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실천

통일
9천년의 역사를 하루에 돌아볼 수 있는 곳
강화 역사기행

역사 기행이라고?
괴롭지 않으려고 시작한 이 공부의 끝은 어디란 말인가?
적게도 먹어야 하고 아껴도 써야 하고 이제 역사까지?
슬쩍 삐딱한 나의 궁금증도 배낭 속 한 귀퉁이에 넣어 집을 나섰습니다.

서울을 둘러싼 광명, 부천, 안양, 인천, 일산, 총 5개 지회에서 무려 294명이 참석하는 대단위 역사 기행이 있는 날입니다. 먼저 연미정 초입에서 입재식을 가졌습니다.

서로 오랜만에 만나 신나있던 회원들은 입재식이 시작되자 여법한 수행자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입재식이 끝나고 지회별 소개 시간도 가졌습니다. 언제 여법한 입재식을 하던 수행자이던가 싶게 지회별로 개성을 갖춘 인사 퍼포먼스에서는 파이팅이 넘쳤습니다.

제비 꼬리를 닮은 김포반도 건너편의 연미정


전날 하루 종일 비가 온 탓에 여리한 연둣빛 나뭇잎들, 촉촉한 흙냄새를 맡으며 차분히 연미정에 올랐습니다.


연미정 한 쪽에 모여서서 해설자 이승용 님의 해설을 듣습니다.

연미정을 한자로 보면 제비 연자에 꼬리 미 자를 씁니다. 김포가 반도인데 지도를 보면 김포 반도가 제비 꼬리처럼 생겼습니다.
제비 꼬리 같이 뾰족한 끝이 갈라져 이곳 지형이 제비 꼬리 모양으로 생긴 곳에 정자를 만들어서 연미정이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

강화도 역사 기행의 의미

우리 역사가 아주 길죠. 짧게는 5천 년 역사 또 길게는 9천 년 역사로 봅니다. 요즘 사회대학에서 스님 강의하실 때도 9천 년 역사까지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신라 역사를 공부하려면 경주로, 고려는 개성으로, 조선은 서울을 찾아봐야 합니다. 9천 년 역사를 하루 만에 공부하고 싶다면 강화도로 오시면 됩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유물부터 가장 최근의 유물이나 유적까지 다 모여 있는 곳이 이곳 강화도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역사 기행의 해설을 맡은 이승용 님(평화재단 역사연구개발팀장, 좋은벗들 사무국장)이 강화도의 역사적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슬슬 역사 기행이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화도에는 고인돌이 왜 많을까?

연미정을 내려와 일행들은 강화에 제일 많다는 고인돌을 찾아 버스에 올랐습니다.



연미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강화역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관 사이 자리 잡은 웅장한 고인돌을 보며 감탄했습니다.
신석기 시대에 굴착기도 없었을 텐데 어떻게 저 어마어마한 돌을 들어 올렸을까? 봐도 봐도 신기합니다.

이승용 님이 해설을 곁들입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유적이 바로 고인돌입니다. 고인돌은 전 세계에 10만 개 정도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중 절반 이상 5만 개에서 6만 개 가량이 한반도에 있습니다. 나머지 대부분은 만주 지방에 남아 있고요. 우리 민족이 살았던 곳과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는 위치가 거의 일치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고인돌이 많은 나라 1위입니다. 우리나라가 5~6만 개 가지고 있는데, 2위인 아일랜드가 가지고 있는 고인돌은 1500개밖에 안 됩니다. 압도적으로 많죠.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은 2000년 제24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고창, 화순의 고인돌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일찍부터 강화도는 많은 사람이 모여 살았고 고인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가 좋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청동기에 농기구가 좋아지면서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생산량이 늘어났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동체를 운영하고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죽을 때 무덤을 좀 더 호화롭고 규모있게 만들고 싶었고, 이런 연유로 등장한 게 아마 고인돌일 겁니다. 그래서 고인돌이 많다는 건 다양한 직급의 권력자들과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사유 체계 등, 다른 곳보다 문명이 월등히 발전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강화역사박물관

웅장한 고인돌을 뒤로 하고 우리는 강화역사박물관을 관람했습니다.

박물관은 외관부터 고풍스럽고 견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입구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선사 시대 유물들이었습니다.

돌도끼, 빗살무늬 토기, 고인돌 모형 등 교과서에서만 보던 유물들을 실제로 보니 역사가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강화도가 왜 '고인돌의 고장'이라 불리는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전시실에서는 고려시대 강화도의 역할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입을 피해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천도했던 이야기가 자세히 설명되어 있었고, 당시의 병영 모형과 갑옷, 무기들도 전시되어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강화가 단순한 섬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고려의 강화도

고려가 500년 국가 운영을 할 때, 세계 최강이라고 할 수 있는 몽골이 북쪽에서 등장해서 많은 지역을 침략했습니다. 몽골은 지금의 동유럽까지 쳐들어갔습니다. 어마어마한 범위로 지금의 이란 이라크 중동 지방까지도 항복할 수밖에 없는 국방력을 가진 나라가 몽골이었습니다.

