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월간정토
백일의 가출

황다복 님은 불편한 시골 생활을 끝내기 위한 방편을 생각하던 중 아주 현실적인 이유로 독립 대신 백일동안의 가출을 선택했고, 그 결과 아주 만만치 않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출가 초반 스스로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다가,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48기 백일출가자 중 내가 가장 성질이 더럽구나'하고 인정하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은 누구나 한 번쯤 느껴본 감정이 아닐까 싶어 배시시 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제 가출을 마치고 진정한 출가를 시작하게 된 황다복 님의 앞날을 응원하며 글을 소개합니다.

어디, 나 없이 잘 지내보라고

“공주야, 운전 배워!”
아빠의 한마디가 그렇게 서운할 수 없었다. “운전은 배우지 않을 것이다. 차는 몰 생각이 없다. 차를 사는 순간 돈이 줄줄 새는 건 둘째 치고, 운전하다가 사고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니, 그렇게 운전하기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이런 말씀을 하시다니, 순간 서운함과 함께 분노가 확 치밀어 올랐다.

그날도 눈이 많이 내렸다. 전날부터 아빠에게 온천에 가고 싶다고 졸랐고 다음 날 아빠는 볼일도 있어 겸사겸사 나를 온천에 데려다 줄 사람한테 태워주기로 하셨다. 그렇게 하얗게 쌓인 눈길 위로 트럭을 몰았고, 도착해보니 아빠와 연락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상대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몇 번 서로 언성을 높이던 중 아빠가 나한테 툭 던지듯 하신 말씀이었다.

그래, 그러니까 내가 아빠한테 이런 부탁을 한 게 문제였다. 그렇다면 난 왜 이런 부탁을 했나. 시골에 살고 있는 탓이었다. 시골이 아닌 도시였으면 혼자서 얼마든지 오갔을 것이고, 굳이 해달라 말라 할 것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 아빠랑 시골에 살고 있는 게 문제구나. 아, 내가 나가야겠다. 근데 어디로 나가지? 돈도 없는데? 당장 독립할 자금도 없고, 또 요즘 전세 사기도 흉흉하고 집 계약하는 것도 어렵고, 꾸준히 월급 받을 능력도 안 되는데, 그럼 백일출가를 할까? 백일출가는 안전하잖아. 수련원에 있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일도 시키고. 그 안에서 알아서 다 해주는데, 아무렴 좋지. 그래, 백일출가를 하자!

결국 난 아빠의 “운전 배워”라는 그 한마디에 백일출가를 결심했다. 다른 이유를 더 들자면 ‘내가 왜 여기 이런 시골에 있는데? 아빠랑 같이 살아보겠다고 있었던 건데, 원한다면 얼마든지 나가주겠다’는 반발심이 섞여 있었다.

수련가는 길(황다복 님)
▲ 수련가는 길(황다복 님)

절은 내가 제일 잘 하는 것 같은데?

입방을 하고, 만 배를 하기 전 이렇게 들었다. “만 배 하는 기간이 제일 편안할 겁니다.” 그 말이 이해됐다. 만 배는 오로지 나만 잘하면 되니까. 나 혼자 알아서 하면 되는 거지, 남하고 딱히 부딪힐 것도 없으니까. 거기다가 다른 핑곗거리 하나 주지 않겠다는 듯, 만 배 하는 동안 오로지 절만 할 수 있도록 짜인 일정표는 감사하기까지 했다.

새해에 집에서 혼자 3,000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어찌나 외롭던지. 그런데 여기서는 다 같이 해주는 데다 절만 하라고 지켜주는 사람들까지 있으니 참 감사하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만 배를 시작하며 굳게 다짐한 게 있었다. 절대로 절 자세를 무너뜨리지 말아야지! 절 자세가 무너지는 순간 앞으로 펼쳐질 지옥도를 이미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천천히 꾸준히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나는 맨 뒷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절하는 도반들의 뒷모습, 그리고 옆에서 절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절을 제일 잘 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절하면 얼마 못 가서 힘들 텐데’라고 생각하며 자세를 더 바로잡았다. 힘들다 싶을 때, 멀리서 한 도반이 겨우겨우 무릎 굽혀가며 절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래, 저런 사람도 절하는데 내가 뭐가 힘들다고’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만 배를 하며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전혀 고개를 숙일 마음은 없었다. 겉으로만 고개를 숙였을 뿐, 속으로는 ‘내가 지금 얼마나 잘하는데’라는 생각뿐이었다.

