떼쓰며 울던 어린 저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었던 그 아이를 마음속으로 가만히 토닥였습니다. 그렇게 아침마다 눈물로 마음을 닦아내고 나니, 낮 동안 세상에서 비난을 받거나 상처를 입어도 하루를 버텨낼 힘이 생겼습니다.

전법교육 중에 (가운데 박소항 님)
▲ 전법교육 중에 (가운데 박소항 님)

그렇게 천 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기도를 이어가자 기적처럼 마음의 눈이 떠졌습니다. 제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제가 세운 과도한 기준과 욕심이 만들어낸 결과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인연 따라 갈 뿐,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저를 둘러싼 환경과 가족들이 감사하게 느껴졌습니다.

거리를 두니 찾아온 평화, 도반이라는 든든한 버팀목

과거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다툴 때 중간에서 중재하고 해석해 주느라 바빴습니다. 가족은 ‘내 것’이라는 생각에 제 방식대로 틀을 잡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가족 또한 저와 다른 인격체임을 인정합니다. 한 걸음 물러나 남편과 아이들이 스스로 느낄 때까지 기다려주고 토닥여 줍니다. 마음속에만 담아두었던 고마움도 “고생 많았어”, “고마워”라고 직접 표현합니다. 그러자 남편, 아이들과의 관계가 거짓말처럼 편안해졌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힘들어하던 친정엄마에게는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안내하며 최고의 효도를 선물했습니다. 엄마의 마음이 편안해지길 바랐는데, 엄마는 마치 수능 공부를 하듯 밤새워 필기하고 공부했습니다. 발표할 때면 “남보다 잘해야지” 하며 타인을 의식하느라 목이 쉬기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저 모습을 닮아 평생 나를 들볶으며 살았구나.’

'26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 '26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제 모습이 거울처럼 비쳐 보였습니다. 동시에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를 내가 원하는 편안한 모습으로 바꿀 수는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있는 그대로의 엄마 모습을 받아들였습니다. 한 걸음 물러서서 도울 수 있는 부분은 돕고, 불필요한 잔소리는 줄이며 따뜻한 말을 전하려 노력합니다.

이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도반’의 힘이었습니다. 공황장애와 직장 일로 정신없이 방황할 때, 모둠장이 늘 전화를 걸어 “화면을 꺼놓아도 좋으니 늦게라도 들어오세요”라며 손을 내밀어주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갈 곳이 없고 저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 것 같아 외로울 때, 항상 저를 찾아주었습니다. 세상의 인간관계는 돌아서면 이용당한 듯 허전했지만, 정토회 도반들과 마음 나누기를 하고 나면 언제나 마음이 꽉 차올랐습니다.

'26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조장 소임하는 박소항 님
▲ '26년 인도성지순례 중에 조장 소임하는 박소항 님

경전대학 졸업 후 전법회원이 되어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에서 돕는이와 진행자로 활동했습니다. 저처럼 힘들고 괴로워 죽을 것 같던 도반들이 수업을 들으며 밝은 얼굴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었습니다. 정토회 활동을 하며 ‘오래 건강하게 살아서, 저보다 힘들고 약한 사람들에게 잘 쓰이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인연 닿는 대로

작년에는 교육을 통해 후배 양성에 기여한 공로로 특별승진을 했습니다. 후배 여경들이 다가와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라고 말할 때면, 세상에 잘 쓰이고 있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낍니다. “요즘 얼굴에서 빛이 난다”는 말을 들을 때면, 비로소 제 삶의 진짜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합니다.

'26년 봄 두호모둠 JTS 거리모금 중에 (앞줄 맨 오른쪽 박소항 님)
▲ '26년 봄 두호모둠 JTS 거리모금 중에 (앞줄 맨 오른쪽 박소항 님)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정토회에 막 들어와 수행을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 말을 꼭 전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이익일까, 손해일까 계산하느라 머뭇거리지 마세요. 좋은 경험이든 힘든 경험이든, 인연 닿는 대로 가볍게 해보세요. 수행은 그 모든 순간을 헛되지 않게 합니다.”


새로운 일을 맡을 때면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에 인연이 닿아도 포기하곤 했습니다. 정토회를 만나고 '잘할 수는 없어도 일단 해보자'는 마음으로 처음 맡은 일이 ‘희망리포터’였습니다. 박소항 님을 첫 인터뷰 상대로 만나 이야기를 들으니, 마치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듯했습니다. “머뭇거리지 말고 인연 닿는 대로 살아라”는 말씀은 ‘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눈앞의 인연을 제 발로 걷어차던 저에게 크게 와닿았습니다. 인터뷰를 하며 스님의 법문과는 또 다른, 삶으로 전하는 법문을 듣는 듯했습니다. 앞으로 펼쳐질 박소항 님의 한 걸음 한 걸음을 마음 깊이 응원합니다.

글_김인혜 희망리포터(강원경기동부지부 원주지회)
편집_박선희(강원경기동부지부 수원지회)


2026 9월 정토불교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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