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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의 첫째 아들 유리의 등장으로 남하해 ‘백제’를 세운 온조의 결단력, 아버지의 안타까운 죽음과 전쟁의 패배 앞에서 깊은 슬픔과 회한을 느낀 위덕왕, 그리고 전쟁으로 갈 곳을 잃은 백성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낙화암의 절절한 사연까지—
약 2000년 전의 이 모든 역사 속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단순한 회상이 아닌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우리의 '행동'입니다.
새벽부터 많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150여 명의 회원들이 참석하는 역사 기행인데 괜찮을지 걱정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차량에서 푹 자고 났더니 어느새 도착한 부여. 신기할 만큼 활짝 갠 날씨에 다행스러운 마음입니다. 정토회가 그동안 공덕을 많이 쌓은 덕분일까요.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 차례차례 도착한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정겹습니다. 부모님과 참석한 어린 학생들도 눈에 띕니다.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오전 9시가 되자 좋은벗들 사무국장 이승용 님이 백제의 건국과 발전 그리고 고구려 신라와의 항쟁의 역사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고구려 주몽의 아내 소서노와 아들 비류, 온조는 주몽의 첫째 아들 유리로 인해 주몽의 뒤를 잇지 못하게 되자,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 때문에 백제의 문화는 고구려와 유사하나 고구려에 대한 경쟁의식이 강했습니다.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국력이 강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전사하자 도읍을 공주로 옮겼고, 성왕은 좁은 공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시 이곳 부여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특히 이곳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국보 백제금동대향로를 제작한 비화가 저의 귀를 사로잡았습니다. 아버지 성왕의 안타까운 죽음과 신라와의 전쟁에서의 패배, 이로 인한 아들 위덕왕의 슬픔과 회한이 고스란히 짐작되니, 어느새 1400년 전 백제의 역사가 훨씬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박물관에서는 회원들이 국보 금동대향로의 아름다움 앞에서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하였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듣고 향로를 보니 그냥 보는 것과 엄청나게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승용 님의 설명대로 진품 향로가 주는 신비감과 아우라가 대단했습니다.”(청주지회 윤유선 님)
두 번째 답사지는 궁궐 근처에 조성되었던 인공 연못 궁남지와 계백 장군의 5,000 결사대 충혼탑입니다.
넓게 탁 트인 궁남지의 전경이 시원스럽게 아름답습니다. 궁남지의 아름다움 때문인지 이곳에서 점심을 먹을 예정이어서인지 소풍 온 아이들처럼 참가자들의 발걸음은 가볍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신라의 문무왕도 태자 시절 백제를 공격하러 이곳에 왔다가 궁남지의 아름다움을 보고 감탄하여 신라에 가서도 비슷한 연못을 만드는데, 그 연못이 바로 월지라고 합니다.
“망해가는 백제의 기틀을 다시 잡은 분이 무왕입니다. 이곳 궁남지에서 살고 있던 용이 여인을 품어 아이가 태어났는데 그 아이가 서동입니다. 자라나 무왕이 됩니다.
서동은 예쁘다고 소문이 자자한 신라 진평왕의 딸을 만나기 위해 신라로 가서 서동요를 만들죠. 드라마를 보셔서 내용은 다 아시죠.”
서동요와 관련된 이승용 님의 재미난 해설이 이어지자 회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자주 터졌습니다.
궁남지에 자라난 엄청난 크기의 연잎들 사이를 걷다 보니 이상한 거인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가 된 기분도 들었습니다.
궁남지를 지나 조금 걷다 보니 5천 결사대의 충혼탑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가족마저 버린 계백 장군과 5천의 결사대 그리고 이들에 맞선 어린 화랑들. 그들의 마음이 스쳐 지나가니 여러 감정이 밀려옵니다.
세 번째 답사지는 부소산성입니다.
“부소산성은 산 아래 남쪽에 있는 궁궐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성으로 지금으로 보면 수도방위사령부 같은 곳입니다. 백제가 나당 연합군과 맞서 싸웠던 마지막 결전지입니다. 백제 패망의 현장이기도 하고요.
낙화암의 3천 궁녀 얘기가 유명하죠. 근데 궁녀가 3000명이라는 얘기는 사실이 아닙니다. 여기서 삼천이란 삼천대천세계라는 표현처럼 아주 많은 숫자를 뜻하죠.
황산벌과 금강 입구에서 패배하고 나당 연합군이 부여로 쳐들어오자 의자왕은 아들 부여융을 데리고 공주로 피신을 가버립니다.
왕을 포함하여 떠날 사람 다 떠나고 이제 남아있는 사람들은 여성과 어린이 등 약자들 정도겠지요. 이들은 오갈 데도 없고 피신할 데도 없으니까 부소산성 위로 올라갔고 적들이 계속 공격해오고 강이 가로막고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게 된 것입니다.”