자기들은 뭐 얼마나 잘났다고!

백일출가 전 나는 어느 정도 정보를 찾아본 상태였다. 종종 바라지장에 참여했을 때 보던 백일출가자들의 여법하고 딱 잡혀 있는 듯한 모습이 좋았다. 나도 수련생이 되었으니 응당 좀 더 여법하고 정말 행자 같은 모습으로 지내고 싶었다. 그러나 막 시작한 백일출가 동기들은 내 기준에서 너무 흐트러져 보였다. ‘아니, 자기 삶 바꾸러 왔다는 사람들이 지금 놀러 왔어? 나이는 내려놓으라니까 왜 이렇게 자기 나이 얘기를 하는 거야!’ 속으로 온갖 시비분별을 하다가 ‘그래, 내가 다른 도반들 공부시키러 온 거 아니지. 나나 잘하자’라며 다른 도반들이야 그러든 말든 나 혼자서 해보려 했다.

그러던 중 대표 소임을 맡게 됐다. 이쯤 되자 나이가 어려서라기보다 혹시 내가 제일 잘 해서 그런 거 아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 기수에서도 어린 사람이 맡았다길래 살짝 실망했다. 그냥 어려서 됐구나. 대표로서 딱히 할 일이 없던 어느 날, 스태프들도 없이 우리만 남게 된 시간이 있었다. 이른바 '땅콩의 난'이라 불린 사건(?)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동기끼리 큰 소리가 오갔고 나는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우선 죄송하다고 했다. 대충 사건이 일단락되고 나면 괜찮겠거니 했지만, 뒤에 이어진 마음 나누기에서 나에 대해 “싫었다, 일 진짜 못한다, 내가 대표를 해도 저것보다는 잘할 텐데”라는 말들이 들렸다.

처음에는 ‘대표라는 게 원래 욕먹는 자리니까, 뭘 해도 욕 듣는 게 당연하지’라며 담담히 넘어갈 것 같았다. ‘이런 거 배우러 온 거니까 저런 말들도 기쁘게 받아들이고 공부할 기회로 삼으면 되지. 정신 차리자! 난 여기 인간관계 맺으러 온 게 아니라 마음공부하러 온 거야’라고 다독여봤지만, 자다가 숨이 안 쉬어져 일어나서 몇 번을 세수하고 거울을 봤다. 우는 얼굴을 보며 정신을 차리자고 몇 번이나 되놰야 했다. ‘지금 자야 해. 지금 못 자면 내일 일정 완전히 그르친다.’

그러다 보니 동기들에 대한 감정이 얼어붙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하나 거슬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내 시선은 자꾸만 함께하는 수련 도반들이 아닌 다른 문경 식구들 쪽으로 향했다. 우습게도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는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도 애정이 안 가고, 함께하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쓰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내가 백일출가 도반에게 느끼는 냉랭함이 엄마가 사람들에게 쓰는 마음과 같은 것인가 싶어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내가 사회생활을 더했다면 똑같이 살아갈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업식으로 살아가는구나.

분리배출 프로젝트(가운데가 황다복 님)
▲ 분리배출 프로젝트(가운데가 황다복 님)

날이 선 마음이 쏟아져 나오면서

다시 친해졌다가 또 분별 나기를 반복하며 엎치락뒤치락하는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중 나눔의 장을 갔고, 수련장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마음속에 칼을 갈고 있었다. 내 마음의 상태를 보며 놀랐지만, 그 마음을 꺼내놓고 싶지는 않았다. 원래 백일출가 전에 날카롭게 벼르던 마음이 있었지만, 굳이 여기서 꺼내고 싶지 않았고, 이러려고 온 게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하룻밤 자고 일어나자,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라왔다. 그 순간 느꼈다. ‘아, 내가 참고 있었구나. 마음공부한다며 넘기고 넘어가며 내 마음을 넘어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결국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다 튀어나왔고, 내 이야기를 꺼낸 도반에게 그대로 쏘아붙였다. 모두 말하고 난 뒤에 어떻게 할지는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었고, 그 순간에는 뒷날이고 뭐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이 순간만 있는 것처럼 쏟아낸 뒤 한을 풀었다.