고려는 몽골과 끝까지 싸우면서도 권력을 유지해 냈습니다. 고려 조정이 바로 바다만 건너면 들어올 수 있는 이곳 강화도로 피신해 왔습니다. 몽골하고 끝까지 싸우겠다고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약 39년 간 몽골과 싸웠습니다.

팔만대장경판(출처 합천군청)과 청자음각연화무늬매병(출처 강화역사박물관)
▲ 팔만대장경판(출처 합천군청)과 청자음각연화무늬매병(출처 강화역사박물관)

강화도에 있는 동안 고려는 또 세계적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찬란한 문화재를 만들어냅니다. 그 하나가 바로 팔만대장경입니다. 세계 최강 몽골하고 싸우면서 만들어낸 게 팔만대장경입니다. 몽골이라는 세계 최강과 싸우는데 왜 불경을 찍어낼 생각을 했을까? '지금 비록 무력이 약해서 몽골이 말 타고 쳐들어와 공격을 당해 우리가 굴복하지만, 우리는 이런 뛰어난 인재들이 풍부한 나라이다.'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화적인 자신감으로 팔만대장경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고려의 문화 자부심이 고려청자입니다. 강화도 고려청자 기술이 그때 당시에 세계 최고 수준까지 올라갈 정도로 아주 탁월했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지는 않고 권력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고려와 몽골이 서로 화해를 하며 전쟁은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몽골의 사위 국가가 되면서 다시 개성으로 돌아갑니다. 치열하게 싸웠던 자주성이 높은 군인들은 '우리는 몽골에 굴복할 수 없다. 우리는 끝까지 싸우겠다' 해서 강화도에서 끝까지 항전합니다. 이 군대가 바로 삼별초입니다.

시대 시대마다 어딜 가나 나라를 지키는 우리들이 있었구나!
고려의 삼별초 군인들을 생각하니 우리와 다를 게 없구나!
역사는 윤회 하듯 돌고 또 돌아가네요.



관람을 끝내고 박물관 안에 휴게 공간에서 점심시간을 가졌습니다. 각자 싸 온 도시락을 수줍게 꺼내놓고 미소 짓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환하게 웃음 지어집니다. 공양도 마치고 도반들과 정다운 담소도 그득 채우고 다시 다음 여정에 오릅니다.

조선의 강화도

치열했던 항전의 현장 광성보

조선이 등장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역사에 강화도가 등장 합니다. 건국 200년 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북쪽에서 강력한 나라 청나라가 등장합니다. 임진왜란은 막아냈지만 30여 년 만에 청나라가 쳐들어옵니다. 청나라가 두 번 쳐들어왔습니다. 정묘년에 먼저 쳐들어온 게 정묘호란, 두 번째 쳐들어온 게 병자호란입니다.

인조는 전쟁이 나니까 고려시대를 떠 올리며 강화도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청나라에 우리가 다녀온 연미정에서 굴욕적인 협정으로 마무리되고 이곳 강화도에서 또 한 번의 위기를 견디어 내었습니다. 인조 이후 효종과 숙종은 강화도 전체를 에워싸며 담을 쌓습니다. 포대, 돈대 등을 무려 54개를 세웁니다. 가장 큰 방어 단위가 '진'입니다. 강화도 전체를 5개의 진으로 나눈 후, 다시 '보'로 구분합니다. 지금 방문하는 곳이 5진 7보 중 하나인 광성보 입니다.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바로 그 역사적 현장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시간 여행길에 오른 듯 신석기 시대부터 고려에 이르러 조선까지 왔습니다. 시간이 흘러 구한말의 광성보에 이르렀습니다.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당시 외세의 침입에 맞서 싸운 격전지입니다. 특히 신미양요 때 조선군이 활이 떨어지자 흙과 돌을 던지며, 미국 무장 침략에 맞서 끝까지 항전한 곳입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뺏기도 어렵고 다스리기도 어렵겠다 생각한 미군은 전리품으로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만을 챙겨 철수합니다.

번뜩 드는 생각은 신미양요 사건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제 인생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장면들이 떠오르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수많은 병사가 미 해병대와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마지막 항전이 펼쳐졌던 '용두돈대'는 지금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보 내부를 걸어 성벽 위로 올라서면, 강화해협 너머로 서해가 탁 트이게 내려다보이니, 예나 지금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실감할 수 있는 풍경입니다.

광성보를 걸으며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오늘의 평화와 자주권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구나 싶습니다. 작은 섬의 작은 보루였지만, 그곳은 조선의 자존심이었고,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를 묻게 만듭니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은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함이었음을 느꼈습니다. 치열했을 그날의 광성보, 그 울분과 용기가 오늘의 우리에게 되새겨지는 듯했습니다. 이름 모를 영웅들을 기리며 마지막 기행지인 전등사로 향했습니다.