쫓기고 쫓겨서 막다른 이곳에 이르러 저 아래 짙은 백마강을 내려다 봤을 백성들의 절망과 비탄을 잠시 생각해보았습니다. 전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은 결국 약하고 평범한 이들. 씁쓸한 마음입니다.
낙화암 답사 후 참석자들은 잠시 부근에서 쉬기도 하고, 낙화암 아래에 있는 고란사에 내려가서 3년은 젊어진다는 약수를 마시고 젊어져 오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답사지는 부여왕릉원입니다.
“이곳은 부여 왕릉원 또는 능산리 고분군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왕들의 무덤이 여기 있습니다. 제 뒤편으로 있는 두 개의 무덤은 가짜 무덤입니다. 하나는 의자왕의 무덤이고 하나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의 무덤입니다.
의자왕은 부여융과 함께 공주로 피신했다가 결국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당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죠. 기록에 따르면 10만 명에 달하는 백제의 인재들이 노예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하기 전 부여에서는 믿기 힘든 해괴한 일들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의자왕은 점쟁이들을 포함하여 올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죽이거나 귀양을 보내 버리고, 아첨하는 사람들은 좋아했습니다. 삼국사기의 이런 기록들은 의자왕의 무능과 부패를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고 당시 왕실이 민심을 많이 잃었다는 사실로 볼 수도 있습니다.”
국가 지도자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여러 국민의 소리에 귀를 닫아버리는 어리석음은 나라를 패망시키고 국민을 고통에 빠뜨린다는 만고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부여왕릉원 답사를 끝으로 부여 역사 기행의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전충청지부 지부장 권유숙 님이 정리 인사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 하늘처럼 표정이 환해진 것 같아요. 이렇게 환한 마음으로 집에 가셔서 환하게 쓰이고 도반들과 함께 환하게 정토 활동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행사를 빛낸 우리 모두에게 손뼉을 쳐보겠습니다.”
권유숙 님의 말처럼 회원들 모두가 하루 종일 이어진 답사 일정에도 뿌듯하고 환한 표정이었습니다.
“활동가다 보니까 온라인 활동이 대부분이고, 제가 사는 곳의 위치와 개인적인 사정으로 그동안 지부 지회 실천 활동지에 참석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이곳에 관광은 왔어도 역사는 잘 알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번 기행에 얼른 참여했어요. 오늘 저랑 인연이 있었던 학생 분도 만나고 그분이 활동하는 모습도 보고, 온라인에서만 만나던 분들도 뵈니 더욱 좋았습니다.”(천안지회 김성혜 님)
이번 역사 기행의 실무총괄을 맡은 대전충청지부 지원담당 김영은 님과도 짧은 인터뷰를 했습니다.
“대규모 인원이 참가하는 행사라 기획하기 조금 힘들었지만 재미있었어요. 놀며 배우며 다녀서인지 오늘 하루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 마음은 뿌듯합니다.”
오늘 역사 기행의 해설을 담당하였던 이승용 님과 잠깐 인터뷰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리포터: 해박한 역사 지식에 놀랐습니다. 역사에 관심을 가지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이승용 님: 특별한 계기라기보다는 자주 오다 보니까 자주 공부하게 되고, 설명해야 하고 그러면서 저도 계속 공부를 하게 되는 거죠. 경주도 많이 다니고, 부여도 예전에 북한 이탈 주민들하고 함께 기행 왔었습니다.
리포터: 부여 역사 기행만의 특별한 점이 있을까요.
이승용 님: 아무래도 신라와 고구려가 망했을 때보다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유적지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또 그때의 여러 가지 사회 현상 그리고 세 나라의 지도부는 어떻게 판단했는지 그런 기록이 잘 남아 있다 보니까,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는데 부여가 굉장히 좋은 소재가 되는 것 같아요.
오늘 하루 우리 곁을 소중히 지키고 있던 백제의 문화유산들을 통해 신라, 고구려에 비해 조금은 관심이 덜했던 600년 백제의 역사와 그 시절 동아시아 국가들의 치열했던 전쟁에 대해서 자세히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된 전쟁 속에서 두렵고 아파했을 선조들의 삶을 떠올려보니,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를 염원하는 정토회와 그 속에서 모자이크 조각이 되어 밝게 빛나는 참가자 한 분 한 분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첫 기사인지라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했습니다.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전국 각지에서 달려와 준 <정토행자의 실천> 리포터들 덕분에 든든했습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글_김성욱(청주지회)
사진_이시안(대전지회), 대전충청지부
지원_장수린(인천지회), 박미경(수원지회), 김난희(원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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