이후, 내 성질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숙고하며 멈췄을 것도 더는 주춤할 틈도 없이 확 튀어나왔고, 성질이란 성질은 다 부리기 시작했다. 내가 제일 착한 줄 알았는데 48기 백일출가자 중에서 가장 성질이 더러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웃음만 나왔다. ‘내가 이렇게 못된 애였구나!’ 마음 나누기에서 다른 도반에게 느낀 분별심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이후 돌아올 공격적인 말을 듣기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겁이 나서 하지 않았을 뿐, 착해서가 아니었다.

바깥에서 이렇게 살았구나

어느 날, 마음 나누기를 하는데 한 도반이 내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싸늘해졌다. ‘아, 또 선 긋네. 그래, 내 행동이 싫은 게 아니라 내가 싫은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이 확 돌아서면서 스트레스가 올라왔다. 그러다가 대웅전 계단을 올라가는데, 문득 모든 스트레스를 덮치듯 우울감이 밀려왔다. 그 순간 모든 걸 끊어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면서 내 목숨까지도 끊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그러자 모든 분별심이 묻혔다.

그 순간 알았다. 내가 왜 바깥에서 괴롭게 살았는지를. ‘늘 이런 기분 속에서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버티고 살았구나. 그래, 제정신 못 가누고 살았구나. 그럼,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 이 감정에 빠지지 말자. 이런 감정을 여기서 알아차리니 다행이잖아. 아, 정말 다행이다. 지금 나 정진하러 가야 하지. 지금 하는 일에 집중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일으키니 곧 우울감과 무력감 둘 다 사라지고 제정신이 차려졌다. 솔직하게 마음까지 다 나누고 난 이후, 더는 그 무력감에 빠지지 않았다.

최재우 대신사 200주년 기념(맨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황다복 님)
▲ 최재우 대신사 200주년 기념(맨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황다복 님)

백일을 지내면 어느 정도 해결될 줄 알았지

백일이 가까워지면서 어쩐지 점점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았다. 일 수행에 잘 쓰이는 건 둘째 치고, 여기 와서 깨닫기는커녕 이제 겨우 내 모습을 보는구나. 백일기도 하면 자기 꼬라지는 알게 된다고 해서 나는 그것 이상으로 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내 꼬라지는 복어였다. 툭하면 그렇게 성질 내고 살아왔다. 성질을 내며 남을 공격하는 걸 즐기고 살았다. 복어는 화가 나 가시를 잔뜩 부풀리면 자기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자주 빵빵해지고 그럴수록 결국 빨리 죽게 된다. 그동안 나도 그렇게 살아왔지 않나. 내 화를 풀어낸다는 이유로 도반에게 쏘아붙여서, 상처받은 나 같은 사람을 또 한 명 만들었다. 그렇게 내가 연화색녀 짓을 했다.

과거의 내가 싫어서 백일출가 초반에 어떻게든 바꿔보려 애쓴 것은 자신을 부정하며 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느꼈다. 이렇게 치열하게 부딪혀보니 보이긴 하는구나. 그렇다면 좀 더 해봐야겠다.

이제는 예전 내 모습도 그러려니 하고 보게 된다. 성질 내는 모습도 전처럼 부끄럽거나 싫지 않다. 다른 사람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생활도 뜻밖에 적응하는 내가 놀라웠다. 난 꼭 개인 방은 갖고 있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니 시야가 더 넓어지고 다른 방향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다.

가출이 아닌 출가로

백일출가 회향을 하고 집에 갔을 때 내가 3년을 더 지낸다고 하면 부모님이 좋아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혼자서 그렇게 정하면 되냐”, “잠시 찾아가 웃었는데, 모르는 척하더라” 같은 말을 들으며 물음표만 떠올랐지만, 그러려니 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 내 앞길은 내가 결정하지, 엄마가 웃어주면 나도 웃어줘야 하나. 말만 안 걸었지, 웃음으로 말을 건 거 아닌가.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예” 하고 고개 숙였다.