강화도 조약, 굴욕의 시작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 초입에서 정족산성을 오르면서 해설이 이어집니다.

지금 우리는 정족산성에 왔습니다. 정족산 산성 안에 한가운데 이 전등사 절이 있습니다. 이곳은 1866년 프랑스 함대와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 전적지입니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군함 7척에 나눠 타고 총 천 명의 프랑스 군대가 조선을 쳐들어오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조선 조정은 프랑스 군대가 강화 읍내 민가를 약탈하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 섬 싸움을 잘 할 것이라 생각해 제주 목사로 있는 양헌수 장군을 데려옵니다.

다리가 3개인 솥, 즉 ‘정’을 뒤엎어 놓은 것 같이 생긴 정족산의 지형 지세를 살펴본 양헌수 장군은 밤사이에 염하를 건너와서 이 산성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이곳이 바로 양헌수 부대와 로즈 제독 군대가 싸운 정족산 전투 현장입니다. 정족산 전투에서 양헌수 부대가 큰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 군대는 철수를 결정합니다.

당시 강화 시내에는 왕립 도서관인 외규장각이 있었습니다. 궁궐의 중요한 문서인 의궤 보관소입니다.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는 길에 그 외규장각에 있는 모든 책들을 약탈해 갑니다. 비록 의궤를 빼앗기기는 했지만 프랑스와 미국 군대와 싸워서 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4년 뒤에 일본이 개항을 하자하고 그 당시 신식 무기로 강화 시내에 대포를 쏘고 혼란을 만드니 어쩔 수 없이 개항하게 되었습니다. 강화 읍성의 서쪽에 연무대라는 군인들의 군사 훈련하던 장소에 모여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일본과 맺은 첫 근대적 조약이었고, 내용은 불평등 그 자체였습니다. 개항이라는 이름 아래 외세의 발판이 된 이 조약은 이후 다른 열강들의 침입으로 이어지는 서막이 되었습니다.

전등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구한말 조선을 생각하니 묵직합니다.



정족산 사고는 조선시대 왕실 도서관 중 하나로, 사고는 '역사 기록을 보관하는 창고'를 의미하며,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중요한 국가 기록물들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해설을 듣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준 가장 위대한 것을 뽑으라면 바로 역사 기록을 들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망하는 그날까지 모든 기록을 다 남겼습니다. 무려 500년 가량의 역사를 다 기록한 세계에서 제일 긴 역사를 글로 남긴 기록서가 바로 조선왕조실록입니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습니다. 실록은 전쟁통에도 꼬박꼬박 기록했습니다.

그 실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이 찬란한 문화를 한류라는 상품으로 세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근간이 되고 실록에 상세한 기록들이 문화 콘텐츠 상품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겁니다. 실록에 대장금 한 줄 나오는데 <대장금> 드라마를 만들어 냈지요.

회향식


이제 회향식을 장소로 이동합니다. 기행을 시작하는 아침에는 하늘이 걷기 좋게 구름을 잔뜩 띄워주더니 회향식을 하는 장소에 다다르니 해가 기분 좋게 비춰줍니다. 맑은 하늘 아래 강화 시내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많은 인원이 안전하게 회향식까지 잘 마쳤습니다.

지부 회원들에게 역사 기행에 참여한 소감을 들어봤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을 겪으면서 매우 괴로웠습니다. 역사를 제대로 알면 처한 상황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예측하고 바른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도 함께 왔는데 일부러 가족끼리 나들이도 가는데 역사도 배우고 산책도 하고 도시락도 먹고 가족들과 좋은 추억 만들고 가서 뿌듯합니다."


강화도, 우리에게 답한다.

그동안 가까이 있어 잘 안다 생각했습니다.
강화도는 단순한 여행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역사가 깊게 새겨진 공간이며, 굴욕과 침략의 상처가 있지만, 동시에 항쟁과 지혜가 함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정토는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 역사를 잘 알고 나니 그냥 오고 가는 곳이 아니라 내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정토가 되어있었습니다.
이른 아침 길을 나설 때의 역사에 대한 어리석은 질문에 강화도가 답을 줍니다.

글_희망리포터 장수린(인천경기서부지부 인천지회)
사진_인천경기서부지부, 김난희(강원경기동부지부 원주지회)
편집_김난희

전체댓글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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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술

살아 숨쉬는 듯 생생하게 역사기행의 현장을 사진과 글로 잘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9천년 우리민족의 역사를 품고 있는 강화도를 다시 가 보고 싶게 하는 군요.

2025-05-24 09:47:58

정 명

제 인생 드라마도 미스터션샤인입니다
그 중요한 무대였던 강화도를 보니, 그 시절 처절히 싸웠던 선조들에게 감사한 마음입니다 🙏

2025-05-24 08:34:50

최선영

아직 가보지 않은 강화도 꼭 가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5-05-24 06: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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