그동안 도반들에게 하도 분별심을 많이 내서 당연히 엄마, 아빠의 어떤 말에도 분별심을 낼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도리어 이런 상황이 내가 꼭 집을 나와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역시 난 아직 자립, 독립이 안 되었구나. 하지만 문경에는 정말 많은 부처님들이 있고, 그래서 부족하고 흔들려도 뿌리를 굳건히 내리며 앞으로 걸어갈 것 같았다. 그렇게 다시 문경으로 왔다.

재입재를 하고 도반들이 돌아가고 하루 정도 지났을 때 문득 내가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잠깐이었다. 엄마에게 카톡 하나를 받았다. ‘뭘 하면 좋을까? 좀 보고 골라 줘’ 하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아! 내가 이게 싫어서 집에서 나왔구나’라고 느꼈다. 어쩌면 아직 가출 중인지도 모르겠다.

버리고, 비우고, 나를 찾다

부모님을 떠나 홀로 자립해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도 부모님 덕분이라는 것을 안다. 아직도 부모님은 내게 비빌 언덕이고, 혹여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는 그 말이 안심이 된다. 재입재를 결심한 후 3년 정도만 공부하고 돌아가야지, 생각했는데 법사님께 딱 걸렸다. “적당히 공부하다가 돌아가서 그걸로 글 쓰겠다가 아니라, 누군가 내 글을 다 태우고 없애버려도 괜찮아야 해.” 이 말씀을 듣고 그때는 반사적으로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니 전혀 아니었다.

연재 시작도 하지 않은 글들, 혹은 언젠가 쓰겠다고 남겨둔 글들을 지우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막상 이거 써야지 하고 생각해둔 글에서는 멈칫했다. ‘나한테는 글이 자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내가 지금 여기에 여행을 왔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원한 꿈 중에서 여행 다니며 글 쓰는 것이 떠올랐다. 아직도 글을 놓지 못했구나, 하는 것을 알았고 돌이켜보니 처음으로 인정받은 게 글이었다. 17살에 글을 써서 책이라는 형태로 만들었을 때, 그때 인정받은 느낌이 깊이 남아 있었다. 그러니 괴로워도 글을 못 놓고 그렇게 살았나보다.

노트북에 남겨 놓은 글을 모두 지웠다. 더는 그 뒤를 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버리고 나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일상 속에서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 ‘아, 자유로워지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지만, 기쁜 일에는 여전히 쉽게 마음이 끌려간다. 수시로 감정이 오락가락하며 도반들에게 분별심을 느꼈다가 이내 그들이 고맙고 사랑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때때로 지쳐 늘어지기도 하지만, 다시 기운을 차리며 나아가는 과정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련원에서의 생활은 흥미롭다. 부처님 법을 듣는 것도,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편안해지는 과정도 즐겁다.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도 재미있다.

운전을 배우라는 아빠의 한마디에 시작된 백일출가였다. 소감문을 쓰고 있는 지금, 부모님께 차마 말하지 못한 많은 감정과 생각을 토로했기에 걱정과 염려가 밀려온다. 혹여 이 글을 읽고 부모님이 상처받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크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떤 순간에도 괴롭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무엇보다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다. 부모님께도 당신의 딸이 더없이 잘 살아갈 것이라는 확신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굳은 다짐으로, 진정 나를 위한 공부에 온 마음을 다하고 싶다.


이 글은 <월간정토> 2025년 3월 호에 수록된 백일출가 소감문입니다.

글_황다복(48기 백일출가)
편집_월간정토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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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9월 정토불교대학

전체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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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자유로운 청년 다복님 응원합니다.
딸들을 믿고 습관적인 걱정을 놓을 수 있도록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25-09-01 15:05:46

현광 변상용

글을 쓰시는 분이군요. 어쩐지 글이 술술 읽혀지더라구요. 그 상황이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듯 하구요.
별거 아닌 아빠의 한마디에 가출 같은 출가에 다시 또 출가 같은 가출에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 재밌네요.
그동안 많이 성숙해지셨겠지요. 그런 고마운 한마디가 어디 있을까요 ㅎ
젊어서 터득하셨으니 멋지게 살아가실 겁니다. 화팅!

2025-09-01 13:09:14

금광화

멋져요~나를 내려 놓은 연습의 여정^^
다복님 재입재하셨군요^^

2025-09-01 10: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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